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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여행기 2편
2015년7월2일
언제나 다름없이 떠나는 여행
그러나 설레이는 마음은 두배이다.
항상 내 눈가에 또 내 꿈속에 맴 도는 곳
바로 이탈리아로 떠난다.
새벽에 일어나 어제 꾸려놓은 여간행장(旅間行裝)을 챙긴다.
빠진 것은 없는지 전날 밤에 안사람과 둘이서 하나하나를 다시 챙기며
행장을 꾸렸지만 마음이 들떠 제대로 넣었는지 물건목록을 살핀다.
아내는 집밖으로 나서면 모든 것은 나에게 맡긴다.
모든 수속에서 짐 보따리를 풀고 다시 꾸리는 일까지 거의 내차지가 된다.
일명 머슴이나 다름 없다.
다만, 돈과 여권, boarding pass 아주 중요한 것만을 챙겨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내가 먼저 이 세상을 가겠지만 약한 마눌이 앞으로 얼마간이 되었건 건강해서 계속 같이 다녀주길 기도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오래 벼르고 별렸던 이탈리아로 향한다.
이번여행을 계획하면서 많은 고민에 빠졌었는데,
2002년에 여행하였던 로마와 남부 나폴리, 폼페이, 쏘렌토, 그앞의 조그마한 섬 카프리
를 생각할 때 시간이 너무 모자란다는 생각이 든다.
로마 상징물 콜로세움
바티칸의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정화
피렌체에서 천재들이 꽃피운 새로운 문명 르네상스
피사, 오르비에또, 씨에나, 아씨시의 오랜 도시의 풍치
친궤테레의 낙조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과 수많은 사연
영화제 몬테카티니
파르마
아! 무엇으로 그 모든 것들과 마주해야 하는가.
아무리 내가 많은 것들을 알고 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말 그대로 겉을 할고 가는 것이리라!
그렇게 수많은 세월과 문명이 앞선 그것들을 내 좁은 머리로 감당이 되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가는 여정으로는 절대 불가능 할 텐데 떠나기 전부터 걱정이 앞선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내 지인들로부터 충고를 받은 적이 있다.
국내도 좋은데 왜 돈도 많이 들고 모든 것이 낮설은 곳을 여행하느냐고,
그런데 여기서 하나 돈이 많이 드는것이야 열심히 벌어서 여축을 하면 되는데 ,
시간은 저축할 수가 없다.
나는 친구들과 가끔 여행을 가자고 제안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런데 각자가 서로 가정사나 사회적으로 시간내기가 그리 쉽지는 않아 거의 무산되어 와잎과같이 부부여행으로 그치곤 하는데,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편하고 쉬운 여행길이기도 하다.
인생은 어차피 외로움과 고독인 것을 굳이 끌어다 붙이며 다닐 이유가 없다.
동행하는 친구들이 아무리 편한 벌거숭이 친구라 할지라도 그의 부인의 취향이나 살아온 과정도 모르고,
여행기간이 열흘을 넘는 동안 서로의 눈치를 보며 즐거운 여행에 부담을 느낄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앞선다.
또한, 죽을래야 죽을 시간도 없다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시간을 빌어줄 수 있는가?
그래서 우리부부는 그냥 우리들만의 세상으로 떠난다.
국내여행은 건강이 쇠하여 시차극복이 어렵거나 항공이동시간이 열 시간을 못 견딜 때 시간 틈틈이 하자고 둘만의 약속하면서 말이다.
[여행은 뭐니 뭐니해도 역시나 먹는것과 좋은 잠자리의 호텔이 아닐까한다. 우리나라 사람들 뿐만아니라 외국인들까지 기내식으로 가장 선호한다는 비빔밥 그리고 와인]
인천을 떠나 12시간이 조금 더 걸린 지리한 비행시간이 지난다.
그렇게 비행시간을 재고 있을 때 이윽고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약30분 뒤 목적지인 로마에 도착한다고 하며, 날씨는 쾌청하고 현재 기온은 영상40도라고 한다.
기내 창을 통해 밖을 보니 이탈리아 반도의 동쪽, 그러니까 작년에 왔었던 아드리아해 크로아티아 드부로브닉 건너편에 해당되는 해안가로 진입한다.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하다.
내륙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이탈리아 반도를 가로지르며 등뼈를 이루는 활 모양의 아펜니노 산맥(Appennino)을 지난다.
내려다보이는 산세가 꾀나 웅장하다.
북쪽에서 남으로 길게 뻗은 것이 꼭 우리나라의 태백산맥과 비슷하다.
산맥을 지나자 로마를 품은 라치오 주의 평야를 향해 하강하면서 농업의 강국다운 잘 정리된 농장들을 지나 피우미치노(일명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공항으로 접근한다.
[ You- Tube에서" Cockpit View- Boeing 767 Landing at Rome Fiumicino Airport"캡처]
[창밖으로 로마 피우미치노 일명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항이 보인다.]
로마!
세계의 수도라 수많은 사람들이 칭송하였고,
세계문화유산이 제일 많은 곳이며,
모든 문명이 이곳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기에 모든 길은 이곳으로 통한다고 한다.
여기는 가는 곳, 발을 딛은 곳, 이 모두가 유적이다 보니 거대한 박물관이나 다름없다.
이곳 도심은 거의 예전과 같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모든 건축물이 유적이다 보니 당국에서 외관은 물론 색채와 석재 한톨 이라도 회손하는 것을 철저히 감시 관리하기에 내부는 적정한 심의를 거처서 이용을 편하게 수리하더라도 외부의 생김새는 전혀 건들면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몇십년이 지나거나 수백년이 흘러간다 하더라도 도시전체의 형태는 예전모습과 같을 것이다.
2002년 9월에 나는 이곳을 온 기억이 있다.
그해 9월에도 덥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기온이 40도란다.
공항은 예전에 비해 규모가 넓어져있었고,
아직도 공사중이다.
2002년 9월4일에 이곳을 통해 유럽을 들어왔었고,
런던을 거처 파리에서 국내로 귀국하였다.
당시 공항 앞에는 군용 장갑차량에 중무장을 한 군인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피부색이 검고 면도를 성실하게 하지 않은 듯한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물고 거침없이 침을 뱉앗던 그들이 생각난다.
로마 직항이 “땅콩항공”밖에 없던 시절,
2002년 여름,
월드컵의 한 달을 뜨겁게 달구며 우리국민 전체가 행복하였었다.
우리 국민의 열화와 같은 응원과 기도에 힘입었는지 모르겠으나,
하루 하루 드라마와 같은 승리를 일구어내며 승승장구 하던 끝에,
월드컵 4강이라는 믿지 못 할 쾌거를 이루어 내었다.
이런 큰 영광을 이뤄낸 젊은이들에게 다시 또 감사하며 같은 국민이라서 행복하였고 가슴벅차했었다,
이런 자부심을 듬뿍 가슴에 안고
가을의 첫 문을 열며 계획되었던 여행에 올랐다.
자랑스런 우리나라의 상징인 태극마크를 두른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간다는 그 기분은 상당했다고 지금도 느낀다.
그 당시 여행을 떠날 때 여행용 캐리어가 하드-캐이스가 거의 대부분이었는데,
겉 부분에 대한민국 태극문양이 새겨진 월드컵축구문양을 붙이고 다녔다.
이 이탈리아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가방을 밀고 다녔으니 16강에서 고배를 마셨던 이들의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겠지 않겠는가.
이들의 축구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다.
축구라고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시초가 영국이라고 하며,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거의 옭다고 보면 된다고 하는데,
1860년대 영국에서 시작된 축구가 영국과 이탈리아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가까워 지게 됨에 따라 영국의 노동자들이 대거 이탈리아로 들어오게 된다.
이때 그들은 힘든 노동과 깊은 향수에 대한 위안점을 찾게 되는데, 자연적 축구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되었고 동네축구를 뛰어 넘는 클럽축구가 태동되게 된다. 1893년에는 이탈리아 클럽축구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제노아에서 부터 클럽팀이 탄생되었고, 이어서 토리노 밀라노등이탈리아전역으로 퍼져 클럽축구가 꽃피우게 된다.
지금은 승부조작사건으로 위축되긴 했지만 1898년부터 시작된 이탈리아 축구리그는 1929년부터 세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리그인 Italia Serie A로 출범되어 오늘에 까지 이어진다.
물론 처음축구가 이탈리아대륙에 도입 되는 계기는 위에서 설명하였지만 영국의 이민 노동자들에 의해서 도입이 되어 발전 되었다고는 하나 이탈리아의 국민성과 잘 대조를 이루는 스포츠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런데 사학자들의 주장은 축구의 종주국은 영국이 아니라고 한다.
