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합덕(성가정)성당 - 충청도 첫 본당이며 성소의 못자리 |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합덕리 275-2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합덕성당2길 22
내포 지방(충청남도 중서북지역)은 1875년 무렵 내포의 사도 이존창에 의해 충청도에서 천주교 신앙을 최초로 받아들인 지역이다. 따라서 합덕 성당은 대전교구의 유서 깊은 성당이며 지역 신앙의 중심지이다.
합덕 성당의 전신은 1890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설립된 충청도 최초 성당인 양촌 성당이다. 당시 초대 주임은 퀴틀리에(Curlier, 南一良, 1863-1935년) 신부였는데 그가 1899년 성당을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합덕 성당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그후 신자수가 급증하여 페랭 신부 재임 때인 1926년에는 예산 본당, 1935년에는 서산 본당, 1938년에는 당진 본당을 각각 분리 신설하였고, 1961년 제8대 박노열 바오로 신부 때 마지막으로 신합덕 본당이 분리되면서 합덕 본당은 구합덕 본당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 후 1997년 다시 본래의 이름인 합덕 본당으로 변경되었다.
합덕 성당은 1890년대 박해 이후에 설립되었기에 박해시대의 순교자는 없으나 동족 상잔의 6 25때 공산군의 만행으로 끝까지 성당을 지키려던 사제와 지도자급 평신도가 순교한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당시 주임 신부였던 페랭 백문필 신부는 양들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성당에 남았다가 1950년 8월 14일 고해성사 중에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피살되었고, 윤복수 라이문도 총회장, 송상원 요한 복사도 신부님을 지키기 위해 자진해 체포되어 결국 처형되었다.
그리고 합덕 성당은 유서가 깊을 뿐만 아니라 조그만 고을임에도 성소자가 많이 나와 지금까지 100명 가까운 성직자와 수도자(사제 30명, 수녀 54명, 수사 5명)를 배출하였다.
점심식사 후 오후 2시가 약간 넘어 성당에 도착. 주차장에 내리니 성당 쪽으로 시원하게 길이 나 있다. 성당 건물을 바라보니 두 개의 첨탑이 건물 양쪽에 솟아 있는데 이는 합덕 성당의 상징이다. 길 입구에는 큰 성당 표지석이 서 있는데 이것은 2010년 성당 설립 120주년을 맞이하여 세운 합덕성당 120주년 기념비이다.
안내 게시판의 성당 안내도를 따라 이동하기로 한다. 안내판에는 이미 정리한 대로 충청지역 최초의 모본당이며 신앙거점이며, 성소자가 가장 많이 나온 지역이라는 사실로 자랑거리로 소개하고 있다. 새롭게 안 것은 이곳 성당 터가 합덕 농민항쟁의 시발지로 이는 전라도 고부에서 일어난 갑오농민 항쟁보다 먼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성당 안내도만 보아도 성당이 있는 언덕은 삽교호 연안에 핀 한 송이 꽃과 같은 느낌이다. 먼저 성당에 오르기 전 좌우에 있는 성모동산(좌)과 성가정 동산(우)부터 순례를 시작한다.
성모동산
성모동산 들머리에는 합덕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비가 나지막하게 앉아 있다. 100주년이라면 1990년에 세운 것이다. 안쪽의 넓은 잔디밭 언덕에 성모상이 서계시고 옆에 주님 우리가 주님을 두고 어디 가겠습니까? 라는 구절이 돌에 새겨져 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닥칠 수난을 예고하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는데, 이때 12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겠느냐고 묻자 베드로가 그럴 수 없다고 자신 있게 한 말이다.
