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취 시작한 거제 고로쇠 물… 햇살 좋은 날에 수액 나와
"거제 동남쪽에 봄 왔어요"… 유채꽃·매화·동백꽃 피어
지난달 말, 먼 남녘 땅 거제에서 고로쇠 수액 채취를 시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매화·산수유·목련·유채 등 숱한 봄의 전령 중에서도 겨울 한복판으로 가장 용감하게 들어서는 봄의 선봉장이 바로 고로쇠 수액입니다. 고로쇠나무가 실컷 수액을 흘려보내고 나면, 그제야 비로소 눈치만 보던 봄꽃들이 앞다퉈 피어나는 것이지요.수액 채취 소식에 이번 주는 거제를 다녀왔습니다. 달짝지근한 수액을 들이켜고 거제를 둘러보니 봄을 알리러 온 건 고로쇠만이 아니더군요. 빨간 동백꽃은 반짝거리는 잎 속에 숨어 조용히 빛났고 유채꽃 한두 송이는 바닷바람에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폐교에 핀 매화는 전날 내린 비에도 화인(火印)처럼 선명했습니다. 이번 주말, 용맹한 봄의 전령들을 만나러 거제로 떠나시는 건 어떨지요.
- ▲ 거제의 겨울에서 마주친 봄의 전령들. 고로쇠 수액과 동백꽃.
◆봄을 마시다
거제에서, 첫봄의 신호는 나무로부터 온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고로쇠나무(단풍나무과)가 봄이 가까워지면 언 땅에서 물을 끌어올린다. 그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보이지 않는 풍경을 고로쇠나무에 꽂힌 플라스틱 호스의 형태로 시각화한다. 고로쇠 수액(樹液)의 이로움을 아는 까닭이다.
거제에서, 그 풍경은 지난달 20일에 시작됐다. 홀로 봄을 준비하는 나무 밑동에 사람들은 전기드릴로 구멍을 뚫었다. 거기에 호스를 박고 비닐봉지를 씌웠다. 그렇게 거제도 남단의 노자산과 북병산, 선자산 능선마다 고로쇠나무들은 발치에 족쇄처럼 하얀 봉지를 찼다.
그래서 지난달 28일 거제를 찾아 그 나무들을 목격했을 때, 꼭 인간의 욕심이 빚어낸 풍경처럼 느껴졌다. 고로쇠나무는 자신을 위해서도 수액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잎이 움트기 좋은 날, 다시 말해 햇살 좋은 날에만 수액을 힘껏 내뱉는다. 당연히, 사람이 노리는 때는 이런 날이다. 고로쇠나무 입장에서 보면 얄미울 법하다.
그러나 20년째 매년 고로쇠 물을 받아왔다는 박귀화씨의 말에서, 그 풍경에 담긴 마음이 '욕심'이 아니라 '절제'임을 깨달았다. 수액 채취에도 규칙이 있다. 톱과 도끼를 쓰지 말 것. 구멍 크기는 지름 0.8㎝, 깊이 1.5㎝를 넘지 말 것. 나무의 크기에 따라 구멍 수도 제한된다. 지름 10㎝ 이하 나무는 채취 금지, 10~19㎝는 하나, 20~29㎝는 두 개, 30㎝ 이상은 세 개까지 뚫을 수 있다. 얼핏 보면 자연 훼손 같은 풍경에도 이처럼 엄격한 규율이 존재한다.
더욱이 수액을 받는 이들에게 고로쇠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다. 박씨는 바람이 많이 불면 고로쇠나무가 "물을 내놓지 않는다"고 했으며, 일교차가 심한 날에야 비로소 "아침에 물을 품고 있다가 오후에 한 방울씩 준다"고 했다. 꼭 사람을 대하는 듯한 표현이다.
의식을 치르듯 정성스레 채취한 고로쇠 수액의 음용 방법도 하나의 의식 같다. 먼저 밤을 새울 각오를 해야 한다. 홀로 밤을 새우긴 힘드니 친구 두엇을 모아 찜질방을 가는 게 좋다. 오징어나 북어, 쥐포 등 어포류를 챙겨 놓으면 준비 완료. 밤새 땀을 흘리며 갈증이 날 때마다 수액을 들이킨다. 더 마시지 못하겠다 싶으면 오징어를 씹으며 갈증을 불러일으키고 다시 수액을 마신다. 이렇게 먹어야 노폐물은 소변으로 빠져나가고 고로쇠 물의 유익한 성분이 체내에 흡수된다고 한다.
이왕 고로쇠 수액을 맛보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서두르는 편이 좋다. 지난달 30일부터 오는 10일까지 나오는 고로쇠 약수를 '첫물'이라 부른다. 첫물은 가장 맛이 좋은 것으로 손꼽힌다. 이후 20일까지가 '중간 물', 3월 10일까지 나오는 물이 '끝물'이다. 물론, 끝물 뒤엔 더는 수액이 나오지 않는다. 그때부터 고로쇠나무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 수액을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식으로 치면 고로쇠 수액은 일종의 '제철 음식'이다.
- ▲ 14번 국도에서 마주친 난대수목 먼나무.
