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항쟁 80주년과 제14회 10월문학제
2026년 10월 10일, 상주와 대구 두 곳의 행사에 모두 참석하려고 며칠 전부터 교통편을 알아보았다. 주말 연휴라 기차표 구하기가 어려웠고, 김천에서 상주로 갔다가 대구로 나오는 버스 편도 자주 있지 않았다. 오전 11시에 열리는 상주의 항보(恒步) 김성순 선생님 백수연(白壽宴)에 참석한 다음 오후 4시에 시작되는 대구의 10월문학제에 가려면 승용차로 이동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제는 장거리 운전에는 자신이 없는 노인이다.
1929년생인 항보 선생님의 백수 잔치는 원래 우리 나이로 99세가 되는 2027년에 해야 하지만, 임낙경 목사님이 한 해 앞당겨 치르자고 제안하여 상주의 오덕훈 선생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나는 초대자의 하나로 이름을 올린 터라 꼭 참석해야 했지만, 결국 백수연에는 찬조금만 보내고 수원역까지 나가 새마을호를 타고 대구로 향했다.
마음호로 이름을 바꾼 열차는 좌석도 널찍하고 편안했다. 문득 고속열차는 쾌적한 여행이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먼 운송 수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몇 시간 절약하기 위해 바뀌는 경치를 감상하거나 맥주를 한 잔 마시거나 책을 읽는 여유를 맞바꾼 셈이 아닌가. 속도와 능률과 돈이 지배하는 거역할 수 없는 흐름에 따라 2년 후에는 무궁화호도 없어진다고 하니 지방 소도시들의 인구는 더욱 줄어들고 수도권 집중은 가속화될 것이다.
비행기나 고속철도를 타고 가면 잘 보이지 않던, 재선충으로 뻘겋게 죽어가는 소나무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산림 전문가인 최병성 목사에 따르면 독한 약을 드론으로 뿌리는 것보다, 한국에서 개발한 천적 곰팡이를 이용한 방제법이 중국에서는 효과적이라는데, 왜 산림청에서는 기를 쓰고 반대하는지 모르겠다. 이러다간 지구온난화와 재선충 때문에 우리나라의 소나무는 일본처럼 전멸할지도 모른다.
마음호를 탄 덕분에 고속철도 열차는 서지 않는 대구역에서 내리니 바로 길 건너가 행사장인 대구문학관이다. 동대구역에서 여기까지 오는 시간을 절약한 탓에 시간이 남아 근처 북성로에서 권상구 씨가 운영하는 10월항쟁 아카이브 전시관을 찾았다. 비밀 해제된 주한미군 정보보고서들을 2, 3년 동안 혼자 힘으로 수집하여 분류하고 일일이 번역한 문서들을 보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오래전부터 대구의 골목들을 연구해온 권상구 씨는 역사학자들이 외면하니까 할 수 없이 전문가가 아닌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대구와 전국각지에서 온 문인들은 전시관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는 상자들을 뽑아 그 안의 문서들을 읽으며 80년 전인 1946년 10월항쟁의 흔적을 직접 손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영천 10항쟁을 다룬 최초의 시집 『시월』(삶창, 2014)의 개정판을 최근에 펴낸 이중기 시인도 이 방대한 자료에 놀랍다는 표정이다. 이런 자료들을 읽고 나면 그는 『시월』의 후속편을 또 써야 할지도 모른다.
대구문학관에서 열린 10월문학제의 백미는 김문주 교수(영남대 국문과)의 발제문 「잊혀진 항쟁, 소거되지 않은 한반도의 모순」이었다. 10월항쟁을 미군과 우익에서는 ‘공산당의 선동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한 반면, 박헌영과 좌익 문인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이하 ‘동맹’으로 약칭)은 쌀 기근과 하곡(보리) 강제 수매, 친일 경찰들의 횡포에 분노한 인민들의 자발적 저항이라고 본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동맹’의 기관지 『文學』 ‘인민항쟁특집호’(1947. 2)에 실린 임화의 글 「인민항쟁과 문학운동」은 10월항쟁을 ‘동학란’과 ‘3•1운동’의 뒤를 이은 인민의 자유의지에 의한 항쟁이었음을 강조한다. 평론가 김영석은 1947년 2월 『백제』에 실린 글에서 “문학자가 객관적 현실의 발전과 애국적 열정에 불탄 인민대중의 정치적 진출에 비하여 멀리 뒤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번 남조선인민항쟁에 대한 문학자로서의 무의식적 사보타쥬는 문학자가 뒤떨어져 있었다는 일표현이었다”고 반성한다.
