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지명의 유래
●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의 유래
- 어버이의 사랑으로 세종의 눈이 낫다.
최영崔瑩장군의 묘와 성녕誠寧대군의 묘가 있는 대자
산 아래 동네를 대자골이라 하고 법정 마을 명으로 대자동大慈洞이라 하는데, 대자동이란 이름이 생겨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하여 많은 학사틀과 더불어 여러 분야의 학문에 몰두하기에 밤낮이 없었고, 이렇게 잠을 제대로 못 자고 피곤이 쌓이다 보니 눈병이 나서 고생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전국의 이름난 의원을 불러 치료를 했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병은 점점 악화되어 그 고통은 말이 아니었고 궁중에서는 걱정으로 수련수련한 분위기였다. 집현전의 학사나 궁인들이 매우 걱정을 하던 중에 집현전의 어느 학사가 어전에 부복하여 아뢰었다.
“대왕 마마!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듣자옵건대 고양의 깊으내골(대자골)에 성녕 대군의 위패를 봉안한 암자에서의 기원祈願이 신통하다 하옵니다. 대왕 마마께서 그곳에 한번 나심이 어떠하올지 하여 아뢰옵나이다."
이 말을 들은 세종은 잠시 웃음을 입가에 띠우며
"그래 공의 그 말을 들으니, 그간 임에 여념이 없어 부모님의 정성을 잊고 먼저 간 아우에 대한 외남을 잊었어구려."
말하였다. 허공을 헤매듯 한 눈길로 잠시 천장을 바라보던 세종은,
"공이 나를 깨우쳐준 바 크구려! 그래 짐은 경의 뜻을 깊이 받아들이기로 하겠소."
하였다. 며칠 뒤 세종의 어가는 고양 깊으내골을 향하게 되었다. 옛날의 길은 오늘날과 같지 않았으니 한양에서 출발한 어가는 산을 넘고 좁고 굽은 길을 따라 힘겨운 행차를 시작하였다. 세종의 어가가 송강 고개(신원동新院洞 송강 마을)까지 다다르자 왕은 오랜 시간의 행차에서 오는 고생에 더해 또한 지루한지라
“여봐라! 그래, 아직도 멀었느냐?"
하며 어가 주위의 별배別陪에게 물었다. 그때 신하는 눈가에 손을 차양으로 하여 깊으내(곡릉천) 건너 골짜기를 바라보던 끝에
"마마! 거의 다 온 듯하옵니다. 그 암자의 지붕 끝이 숲그늘 사이로 보이옵니다."
하였다. 이 말에 세종은 지리함 끝에 희망을 찾은 듯한 기쁨으로
"그래, 어디 어디 보인단 말이냐?"
하며 신하가 하듯이 손을 눈가에 대고 신하가 가리키는 곳을 향하여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처럼 아프던 눈의 고통이 사라짐을 느끼며 부드러운 눈길로 암자의 지붕 끝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얼마 뒤 암자에 다다라 의식을 치르고 돌아서는 길에 올랐다. 세종의 가슴에 회오리쳐 오는 것은 어버이의 지극한 사랑이었다. 흐르는 개울물 소리에도 스치는 바람결 나뭇잎의 속삭임에도 어버이의 음성을 듣는 듯했다.
"여봐라! 이 골짜기는 어버이의 사랑과 숨결이 숨 쉬시는 곳이 아니겠느냐? 그렇거늘 암자의 이름을 대자암大慈庵이라 부르도록 하라!"
세종의 이 말로 암자는 대자암이라 불리게 되었고, 암자가 있는 곳을 대자골이라 하였다. 대자암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 흔적만 남은 대자사터
통일로변 필리핀 참전 비를 옆에 두고 관청령을 향해 가다가 최영의 묘를 가리키는 이정표를 향해 가면 최영 묘가 있는 대자산을 향한 마을 끝 대여섯 계단을 올라 바로 오른쪽 50여 개 지점이 대자사大慈寺터였던 것으로 기록이 전해진다. 자세히 살펴보면 깨어져 흩어진 기와 조각을 발견할 수 있어 이곳이 대자사지였음을 짐작해 보게 된다.
이 터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대자2리 산65-1로 산을 향한 바로 앞에 는 묘와 석비가 있다. 그 기록을 살펴보면 역사에 많은 사연을 남기고 일찍 유명을 달리한 소현昭顯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慶安君과 부인 허許씨의 묘가 위에 있고, 그 아래로 경안군의 장남 임창군臨昌君과 그 부인의 묘임을 알게 해준다.
▲ 사진 소현 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 이회와 배위 허씨의 묘. 경기도 고양시
대자사의 흔적이 오직 와편瓦片으로 보여지고 마는 것은 임진왜란 때 병화兵火에 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자사의 웅장하고 화려함이 회암사檜巖寺와 우열을 다루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많은 문객文客이 재사자에 다녀갔던 기록이 있다. 아래 성종 때 유학자 서거정徐居正의 시 한 수를 적어 본다.
산 속에 여읜 말 채찍질하고
절 안에 고승高僧과 이별한다
빽빽한 수목에 구름이 어둡고
명랑한 모래에 몸이 절로 맑다.
거친 둔덕에 예전 비碑들을 찾고
기우는 날에 전조前朝의 능을 조문弔問한다.
가을을 슬퍼하는 객客이라 마소
다락집 오르니 한이 없네.
대자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전에는 대자암이라 불리었는데 후일 대자사로 바꿔 불리게 된 것이다. 대자암이 서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대자암지에 거의 닿는 길 왼편에 성녕 대군의 제당이 보이고, 제당 뒤 산을 오르는 곳에 성녕 대군의 묘가 있다. 성녕 대군은 태종의 넷째 아들로 세자 양녕 대군이 세자 직위를 사양함에 따라 태종은 세자를 다시 정하는 일로 고심하던 끝에 성녕으로 택하였다. 성녕이 총명하고 성품이 웅대하면서도 겸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녕 대군은 13세에 무서운 열병으로 타계하고 말았다. 태종과 왕비 민씨는 성녕 대군을 어느 아들보다 제일로 귀엽게 여겼음은 물론이려니와 그 총명함, 온후, 겸양한 아들이 요절을 함에 애통함이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 성녕 대군과 부인 창녕 성씨 합장묘. 경기도 고양시
그렇기에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한 암자를 짓게 된 것으로 대자암에 태종이 들렸고 민비는 수없이 들렀다고 한다. 그래서 대자골은 왕이 다녀간 골짜기이라 하여 왕래王來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사진 경안군과 성녕대군 묘소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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