“축구”라고 하는 경기는 로마 제국이 영토를 확장하여 영국을 지배 할 당시 루도스 하르파스룸(Ludos Harpastum)이라고하는 경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이 경기방식은 “Ludos”는 경기, “Harpastum”는 폭력의 뜻과 같이 군대축구인 셈인대 손과 발을 다 쓰고 태클을 심하게 하는 미식축구와 같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기 방식이 로마가 영국통치시기 후 변하여 하나는 럭비 및 미식축구, 또 하나는 현대식 축구로 변하였다고 하니 그 원조를 영국이라고 해야 할지 이탈리아라고 해야 할지 그것이 의심스럽지만,
아무튼 그런 축구 종주국 이탈리아가 동방의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소국에 패했으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하는 상상을 하면 “픽” 웃음이 나온다.
2002년 당시 로마군단의 사령관격인 주장 "프란체스코 토띠"가 경기를 하루 앞둔 시점에서 기자회견을 하였는데, 여기서 눈 하나 깜작거리지 않고 “언제든지 내가 마음먹으면 골을 넣을 수 있다”고 느끼한 자세로 앉아 기자들을 처다 보며 장담을 한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었겠다.
그리고 이탈리아 국민들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 그 충격과 좌절감은 이루 말로 표현을 못할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 경기가 이탈리아가 연장전 끝에 패한지 한달여가 지나 그런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 나라에 그들을 비웃듯이 태극문양을 흔들고 다녔으니 얼마나 보기 싫었을까.
로마에서 폼페이를 거쳐 기차를 타고 쏘렌토항에서 카프리로 섬여행을 떠났을 때 이야기 이다.
카프리에서 쾌속여객선으로 나폴리 항으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는데,
나폴리항에 도착해서 다시 로마로 귀환하고자 항구 옆의 주차장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일행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잠작 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한10~13세정도되는 남자아이들 서너명이 우리의 뒤를 따라오면서 손가락으로 엑스(X)자를 연방 하면서 외쳐댄다.
꼬리아노 카쪼! 카초!
카초(cazzo) 이말은 그대로 직역하면 남자의 성기를 비유하기도 하고 비유적으로 멍청이 얼뜨기라고 할수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지만 그것을 이해하는데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2002년 월드컵축구 대한민국 대 이탈리아전에서 이탈리아 응원단 - 이들은 후반 43분까지 이탈리아가 승리하는것으로 알고 환호 했으나 결국 30분도 채 넘기지 못하고 설기현의 동점골과 안정환의 역전골로 대한민국에 패하며 승리의 환호가 눈물이 범벅이된 슬품의 아우성으로 변해야 했다.]
로마!
이글거리는 아스팔트의 폭염 속으로 로마의 여름은 찾아왔나보다.
대지가 불에 타는 것처럼 뜨겁다.
땀에 베인 옷자락을 추스르며 연신 부채를 부치던 팔이 곤하다.
작열하는 태양볕의 무서움에 피해 들어간 간이 레스토랑의 커피 내음이 신선하다.
방금 구매한 시원한 생수 유리잔에 물방울이 맺히고,
햇살이 부서지는 밖의 온도와 그늘진 실내의 온도차이가 많아서인지 얼마되지 않아 땀 베인 어깨가 보송하다.
살인적인 더위를 잠시 잊어보려고 시원하다 못해 이 시린 커피를 한 모금을 구하려 애써보았지만 이탈리아에는 우리나라처럼 별다방(스타벅스), 콩다방(카페베네)에서와 같은 시원한 아이스 라떼는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단다.
이곳사람들은 뜨거운 증기로 찐하게 막 짜내어진 “에스프레소”로 아침을 시작한다.
이 에스프레소 한잔마시고 우리네가 조반을 들고나서 숭늉으로 입을 행구듯이 이들은 맹물 한컵으로 입을 행구는 것이 아침식사라고 한다. 거기에 빵한 조각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예전에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여행했을 때 마시던 생각이나서 에스프레소 한잔과 생수한병을 주문해서 마셔보았더니 무척 쓰고 신맛이 혀를 강타한다.
“혁” 하고 더위에 나간 정신 줄이 돌아오는 느낌이다.
[로마의 더위를 이길수 없어 평소 입에 대지도 않는 아이스 크림을 다 먹는다.]
[ 폭염의 로마!- 그늘진 유적지의 대리석 돌계단은 시원한 여행객의 쉼터가 된다.]
[예전에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여행했을 때 마시던 생각이나서 에스프레소 한잔과 생수한병을 주문해서 마셔보았더니 무척 쓰고 신맛이 혀를 강타한다. “혁” 하고 더위에 나간 정신 줄이 돌아오는 느낌이다. ]
공항에서 우리를 픽업한 버스가 로마를 끼고 돌아 우리들의 숙소가있는 피우치로 행한다.
로마도심에서 약 한시간 반정도 걸린다고 한다.
차창밖으로 이탈리아만의 풍경이 들어온다.
소나무는 소나무인데, 버섯처럼 윗부분이 올라간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고 그 아래로 좁은 옛도로가 중간 중간 나타난다.
이것이 수 십세기 전 로마제국으로 통하던 바로 그 도로이라고 한다.
문명의 보고 로마제국!
그 위대한 로마가 멸망을 하였고 다시 분열을 거처 통일이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그들이 쌓아올린 문명의 탑은 외세와 그 본인후손들의 잘 못된 판단으로 파괴되고 짓밟혔다.
權不十年 이요 花無十日紅 이라는 옛 속담이 머릿속을 스친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있다 보니 목적지인 피우치 시내에 자리한 숙소에 도착했다.
피우치!
이탈리아 내륙에 위치하여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스하다.
고즈녁한 지방도시로 예전에는 온천이 유명하여 로마황제들의 목욕탕이었고,
미켈란젤로등도 이곳에서 온천을 즐겼다하니 우리나라 온양온천과 다를 바가 없다.
이곳으로 들어올 때 차창밖으로 조그마한 와인까페와 공연이 한창인 넓은 광장이 눈에 들어온다.
시간이 나면 한번 들러봐야겠다고 내심 생각하였으나
피곤한 심신은 내 자유로운 영혼을 따라주지 못한다.
[로마에서 약 한시간 떨어진 지방도시 피우치 거리의 모습]
[로마에서 약 한시간 떨어진 지방도시 피우치 거리의 모습]
전기불이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며 저녁식사를 마친다.
이곳 이탈리아는 전기사정이 안 좋다고 해서 그렇다고 하는데,
이탈리아는 발전소가 있기는 한데 바이오에너지에 의한 전력생산이 다 이다 보니 전력이 필요할 때는 거의 외국에서 전기를 수입하여 소비한다고 하니 전기요금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세계의 관광객이 몰리는 로마!
이 도시의 전철에는 아예 에어컨이 없고,
웬만한 레스토랑 조차 음식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
에어컨의 설정온도가 높아 실내는 에어컨이 있으나 마나한 형편 이었으며,
큰 건축물과 지형,지물이 해를 가리는 그늘진 길거리나 골목의 노천식당과 카페는 지열로 지글지글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도 관광객들과 서민들이 드나들어 여전히 성업중이다.
폭염에 푹푹찌는 기차역과 터미널,
그래도 이들은 원자력발전을 안 한다고 한다.
좀 불편하더라도 조금 춥고 덥더라도 아직 안전이 담보되지 않은 수단은 사용하지 않겠단다.
다행스런 것은 이 나라 전기사정이야 어떻든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지만,
내가 묶는 방은 에어컨이 잘나온다는 것에 크게 감사하며 만족한다.
소박한 싱글침대 두 개 놓여 진 방바닥은 붉은 타일로 되어 있고 카펫은 없는 것이 신기하다.
아주 오래되어 못 밖음질한 화장대와 찌그러진 나무의자, 아주 오래된 나무옷장!
침대위의 이불은 평소 해외여행 시 이용한 호텔수준에는 너무도 많이 떨어지는 수준이다.
그 침대의 침구를 사용하기가 영 찝찝하여,
가방을 뒤져 여행할 때마다 가지고 다니는 국내 항공사 기내용 모포로 대체하였다.
삐그덕대지만 여행가방용 지지대에 행장을 풀어헤치고 피곤한 몸을 던진다.
호텔의 복도는 정전의 반복으로 항의하는 목소리와 프런트 스탭들의 분주한 움직임으로 밤새 소란해야 했다.
아무리 피곤하다고는 하나 시차가 틀려 잠든지 두 어시간만에 잠을 깨었다.
옆 사람 수면을 방해할까 내심 어려워 몸을 뒤척이기도 조심스럽다.
하늘이 맑아서 인지 창밖으로 별빛이 녹아 침대 끝으로 들어온다.
그렇게 자세가 한참 되어 몸이 피려울 정도가 되었는데,
아내의 손이 가만히 내손을 잡는다.
