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84. 서안의 역사와 불교 ③
도안, 구마라집, 부견, 요흥 중국불교 부흥 ‘4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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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스님 사리탑> |
사진설명: 서안 남쪽 종남산 부근의 초당사에 있는데, 서역에서 갖고 온 대리석으로 조각한 것이다. |
서기 291년부터 시작된 ‘팔왕의 난’(291~306.서진의 여덟 왕자가 권력을 다툰 사건)과 ‘영가(永嘉)의 상란’(307~312. 흉노족 등이 영가 연간에 일으킨 난리) 속에 위, 촉, 오를 통일한 서진(265~316)이 멸망되고, 뒤이어 회수(淮水) 북쪽 화북지방에 다섯 민족이 번갈아 16개 나라를 세우는 오호십육국 시대(304~439)가 시작됐다.
흉노, 선비, 갈, 강, 저족 등은 장안과 낙양 주변에 저마다의 나라를 세우고, 천하를 잡기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16개 왕조 가운데 불교와 관련해 언급될 가치가 있는 나라가 흉노족인 석(石)씨의 후조(後趙. 328~352), 티베트족인 부씨의 전진(前秦. 351~394), 티베트족인 요(姚)씨의 후진(後秦. 384~417), 흉노족인 저거(沮渠)의 북량(北凉. 397~439) 등이다. 이들 중 장안(서안)에 도읍을 정하고 활동한 나라가 전진과 후진이다. 전진을 대표하는 왕이 372년(소수림왕 2)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준 부견(338~385), 후진을 대표하는 왕이 요흥(姚興). 전진 부견왕의 치세 시절 불교 부흥에 앞장선 스님이 도안스님(312~385)이며, 요흥왕이 흥하던 시기 불교를 진흥시킨 이가 구마라집 스님(344~413)이다. 부견과 요흥, 도안스님과 구마라집스님은 ‘중국 전통사상을 매개로 불교를 해석하는 종래의 불교연구’(=격의불교)를 반성, 비판하고, 경전을 직접 연구하는 방법을 수립하는 등 중국불교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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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구마라집스님 사리탑의 보호각. |
전진의 역사는 씨족 추장 부건(재위 351~355)이 장안을 공략, 도읍으로 정하고, 천왕대선우(天王大單于)라 칭하며, 국호를 대진(大秦)으로 부른 351년부터 시작된다. 불안정한 모든 권력이 그렇듯 전진도 지난한 권력투쟁 속에 막강한 후계자 부견이 등장했다. 그는 사촌 형 부생(재위 355~357)을 죽이고 최후의 승자가 됐는데, 그 때가 357년이었다.
어렵게 등극한 부견왕은 지역과 종족을 초월, 폭넓게 인재를 등용했다. 그의 최고 참모가 한족(漢族)출신인 왕맹(王猛)이라는 점에서 보이듯, 부견은 혈연과 지연을 뿌리치고 철저하게 능력 위주의 인사를 실시했다.
부견왕의 이런 인사는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귀족주의(강남)’와 ‘종족주의(화북)’가 위진남북조 시대를 가로지른 정치, 사회의 주요한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다섯 민족이 서진을 멸망시키고 저마다의 나라를 세운 뒷면엔, 자기들 종족이 왕도 되고, 귀족역할도 해보자는 욕심이 일정정도는 있었다. 그런데 부견왕은 이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종실 제왕의 작위부터 강등했다. 당연히 불만이 고조됐다. 일반 백성이 아닌, 힘 있는 호족과 관리들을 대상으로 한 철저한 법치(法治)를 통해 부견왕은 난관을 정면으로 돌파했다.
부견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대륙을 통일하기 위해선 한족도 포섭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 적극적인 한화(漢化)정책을 취했다. “오호십육국 시대 북방민족이 세운 왕조들이 단명했던 것은 극히 제한적인 면에서의 한화 때문”(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한제 교수)이었다. 한화정책은 한족의 정권 참여 폭을 넓히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지배종족(티베트족)이 한족에게 권력을 상당부분 양보해야 된다는 것과 통한다. 대부분의 나라가 이를 이해하지 못했고, 자기종족만 배불리며 살다가 결국은 짧은 시일 내 나라마저 망치고 말았다. 부견왕은 종족 중심의 정치가 위험하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았고, 적극적으로 한화정책을 실시했다.
‘격의불교’ 반성…경전을 직접 연구
영내 다른 민족에 대해서도 보편적이고 공평한 정책을 펼쳤다. ‘인의(仁義)와 은신(恩信)’은 이민족에 대한 부견왕의 기본 시책이었다. “백성은 쓰다듬어야 하고 다른 민족과는 화목해야 한다. 천하를 합하기위해선 갓난아이처럼 그들을 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란을 일으켜 잡혀온 이(異)민족 수장에게 오히려 벼슬을 주고, 반란에 가담했던 부락들을 잡혀온 수장에게 그대로 배속시켜 주었다.
인의와 은신을 바탕으로 실시됐던 그의 정책들은 전연(前燕)의 척속(戚屬)이자, 전연의 실력자인 모용평과의 알력으로 도망쳐온 ‘모용수 부자’를 받아들이게 했고, 전연의 마지막 황제 모용위를 장안에 연행한 후 신흥후에 봉하게끔 했다. 강족의 요장이 항복해오자, 양무장군에 임명해 우대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들은 전진의 정책 결정에 깊숙이 관여했고, 그들이 이끈 부대는 전진에 투항하기 직전 그들이 다스렸던 군대 그대로였다. 이런 정책들 덕분에 부견왕은 북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나라가 힘이 있을 때 그렇지, 약해졌을 땐 배신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은 정책이었다.