오른쪽의 성가정 동산에는 별다른 시설은 없고 잔디밭뿐인데 성가정 동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언덕 위에 성가정 경당이 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합덕 성당 성전(충청남도 기념물 제145호)
계단으로 오르니 성전이 나타나는데 예수님께서 팔을 벌리고 맞아주신다. 처음 1899년 양촌성당이 이곳에 이전했을 때 초대 주임 퀴클리에 신부는 이곳에 한옥성당을 지었다. 그러나 신자수가 늘어나서 수용할 수 없게 되자 7대 패렝(백문필) 신부가 1929년에 아름다운 지금의 서양식 고딕 성당 건물을 지었다.
정면의 종탑이 쌍탑으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인데 두 개의 첨탑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상징한다. 성당의 3개의 출입구와 창들은 모두 무지개 아치 모양을 이루고 있다. 외벽은 붉은 벽돌로, 창 둘레와 종탑의 각 모서리는 회색 벽돌로 쌓았다. 창 아래와 종탑의 각각 면에는 회색 벽돌로 마름모형의 장식을 하였다. 아름다우면서도 건축사적의 의의가 있어 1998년 7월 28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성당 내부는 아치형 천정에 벽돌식 열주가 좌우에 있어 좌우 회랑을 간막이 하고 있다. 옛날의 지역 성당이라 그리 넓지는 않다. 주보를 보니 교적 신자수는 929명인데 미사 참례자 수는 190명이라고 나와 있다.
제대는 옛날식 트리엔트식 제대가 벽을 향해 있고 그 앞에 현재 사용하는 제대가 신자석을 향해 있다. 그리고 후벽에는 십자가고상 대신 본당 주모인 성 가정화가 걸렸고 좌우에 스테인드 글라스가 균형은 잡아주고 있다. 대신 십자고상은 천정에 매달려 늘여뜨려 있는 것 또한 특징이다.
옛날식 제대 양쪽에 천사상이 좌우에 있고 앞쪽 현재의 제대 앞면에는 최후의 만찬화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좌우 회랑 정면에는 예수성심상(좌)과 성모상(우)이 높이 걸렸는데 성모상 아래에는 순교 성인들의 유해가 봉안되어 있다.
오른쪽 갈색 궤짝 위에 놓인 성광의 상단에는 김대건 신부의 발뼈가 봉안되어 있고, 성광 하단에는 성 엥배르주교 성모방신부 성샤스탕 신부의 머리마락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유리함의 십자가는 합덕성당 7대 주임 패랭 신부의 유품이다.
성가정 경당
성전을 나오니 왼편 언덕 위에 성가정 경당이 있다. 성당 경내에, 성가정 경당이니, 성가정 동산이니 하는 시설이 있는 것은 본당 주보가 성 가정이기 때문이다. 성가정 경당 앞에는 성가정 기도가 새겨진 표지석이 있고 경당 안에는 성가정 상이 있다.
성가정 경당 옆 마당에는 2008년에 세운 종탑이 있는데 하나의 종이 아니라 12개나 단 종으로 종소리가 중단 되었던 성당에 다시 종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성당 오른쪽 마당 뒤편 언덕에는 큰 나무 몇 그루가 그늘을 지우고, 그 아래 긴 탁자와 의자가 마련된 쉼터가 있다. 안내판을 보면 합덕 성당 경내에 있는 수령 100-150년이 되는 10여 그루의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당진시에서 지정한 아름다운 나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6 25 때 성당을 지키다가 순교한 페랭 백문필 신부상과 성모자상이 나란히 서 있다.
가까이 있는 안내소 겸 성물방 건물을 지나면 성가정 순례자의 집이 나온다. 이 건물은 2008년 당진시와 함께 건립한 합덕 유스호스텔이다. 이곳을 찾는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신앙인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또한 인근 성지와 연계한 도보순례길 등을 통해 순교신심을 고양하는 거점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인근의 역사 유적과 문화 관광지를 탐방하는 가족 나들이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성가정 순례자의 집 옆 널찍한 잔디밭은 야외 제대이다. 이 야외 제대 잔디밭은 더 넓게 이어져 성당 뒤편 김대건 석상을 지나 성직자의 묘까지 이어진다.