아내도 한참 전에 잠에서 깨었지만 내 수면을 방해치 않으려고 그렇게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이탈리아의 밤은 깊어갔다.
[로마에서 약 한시간 떨어진 지방도시 피우치에 위치한 우리의 숙소 "ALFIERI" 호텔의 모습- 엘리베이터는 2인용으로 짐올리기도 바쁘고, 커피포트나 쿡커등 전원을 올리면 전체 호텔이 전기가 먹통이 된다. 어떤방은 에어콘이 안되서 항의하는 사람들과 스텝들의 분주한 발걸음으로 밤잠을 설치기가 일수였다. 이호텔에 3박을 했다.]
담날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풀어진 짐 보따리를 다시 챙겨 피렌체로 떠날 준비로 아침이 바쁘다.
아!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그 곳으로 간다고 하니 심장이 마구 뛴다.
꽃의 도시 피렌체 영어로는 플로렌스
이곳은 젊은이들에게는 일본영화 열정과 냉정사이로 알려져 있어 유명하다.
젊은이들의 연애사를 다룬 이 영화로 인해서 남자보다는 여성들이 아주 많이 찾는다고 하는데,
와서 둘러보니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이곳은 로마제국시절부터 중세를 거처 근대에 이르기 까지 모든 굴곡진 역사의 현장에서 주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모든 사람들 머리와 심장 속에 어떻게 각인 되었을지는 몰라도 또한 그 역사가 그들에게 이롭게 작용하였던 아니면 슬픈 역사로 남았을지 모르지만,
이곳은 나에게 무언가를 시작하게 한 곳이다.
인문학을 경시한 공학도인 나에게 생소한 인문학에 뛰어들게 하고 내 심장을 마구 뜨겁게 달구개한 시발점이 된 곳이라 할 수 있다.
내가 피렌체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피렌체의 천재들과 그들을 후원한 메디치 가문이 있었기 때문에 르네상스가 촉발되었고, 그 경외심에 끌리어 나도 모르게 열열한 팬이 되었기 때문이다.
신곡의 단테 알리기에리,
그의 영원한 여인 베아뜨리체,
우리에게 깊은 사상을 남긴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조토 (Giotto di Bondone)
눈을 뜨고 태어 난,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
싸가지 없는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고 감탄하였던 그 문을 만든 “로렌초 기베르띠”
천국의 문 경합에서 기베르띠에게 떨어졌지만 “산타마리아 델라 두모오”의 돔을 올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산 조반니 세레당의 동쪽문 이문을 천국의 문이라고 한다. - 이 문이 우리나라에 교황 방문시 같이 와서 2014.08.15부터 약 6개월간 고궁박물관에 전시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정작 보지 못하고 여기에서 진품이 아닌 복제품을 보고간다.]
[산 조반니 세레당의 모습- 벽면 대리석의 복원공사가 한참 진행중으로성당 전체를 둘레 쌓아놓았는데, 천국의문은 개방해 놓았다.}
천국의문
1401년 피렌체에서는 이 세례당에 구약성서의 내용을 주제로 하는 '천국의문'(Gates of Paradise)을 제작할 조각가를 선정하기 위한 공모전을 시행한다.
쓰이던 문이 없어서가 아니라
1322년에 세레당의 오래된 나무의 동쪽문을 피렌체의 양모와 옷감 상인들의 조합인 "아르테 데이 메르칸티 디 칼리말라(Arte dei Mercanti di Calimala)"에서 의뢰하여 청동문으로 제작하는데,
안드레아 피사노가 디자인하고 레오나르도 다반초(베네치아 청동 세공업자)가 제작에 참여해 1330년~1336년에 걸처 완성했다.
그 이후1401년 칼리말라 길드는 피사노의 '동쪽 문'을 대체하기 위한 공모전을 열었다.
'이삭의 희생'이 공모작이었고 경쟁에 참여한 일곱 명의 세공인들은 네 개의 문짝을 시험적으로 제작했다. 그리고 일 년의 노력 끝에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와 “로렌초 기베르띠” 두 사람만이 세례당의 청동문을 제작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 받는다.
그런데 브루넬레스키는 로렌초 기베르띠와 청동문을 제작하라는 제작자와의 계약을 포기한다. 그 결과 이문은 결국 기베르띠 단독으로 제작에 참여하게 되고, 이후에 오늘날의 '북쪽 문'으로 옮겨진 그의 작품은 1403년에서 1424년까지 제작되었다. 기베르티의 작품은 원근법의 사용과 역동적인 인물 조각을 통해 르네상스 양식으로 옮겨가는 전환기를 나타내고 있고, 학자들은 이때를 르네상스의 기원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동쪽 문' 역시 기베르티에 의해 1425년에서 1452년까지 만들어졌다. 기베르티는 여생 대부분을 새로운 동쪽 문을 완성하는 데에 보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문은 원래부터 “천국의 문”이 아니고 유명한 “미켈란젤로”가 ‘너무 아름다워 천국 입구에 그저 서 있고 싶다.’ 라고 표현한 것이 지금까지 회자되어 그렇게 불리우고 있다.
이 문은 너비 4.6m, 높이 약 6m 정도의 쌍여닫이문으로, 두 개의 대문을 각각 5구획으로 나눠 10구획 속에 아담과 이브ㆍ다윗과 골리앗ㆍ십계를 받는 모세의 모습 등 구약성서 이야기를 청동에 금도금해 부조로 만들었다.
[ 산 조반니 세레당 천국의문 건너편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정문인 서쪽문]
이 공모전에서 쓴맛을 본 "부르넬레스키"- 그는 이후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을 완성한 건축가로 큰 명성을 얻게 되는데,
나중에도 설명하겠지만 조르조 바사리(Giorgis Vasari)는 우피치 미술관과 메디치가에서 의뢰한 팔라초 베키오에 프레스코 벽화를 그린 화가이면서 건축물을 지은 건축가로 널리 알려졌으나 르네상스기의 주요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의 삶을 다룬 『미술가 열전』을 펴내어 더욱 유명해졌다.
그에 의하면 이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을 1296년부터 건축하기 시작했는데, 건축 책임자 “아르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가 원형 지붕(dome)을 완성하기 전에 죽었고(1302년), 그 후 1세기 동안 돔을 완성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봤지만, 유명하다는 건축가는 물론 누구도 성공하지 못 했다.”고 전한다.
부연 설명하자면 공사는 오랫동안 중단되다가 마침내 1334년에 “지오토 디 본도네”에 의해 다시 시작된다.
그는 최초의 설계자 캄비오의 설계안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1348년, 피렌체에 흑사병이 창궐해 공사는 다시 중지된다.
그리고 이듬해, 공사가 재개되었는데. 프란체스코 탈렌티와 지오반니 디 라포 기니, 넬리 디 피오라반티 등의 건축가들이 대를 이어 공사에 참가했고, 대성당은 초창기에 캄비오가 설계한 것보다 훨씬 크고 장대한 건축물이 되었다. 하지만 42m 직경의 팔각형 돔만큼은 도무지 만들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후 1407년 피렌체의 건축가들이 모두 모여 돔을 완성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는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란 젊은 건축가가 자신이 그 지붕을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설계도면과 같이 만들어 보겠다고 장담하고 나선다.
그런데, 이 돔을 건축하려다 무수히 실패하였던 유수한 건축가들은 이 무명의 젊은이 말을 믿으려하지 않았다.
브루넬레스키는 고대 로마의 판테온의 거대한 돔에서 아이디어를 얻게 되는데, 판테온의 지붕처럼 보나 기둥이 없이 공중에 떠있는 원형 지붕 건축기술을 도입하여 전통과 새로운 구성미를 나타내고자 연구를 거듭하였다.
그가 판테온의 돔을 연구하게 된 사연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청동의 문” 경합에서 기베르띠에게 수석을 놓치고 절망한 나머지 친구 도나텔로와 함께 로마로 떠나게 되는데, 이때 이 경합에서 어떤 기록에서는 패배했다고 하고, 다른 기록에서는 공동 일위를 했으나 공동은 싫다고 하여 스스로 손을 뗐다는 기록도 있다는데, 아무튼 그는 피렌체를 떠나 로마에서 판테온을 보고 감탄한 나머지 이 건축물의 건축기술 연구에 심취하게 되는데, 수학적 비례에 의해서 어떻게 하면 돔을 제대로 올릴 수 있나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된다.
아마도 그 결과 돔을 건축할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로마 판테온의 외관]
[필리포 부르넬레스키가 이 판테온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아 연구에 심취한 끝에 피렌체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을 만들었다. 그는 다른사람들이 해내지 못한 난제를 완벽하게 해냄으로 천재성을 인정 받았다]
그리고 어떤 서적을 보면 부르넬레스키가 피렌체를 떠나 로마에 도착했을 때 이미 판테온은 무너져 내리고 흙속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내용이 전해진다는 것은 알 수가 없지만 바사리가 전한 내용의 신빙성에 의문이 가는 건 사실이다.