부견왕은 또한 불교를 무척 장려했다. 그의 불교 부흥에 힘입어 중현, 법희, 중천스님 등 카슈미르 출신 스님들이 장안에 도착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설일체유부의 경전들을 번역하고 중국인 스님들을 역경승으로 훈련시켰다. 당시 가장 중요한 중국인 스님은 축불념스님으로, 역경분야에서 훌륭한 공헌을 했다. 이렇게 훈련된 중국 스님들이 후일 장안에서 결성된 대규모 역경기구에 커다란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 ‘부견왕 시대’를 대표하는 스님은 누가 뭐래도 도안스님이다. 흔히 석(釋)도안으로 불리는 스님은 하북성에서 출생, 초기 중국불교의 기초를 닦은 대표적 학승이다. 12세에 출가해 서역에서 온 불도징(佛圖澄)스님에게 사사하고, 스승의 사후엔 문하생을 지도했다. 전란을 피하여 하북, 산서, 하남 등 각 지방을 유랑했다. 혜원(慧遠)스님을 비롯한 40명의 문하생과 양양에 단계사를 짓고 교단을 조직했으며, 왕과 귀족들로부터 신임과 존경을 받았다. 379년 부견왕의 요청을 받고 장안(長安)으로 가 왕의 고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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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구마라집스님이 머물며 경전들을 한역했던 초당사의 대웅보전. |
장안에 도착한 도안스님은 쿠차에 있던 구마라집 스님을 초청할 것을 부견왕에게 건의하는 한편, 인도와 서역에서 온 역경승(譯經僧)들의 경전 번역을 도왔다. 당시에 유행하던 격의불교(格義佛敎)의 결함에 착안, 이역경(異譯經)과의 비교연구를 통해 진의(眞義)에 접근하고 노력했다. 이 결과 최초의 경전목록인〈종리중경목록〉이 출간됐다. 나아가 스님들의 의식이나 행규를 정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스님은 자주적 중국불교 교단을 창설하고 많은 고승을 육성했으며, 중국 전통사상을 매개로 불교를 해석하는 종래의 불교연구를 반성, 비판하고, 경전을 직접 연구하는 방법을 수립하는 등 중국불교 발전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한편 불교를 진흥시킨 부견왕은 동진(東晋)을 정복해 전 중국을 통일시키려 했다. 여러 사람이 “때가 이르다”고 말렸다. 심지어 부견왕이 신임하던 도안스님도 반대했다. 그런데도 383년 8월 부견왕은 90만 대군을 이끌고 비수 가의 수양성으로 돌진, 동진의 85,000 군사와 마주쳤다. 결과는 전진의 큰 패배였다. 도망치던 부견왕은 회수(淮水)에서 회한의 눈물을 뿌렸지만, 비수전쟁이 끝난 지 2년 뒤인 385년 8월 그동안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었던 ‘선비족 모용수’와 ‘강족 요장’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자신은 살해되고 말았다. ‘인의와 은신’이 ‘배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도안, 구마라집...한국불교에도 큰 영향
385년 요장은 수도를 그대로 장안에 두고 후진을 세웠다. 요장의 뒤를 이은 요흥왕은 전진을 멸하고, 서진(西秦), 후량(後凉), 남량(南凉), 북량, 서량 등을 모두 평정, 화북(華北)지방의 태반을 장악할 정도가 됐다. 부견왕 당시 시작된 불교활동도 계속 지원했다.〈중국불교〉(케네스첸 지음)에 의하면 “393년에서 415년까지 계속된 요흥왕의 재위동안 불교는 중국 역사상 같은 예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제왕의 후원과 총애를 누렸다.” 요흥왕은 자신의 시주로 3000명의 스님을 먹여 살릴 만큼 열렬히 불법(佛法)을 후원했고, 출가자들의 궁중 출입은 자유로이 이뤄졌다. 그 시절 ‘장안불교’를 대표하는 스님이 바로 쿠차 출신의 구마라집 스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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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중국불교 진흥의 요람이었던 서안 시내를 걷고 있는 시민들. |
401년 장안에 도착한 스님은 서명각과 소요원(서안의 초당사가 그곳이다)에 머물며 1000여 명의 스님들과 함께 역경에 종사했다.〈대품반야경〉〈묘법연화경〉〈아미타경〉〈중론〉〈금강경〉등 경율 74부 380여 권을 역출했다. 특히 삼론(三論), 중관불교 발전에 많은 힘을 기울였는데, 구마라집 스님을 중국, 한국, 일본 삼론종의 조사로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3,000명의 제자 가운데 도생, 승조, 도융, 승예를 ‘구마라집 문하의 4철(四哲)’로 부른다. 이처럼 불교 후원에 힘을 아끼지 않던 요흥의 후진은 흉노, 하(夏)와의 싸움에서 패한 뒤 쇠퇴하기 시작, 동진의 장군 유유에게 낙양, 장안을 빼앗기더니 결국 멸망되고 말았다.
전진과 후진시대 불교를 대표하는 도안스님과 구마라집 스님이 한국불교에 끼친 영향은 실로 크다. “한국불교계가 보는 대부분의 한역 경전은 당시 두 스님이 역경한 것들이며, 우리나라에 유통되는 경전 체제도 도안스님이 잡은 서분, 정종분, 유통분 형태인 점에서 이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출가자 성을 모두 석(釋)씨로 하자”는 것도 도안스님이 제창, 정착시킨 제도며, 오늘날 조계종도들이 가장 많이 보는〈금강경〉은 구마라집 스님이 옮긴 것이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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