■ 무신론자의 성경읽기
지독한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 그는 과학과 인문학의 온갖 삐딱한 지식을 동원하여
‘신의 부재’ 곧 실제적 무신론을 퍼트리려 한다. 그 일환으로 저술된 책이 「만들어진 신」
이다. 과연 그의 논조는 어떨까. 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굳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겠
다. 대신 다음의 문장에서 그 일단을 확인해 보자. 그는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사악을 바
치라 하신 하느님의 분부와 관련된 성경의 대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독설을 늘어놓았다.
“결국 신이 농담을 했던 것이다. 신은 아브라함을 ‘유혹하고’ 믿음을 시험했을 뿐이다.
현대의 도덕주의자들은 그러한 심리적 외상을 아이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의 도덕 기준들로 보면, 이 수치스러운 이야기는 아동학대이자,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핍박이자,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때 나오는 것 같은
변명이 처음으로 기록된 사례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독자 가운데에도 도킨스의 일차원적 알레르기 반응에 공감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겸허하게 밝히거니와, 이러한 해석은 전적으로 짧은 안목에
기인한다. 하느님의 안목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차원적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
55,8-9).
이해력은 철저히 안목에 비례한다. 안목이 떨어지면 높은 수준의 섭리나 계획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큰 일을 계획하실 때, 그 일을 위해 부르신 인물에게 당신
의 안목을 무조건 수용하도록 훈련을 시키고자 하신다.
바둑의 예를 들어보자. 바둑 10단이 바둑 10급에게 묘수를 가르쳐 주어도 10급짜리는 그
훈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10급짜리가 바둑을 잘 두려면 10단이 시키는 대로 이행
해야만 한다. 이것이 실력을 향상시키고 바둑을 잘 두는 비결이다. 그러다 보면 수가 보이
고, 안목이 이해되는 것이다.
불문곡직하고,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분부는 누가 들어도 납득이 안 되는 명
령이었다. 하느님께서는 말이 안 되는 이 말씀을 일부러 내리셨던 것이다. 어떻게 하나 보
려고 말이다. 이는 일종의 지혜다. 어떤 부하가 나에게 충성을 다하는 부하인가 아닌가 알
아보려면, 말 되는 명령을 해서는 알아볼 수 없다. 말 안 되는 명령을 해도 충성을 다할 때
그가 바로 충복이다. 가령 새벽 2시에 갑자기 전화를 해서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 지금 당
장 출근하시오”라고 했을 때, 출근하는 사람이 충성을 다 바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나중
에 사장감이다. 이런 정신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 아브라함의 변론
무엇이건 최고의 것을 배우려면 고수의 문하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믿음을 배우기 위하여
이른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한 수 깨우침을 청했더니, 영감 속에 이런 속삭임이 들
렸다(졸저, 「맥으로 읽는 성경」 참조).
나도 꽤나 영특한 사람이었소.
안 되겠다 싶을 땐 용한 잔꾀도 부릴 줄 알았소.
파라오와 아비멜렉 앞에서 아내를 누이라 했던 것도,
하가르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은 것도,
다 내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소.
돌연 나는 바보가 되었소.
숨을 넘길 나이 아흔 아홉에
이가 다 빠진 할망구의 뱃속에
아이가 태동하는 걸 보고선,
그만 말을 잃었소.
그때부턴 무조건이오.
네, 네, 네,
예스, 예스, 예스.
가라셔도 아멘, 오라셔도 아멘.
주셔도 아멘, 달라셔도 아멘.
허, 거-어-참.
■ 야훼 이레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2 참조).
이 명령은 아브라함 이야기의 대단원이다. ‘떠나라’ 하시면 떠났고, ‘가라’ 하시면 갔던
아브라함이었다. 또 ‘믿어라’ 하시면 믿었던 아브라함이었다. 하지만 하느님 보시기에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직 인간적인 잔꾀가 섞여 있는 믿음이었다. 그랬기에, 이집트 파
라오 앞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부인을 여동생으로 속여 말했던 인간적인 잔머리를 꾸짖
으셨고, ‘대리모’라는 인간적인 술수로 후사를 보려했던 믿음의 부족을 일깨우기 위하여
90세가 된 사라의 쭈그렁 자궁에서 이사악이 태어나는 기적도 보여주셨다. 이런 일련의
충격적인 깨달음의 결과로 아브라함에게는 요지부동의 믿음공식이 생겼던 것!
“나는 앞으로 하느님이 뭐라고 그러셔도 무조건 따를 거야. 더는 생각 안 해.”
이런 믿음이었다. 그럼에도 외아들, 그것도 100세 늘그막에 얻은 유일한 희망을 바치라는
명령은 아브라함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뇌였을 터다. 너무나 잔인한 명령! 어쩌면 도킨스
의 논리처럼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게끔 하는 폭압 같은 것! 그랬기에 하느님의 명
령과 양심의 소리 사이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갈등은 얼마나 그를 괴롭혔겠는가.
단장의 마음앓이 끝에 그는 결국 이 믿음으로 새벽 일찍 일어나 이사악을 바치러 간다.
그런데 알려져 있듯이 장작, 불쏘시개 등은 다 있는데 제물이 없다. 이상한 생각이 든 이사
악이 아버지께 묻는다.
“아버지 제물은 어디 있는 거예요?”(창세 22,7 참조)
아브라함의 답변은 천연덕스럽다.
“야훼 이레, 야훼께서 마련해 주신단다”(창세 22,8 참조).
궁지를 모면하려고 임기응변으로 한 답변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이미 마음속에 이 믿음
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설령 아들을 잃는다 해도 내가 상상치 못한 더 큰 선물을 주시
리라!”
말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이 믿음을 그대로 결행하였다. 그는 이윽고 모리야
산에 당도하여 아무 생각 없이 이사악을 제물로 묶어 희생 제사를 바치려 했다. 바로 그 때
야훼의 천사가 하늘에서 큰 소리로 아브라함을 부르며 아이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한다.
“나는 네가 나를 얼마나 경외하는지 알았다. 네 외아들마저 서슴지 않고 바쳐 충성을 다하
였으니, 나는 너에게 더욱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불어나게
하리라.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창세 22,12-18 참조).
이 말씀을 듣고 주위를 살펴보니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이 있다. 아브라함은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제물이로구나!” 하고 이사악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린다. 아브라
함은 하느님의 시험을 통과했고 저 하느님의 약속은 오늘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