어떻든 브루넬레스키는 이 돔을 완성할 수 있는 설계도와 모형까지 제작해 놓고 이 집회에 참가하여 자신이 이성당의 미완성 돔을 완성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드러내며 주장하였지만, 이것을 모르는 다른 건축가들은 브루넬레스키에게 이돔의 축조를 맡기는 것에 철저히 반대하고 나선다. 이때 부르넬레스키는 자기가 연구하여 개발한 건축방법을 다른 건축가들이 도용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철저하게 비밀로 감추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이런 사실을 몰랐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1419년,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설계할 건축가를 찾기 위해 공모전이 열린다. 무수한 사람들이 건축안을 내놓았지만 거의가 불가능한 안 이었다.
이때 브루넬레스키는 엉뚱한 제안을 하게 된다.
“공모에 참가한 응모자 전원에게 평평하고 미끄러운 대리석 위에 달걀을 세울 수 있는 사람에게 돔 건축을 맡기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는데,
이 제안을 받은 건축주들은 그 말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게 되고,
다른 참가자들은 달걀을 세우지 못 했으나, 브루넬레스키는 달걀을 집어 들더니 한쪽 끝을 부스고 달걀을 세워 보였다. 이를 본 다른 건축가들은 소리 높여 “그렇게라면 나도 할 수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비아냥거렸다.
이 때 브루넬레스키는 큰소리 대중을 향햐 말한다. “내가 돔을 만드는 방법을 당신들에게 미리 알려준다면 당신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점은 어려운 일이라도 생각을 달리하면 쉽게 풀 수 있다는데 있다는 것이다. 달걀의 밑을 깨서 새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실지로 그렇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데 있다는 것이다.
결국 쟁쟁한 건축가들을 따돌리고 돔의 건축 계약을 따냈다.
하지만 총감독, 일명 ‘카포-마에스토로’에는 청동의 문에서 자기를 눌렀던 숙적인 로렌초 기베르띠를 포함해 세 명의 다른 경쟁자들도 함께 임명 되었다.
이에 기분이 상한 부르넬레스키는 공사장에 나오더라도 세명의 감독들에게 자기가 구상했던 모든 것을 일체 공유하지 않고 홀로 완벽하게 완성함으로 다른 세명을 감독으로 임명했던자들의 의문된 시선을 완전하게 벗어났음은 물론 한때 미치광이처럼 인식하였던 피렌체 시민들로부터 천재성을 인정받았고 한다.
그리고 또다른 야사가 전하는 바 한가지 소개하면
1420년 브루넬레스키는 기베르티와의 공동 작업이 못마땅한 차에 자신의 의견에 반대를 일삼는 기베르티 때문에 몸이 아프다는 것을 핑계로 돔 공사에서 차일 피일 미루며 애정이 식은듯 행동을 하였다.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띠는 본래 금속세공인이었다.
브루넬레스키는 금속세공인이었지만 로마에서 수학하며 연구에 몰두한 결과 건축가로서 지식을 넓혔지만 ,기베르띠는 그에 비해 문외한이라서 공사를 진척시킨다는것은 불가능하였다.
물론 공사를 책임지는 감독들이 공사를 다하는것이 아니라 그 밑의 각 기술자 집단들에 의해 건축물이 완성되기는 하지만 이런 대규모 공사는 일사 불란한 오더와 실행이 필요한데, 기베르티가 공사를 책임지게 되자 여러가지 문제가 잇따라 발생되었고,
결국 이 교회의 건축을 의뢰한 양모 상인 길드 아르테 델라 라나(Arte della Rana)가 공사를 단독으로 책임지고 진행시키라는 요청을 하게되고, 1423년 브루넬레스키는 돌아와 단독으로 그 건축물을 완성 사켰다고 전한다.
그리고 철저햐게 비밀로 감추었던 1420년 제작된 목조 모형은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현재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Museo dell'Opera del Duomo)"에 전시되어 있으며,
그 모형이 섬세하게 잘 제작된지라 지금의 두오모 돔의 각 개별 부위와 완전히 일치한다고 한다. 돔 위의 제등은 1471년 베로키오에 의해 완공되었다고 전한다.
[청동의문 제작 응모작인 "이삭의 희생" 피렌체 바르젤로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왼쪽이 부르넬레스키, 오른쪽이 기베르띠의 작품이다, 내가 보기애는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여기서 기베르띠와 부르넬레스키의 운명은 갈렸다. 하지만 1418년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돔 설계를 놓고 또다시 경쟁을 벌여 결국 인정 받은것은 부르넬레스키였다.]
[천국의 문 앞에서 일본 가이드가 관광객을 상대로 해설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사람은 가이드가 해설을 하든 말든 듣지도 않고 사진찍기 바쁘고, 또 다른 무엇을 찾아다니기 바쁜데, 그들은 차분하게 해설울 경청하고 있는 모습에서 우리와 극명하게 틀리다.]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붉은색 지붕의 돔]
[자기가 건설한 돔을 처다보는 부르넬레스키의 모습-성당 정문에서 오른쪽에 위치하는 조각상 ]
피렌체의 천재들을 다시 열거하자면
그림 원근법의 천제 이론가 알베르티
르네상스를 여는 인문주의 초기 대표화가 원근법의 대가 마사초 (Masaccio),
역사가이며 행정가 브루니 (Leonardo Bruni),
1433년 코시모 데 메디치가 역신의 누명을 쓰고 베네치아로 망명할 때 같이 따라간
미켈로초 (Michelozzo)와 도나텔로 (Donatello)
안젤리코 (Fra Angelico),
우첼로 (Paolo Uccello),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Piero della Francesca),
“동방박사들의 행렬” 그림에 자기를 그려 넣은 베노초 고촐리(Benozzo Gozzoli),
싸가지 없는 미켈란젤로의 스승 기를란다요,
(미켈란젤로는 한때 스승이었던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에게서 베운 것이 없다며 스승을 펌하 하였기에 싸가지가 없다는 평을 듣는다.)
기를란다요는 “안드레아 델 카 스타뇨”, “고졸리”, “프라 필리포 리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싸가지 없는 미켈란젤로 또한 그들의 영향을 안 받았다고 할 수 는 없으나, 그는 원래 천재였음을 알 수 있다.
(기를란다요는 위대한자 로렌초의 어머니인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와 아내가 죽은 후 두 번째 여인 조반나 델리 알비치(Giovanna degli Albizi)의 초상화를 그렸다.)
또 하나의 불행한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
교황의 총애를 받았던 라파엘로
비너스의 탄생을 그린 보티첼리(그의 스승은 “프라 필리포 리피” 프라 필리포 리피의 스승은 마사초)
“짜슥들아! 그래도 지구는 돈다.”의 갈릴레오
아메리고 베스푸치 (아메리카대륙의 초기 탐험자 이로 인해 아메리카라고 명명)와 무수한 천재들,
그리고 이들을 후원하여 르네상스의 큰 엔진에 시동을 켠,
가진 것이 많아도 모든 사람에게 항상 고개 숙여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를 실천한 가문.
암흑의 유럽을 밝은 세상으로 인도하였던 그 가문 “메디치 가(家)”가 있기에 기능했다.
이 가문은 1400년부터 1743년까지 약 350년을 이어온다.
이 가문은 세 번에 걸처 목숨을 건 피렌체에서의 추방을 당했지만 다시 복귀하였고 결국 마지막 절손되어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Anna Maria Luisa de’ Medici, 1667-1743)”가 가문의 문을 닫을 때까지 이 피렌체를 지켜 나간다.
그로인해 그 유산들이 숨쉬어 백성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고 오늘날 현세문명을 보게 된다.
교황을 두명(레오10세, 클레멘스7세)이나 배출하고 프랑스왕비 또한 두명(카트린 데 메디치, 마리 데 메디치)을 배출한 가문,
이 기가 막힌 가문의 이야기로 이번여행을 오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이들 가문의 이야기를 이곳에 다 풀지는 못한다.
나의 짧은 지식과 어리석음을 알기에 다는 못 올린다고 해도 안타깝지만 그냥 느낀 바를 이야기하고 싶다.
아마도 “메디치 가문”과 그에 얽힌 비사를 소개한다면 수 십권의 책으로도 부족하다.
