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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나와 가룟유다의 결별포인트>의 줄거리:
가롯유다와의 결별포인트를 언급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가롯유다와 내가 함께 움직이는 과정이 있다는 것이고 또한 반드시 서로 찢어져야만 하는 지점까지는 반드시 도달해야만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참으로 많은 교인들이 가롯유다가 도달했던 그 결별포인트까지 도달조차 못하고 맙니다. 이 지점에 도달하고 그리고 찢어져야 참 기독교인입니다.
나와 가룟유다의 결별포인트
(마26:14-25)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나와 가룟유다의 결별포인트>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나와 가룟유다의 결별 포인트’
결별 포인트라는 말에서 뜻하는 바가 분명히 있습니다.
결별이라는 말이 얘기되려면 함께 한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가룟유다와 함께 하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됩니다, 그리고 결별 포인트라고 하는 것은 이 과정이 진행되다가 어느 시점에서 서로 관계가 찢어져야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가룟유다의 마음속에 들어갔고, 그리고 곧바로 가룟유다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되면서 예수님을 넘겨주려는 배반행위가 본궤도에 진입하게 됩니다.
사탄이 들어오기 전까지 어떤 마음이었을까?
배반과 관계되는 아무런 생각도 그 조각조차 없다가 갑자기 사탄이 들어오면서 불쑥 생각이 솟아나서 나가서 예수님을 배반하고 넘겨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형이 결정되면서 고난을 받는 모습을 본 가룟유다가 괴로워서 자살한 사실을 보아도 사탄이 들어가서 행동으로 옮기기 전까지 가룟유다가 어느 정도 번민을 했겠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요, 가룟유다가 태어날 때부터 특별히 악질로 태어났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와 같은 성정의 인간이었지요.
그러니까 3년 동고동락한 스승을 배반해서 죽음의 자리에 내어줌에 있어 고민과 번민이 없었을 수는 없다는 겁니다.
바로 이 지점까지, 가룟유다가 번민하고 고민해야만 하는 이 지점까지 가룟유다와 함께 가야 됩니다.
가룟유다의 이 번민의 자리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기독교인으로 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도대체 가룟유다와 함께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이 지점, 그래서 그 지점까지는 같이 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 지점 이후부터는 가룟유다와 결별하고 찢어져나가야 되는 그 지점은 어떤 지점일까요?
오늘 본문에 가룟유다가 은 30에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구두로 계약을 맺지 않습니까?
이 은 30에 넘겨준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보면서 가룟유다와 우리가 함께 도달할 지점, 그리고 그 지점에서는 이젠 더 이상 같이 가면 안 되는 반드시 결별해야만 되는 그 지점의 내용이 무엇인지 한번 살펴봅니다.
왜 하필 은전 30세겔일까?
우선 주석가들에 의하면 결코 많은 돈이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3년 공생애 동안 떨쳤던 그 명성에 비하면 예수님이 메시아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단순히 랍비라고 하더라도, 그 명성을 떨치고 있던 랍비의 생명 값으로는 은전 30세겔이 너무나도 사소한 돈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면 왜 유다는 이 얼마 되지 않는 돈에 스승을 넘겨주기로 결심을 할까요?
이것을 많은 주석가들이 이렇게 이해합니다.
가룟유다는 재물에 대한 탐욕, 그가 헌금궤를 맡고 있었던 자라는 것도 아마 자발적으로 돈을 관리하고 싶다고 자원했을 것이고 돈에 대한 관심이 특별했고 돈에 대한 탐욕이 많았다.
그러나 맞지 않아요, 이게 사소하게 여겨지는 은 30세겔을 가지고 탐욕을 부릴 일입니까?
이것은 돈에 대해 탐욕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돈을 받고 스승을 넘겨준다고 하는 것은 유다의 독특한 심정의 표현이었다는 겁니다.
그 상황에서의 독특한 심정이라는 게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에 대한 평가가 드러난 것이라는 거예요.
쓸모없음이라는 평가, ‘예수님은 더 이상 쓸모없다’라는 평가가 드러난 것이 은 30세겔로 나타난 겁니다.
