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이 자리에서 내용적으로 가전연경과 유사한 여러 경전들 및 후대의 인증을 일부 모아서, 십이연기설에 입각한 중도설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자 합니다.
생문바라문(生門婆羅門)이 세존에게 이렇게 여쭈었다.
"구담(瞿曇)이시여, 일체(一切)는 있는 것입니까?"
"바라문이여, 일체가 있다함은 첫 번째 극단(極端)이니라."
"구담이시여, 일체는 없는 것입니까?"
"바라문이여, 일체가 없다는 이것은 두 번째의 극단이니라.
바라문이여, 이 양변을 떠나서 여래는 가운데[中]에 의하여 법을 설하느니라.
무명에 연하여 행이 있고 행에 연하여 식이 있으며
이와 같은 것이 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모임(集)이니라.
무명의 남음이 없고, 탐욕을 떠나고 없어짐에 의하여 행의 없어짐이 있고,
행의 없어짐에 의하여 식의 없어짐이 있으며
이와 같은 것이 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없어짐이니라."
그와 같이 말씀하시자 그 생문바라문은 세존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구담이시여, 희유(稀有) 하나이다. 생애(生涯)를 귀의하여 받들겠나이다."
[南傳大藏經 相應部經典 2권 p.112]
있음과 없음을 여의는 것이 중도
부처님이 중도를 설하실 때, 있음과 없음을 거론하며 그 양극을 떠날 것을 가르치셨는데, 여러 곳에서도 있음과 없음을 여의는 것이 중도라고 말씀하실 때는 가전연경의 경우처럼 반드시 연기의 순관과 역관으로 그 의미를 해명하셨습니다.
순세파(順世派)의 바라문은 세존에게 이렇게 여쭈었다.
"구담이시여, 일체는 있습니까?"
"바라문이여, 일체가 있다는 이것은 첫 번째 세간의 영역이 니라."
"구담이시여, 또 일체는 없습니까?"
"바라문이여, 일체가 없다는 이것은 두 번째 세간의 영 역이니라."
"구담이시여, 일체는 하나의 성품입니까?
"바라문이여, 일체는 하나의 성품이라는 이것은 세 번째 세간의 영역이니라."
"구담이시여, 일체는 여럿의 성품입니까?"
"바라문이여, 일체는 여럿의 성품이라는 이것은 네 번째 세간의 영역이니라.
바라문이여, 이 양 극단을 떠나서 여래는 가운데[中] 에 의하여 법을 설하느니라.
무명에 연하여 행이 있고, 행에 연하여 식이 있으며
이와 같은 것이 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모임이니라.
무명의 남음이 없고, 탐욕을 떠나고 멸함에 의하여 행의 멸함이 있고
행의 멸함에 의하여 식의 멸함이 있으며
이와 같은 것이 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멸함이니라."
이와같이 말씀하시자 순세파의 바라문은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경하는 구담이시여, 희유(稀有)하나이다. 금일 이후로 생애를 귀의하여 받들겠나이다."
[南傳大藏經 제13권 相應部 p.114]
이 경전에서는 있음과 없음만 가지고 말씀한 것이 아니라 구성요소가 하나[一元]인가 여럿[多元]인가를 포함하여 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있다거나 없다는 것, 하나라거나 여럿이라는 것, 이와 같은 견해들은 모두 변견이므로 이것을 떠나야만 중도의 정견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아난(阿難)아, 내가 만약 자아가 있느냐는 물음에 자아는 있다고 대답하면,
아난아, 이는 상주론자(常住論者)인 저 사문 바라문 등과 함께 하는 것이리라.
또 만약 자아가 없느냐는 물음에 자아는 없다고 대답하면,
이는 단면론자(斷滅論者)인 저 사문 바라문 등과 함께 하는 것이리라.
[南傳大藏經 16上 相應部經典 5권 p.133]
상견과 단견의 두 극단 물리치고 중도 선언
개개의 사물에 내재하는 어떠한 영속적인 실체성을 자아[自我: atman]라고 합니다. 부처님이 계시던 당시에 인도의 여러 종교가와 철학가들은 삼라만상의 제법에 자아가 있다거나 없다는 두 견해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자아가 있다는 것은 상견(常見)과 같고, 없다는 것은 단견(斷見)과 같은 것이라 하여 이 두 극단을 물리치고 중도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어느 때 세존은 사위성(舍衛城)에 머무르셨다.
유행자(遊行者) 점모류( 牟留)는 세존에게 이렇게 여쭈었다.
"구담이시여, 괴로움[苦]과 즐거움[落]은 자기가 짓는 것[自作]입니까?"
"점모류야, 그렇지 않다."
"구담이시여, 괴로움과 즐거움은 남이 짓는 것[他作]입니까?"
"점모류야, 그렇지 않다."
"구담이시여, 괴로움은 자기가 짓고[自作] 남이 짓는 것[他作]입니까?"
"점모류야, 그렇 지 않다."
"구담이시여, 괴로움과 즐거움은 자기가 짓는 것도 아니고 남이 짓는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나는 것[無因生] 입니까?"
"점모류야, 그렇지 않다."
"구담이시여, 괴로움과 즐거움은 없습니까?"
"점모류(점牟留)야, 괴로움과 즐거움은 없는 것 이 아니다.
점모류야, 괴로움과 즐거움은 있느니라."
"그렇다면 존경하는 구담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합니까?"
"점모류야, 나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것이 아니다.
점모류야, 나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안다, 점모류야, 나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본다."
"존경하는 구담은 나를 위해 괴로움과 즐거움을 설해 조소서."
"받음[受]과 느끼는 것[感]은 같다고 하는 점모류야, 처음부터 이야기 되어진 것에 대하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내가 짓는 것이다.'라고 하는 이와 같은 것을 나는 말하지 않는다.
'받음과 느끼는 것은 다르다'고 하는, 점모류야, 받음에 중압되어진 것에는
'괴로움과 즐거움은 남이 짓는 것이다'라고 하는 이와 같은 것을 나는 말하지 않는다.
점모류야, 이 두 극단을 떠나서 여래는 중도에 의하여 법을 설하느니라.
무명 극단을 떠나서 여래는 중도에 의하여 법을 설하느니라.
무명에 연하여 행이 있고 행에 연하여 식이 있으며
이와 같은 것이 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모임[集]이니라.
무명의 남음이 없고, 탐욕을 떠나고, 멸함에 의해서 행의 멸함이 있고,
행의 멸함에 의해서 식의 멸함이 있으며 이와 같은 것이 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멸함이니라." [南傳大藏經 相應部經典 2권 p.31-33]
일체에 대한 있음과 없음[有無] 또는 구성요소의 하나[一元]와 여럿[多元] 혹은 고락의 자작[自作]과 타작[他作]등 이 모두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두 극단이며 변견인데, 모든 상대적인 변견은 불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법문을 하든지 간에 두 극단을 떠난 중도를 정등각하고 중도에 입각해서 법을 설해야 바른 불교이지 그렇지 않고서는 바른 불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변견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自性]을 깨쳐야 하고, 자성을 깨쳐 중도를 성취하여야 하며, 중도의 정견을 성취하려면 참선으로 깨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