메디치 가문의 생일잔치에서 비롯된 오페라,
프랑스로 시집간 딸들에게서 퍼져나간 식사예절
(그 당시 유럽은 포크와 나이프로 식사를 하지 않고 손으로 집어 먹거나 칼로 베어 먹엇다고 한다.) 승마를 좋아하던 카테리나(카트린 데 메디치)로 인해서 전해진 여성용 바지,
키가 작은 이탈리아여성이 키 큰 프랑스 사람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 신었던 하이힐,
이들은 과연 천재를 뛰어넘는 가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메디치 가문을 반석위에 올려놓은 “코시모 데 메디치”는 인재를 등용하는데 인색하지 않았고 그들에게서 천재성을 발휘하도록 충분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런 인재등용과 인문학의 사랑은 대를 이어 계속되어 결국 르네상스라는 큰 걸작을 만들어 내었고, 이러한 신지식이 바탕이 되어 “종교개혁”과 훗날 “문명의 근대화”로 이어지는 단초가 된다.
이 글을 쓰면서 기회마다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 볼까 한다
다시 본글로 돌아가서
그렇게도 전기불이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면서 떠들어대던 호텔을 나선다.
아침이야 빵 몇 종류에 쓴 커피가 다 일지라도
나서는 마음이야 들뜬 기분이다.
로마 근교 피우치에서 로마로 통하는 1번 고속도로 “아피아가도”를 따라 올라간다.
이른 아침시간이라서 그렇게 막히지는 않으나 로마도심을 지날 때는 교통체증이 심하다.
로마를 벗어나면서 한가로운 라치오 주의 전원평야가 펼쳐진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대지 가득이 노란색의 해바라기가 끝도 없이 펼쳐져있다.
바닥에 노랑물감을 쏟아놓은 것 같아 반 고흐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라치오주를 지나는 고속도로에서 바라본 해바라기 농장- 반 고흐 그림처럼 노란색 물감을 풀어 놓은것같다.]
[피렌체로 가는도중 고속도로 휴게소- 여기의 에스프레소맛이 일품인데, 나중에 알고보니 휴게소란 휴게소 어디나 커피맛은 참 좋다.]
아침 일찍 떠난 버스가 거의 12시가 다 되어 피렌체에 도착하여 도심을 가르는 아르노강 옆“정의의 문(torre della zecca vecchia)” 앞에 정차를 한다.
“정의의 문”이란 말 그대로 정의를 상징하는 문이다.
정의를 상징한다는 것은 정의를 실천하는 뜻으로 죄수들을 처형하는 곳이라고 보면되는데, 이곳을 지나면 바로 처형장이 있다는 뜻이라 하겠다.
예전 전제주의 국가에서는 흔히 자기의 정치적이나 사적인 감정이 개입된 자기와 적을 진 사람들을 처형하곤 했는데, 매우 잔혹하고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끔직한 일들이 벌어지곤 하였다.
글 후반에 소개하겠지만 이들은 피렌체의 사람들은 보기드문 현자(賢者=어질고 총명하여 성인에 견줄 만큼 뛰어난 사람)였지만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매우 끔직하게 사람들을 살해하는 잔혹하고 냉정한자들 이기도 했다.
피렌체는 정부인사에 대한 암살 등이 끊임없이 저질러졌으며, 지배자의 통치력 상승을 위해 외국용병들을 고용하는 일이 많았다.
암살이나 독살을 저지른 사람들이 쿠테타나 혁명에 성공을 못하게되면 그야말로 상상하기도 어려운 형벌로 관련자들에게 응징을 하였으며 다시 재발방지를 위해 군중들이 모인 자리에서 최악의 끔직하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그들을 처형하였다.
차에서 내리자 테양볕이 작열하고
달구어진 뜨거운 대지열이 훅하고 온몸을 감쌓 안는다.
스마트폰을 꺼내어보니 섭씨39도를 가리킨다.
[피렌체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아르노 강 - 뒤에 보이는 나즈막한 언덕이 미켈란젤로 언덕이다. 그앞 성채처럼 보이는 곳 밑에는 신에 대한 감사"의 뜻에서 유래한 "폰테 알레 그라치에"(Ponte alle Grazie)다리가 언 듯 보인다.]
[피렌체를 가로지르는 아르노강변에 버스에서 하차하여 정의 의 문옆으로 말콘텐티(Via dei Malcontenti)” 일명 “불만을 품은자의 거리”로 들어선다.]
아르노강옆의 길가에 이르자 멀리 "신에 대한 감사"의 뜻에서 유래한 "폰테 알레 그라치에"(Ponte alle Grazie)다리가 언 듯 보인다.
이 다리 옆으로 조그마한 예배당이나 수사들이 살고있는 수도원들이 여러개가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몇분이 지나지도 안았는데,
관람이고 뭐고 간에 당장 이 타들어가는 더위로부터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앞선다.
점심시간이라서 먼저 식사를 하고 예정된 코스로 이동한다고 하는데,
정의의 문 맞은편으로 뚫린 “말콘텐티(Via dei Malcontenti)” 일명 “불만을 품은자의 거리”로 들어선다.
도착한 곳은 산타 크로체성당 오른쪽골목에 위치한 환타시아 레스토랑(Fantasia Ristoranta)이라는 식당으로 입구는 좁은데 들어가 보니 꾀나 넓고 천장이 높다.
이곳은 입구는 고급 레스토랑이나 뒤로 돌아 들어가 보니 여행객들을 단체로 받는 저급한 식당과 같은 곳이었다.
사람들이 약 3백여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거의가 한국인과 중국인 그리고 동유럽과 러시아 사람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더위를 참아가며 식사를 한다.
메뉴는 이곳의 전통음식 스파게티
식사도 하기 전에 땀을 식히는 부채질로 지쳐간다.
종업원들이 스파게티가 가득 담긴 큰 대형접시에 담아 와서 테이블에 있는 개인접시에 덜어준다.
인심이 좋아서 그런지 접시가 넘칠 것 같다.
국수가락은 인심이 좋은데 소스는 거의 없다 시피하다.
그냥 국수 가락만 댕~그러니 있는 것 같다.
내가 입맛을 잃었을 때 집에서 가끔 와이프가 해주는 토마토소스가 듬뚝 들어가고 홍합, 조갯살, 새우, 동그란 물오징어가 들어가 텡글한 해산물과 따끈한 토마토의 소스로 흠뻑 비벼진 국수가락,
그리고 우유와 생 치즈를 적당히 끓이다가 통마늘과 국수가락을 넣어 만들어준 “까르뽀나라”도 마냥 그립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여기는 지구 반바퀴를 돌아온 이탈리아 인 것을!
그냥 웃음지며 파마산 치즈를 흠뻑 뿌리고 포크로 돌 돌 말아가며 맛나게 한입 크게 빼어 문다.
남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배가 고파서 그냥 먹는다.
오늘 아침식사가 커피와 빵이라서 가져간 쿠커를 에어컨 꽂이에 꼽고 라면을 끓이고 일회용 밥 일명“햇반”과 집사람이 준비해온 짭잘한 오이지(다듬이 돌로 꼭 눌러서 물기를 완전히 쪽 뺀 오이지)로 때웠기에 아무것이라도 맛있다.
[파마산 치즈를 흠뻑 뿌리고 포크로 돌돌 말아서 한입]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이곳의 전기사정이 좋지 않아서 호텔에서 전기 쿠커나 커피포트 쓰는 것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다행하게도 물이나 밥, 라면을 끓일 때 전기가 다운이 안 되어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기억에 남는 추억거리이고,
집에서는 인스턴트음식을 자주 접하지는 않지만,
여행 때나 먹어보는 특별한 별식이라 생각한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내 평생 그렇게 맛나는 인스턴트 "라면"을 먹어본 적이 없다.
이 여행 후 그때 생각이 새록, 새록 나서 라면을 끓여 밥을 말아 먹어 보았지만,
그때 먹었던 그 맛은 전혀 나지 않는다.
내 입맛이 요물이다.
피우치에서의 어제 저녁은 불이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한 것도 알고 보면 우리 일행들이 커피포트나 쿠커를 이용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니 우스운 생각이 든다.
약주를 좋아하는 나는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거의 입에 대지 안았다.
안 먹었다기보다는 먹지를 못하였다고 표현함이 올을것 같다.
그 이유는 날씨가 워낙 더워서 술을 먹고 다음날 폭염에 여행 예정코스를 강행하기가 영 겁이나기에 그 좋아라 하는 약주한잔을 포기 했고,
저녁식사 때나 아니면 샤워 후 시원한 맥주 몇 모금으로 아쉬움을 달래곤 하였으며,
피렌체 그러니까 "토스카나"지방의 유명한 와인을 두병을 구입해 여행가방에 팽게처두고 바라만 보다가 결국은 국내로 가져오고야 말았다.
나의 인생에 이런 참 말도 안되는 일도 다 있었다.
[왼쪽에 산타 크로체성당과 멀리 우뜩선 단테입상의 뒷모습이 보인다.]
첫날의 스파게티 점심식사를 마친 후 산타 크로체성당으로 향한다.