만약에 돈에 대한 탐욕이 있었다면 이건 거래가 됩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대제사장들과 deal을 할 수가 있어요, ‘은 30에는 못 넘겨준다’
그러면 이렇게 물어볼 수 있어요, ‘넘겨준다는 게 뭐냐? 예수님이 자기 것이었냐, 넘겨주게?’
‘예수님을 팔았다’고 하는 게 무슨 말인가?
넘겨준다는 건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포박해서 공회에 넘겨준다거나 법정에 고소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26장 앞부분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할 때 민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서 민중들이 정당한 점도 보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가룟유다가 판다는 것이 왜 대제사장들에게 큰 의미가 있는가 하면, 3년 동안을 동고동락했던 측근 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의 부당함을 들고 나올 때, 민란을 두려워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있어서는 이 보다 더 큰 호재가 없다는 겁니다.
측근 중에서 예수님이 잘못 됐다고 들고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예수를 잡아 죽일 수 있는 명분을 강력하게 제시하는 사건일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넘겨준다는 말이 돈으로 거래가 성사될 수 있다는 거예요.
이렇게 거래가 성사될 바에는 예수를 죽이고 싶은 것이 첫 번째 관심인 대제사장들에게 더 요구할 수도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를 넘기는 것은 돈에 대한 관심이 아니에요.
그러면 무엇의 표현이냐?
예수가 더 이상 쓸모없어졌다고 하는 것에 대한 표현입니다.
우리 옛날에 강냉이나 엿을 사먹을 때 돈을 주고 사먹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빈 병이나 신문지, 못 쓰는 양은 그릇, 이런 것들로 강냉이나 엿을 바꿔 먹었어요.
다시 말해 못 쓰는 것을 주고 강냉이나 엿을 헐값으로 받은 겁니다.
마찬가지예요.
30세겔은 엿에 불과해요, 예수님 가지고 엿 사먹은 겁니다, 강냉이 바꿔 먹은 겁니다, 예수님이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자기 삶에서 헐값에 폐기처분한 겁니다.
그러면 무엇에 쓸모가 없다는 얘깁니까?
내 소원에 대해서, 내가 몸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 내 가정이든 직장이든 사회든 어디에서든 내 소신과 신념에서 나오는 것이든, 내 소원에 대해서 예수님이 더 이상 쓸모없는 폐기처분해야 마땅한 폐품이라고 단정을 해버리고 평가를 내려버리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표현이 고작 은 30세겔 받고 자기 스승을 팔아넘기겠다는 결심으로 나타났다는 얘깁니다.
바로 이 점까지 도달해야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해서 더 나아지기를 원한다든지 오래 살고 건강하기를 원한다든지 내 소원에 대해서 아무 쓸모없다고 하는 깨달음의 지점까지 와야 됩니다, 가룟 유다와 같이.
이 지점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기독교인으로 거듭날 수도 없습니다.
반드시 이 세상을 향해서 갖고 있는 나의 소원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죽어도 내 소원을 안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내 소원에 대해서 아무 쓸모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깨달아야 됩니다.
가룟 유다와 함께 그 지점까지 와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왜 이런 깨달음에 도달해야만 될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을까요?
누구나 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그 관계의 시작이 잘못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은 30세겔에 담긴 또 하나의 의미가 노예의 몸값이라는 겁니다.
출애굽기 21장에 보면, 우리 집 황소가 남의 집 노예를 뿔로 받아서 죽게 했을 때 내가 죽은 노예의 주인에게 물어주어야 될 돈이 은 30세겔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아예 예수님을 노예의 위치에, 나는 주인의 위치에서 관계했다는 것입니다.
“아유, 그럴 리가 있겠나?”
아니에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노예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누구냐 하면 ‘주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종’이고, 나는 ‘종’이라는 별명을 가진 ‘주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런 관계가 시작됩니까?