지금 거제는 겨울과 봄의 경계에 서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해, 겨울 한복판으로 봄이 때를 노리며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는 형국이다. 거제의 산하를 압도하는 건 아직 메마른 나뭇가지의 갈색과 소나무의 검녹색이지만, 군데군데 봄의 척후병인 노란색과 빨간색·담홍색·연둣빛이 눈에 띈다.
물론 선봉장은 고로쇠 수액이다. 볕이 가장 좋은 오후 두세 시쯤, 고로쇠 수액은 인간이 꽂은 호스를 통해 한 방울씩 떨어진다. 느리지만 거침이 없다. 물론, 자중할 때를 알아 눈이 오거나 바람이 많이 불라치면 나무에 숨어 주변만 살핀다.
거제에서 봄의 움직임이 그와 같다. 확실하게 전진하지만 느리거나, 때로 몸을 숨긴다. 그래서 주의 깊게 쳐다보지 않으면 봄의 움직임을 놓치기 쉽다. 거제에서 봄을 느끼기 위해선 천천히 달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봄의 공격이 가장 치열한 곳은 거제 동남쪽, 신선대와 공곶이를 잇는 14번 국도 주변이다. 서북쪽으로 해발 500m 내외의 가라산과 노자산, 북병산이 병풍처럼 둘러싸 북쪽의 찬바람을 막아주면, 봄은 동남쪽의 따뜻한 바닷바람을 타고 거제에 당도한다. 실제로 이 도로 근처를 지나다 '추리닝' 차림으로 뛰노는 아이들, 여럿 보았다.
따라서 거제에서 봄을 찾는 여정은 신선대에서 시작한다. 신선대 전망대 오르는 길에 해금강 테마 박물관이 보이는데, 거기서 잠시 차를 멈추자. 박물관 옆 샛길로 들어서면 언덕에 연둣빛 초원이 펼쳐진다. 대부분 유채다. 주의 깊게 언덕을 살피면 수줍게 고개를 들어올린 유채꽃을 발견할 수 있다.
유채꽃을 봤다면 매화를 만나러 갈 차례다. 14번 국도를 다시 거슬러 올라 구조라 관광정보마을로 간다. 그곳에 일운초등학교 구조라 분교가 있다. 1999년 9월 폐교된 학교다. 녹슨 이순신 장군상과 세종대왕 동상이 세월의 흐름을 보여준다면 그 옆 커다란 매화 한 그루가 세월의 순환을 증명한다. 운동장에 큼지막하게 자리를 차지한 '서바이벌 게임장'과 이미 문 닫은 지 10년 된 폐교, 그리고 매화나무의 조화가 아리다.
마지막으로 동백이다. 지금까지의 여정을 그대로 따랐다면 이미 동백군락지를 마주쳤을 것이나, 진정 동백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은 따로 있다. 구조라 관광정보마을에서 약 4㎞ 떨어진 공곶이가 그곳. 포장되지 않은 진흙 길을 30분쯤 걸으면 천주교인들의 공동묘지를 지나 '비밀정원'이 펼쳐진다. 삐뚤빼뚤 놓인 나무계단을 동백이 터널처럼 감싸고 있다. 오후 네 시, 먼 데 파도소리가 아득히 들려오고 동백 사이를 빠져 나온 햇살이 발 아래서 춤춘다. 붉은 꽃과 푸른 잎이 햇빛을 받아 쨍, 하고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 고로쇠 약수 사려면
거제시 구천삼거리에서 학동삼거리에 이르는 1018번 지방도 곳곳에서 고로쇠 약수를 판다는 현수막을 마주칠 수 있다. 거제고로쇠약수협의회 회원들이 이곳에 밀집해 있다. 가격은 1.5L 6000원, 4.3L 1만5000원, 9L 2만5000원, 18L 4만5000원. 이곳 외에도 학동삼거리에서 도장포로 이어지는 14번 국도에서도 고로쇠 약수를 살 수 있다. 문의 010-4455-9410
- ▲ 웅아회해산물 식당의 물메기탕.
※ 거제 먹거리
거제시는 '잘사는 동네'다. 지난 2006년 1인당 GRDP(지역 내 총생산)가 2만8356달러. 같은 해 1만8161달러였던 국내 1인당 GDP(국내 총생산)보다 1.6배가량 높다. 그래서인지 밥값도 비싸다. 웬만한 식당에서 1인분 가격이 1만원 이상이다. 대신 양이 많다.
장승포동 항만식당은 주인 이천용씨 부부가 주방을 책임지는 식당으로 해물뚝배기가 대표 메뉴다. 무쇠 솥 뚝배기에 해산물을 듬뿍 담아 넣고 끓여,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온다. 새우·홍합·게·바지락·미더덕·가리비·갯가재 등으로 맛을 내고 고추장과 된장으로 양념한다. 2만9000원(2인분·보통)~6만9000원(4인분·특선). (055)682-3416, 4369.
포로수용소 앞 웅아회해산물에서 맛볼 수 있는 '물메기탕'은 지금이 제철이다. 메기를 닮았다 해 남해 인근에서 물메기나 바다 메기로 불리는 이 생선의 표준어는 꼼치. 피부와 살이 연해 일정한 모양을 갖추기 어렵다는데, 죽어서도 그 성질은 변함없다. 몇 번 씹기가 무섭게 입속에서 살살 녹을 정도로 연하다. 1만원. (055)632-76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