성전 뒤편에는 김대건 신부 석상이 있고 그 좌우에는 성소를 위한 기도와 사제를 위한 기도가 새겨진 비가 서있다.
성직자 및 순교자 묘
앞줄에는 여섯 분의 순교자의 묘이고 뒷줄에는 네 분의 순교비이다. 뒷줄의 순교비는 왼쪽부터 성 황석두 루카 순교비, 백문필 비리버(필립보) 신부 순교비, 윤복수(레이몬드) 순교비, 송상원(요한) 순교비이다. 윤복수와 송상원은 이 성당의 평신도로 각각 총회장과 사무장으로 임무를 다하던 중 6 25때 백문필 주임 신부 피납시 자진하여 동행하겠다고 요청하여 함께 피납되었다가 1950년 9월 신부님과 함께 피살되었다. 성 황석두 루카의 순교비가 여기 모셔진 것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앞줄의 묘는 왼쪽부터 천주교 탁덕 이요셉, 천주교 탁덕 홍요한, 백문필 패랭 신부. 심재덕 마르코 신부, 총회장 尹福壽 레이문도, 사무장 송상원 세레자 요한의 묘이다.
심재덕 마르코 신부(1908-1945)는 백문필 신부의 보좌 신부로 있다가 병사하였다.
순교자의 묘 중에서 성직자의 묘의 유해는 가톨릭 대학교 성직자의 묘원으로 옮겨갔으며 평신도의 묘는 유해 없는 가묘이다.
십자가의 길
성당 뒤편 잔디밭 둘레에 골고다란 이름으로 십자가의 길 14처가 조성되어 있는데 그 마지막 14처가 순교자 묘지에 서 있다.
성당 언덕에서 뒤편을 내려다보니 무슨 민속 공원 같은 공간이 내려다보인다.
마지막으로 현재 역사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고풍스런 기와집인 구사제관 건물이 나타났는데 문이 닫혀 있어 아쉽게도 관람하지 못했다.
성당을 나오자 마을 어구에 성소마을 표지석이 있다. 하느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이 마을에서 배출된 성직자 수도자가 100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래서 2017년 성소 마을로 지정이 되어 관련사업을 해오고 있다고 한다.
오후 3시가 다 되었다. 마지막 코스인 신리 성지로 출발. 벌써 시간에 쫓기고 있다.
신리 성지 - 성 다블뤼 주교와 손자선 성인의 빛나는 활동 자취 |
성지 주소는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신리 62-3 (도로명 주소는 당진시 합덕읍 평야6로 135)
신리 성지의 의의
내포 땅 당진시 합덕읍 신리(는 지금은 평야지대로 보이지만 삽교천 상류에 위치하여 조선시대에는 삽교천 밀물 때 배가 드나들 수 있어서 외부와 소통이 가능했다. 따라서 신리 성지는 조선 천주교 유입 초창기부터 박해가 끝날 때까지 서양 선교사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지역 주민의 결집된 신앙심으로 비밀 교우촌이 유지될 수 있었다. 1866년 직전에는 손씨 일가를 중심으로 마을 주민 400여명 전체가 교우였을 정도로 신자수가 많았다. 혹자는 신리를 한국의 카타콤바(로마시대 비밀교회)라고도 이른다.
이곳 공동체는 신리 성지를 중심으로 한 거더리, 세거리, 소덜, 강계, 양촌 등 주변 마을로 구성되는데, 1836년 1월 13일에 조선에 입국한 첫 프랑스 선교사 모방(Maubant, 羅伯多祿, 1803∼1839, 베드로) 신부가 이 지역을 방문하고 신자들에게 성사를 줌으로써 신리(거더리) 교우촌이 가장 먼저 공소로 설정되었다.