이 세상에 대해서 내가 예수님과 만나기 전에 예수님과 상관없이 먼저 소원을 갖게 되면, 하여간 이 땅 위에서의 삶에 관계되는 소원을 먼저 갖고 예수님을 찾아가면 반드시 내가 주인이 됩니다.
나는 종의 별명을 가진 주인이고, 예수님은 주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종이 내 소원을 들어주지 못하는 필요 없는 종이 됐을 때에 30세겔을 받고 팔아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 삶에 대해서 갖고 있는 내 소원에 대해서 아무 쓸모없다고 하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까?
그러면 아직 가룟 유다가 도달한 지점까지도 오지 못한 거예요.
죽음을 받아들이시고 죽음을 기정사실화 하시는 예수님을 아직 못 보고 있는 것이고 기적의 예수님 능력의 예수님만 보고 쫓아가는 겁니다.
아직도 가룟 유다가 도달한 지점까지도 못 온 대부분의 교인의 상태를 우리는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래 갖고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고 신앙인이 없고 하나님의 자녀요, 주님의 권속이 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가룟 유다가 번민한 이 지점까지 와야 됩니다.
스승을 팔까 말까, 왜 이런 번민을 합니까? 내 소원에 대해서 필요가 없으니까…
어떤 분은 이렇게 질문을 하실 수 있어요.
‘이상하다,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많은 은혜를 베푸시고 도움을 주시는데?’
여러분, 맞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삶에 대해 허락해주시는 은혜를 감사해야 되지요.
그런데 그 상황은 예수님께서 해와 비를 선한 자와 악한 자 모두에게 동일하게 내려주시는 그 은혜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어서 원불교인 이건희 씨보다 돈을 더 많이 벌었습니까?
여러분이 예수 믿어서 예수 안 믿고도 돈을 많이 번 이건희 씨보다 반드시 더 오래 산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이건희 씨의 자녀들보다 여러분들의 자녀가 잘 믿어서 더 잘됐습니까?
아니에요, 굳이 이건희 씨 예가 아니더라도 세상에 믿지 않고 불상 앞에 절하고 공양하는 사람 중에 잘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내가 이만큼 사는 것은 예수님 잘 믿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일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조물주로써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으로써 모든 악인과 선인에게 내리는 은혜의 차원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절대로 예수님은 믿는 자일수록 자기의 소원대로 이루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변화산에서 초막을 짓고 살자고 하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절대로 내 소원 안 이루어주세요.
그런데 내가 세상에 대해서 갖고 있는 소원에 대해서 예수님이 전혀 쓸모가 없다는 이 깨달음의 자리까지 오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아직까지도 자기 소원 자기 비전을 내세우면서 ‘예수님이 이루어주신다, 예수님께서 해주실 것을 믿습니까? 아멘!’ 하면서 믿는 가짜 교인, 아예 교인이 아닌 교인들이 있다는 거예요.
자 이 지점까지 와서부터 이제 진짜 기독교인이냐 아니냐가 결정된다는 겁니다.
자, 내가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전혀 도움을 주지 않으시고 가룟 유다와 제자들이 소원을 가졌던 것처럼 그 소원대로 눈곱만큼도 움직여주지 않으십니다.
단지 그들이 먹고 입을 것은 하늘아버지께서 창조주로써 허락하고 계시는 거예요, 모든 자들에게, 악인들에게도.
그런데 악인들이 다른 것은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걸 알고 감사하는데, 악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걸 모르고 감사하지 않는 것뿐이지요.
예수님 믿었다고 내 소원이 이뤄지는 게 아니에요, 착각하지 마세요.
이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 이제 결정합니다.
가룟 유다와 찢어져야 될 단계가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 땅 위에 대한 나의 소원, 내가 갖는 소원을 놓지 않습니다.
끝까지 놓지 않을 때 반드시 예수님을 버려야 하고 예수님을 배반해야 되고, 예수님을 무시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내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 아니니까…, 절대로 안 들어주십니다.
왜? 그분은 내 주인이니까, 내 주인이니까… 내가 종이니까.
종의 소원을 들어주는 주인은 없습니다.
제자들은 어떤 상태입니까?