식당을 빠져나와 골목길을 통해 산타 크로체 성당 옆으로 접근하는데 거대한 조각상이 태양볕을 가득품은 광장을 응시하는 뒷모습이 보인다.
바로 단테의 조각상이다.
그의 뒷모습에서 그의 처절한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단테하면 가장먼저 떠오르는 것은 “신곡”이다.
그는 9살에 첫눈에 반한 동갑나기 소녀 “베아뜨리체”를 죽을 때 까지 자기만의 연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과연 단테는 결혼을 안했을까?
아니다.
그는 젬마 도나타(Gemma Donata)와 12세에 약혼을 하게 되어 결국 결혼을 하게 되고 세명의 아들을 두게 된다.
단태와 결혼한 부인은 남편이 쓴 여러편의 책들 속에 전혀 언급이 없던 것으로 봐서 그다지 금술이 좋지는 못했을거라고 상상이 된다.
머릿속에는 온통 “베아뜨리체”만 들어 있었테니까 말이다.
그런 관점으로 볼 때 단태는 여인들로부터 칭송받아야 마땅한가 의문이 든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곳의 여인들 특히 귀족의 가문이 아니면 우리 조선시대보다 못한 꽤나 경시된 삶을 살은것 처럼 보인다.
단테는 정치적으로 숙청을 당함으로 피렌체에서 추방되어 긴 망명생활 중에 돌아오지 못하고 원귀의 객이 되고 만다.
[영국 화가 헨리 홀리데이(Henry Holiday, 1839-1927)가 그린 <단테와 베아트리체 Dante and Beatrice (1883)>
베아트리체를 향한 단테의 짝사랑하는 애 심정을 표현한것 같은데, 아르노 강가를 걷고 있는 세 여인 가운데 노란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이 베아트리체이다. 단테가 다리 위에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지만 베아트리체의 눈길은 냉넹하기만 하고 그를 외면하는것 같이 다른 곳으로 향해 있다. (사진 위키미디어) ]
1290년대에 피렌체와 피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당파 싸움에 단테가 휘말리게 된다.
단테는 1300년에 피렌체 시협의회 회장(Priorat)직을 맞아 1302년까지 적극적으로 정치무대에서 활동하였고 여러 나라를 대사직으로 돌아 다녔던 외교관 이었다.
당시에는 정파가 크게 로마교황을 옹호하는 겔프(Guelf)당,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받드는 기벨린(Ghibelline)당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마디로 애기하면 황제가 있어야 교황도 있고,
교황이 있어야 황제도 있다는 밑도 끝도없는 언쟁으로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를 두고 한심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단테는 피렌체가 로마 교황령의 세력에서 들어가지 않고 독립된 주권국가로 남아있기 위하여 황제파의 기벨린당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정치적인 표출이었고 원래 그는 피렌체의 소 귀족가문으로 대대로 겔프(Guelf)당이 었다.
이 후 로마교황을 옹호하는 겔프(Guelf)당의 승리로 두 당의 전쟁은 끝이 난다.
그 후 휘몰아치는 정쟁이 끝나고 겉으로는 잠잠해 지는 것 같다가
피렌체의 정국은 집권당이던 겔프(Guelf)당의 코르소도나티가 이끄는 ' 흑당'(黑黨)과 단테가 속한 '백당'(白黨)으로 분열되고 만다.
또 다시 정쟁이 일어나고 겔프(Guelf)흑당은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간교를 부려 흑당을 지지하는 바람에 백당을 패배하게 되는데,
단테는 정치적인 생각을 바꾸지 않고 모든 힘을 기울여 흑당을 축출하려 했지만 모두 실패하게 된다.
승리자와 페배자의 말로는 참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굳이 밝히자면 단테에게는 죄가를 인정하면 조건부사면을 해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그 죄목은 부정부패와 민란을 일으킨 역모의 죄로 이해하기 어려운 죄목이었다.
혈기왕성하고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 단테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게 된다.
단테에게는 어림없는 제안이었다.
단테는 모든 정치적 역량을 동원하여 재기를 도모 하였으나 당시의 사회는 단테를 외면하게 된다.
1315년 결국 흑당의 피렌체 정부는 그에게 궐석 재판을 열어 그를 추방령과 함께 극형(화형)을 내리고 만다.
망명길에 오른 단테는 한동안 여기저기를 떠돌며 다니다가 “라벤나”의 통치자 “귀도 노벨로”(Guido Novello)에게 몸을 의지해 연명하다가 1321년 라벤나 영주 플렌타의 요청으로 베네치아에 외교사절로 다녀오다가 말라리아에 감염된다.
그 당시에 말라리아는 치명적인 전염명이기에 1321년9월13일 56세의 나이로 단테는 생애를 마감했고 이곳 라벤나의 '산 피에르 마조레 성당'에 매장되었다.
[베아트리체의 묘비와 그 앞의 버드나무 바구니- 이묘는 짝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찻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묘의 앞에 놓인 버드나무 바구니에는 베아트리체에게 쓴 편지들이 가득 들어 있다. 베아트리체에게 비는 기도를 직접 써서 이 바구니에 넣으면 글쓴이의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이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베아트리체 가문의 묘는 이 교회에 있지만 베아트리체는 바르디 가문 사람과 결혼했기에 그녀의 남편의 묘에 같이 매장될 수 도 있다고 하면, 이묘는 가묘일 수 도 있다고 한다.]
[단테의 생가 맞은편에 있는 교회- 골목안쪽의 소박하리 만큼 초라한 교회인것 같다.]
[단테 교회임을 알리는 간판. 이 교회의 정식 이름은 “키에사 디 산타 마르게리타 데이 체르키(Chiesa di Santa Margherita dei Cerchi)”이다. 체르키 가문의 후원을 받아 세워진 성녀 마르게리타 교회라는 뜻이다.
단테가 아홉 살의 나이에 첫눈에 반한 베아트리체(Beatrice)를 만난 곳이 바로 이 교회이다. 세월이 흐른 뒤 단테가 젬마 도나티(Gemma Donati)라는 여인과 결혼식을 올린 곳도 바로 이 교회였다. 베아트리체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살다 스물 네 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신곡”
이 신곡은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의 3부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1307년경부터 쓰기 시작하여 단테가 죽기 바로전인 1321년 약 14년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 책은 그가 죽은후 유명한 보카치오에 의해 평가를 받게 되었고,
단테가 신곡을 코메디(희극)이라고 하였음에도 신성하다는 디바인 (Divine)을 붙여 “신성한 희극(Divine Comedy)”으로 알려져 우리에게는 신성한 희극 “신곡”으로 해석되고 알려졌다.
그 단테가 자기를 쫒아내었던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 앞에서 거대한 조각상으로 나를 뚫어지게 내려다 보고 있다.
그가 죽은지 700년(694년)이 지나고 있다.
이 성당 안에 단테의 가묘가 있다고 한다.
그가 죽은 백년 뒤 페렌체에서 그에게 모든 사면령이 내려지고 라벤나에 있는 그의 시신을 영안하여 하였으나 그의 가문은 물론 라벤나에서 강력히 저지하는 바람에 그 묘는 가묘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피렌체에 그렇게 뼈에 사뭇치도록 돌아오고 싶었던 그 영혼이 정치적인 사정과 도시간의 경쟁으로 단테의 영혼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출타 중”이다.
다시 말해보면 단테,
그는 문학가이지 결코 정치가가 아니다.
단테와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등이 그리스·로마의 고전에서 휴머니즘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르네상스를 꽃피운 인본주의는 아마도 늦게 왔으리라고 내 나름 생각해 보았다.
우리나라가 한창 폭염이던 7월 말경 내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왔을 때 어느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단테의 묘가 급진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사주한 공격을 받을지 모른다는 우려 섞인 보도내용이었다.
이 뉴스에 따르면 단테의 대표작 ‘신곡’에 나오는 예언자 무함마드(이슬람 창시자)에 대한 묘사 때문이다.
이탈리아 신문에 따르면 라벤나에 있는 단테의 묘가 IS 지지세력의 잠재적 공격목표 목록에 올랐다며 현장에 경찰의 경계가 강화될 것이라고 보도했다고 하는데.
그 보도를 자세히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제1편 ‘지옥편’에서 예언자 무함마드와의 만남을 묘사하는데,(이것은 사실이 아니라 허구적으로 쓰여져 있다.)
무함마드는 사기꾼들이 가는 지옥의 제8원에서 형벌을 받는다.
악마들이 무함마드의 가슴과 배를 찢어 내장이 밖으로 나와 걸려 있고,
그의 사위 알리(이슬람 시아파의 최고 선지자)는 머리가 위부터 턱까지 얼굴이 잘라져 있다.
단테는 무함마드와 알리를 ‘평생 스캔들과 분열을 부추긴 장본인들’이라고 묘사했는데
이슬람이 기독교의 이단 분파라는 당시의 통념을 이 책에 씀으로 아주 지독한 이단이라 표현하였다.