이후 박해시기에는 서양 선교사의 보호처가 되었기에 성 다블뤼주교가 오랫동안 이곳에 거처하면서 활동을 하였다. 이로 인해 신리는 내포 지역의 사목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신리는 성 손자선 토마스가 태어나 자란 곳이어서 교회사적 의미가 더욱 큰 곳이기도 하다.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 ~1866, 안토니오) 주교는 프랑스 외방전교회 소속 사제로 1845년 10월 12일 김대건 신부와 함께 당시 전라도(현 충청도) 강경 황산포에 첫걸음을 내딛은 후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의 사목 기간 중에 가장 많은 시간을 이곳에 머물렀으며 나중에는 부주교의 신분으로 내포 지역의 교우촌을 사목하고 지휘했기 이곳이 주교관이 있는 교구청과 같은 위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866년 병인박해로 조선교구 제4대 뵈르뇌 주교가 순교하자 그 뒤를 이어 제5대 조선 교구장의 직책을 맡았으나 짧은 기간 동안 재직하다가 안타깝게도 체포되어 순교하고 말았다. 그리고 성 손자선 토마스 역시 같은 시기에 순교하여 신리 교우촌의 쇠망을 초래하고 말았다.
당시 신리 성지에서 성 다블뤼 주교가 머무르며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던 집은 이 지역의 유력한 교우였던 손자선 토마스의 생가로 20여 평밖에 되지 않는 초가집이었다. 비록 작은 집일망정 선교사를 모시기 위해 자신이 태어난 집도 흔쾌히 내준 것이다.
다블뤼 주교는 손자선의 생가를 주교관으로 삼아 여기에서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 그리고 병오 박해(1846년) 당시 순교한 신부 등과 평신도들의 행적을 조사하여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과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비롯하여 초기의 한글 교리서를 저술하고 이를 목판으로 간행했다. 이 자료들은 파리 외방전교회의 달레 신부(Dallet, 1829~1878)가 지은 《한국천주교회사》의 기초가 되었고, 1984년에 103위 성인을 탄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다블뤼 주교는 연풍 출신의 복사 성 황석두 루카와 함께 신리에서 《영세대의(領洗大義)》, 《성찰기략”(省察記略)》, 《신명초행”(神命初行)》, 《회죄직지(悔罪直指)》,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 《천주성교예규”(天主聖敎禮規)》 등과 같은 수많은 교회 서적들을 집필하고 출판했다. 이처럼 신리는 한국 교회사에서 최초로 근대적 출판 인쇄가 시작된 곳라고 할 수 있다.
1866년 3월 11일 포졸들이 거더리로 몰려와 주교와 복사인 성 황석두(黃錫斗, 1813~1866, 루카)를 체포하고 이어 위앵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도 체포하였다.
이들 다블뤼 주교 일행은 서울로 압송된 후 몇 차례의 신문에 이어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게 되었다. 이때 제천 배론에서 체포된 성 장주기(張周基, 樂韶, 1803~1866, 요셉) 회장이 그들 일행에 포함되었다. 이들 5명의 성인은 갈매못으로 이송되어 3월 30일 성 금요일에 순교하였다. 예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 성 금요일에 형을 집행해 달라는 다블뤼 주교의 희망을 들어준 것이었다. 베르뇌 주교를 도와 9년 동안을 부주교로서 그리고 주교의 순교 후 조선 교구의 제5대 주교가 된 지 21일 만에 장엄하게 순교한 것이다.
1839년 이 지역 최초의 순교자 손경서 안드레아 이후 병인박해 시에 이렇게 알려진 순교자를 배출했지만 알려지지 않은 무명 순교자는 압도적으로 많았다. 신리에서 1.8km 떨어진 인근 대전리 공동묘지에 무명 순교자묘가 46기나 발견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성 손자선 토마스(1844-1866)는 홍주(현재는 당진) 신리 거더리 마을 출신으로 3대째 천주교를 믿으며 순교자들을 배출한 매우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매우 근면하고 독실한 신자였으며 강인한 신앙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었다.