앞서의 『文學』 ‘인민항쟁특집호’에는 2편의 시와 5편의 소설이 실렸는데, 그중에서 낯익은 이름은 「機關區(기관구)에서」라는 시를 쓴 이용악과 「아버지」라는 소설의 작가 황순원이었다. 이용악은 월북했으나 황순원은 신문에 공개 전향서를 발표하고 남한 문단과 대학에서 문필활동을 이어갔다. 김수영도 공개전향을 통해 살아남았고, 신동엽은 잠시 빨치산에 합류했다가 이탈하여 나중에 국군에 입대하여 복무한 바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와 분단 시대에 숨죽이며 글을 쓴 작가들의 작품에 그런 상흔이 복잡한 문양으로 새겨져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낙엽처럼 전쟁과 험난한 시대의 풍랑에 휩쓸려 월북한 임화, 김남천 등 남로당 계열의 문인들은 6•25 전쟁 이후에 박헌영과 함께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그런데 이같은 정치적 숙청과 더불어 북한의 역사에서 남한의 10월항쟁은 사라지고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10월항쟁은 남북한 모두에서 무시되거나 잊혀지거나 ‘폭동’으로 왜곡된 채 80년이 지났다.
김 교수가 논문에서 처음 발굴한 10월항쟁의 작가는 대구 출신의 소설가 이갑기(1908〜?)와 경남 합천 출신의 시인 박산운(1921〜1997)이다. 이갑기는 월북 직후인 1949년 8,9월 『文學藝術(문학예술)』에 대구의 10월항쟁을 소재로 한 소설 「遼遠(요원): 항쟁의 서사」를 발표했는데, 평론가 한효는 ”투쟁을 조직하는 당의 지도적 역할에 대하여 옳은 묘사를 보여주지 못하고(…) 마치 당의 어떠한 지도 없이 군중들이 자발적으로 투쟁을 일으킨 것처럼“ 보여주고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거대한 인민들의 항쟁을 마치 자연발생적인 투쟁과도 같이 생각케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고 비판했다. 10월항쟁에 대한 남북한 문학인들의 관점이 다르다는 것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갑기는 1950년에도 「보도자」라는 소설을 통해 미군정하 좌익언론인이 겪는 고뇌와 저항의 모습을 그렸다. 실제 이갑기는 해방 직후 이원식, 김종구 등과 함께 치안유지회를 결성하고 일제가 운영하던 대구일일신문사를 접수하여 운영하다가, 대구 10월항쟁을 호외로 보도했다는 이유로 유치장에 수감되어 겪은 일들을 형상화했다. 이런 사실은 정영진 기자가 쓴 『폭풍의 10월』(한길사, 1990)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갑기가 나중에 월북하여 10월항쟁의 경험을 형상화한 소설의 내용은 김 교수의 이번 논문을 통해 처음 밝혀진 것이다.
박산운은 1950년 평양에서 출간된 『한 깃발 아레서』(문화선전사)라는 남북한 시인들의 합동시집에 「노래」라는 시를 통해 제주 4•3이 대구 10월의 항쟁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썼다. 그는 70 고개에 올라선 1990년에 낸 시집 『내 고향을 가다』(평양출판사)에 서사시 「내 고향을 가다」와 ‘서정서사시’ 「10월의 불길」이라는 두 편의 장시를 발표했다. 「내 고향을 가다」는 남쪽의 고향을 그리는 연작시이고, 「10월의 불길」은 ”노인이 된 화자가 항쟁의 동지였던 기관사(그대)를 떠올리면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난 1946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겪은 일들을 순차적으로 회고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10월항쟁은 80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정부의 공인을 받아 그 진상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오랫동안 금기와 망각의 영역으로 봉인돼 있던 역사적 사실이 공인된 진실로 인정받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채영희 회장(81)을 비롯한 유족회 회원들의 피나는 노력과 이들의 증언을 문학으로 형상화한 10월문학회 회원들, 브루스 커밍스와 정해구, 정영진, 심지연, 김상숙, 권상구, 이동진, 김문주 같은 연구자들의 노력 덕분이라고 나는 돌아오는 기차 속에서 되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