또한 알리는 이슬람 안에서도 분열을 초래했다.
알리가 무함마드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믿는 무슬림이 이슬람을 지배하던 수니파에 반기를 들고 시아파를 만들었다.
이런 내용으로 이전에도 이탈리아의 한 인권단체가 ‘신곡’에 “인종차별적이고 이슬람 혐오적이며 반유대주의 내용”이 포함됐다고 비난하며 학교에서 그 작품을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보도한 내용과 다르게 내 생각은 신곡은 그냥 창작일 뿐이고 테러의 대상이 되지 않아야 한다. 단테가 주장한 “코메디”일 뿐이지 않는가?
거의 40도에 이르는 폭염이 단테가 내려다 보는 산타 크로체 광장을 덮는다.
광장을 가로 질러 이탈리아의 유명한 가죽 세공점으로 향한다.
가죽제품이고 뭐고 간에 시원해서 좋다.
그 안에는 우리 말고도 중국인 관광객이 있었는데,(거의 중국인)
상표 가격표(택)를 보니 제품의 질을 떠나 엄청난 고가였다.
총 4층으로 된 이 상점은 각 층별로 여러 가지 제품별 콜렉션으로 진열해 놓았다고 한다.
2층의 창가가 있는 구두 제품을 진열하고 신어볼 수 있는 넓지막한 공간있었는데,
다행하게도 인적이 드물어 고단한 여행객의 두 다리를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쉬어 갈 수가 있었다.
창밖의 산타 크로체 광장은 햇볕 가득한 한여름의 열기로 데워 졌지만 주위로 공사가 한창이다.
공사는 한다고 하지만 그냥 한가로운 목가적 풍경이었다.
그렇게 한가로운 시간이 얼마나 되었을까. 시끄러운 중국말들이 들린다.
그런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 중국인들이 재력이 얼마나 좋은지는 몰라도 진열한 제품들을 거의 싹 쓸어 담다시피 한다.
보통 가죽 구두가 1,300~4,000 유로인데,
자기 발에 맞으면 디자인에 따라 몇 켤래씩 장바구니에 담는다.
가방도 그렇고 가죽 재킷도 그렇고 나는 정말 놀랐다.
G2의 중국!
그 힘(재력)이 내 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자리잡은 2층 로비의 정막함은 그들의 수선함으로 깨어졌지만
곧 그들이 사라지자 다시 조용해진다.
창밖으로 산타 크로체 성당과 그 앞의 공사가 한창인 광장이 다시 들어온다.
광장 저편 성당에는 단테의 가묘 뿐만아니라 내가 좋아하던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 벨리, 싸가지 미켈란젤로, 17세기 역사가이며 인문주의자 행정가였던 브르니, “이 짜슥들아!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했던 갈릴레이, 작곡가 롯시니의 묘가 봉안되어 있고,
성당의 벽에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성당의 조토의 종탑으로 알려진 조토의 프레스코벽화가 있다.
창가에 서서 세월의 억겁으로 반질반질 달아진 산타 크로체 광장을 보며,
에어컨 바람의 시원함으로 원기를 회복하고,
다시 폭염의 피렌체로 들어간다.
이 더위에 여기를 오게된 것은 아내와의 약속이기도 했거니와
위에서 서두에 밝혔듯이 르네상스의 꽃피는 문명을 일구어낸 이곳의 현장을 직접보고 느끼고 싶어서 였다.
지식인들과 예술가, 그리고 현세를 뛰어넘는 사상가들로 당시의 국민들을 개몽했던 혁신가들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못했으리라.
또 한번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적극후원하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날 르네상스가 이루어졌을까하는 의문이다.
아무리 훌융한 지식인, 예술가라고 하더라도 호구지책의 바탕을 책임져주지 않았다면,
그들을 발굴하여 적극 후원하고 학문과 예술에 전념토록 배려하지 않았다면,
내가 생각해 보건데 아마도 피렌체는 조그만 지방도시에 불과 하였다고 생각한다.
피렌체를 꽃의 도시로 만든!
유럽속에 가장 빛나는 별처럼 만들어낸 사람들!
바로 『메디치 가문(家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은 조상은 양모업자에서 출발하여 좋은 설명으로는 은행업이라 하지만 돈 장사 일명 “고리대금업”으로 큰 재력을 모으게 되었고 가문이 번성해 지면서 쌓인 재력을 학문과 예술에 돈을 쏟아 부었다.
그들의 시작은 상당히 한미하여 보잘것없는 가문에서 출발하였다.
이 가문의 시작을 훌터보면 맨 처음 궤도에 올려놓은 이는 코시모의 아버지 조반니 디비치 데 메디치(1360~1429)이다.
이 조반니의 증조부 아베라르도 메디치와 조부 살베르토가 “시뇨리아” 의 수장을 잠깐 잠깐한 것은 사실이나 그 이후 큰 공직에는 오르지 못하였다고 하며,
1378년 당시 하급인들이 생존을 위해 폭동을 일으켰는데
이를 “치옴피의 난”이라 하고, 여기에 메디치가의 조부의 사촌급에 해당하는 인사가 주모자로 몰려 추방당하는 일이 있었기에 피렌체 상류사회에서 메디치가는 주목받는 대상이 되었다.
치옴피라고 하는 것은 피혁과 모피를 가공하는 공장에서 하급노동자들이 바닥에 물기와 오물들을 피하기 위한 “나막신”같은 것을 신는데 그 나막신을 말한다.
그래서 치옴피하면 최하위 노동자를 표현한 말이기도 하였다.
이 당시 피렌체는 유럽금융의 본거지로 서유럽 금융계의 로마와 같은 곳이기도 하였다.
모든 상권은 상인조합인 길드가 장악하였으며,
우리나라 조선시대 상권을 장악한 시전과 같이 상인조합에 가입되지 않으면 아무런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공직에 나갈 수 도 없었다.
“단테”의 경우에 자기와 전혀 관계없는 약사,의사조합(당시에 의사 약사는 하급부류에 속하였다고 함)에 들어가서 활동을 하였고,
후에 태어난 "마키아밸리"도 공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자기 아버지 “베르나르도”가 변호사격인 법률고문을 하였음에도 그가문이 와인업에 종사하였기에 "포도주 양조엽자 및 선술집 경영자 조합에 가입 하여야 만 했다.
이와 같이 길드에 가입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고 피렌체에 거주할 수도 없었다.
그에 따라 치옴피의 난이 “왜” 일어 낮음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시뇨리아(공화정 또는 참주정: signoria)라는 단어는 13세기 중엽부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의 정부형태를 말하는 것으로 도시국가에서 정부를 운영하는 의회집단(공화정)을 뜻하기도 하고 권력의 최 정점을 뜻하는 의장이라고도 한다.
피렌체정부는 13세기에 시청사 시뇨리아를 짓게 되는데,
설계자 아르놀포 디 캄피오에게 "시끄러운 정쟁에 대비하여 안전하게 정무를 보는 곳으로 ”설계를 맏길 만큼, 얼마나 격동의 세월을 보냈으면 이렇게까지 설계할 때 신경을 써야했을까?
이 이야기는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또하나의 이야기로 올려 보고자 한다.
피렌체는 전제한 바와 같이 서유럼 금융의 중심이였기에 돈이 몰리면 자연 정치적인 세력도 득세하기 마련이기에 정쟁이 끊이지 안았던 정치의 중심이기도 하였다.
당시 피렌체는 자유를 열열히 사랑했다.
1343년 이전에는 거의 매일 기벨린당(황제당)과 겔프당 (교황당)의 싸움으로 편할 날이 없었고, 단테를 이야기하면서 올린바와 같이 기벨린당과 겔프당의 전쟁이 종식된 후에도 흑당과 백당으로 나눠서 편할 날이 없었다.
조금만 잘못하면 피렌체에서 추방령이 내려지거나, 가문이 멸문당하는 혹독한 형벌을 지어져야 했기에 항상 몸을 낮추고 힘 가진 자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설명한 바와 같이 1378년 치옴피의 난이 발생했다.
그 결과 곧 치움피의 난은 평정되었고 유력인사들로 구성되던 시뇨리아(정부)는 상인조합인 21개 길드의 각 대표들에 의해 장악된다.
이 시의원의 임기는 두달간으로 귀족들은 시의원에서 재외 되었다.
이 시뇨리아의 의장을 “곤팔로니에레”라하고 임기는 시의원과 같았다고 한다.
이러한 방식은 세월이 가면서 점점 중앙 정부적 형태를 띠게 되었으며,
나중에 코시모1세가 토스카나 대공(왕)으로 승격되면서 공화정에서 왕정으로 변형되기에 이른다.
