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36)기와 주막집
천둥 번개 치고 장대비가 양동이로 퍼붓듯이 쏟아지는 늦은 밤.
주막집의 잠긴 사립문을 잡고 누군가 뭐라고 내뱉는 목소리는 빗소리에 잡아먹혔다.
“술장사·밥장사는 벌써 끝났소.” 자다가 일어난 주모가 고함치고는 안방 문을 쾅 닫았다.
열두어살 먹은 사동이 나와서 사립문을 열었다.
한 사람이 등을 흙담에 기댄 채 질척거리는 흙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었다.
고주망태가 된 술꾼인 줄 알았는데 술 냄새는 나지 않았다. 가시넝쿨 속을
헤맸는지 옷은 찢어졌고, 삿갓은 벗겨졌고, 도롱이는 비에 흠뻑 젖어 등짐이 됐다.
사동이 그를 부축하며 뒤뜰 굴뚝 옆에 붙어 있는 쪽방으로 데려갔다.
내일이 장날이라 장사꾼들이 빼곡하게 새우잠을 자는 객방에는 자리가 없었을 뿐더러
흙투성이인 상태로는 발을 들이게 할 수도 없었다. 사동은 반평도 안되는 자기 방에
그 사람을 구겨 넣었다. 호롱불 빛에 보니 그 사람은 볼품없는 노인이었다.
동창이 밝았을 때 노인이 눈을 떠보니 자신은 발가벗겨져 있고, 옷은 바짝 말라 머리맡에
개어져 있었다. 사동이 문을 열고 생긋이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 아궁이에 옷을 말렸으니 입으세요.”
며칠 후, 그날은 무싯날이라 저녁 일찍 주막 문을 닫으려는데 웬 장정이 들어왔다.
주모는 바깥나들이를 나갔고 사동 혼자 있었다.
“너, 나하고 어디 좀 가야 쓰것다.”
장정이 사동의 목을 잡아끌었다.
“안돼요.”
발버둥 쳤지만 덩치 큰 장정은 사동을 번쩍 들어 사립문 밖에 매어둔 말 등에 태웠다.
말은 달리고 사동은 떨어질세라 장정의 허리를 껴안았다.
수십리를 달려 고래 등 같은 어느 기와집 앞에 멈췄다.
사동이 바들바들 떨면서 장정에게 이끌려 대문 안 사랑방으로 갔다.
유건을 쓴 대주 어른이 빙긋이 웃으며 사동의 두손을 잡았다.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그제야 대주 어른을 쳐다본 사동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날 밤 비를 맞고….”
“그래, 지난봄에 쓴 어머님 묘소에 갔다가 갑자기 폭우를 만나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여우고개 아래 너희 주막에서 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
사동의 얼굴에서 두려움이 사라지고 놀라움에 벌린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그날 밤 비를 맞고 주저앉은 노인을 보고 ‘붓장수일까, 갓장수일까, 아니면 비렁뱅이일까’
온갖 추측을 했는데 이런 큰 기와집 주인이라니.
대주 어른이 물었다.
“너의 바람이 뭐냐?”
“돈을 벌어서 주막을 도로 찾는 것입니다.”
원래 여우고개 아래 주막은 사동네 것이었다.
이태 전 7년이나 누워 있던 사동의 아버지가 이승을 하직하자 약값으로 쌓인 빚 때문에
주막은 저잣거리 고리채 영감에게 넘어갔다. 사동의 어머니는 저잣거리 국밥집 찬모로
일하게 됐고, 형은 장터에서 지게꾼으로 일하고 있었다. 지금 주막집 주모는 고리채
영감의 여동생이다.
사동의 내력을 다 듣고 난 대주 어른이 물었다
“몇년이나 돈을 모으면 그 주막을 도로 찾을 것 같으냐?”
코흘리개를 겨우 면한 사동이 손가락을 세어보며 말했다.
“십년 안에는….”
대주 어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동을 말에 태워 돌려보냈다.
이튿날 대주 어른이 저잣거리 고리채 영감을 찾아가 주막을 사겠다고 흥정을 했다.
이미 주막이 넘어간 가격을 알고 있는데 고리채 영감은 터무니없는 값을 불렀다.
며칠 후 나루터 옆에 목수들이 모였다.
뚝딱뚝딱. 석달 후 춥지도 덥지도 않은 시월상달에 기와집 주막이 완공됐다.
널찍한 부엌에 객방이 다섯이요, 안마당엔 평상이 세개였다. 완공식 날 대주 어른은
땅문서와 집문서를 열두살 사동에게 줬다. 사동의 어머니와 형,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흘린 눈물이 눈물바다를 이뤘다.
첫댓글 태풍 산산의 영향인지 구름과
바람이 많은 수요일 아침 이네요
좋은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