다블뤼 주교가 체포된 후 며칠 후 손자선도 체포되어 덕산 관가에 가서 배교를 강요받았다. 이때 그는 "저도 죽는 것이 무섭지만,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고 말했다. 하는 수 없이 관찰사가 있는 공주로 이송되자 거기서 다시 고문을 가했다.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에게 관장은 “너가 끝내 배교를 하지 않으려면 네 팔뚝을 물어뜯어 보아라“고 하자 그는 주저하지 않고 팔뚝을 물어뜯어 선혈이 낭자하자 고문을 멈추고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려 처단했다.
성지 조성
이토록 유서 깊은 신리 순교사적지는 2002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이곳에 파견되면서 그 중요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대전교구는 2003년 말 다블뤼 주교가 쓰던 옛 주교관(손자선 성인 생가)을 교회사적 고증을 거쳐 본래의 초가집으로 복원하고, 2004년 성역화를 위한 첫 삽을 뜨고 부지매입과 진입로 확장, 편의시설 확충 등을 거쳐 다블뤼 주교와 손자선 성인의 순교 140주년인 2006년 5월 6일, 2년 가까운 공사 끝에 성 다블뤼 안토니오 · 성 손자선 토마스 기념성당 및 사제관을 완공하여 축성식을 가졌다. 2008년 12월 22일에는 당진 신리 다블뤼 주교 유적지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76호로 등록되었고, 2009년 기념성당 외벽에 순교자들의 부활을 주제로 대형 부조상을 설치하고 다음해 7월말 야외성당(다블뤼 광장)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2013년 4월 20일 신리 성지 내에 성 다블뤼 기념관과 순교자 기념공원 기공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 2014년 5월 6일 다블뤼 주교 시성 30주년을 기념해 봉헌식을 가졌다. 기념공원에는 신리 성지에서 잡혀간 다섯 성인을 기리는 야외 경당을 봉헌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다섯 성인의 시성 30주년을 기리며 다블뤼 주교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지하 2층, 지상 4층으로 꾸며진 다블뤼 기념관에는 이곳 성인들에 관한 소개와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2017년 3월 25일에는 성 다블뤼 기념관 지하 2층에 국내 유일의 순교미술관을 개관하였다. 원로 한국화가인 이종상 요셉 화백이 신리 교우촌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성직자와 순교자들의 행적을 그린 순교 기록화 13점과 신리 성지 출신 순교성인 5위의 영정을 우리나라의 전통 채색 기법과 초상화 기법으로 제작해 봉헌하였다.
신리 성지가 이번 순례의 마지막 코스이긴 하나 벌써 오후 3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다. 4시에 출발을 한다고 해도 집에 돌아가면 밤 9시는 넘을 것이다. 조급한 마음이 든다. 더욱이 오래 참았던 비가 뿌린다.
주차장에 내려 성지 안에 들어가니, 주변의 편편한 들판과 조화를 이루는 드넓은 순교자 기념공원과 그 안에 지어진 여러 개의 작은 오각형 경당들만 눈에 뜨인다. 하도 넓어서 신축되거나 복원된 건물은 한쪽에 치우쳐 아주 작게 보인다. 속세를 넘어선 세계로 인도된 같은 느낌이 든다. 일단 안내도만 봐도 그렇다.
순례코스는 기념성당, 야외 성당, 성 다블뤼 주교관, 승리의 성모상, 기념 공원 내 경당들, 순교미술관을 동선으로 한다.
순교자 기념 성전
앞에서 말했듯 이 성전은 다블뤼 주교와 손자선 순교 140주년을 기념하여 2006년에 축성되었다. 외관은 아무 꾸밈도 없이 그냥 벽돌을 쌓아 올리고 마감을 하지 않은 건물과 같다.