가룟 유다는 자기의 소원을 붙잡고 예수님을 버립니다, 제자들은 우왕좌왕하는 상태가 됩니다.
배반도 못하고 소원을 버리지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모습 보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승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기로 결정하고 기도할 때 오순절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죠.
그리고 세 번째 부류가 있습니다.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 내 소원을 죽이는 겁니다.
십자가에 죽음의 단계로 들어가는 예수님과 함께 마음이 따라 들어가는 겁니다.
삶에 대해서 죽는다는 게 어떻게 나타납니까?
삶에 대해서 소원이 없는 게 죽는 거예요.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저렇게 됐으면 좋겠다, 소원이 없는 게 죽는 겁니다.
그렇게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내 소원을 죽어도 안 들어주십니까? 왜?
예수님께서 내 인생을 주인으로써 이끌어 가실 때에 내 인생에 대한 예수님과 하나님아버지의 소원만 있으면 되기 때문인 거예요.
가룟 유다는 자기가 갖고 있는 소원을 강하게 붙잡으면서 예수님을 쓸모없다고 팔아버렸는데, 예수님이 보실 때는 예수님이 내 인생에 대해 갖고 계신 소원만 있으면 내가 스스로 내 인생에 대해 갖고 있는 소원은 폐기처분해도 된다고 느끼시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거라도, 길에 지나가는 외제차를 보고 ‘아, 저 차 좋다!’라는 생각이 날 때조차도 그 소원을 버리라는 거예요.
그 소원을 갖고 예수님을 쫓아가지 말라는 거예요.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서, ‘아, 저런 아가씨와 결혼하면 좋겠다’ 그런 마음도 총각들이여, 갖지 말라는 얘깁니다.
내 결혼에 대해서 예수님이 갖고 계신 소원이면 충분하다는 거예요, 내 소원은 폐기처분하라는 겁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내 생애에 대해서 내가 소원을 갖는 죄적인 습성을 가지고 예수님과 관계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관계는 언제나 종이라는 별명을 가진 주인인 내가, 주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종인 예수님을 관계하면서부터 시작해서 가룟 유다가 번민하는 자리에까지 도달해야 됩니다, 먼저.
어느 자리입니까?
내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깊이 깨닫게 되는 자리까지 와야 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제자들처럼 번민하더라도 아니면 마리아처럼 번민 없이 곧바로 가더라도 예수님을 폐기처분하는 대신에 세상에 대한 내 소원을 죽이고 폐기처분하고 예수님이 죽음으로 들어가는 그 블랙홀 복음으로 나를 놓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대해 소원을 갖고 싶어 하는 내 마음 전체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빨려 들어가도록 내어놓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참 신앙으로 거듭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완전히 세상에 대해서 소원을 가지려는 마음이 빨려ㄹ들어가 죽어버릴 때, 내 마음이 승천하신 주님 따라 승천하고 하늘나라에서 거듭나고 그리고 보내졌을 때…
빌립보에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 소원을 두사…’
이 소원은 어떤 소원입니까?
세상에 대해 갖고 있는 내 소원이 죽어버리고 그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다가 하나님 만나 배불러서 하나님으로 배부른 상태에서 어떤 것도 세상에 대해 갖고 싶지 않을 때에 넣어주는 소원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예요.
가룟 유다와의 결별 포인트, 아직 여기까지 도달도 못한 상태로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내 소원을 가지고 주님께 나와서 이루어달라고 기도할 때, 전혀 내 소원은 들어주실 마음이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지점에서부터 가룟 유다와 결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종이라는 별명을 가진 주인노릇을 십자가를 바라보며 중단하게 하시고 그동안 주인이라는 별명으로 대했던 종의 위치에 서계신 우리 주님 예수님을 진정으로 주님의 자리로 모실 수 있게 하여 주셔서 가룟 유다와 분명한 결별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예수에
대 한 소원을 법정까지 가서 확인도 하고싶지 않했을까 꿩도먹고 알도먹을 강도가 아니
겠는가 합니다 세상에 소원이 스승을파는 파렴치범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