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신문
성균관, 심산 김창숙 선생 59주기 추모제례
성균관(관장 손진우)은 5월10일 오전 11시 서울시 강북구 수유리 소재 심산 선생 묘역에서 ‘심산 김창숙 선생 59주기 추모제례’를 봉행했다.
이날 행사는 성균관·(사)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성균관이 주관했으며, 서울북부보훈지청·강북구청·성균관대학교·서초구청·의성김씨대종회가 후원했다.
또한, 코로나19 확산 예방을 위해 외부 인사를 초청하지 않고 성균관과 (사)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등 최소한의 임직원을 중심으로 거행했다.
추모제례는 ▶점시 ▶강신례 ▶참신례 ▶초헌례 ▶독축 ▶아헌례 ▶종헌례 ▶사신례 순으로 진행됐다.
초헌관은 손진우 성균관장, 아헌관은 정병국 (사)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회장, 종헌관은 김무락 의성김씨대종회 사무총장이 맡았으며, 집례는 김동목 성균관 전례위원장, 축관은 권선출 전례부위원장, 알자는 안도섭 전례위원, 김영기·김형열·공재춘·양해태 전례위원이 집사로 참례했다.
추모제례를 마치고 손진우 성균관장은 추모사에서 “유림의 지도자이자 민족교육의 사표이신 심산 김창숙 선생이 서세하신 지 59주기가 되는 날이다. 심산 선생께서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과 고난 속에서도 대의를 지키며 조국의 독립과 통일에 헌신하신 애국지사이자 참된 유학자셨다. 선생의 숭고한 뜻을 계승하여 우리 후세들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사회부조리와 갈등을 척결하고 평화통일을 실현하는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정병국 (사)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은 추모사를 통해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爲天地立心) 부모를 위해 몸을 세우고(爲父母立身) 나의 삶을 위해 도를 세우고( 爲吾生立道)백성을 위해 위해 진력을 다하고(爲斯民立極) 만세를 위해 모범을 세운다(爲萬世立範)’ 구절을 읽으며 “이 글은 선생의 스승이신 대계 이승희 선생께서 지으신 ‘일송오강’으로 선생께서는 이를 자신의 삶에서 지표로 삼았다. 손자 김위 선생께서 김구 선생의 글씨로 쓰어진 일송오강 휘호를 오늘 59주기 추모일을 맞아 기념관에 기증해 주시기로 했다. 기념사업회는 선생의 나라사랑과 민주주의 정신을 많은 시민들과 함께 기억하고 나누며 자라나는 세대에게 함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성춘 서울지방보훈청장, 김무락 의성김씨대종회 사무총장도 추모사를 이어갔다.
기념식을 마치고 ‘일송오강’ 기증식이 이어졌다.
‘일송오강(日誦五綱)은 날마다 외는 다섯 가지 강령’으로 과거 백범 김구 선생이 심산 선생에게 써준 휘호를 심산 선생의 손자인 김위 옹이 유품으로 보관했으며 이날 기념관에 기증했다.
이날 추모제례에는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신동렬 성균관대 총장, 김일윤 헌정회 회장, 김웅대 의성김씨대종회 회장, 박겸수 강북구청장, 김원웅 광복회 회장, 김웅대 의성김씨대종회 회장 등이 화환을 보내 추모했다.
한편, 모든 행사를 마치고 손진우 성균관장은 추모를 위해 참석한 조경호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 사회통합비서관에게 성균관 사서(四書)를 증정했다.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 연보
1879년(1세) 8월27일(음력 7월10일)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 사월리에서 아버지 의성 김씨 김호림과 어머니 인동 장씨의 외아들로 출생.
1905년(27세) 스승 이승희 선생과 함께 을사오적 처단 상소를 올림.
1909년(31세) 반민족단체인 일진회의 한일합병론을 성토하는 글을 발표하고 검거되어 옥고를 치름.
1919년(41세) 유림 137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파리평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영어로 번역하여 김규식 박사에게 보내 회의에 제출케 함. 이 일로 국내의 유림 500여 명이 검거됨. (파리장서운동)
1920년(42세) 박은식, 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 탄핵. 박은식 선생과 한중 혁명운동지 <사민일보> 발간. 신채호 선생과 독립운동 잡지 <천고(天鼓)> 발간.
1926년(48세) 상해에서 김구 선생과 함께 의열단원 나석주를 국내에 밀파하여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을 폭파케 함.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모금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킴. 이 일로 유림 600여 명이 검거됨. (독립군자금 모금운동) 임시정부 의정원 부원장(의장 이동녕)에 선출됨.
1927년(49세) 상해 공동조계병원에서 일경에 검거되어 대구로 압송됨. 장남 환기 국내에서 일경에 검거되어 고문 끝에 순국.
1928년(50세) 일제의 법 자체를 부인, 변호를 거절하고 14년 형을 받음. 2년간의 모진 고문으로 두 다리가 불구가 되고 신병도 악화됨.
1934년(56세) 병세 악화로 가출옥하고 한용운, 홍명희, 정인보 선생 등과 접촉함.
1940년(62세) 일제의 창씨개명을 단호히 거부함. 어머니 별세 후 21년만에 귀향하여 묘막에서 시묘살이를 함.
1943년(65세) 차남 찬기를 중경 임시정부에 밀파함.
1944년(66세) 고향에서 독립운동 추진하여 비밀결사체인 건국동맹 남한 책임자로 추대됨. (중앙책 여운형, 북부책 조만식)
1945년(67세) 건국동맹 일로 일경에 검거되었으나, 광복을 맞아 출감. 어느 정당에도 불참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환영대회 부회장에 추대됨.
1946년(68세) 신탁통치 반대투쟁 전개. 성균관장과 유도회총본부 위원장에 추대됨.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여 초대 학장에 취임.
1948년(70세) 김구, 김규식, 홍명희,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선생 등과 7거두 공동성명을 통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함.
1950년(72세) 6.25 때 서울에서 북측의 사상 전향 요구를 거부함.
1951년(73세) 1.4후퇴로 부산 피란. 이승만 대통령 하야 경고문 발표로 부산형무소에 투옥됨.
1952년(74세) 이시영 부통령, 신익희, 서상일 선생 등과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호헌구국 선언대회를 주도하고 옥고를 치름.
1953년(75세) 성균관대학이 종합대학교로 승격. 초대 총장으로 취임.
1956년(78세) 효창원 7열사 묘소 이장 반대투쟁위원장으로 투쟁함. 이승만 박사 3선 취임 반대 경고문 발표. 성균관대학교 총장직에서 사퇴.
1957년(79세) 자유당 정권의 압력과 술수로 성균관, 유도회 등 모든 공직에서 물러남.
1959년(81세) 반독재민권쟁취 구국운동을 거국적으로 전개. 이승만 대통령 사퇴 권고 서한을 발송함.
1960년(82세) 4.19혁명 이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대표 추대.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일성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 회장 추대.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회장 선출.
1961년(83세) 백범 김구 선생 시해진상규명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
1962년(84세) 3.1절에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을 받음. 5월10일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서거. 5월18일 사회장으로 수유동 산 127-4 묘지에 안장.
대기하고있다.
초헌례을 하고있다.
축관이 독축을 하고있다.
손진우 성균관장이 사서를 조경호 청와대 사회통합비서관에게 증정하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정병국 (사)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손진우 성균관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사신례를 하고있다.
종헌례을 하고 있다.
아헌례을 하고있다.
축관이 독축을 하고있다.
헌관이 초헌례을 하고있다.
행사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