성전내부도 퍽 소박하다. 제대 뒤 벽에는 흰 바탕에 큼직한 고상만 걸려 있고 제대 뒤에는 작은 승리의 성모상이 안치되고 제대 좌우에 강론대와 독서대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강론대에는 두 개의 성인 유해 성광이 들어 있어 예사 강론대와는 다른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오른쪽(안쪽) 성광에는 다블뤼 주교의 유해가, 왼쪽(바깥쪽) 성광에는 위앵 신부의 유해가 봉안되어 있다.
양쪽 벽면에는 14처가 있고 그 밑으로 액자에 빽빽하게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봉헌자 일 것 같은데 매우 많다. 출입문 안쪽 윗벽에는 이종상 요셉 화백의 순교화가 큼직하게 걸려 있어 더욱 빛이 난다. 신리 다섯 순교자와 순교교우들이 천국에서 만나 주님의 은총을 받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야외 성전
야외 성전은 기념 성전 외벽에 조성된 부조상과 그 앞에 놓인 제대 앞 넓은 공간을 말한다. 야외 성전 옆으로 종각이 있다.
성 다블뤼 주교관
당시 다블뤼 주교는 손자선 성인 생가를 주교관으로 삼아 활동했는데 성지 조성 시 고증을 거쳐 옛 주교관인 초가를 복원한 것이다.
1863년 화재가 발생하여 큰 피해를 입었으나 후에 공소로 사용하다가 옛 사진이 발견되어 이를 토대로 2004년에 복원하였다. 대들보와 서까래, 주춧돌과 문지방 디딤돌, 상량문을 옛것 그대로 사용하였다.
주교관이면서 손자선 성인의 생가
경내에는 다블뤼 주교의 상과 순교복자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순교비에는 신리 순교 5성인인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카 성인, 손자선 토마스 성인의 약력이 소개되어 있다.
승리의 성모상
승리의 성모상은 1629년 루이 13세가 건립한 파리 '승리의 성모성당'에 모셔져 있는 성모상이다. 1832년 이 성당에 부임한 데 즈네트 신부는 신자들의 신앙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했으나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1936년 미사를 봉헌하던 중 "지극히 거룩하고 하자 없으신 마리아의 성심께 너의 성당을 봉헌하라"는 음성을 듣게 되었다. 데 즈네트 신부는 곧 성모의 밤을 열었고 그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성당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1854년 "원죄없이 잉태하신 성모"교리 선포이후, 교황 비오9세는 '승리의 성모상'에 관을 씌워 드렸는데 많은 기적이 '승리의 성모님'을 통해 일어났다.
조금 전에 갔던 기념 성전 제대 뒤에도 모셔져 있었다.
여러 경당들
기념 정원에 흩어져 있는 다섯 개의 작은 경당은 이곳 신리 성지와 연관된 다섯 성인을 기념하는 기도 공간이다. 2~3명이 들어갈 수 있는 경당의 한쪽 벽에는 성인의 초상화 부조가 있고 그 옆에는 성인의 말씀이 적혀있다.
▲성 다블뤼 주교 경당
“예수님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성 오메르트 신부 경당
“저는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받아 천주교 신앙이 골수에 새겨졌습니다.”
▲성 위앵 신부 경당
“좋으신 하느님 께서 원하신다면 거룩한 복음의 증인이 되어
제 피를 쏟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조선입니다.“
▲성 손자선 토마스 경당
“나는 솔직히 죽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죽는 것보다 몇천 배 더 무서워 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성 황석두 루카 경당
"나는 이미 천당 가는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이 세상의 과거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순교미술관
성 다블뤼 기념관 지하 2층에 개관한 국내 유일의 순교미술관이다. 원로 한국화가인 이종상 요셉 화백이 3년에 걸쳐 신리 교우촌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성직자와 순교자들의 행적을 그린 순교 기록화 13점과 신리 성지 출신 순교성인 5위의 영정을 우리나라의 전통 채색 기법과 초상화 기법으로 제작해 2017년 3월 25일에는 재능기부로 봉헌했다.
◆성인 영정 - 성 오메트르 신부, 성 위앵 신부, 성 황석두 루카, 성 손자선 토마스
◆김대건 신부 서품식 장면 - 1845. 8.17 상해 금가항 성당. 페레올 주교 집전, 다블뤼주교 보좌, 서양신부 4명, 중국 신부 1명, 조선인 신자 11명 참여했다.
◆강경포구를 통해 입국한 선교사들 - 다블뤼 주교, 김대건 신부가 1945.8.31. 라파엘호로 상해출발, 제주도 용수리를 거쳐 10월11일 강경포구 도착. 상복차림
◆사목 방문 - 상복 차림으로 옷과 부채로 몸을 가리고 농한기에 신자들을 만나서 고해성사, 교육, 찰고, 교회현황조사 등을 실행하였다.
◆조선 최초의 예비 신학교 교장 - 페레올 주교가 지병으로 실행하지 못하고 다블뤼 주교에게 명하여 예비 신학생들에게 틈틈이 라틴어를 가르쳤다.
◆신리에서의 미사 - 다블뤼 주교는 사목방문의 대부분을 400명의 신자가 있는 신리의 손자선 토마스 집에서 보내면서 고해성사, 미사 집전, 신앙교육을 했다.
◆한양에서의 수감 - 신리에서 잡힌 순교자 4분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살인자, 도둑 등과 함께 수감되었다. 이때가 사순시기였으며 자신들의 배고픔에도 먹을 것을 양보했다.
◆오성바위에서의 기도 - 한양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충청도 갈매못을 향해 내려오다가 포졸들이 주막에 쉬는 동안 다섯 성인은 큰 바위 위에서 성가를 부르며 서로 격려했다.
◆갈매못에서의 순교 - 충청 수군절도사에 의해 형이 집행되었다. 만일을 대비해 9명의 조총수가 배치되었고, 200명의 군사가 구경꾼의 접근을 막았다. 1866.3.30. 성 금요일에 참수 순교했다.
◆신리 신자들의 체포 - 1968년 이후 수많은 신리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포졸들은 신자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마구 때리고 팔을 부러뜨렸다.
◆손 요한의 신지 신자들 염습 - 박해시절 손 요한은 피난길을 떠난 것을 후회하며 돌아와 전염병에 걸리고 부패한 신자들의 시신을 정성스레 염습하여 묻어주었다.
◆손자선 성인의 생가에서의 저술 - 다블뤼 주교는 사목 방문 후 다양한 저술을 하였다. 조선교회사와 순교자들의 사료를 수집하고 새 교우를 위해 한글 교리서를 출간했다.
◆다블뤼 주교 서품식 - 1841년 12월 8일 파리 성 쉴피스 신학교에서 아포르 주교의 주례로 위대한 순교자의 사제 서품식이 있었다. 1845년 입국한 다블뤼 주교는 4대 베르뇌 교구장의 선택을 받아 1857년 주교로 서품된다.
◆ 다블뤼 주교
▲다블뤼 주교 저서들
이로써 이번 회차의 성지 순례를 마쳤다. 비도 뿌리고 하여 나오는 길에 경내에 있는 카페 치타 누오바에 들어갔다.
치타 누오바는 이태리 어로 새로운 도시라는 뜻으로 이곳이 新里(새마을)이므로 지명에 맞추어 이름을 지은 것 같다. 이 건물은 옛날의 양곡창고를 고쳐지었다고 한다. 바깥에서 보기보다 내부는 한결 잘 꾸며져 있다.
차 한 잔의 여유를 갖고 나니 오후 6시. 날씨가 흐려서인지 마치 아두워지는 느낌이다. 언제 다시 오겠는가? 신리 성지에 하루가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출발했다.(김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