[태양볕이 작열하는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 시뇨리아, 즉 의회 건물앞에 있었기에 그렇게 불리워 지게 되었다. 의회건물은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으로 1322년에 지어진 건물이며, 코시모1세가 머물렀던 곳으로 그가 후에 피티궁전으로 이전하면서 의회로 사용하였다. 그 후 1872년에 시청청사로 사용하게 된다.]
여기서 피렌체가 공화정이 된 역사를 약간이나마 알고 가야 하는데,
이 글을 읽는 여러 독자들도 아시겠지만
이탈리아 반도와 유럽은 물론 북아프리카 및 중동근 지방까지 광활하게 통치하였던 로마제국이 멸망한다.
로마 제국의 멸망은 그 원인을 정확하게 한가지로 정의 할 수는 없다.
여러 전문가들이 쓴 서적들도 단 몇가지로 구분하지를 못한다고 하는데, 하물며 범부에 지나지 않은 내가 어찌 논거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 당시의 종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기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전제아래 우리가 아는 제국이 무너져 버렸다고 이해하여야 한다.
이것를 나열하자면 “기번”이 쓴 “로마제국 쇠망사”를 다 열거 해야 하는데 그냥 여기서는 위의 전제한 것과 아래의 글로 지나가기로 한다.
로마제국은 동 서로 제국이 분열된다.
분열될 당시 로마제국은 북쪽의 게르만족(훈족에 쫒기는 동고트, 서고트족), 브리튼섬(영국)은 섹슨족이, 이베리아반도(스페인)는 수에비족, 갈리아지방(프랑스)프랑크족 등의 끊임없는 반란과 침입으로 인하여 국가재정이 바닥이 남에 따라 침입해오는 적을 물리칠 힘을 잃어가고 있었고,
정치적으로 자도자의 잦은 교체로 황제의 통치력이 상실되어가고 교황의 위치가 사실상 우위를 점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인이야기와 십자군전쟁을 써낸 “시오나나미”는
로마제국의 절대군주였던 율리아누스가 조금만 더 살았어도 이렇게 로마가 무너지지는 않앗다고 평가한다.
율리아누스!
그의 아버지는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동생인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로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자 큰아들이 일가들을 학살하고 그의 세아들이 제국을 분할하여 통치하던 중 큰아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가 나머지 형제를 죽이고 제국전체를 통치하게 된다.
이때 살아남은 사촌동생 율리아누스는 엄격한 황제의 감시 하에 기독교적인 교육을 받았으며, 성장 후에 침략자로부터 방어하는 전쟁에 동원된다.
로마제국은 항상 침략으로 도전받는 시기에 변방은 항상 크고 작은 전장이었다.
공을 세워도 계속 이곳, 저곳의 전쟁터로 전전하게 할 수 도 있고, 죽으면 더욱 좋다는 식 이었다.
그렇게 내몰렸던 그가 모든 매번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승승장구하자,
군대는 더욱이 강성해지고 그를 따르는 군은 제국에 충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면과 호탕함 그리고 과감한 결단력에 매료되어 그의 군대가 되고 많다.
사촌형인 황제는 이런 그에게 위협을 느끼고 물자와 식량의 공급을 끊어 버린다.
그를 추종하는 군은 칼끝을 황제에게 돌려 역성혁명을 감행하는데, 이 도중 황제가 급사하고
유언으로 율리아누스에게 황제를 이양한다.
그는 엄격한 기독교식 교육과 그리스 로마의 고전에 심취하였던 지식인 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교육과 상관없이 다시 로마제국을 번성했던 제국으로 돌려놓기 위해 기독교를 박해하고 구 제국의 통치방식으로 회귀하고야 만다.
율리아누스!
그는 강력한 철권통치로 최후의 비기독교인 로마 황제로 악명을 남기게 되는데,
쇠락해가는 제국의 부흥을 위해 로마의 전통을 부활하려고 자기의 온 열정을 바친 까닭에 이 때문에 후세의 기독교계로부터 "배교자 율리아누스"라고 평가되었다.
그는 전임황제 콘스탄티누스 2세가 못 이룬 “사산조 페르시아” 정복원정에 나섯다가 사망하고야 만다. 그가 황제에 오른지 채 2년(361년~ 363년)을 넘기지 못하였다.
어떻게 보면 로마제국으로써는 안타까운 사실이었다.
그 이후 로마제국은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되는데,
4두 정치 즉 4명(두명은 정제, 두명은 부제)이 나눠서 동서로 제국을 나뉘서 통치하는 형태를 취하는 이른바 분할 지배가 되는 바람에 덩치 큰 제국은 더욱이 나약해 지고야 만다.
그 후 테오도시우스(Theodosius)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나눠진 제국을 통합하였고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인정하였으며, 다시 로마제국이 안정기를 찾게 되었고 교황이 황제를 깔보는 시대가 도래되었다.
이후 계속되어 온 재정의 적자와 이민족들의 침략에 대한 방어전쟁으로 인한 정국의 불안은 제국의 몰락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었고,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임종할 때 두 아들에게 행정적으로 분할하여 통치하는 것이 효율적이란 판단아래 동로마의 아르카디우스(Arcadius)와 서로마의 호노리우스(Honorius) 로 분리 하여 통치 하게 하였고,
두 개의 로마는 서로 형제간의 고질적인 반목 속에서 정치적, 지리적, 문화적 이질성이 가속화됨에 따라 분열하고 말았다.
정치적, 지리적인 것은 두명의 황제가 서로 영토를 배분하여 통치한 것이고,
문화적 이질성이란 로마제국은 크게 둘로 갈리어 라틴어를 쓰는 서 로마계( 또는 라틴계)주민
그리고 그리스어를 쓰는 동 로마계 주민들로 나뉜다.
라틴계 주민은 지금의 서유럽에 해당하는 제국의 서부와 북아프리카에 살았고, 그리스어를 쓰는 주민들은 발칸 반도와 북아프리카의 동부, 중동 지역에 거주하였기에 이들간에 문화적 이질감은 높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종교적으로도 서로 다른 것이 있었는데 현재로 보면 서유럽은 카톨릭을 신봉하고 동유럽 쪽은 그리스정교를 지켜나가는 것을 보면 어림잡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동서로 분열된 후 서로마제국은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 시대인 476년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침공당하여 멸망하게 된다.
이때 로마제국은 사실상 제국의 문을 닫은 것이나 마찬가지라 생각되는데,
서 로마 만이 로마이지 사실상 동 로마는 비잔티움으로 엄격하게 말한다면 내가 생각하는 바로는 로마라고 부르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인데,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다.
이후 서로마는 오도아케르의 지배를 받다가 동고트족에 의해 암살당하고 서기493년 동고트족에 의해 동고트왕국이 만들어지게 된다.
한편 동 로마 제국(비잔티움)에서는 그들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서 로마 영토탈환을 위해 군사를 일으켜 오랜 소모전 끝에 예전의 왕성하였던 로마제국의 고토를 일부 회복하였으나,
유스니티아누스 1세 사후 다시 게르만족의 일파인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북부를 장악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지배는 이탈리아반도 남부지방으로 밀려나게 된다.
서로마 멸망이후 유럽동네는 그야말로 엄마를 잃어버린 어린아이처럼 패닉 상태가 된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서로마가 멸망한 자리에는 게르만족들의 일파인 고트족, 프랑크족, 반달족, 앵글로 색슨족 등이 서유럽 각지로 이동하면서 자기만의 왕국을 건설하게 되고,
현재로 말한다면 북쪽의 벨기에 지방과 일부프랑스 북부의 조그만 족속인 프랑크왕국이 점차 힘을 키워 유럽전역을 지배하게 된다.
이탈리아 반도 북쪽에는 위에 올린 바와 같이 어수선한 틈을 타 롬바르드족(랑고바르드 왕국 이라고도 함)이 지배하였고,
이탈리아 나머지 절반 중에서 로마를 포함한 일부는 교황령, 그리고 남부는 동로마제국(비잔티움 제국)이 통치하던 시대였는데,
이때 롬바르드족은 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교황령을 수차례에 걸쳐 침략하게 된다.
당시 교황령을 통치하던 교황 스테파노 2세는 롬바르드족의 핍박에서 벗어나려고 묘안을 짜내게 되고, 여기서 교황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다름 아닌 롬바르드족과 같은 게르만족이면서도 유일하게 스스로 로마 카톨릭교로 개종한 프랑크 왕국(489년에 카톨릭으로 개종)이었다.
롬바르드족에게 질린 교황 스테파노2세는 롬바르드족의 침공으로부터 도움을 요청한다.
이 당시(754년경) 프랑크왕국은 피핀 3세가 지배하고 있었고, 서양역사에서 유명한 그의 아들 샤를마뉴(카를대제라 하기도 하고 카롤루스1세라 칭 하기도 함)는 12세로 왕국의 장자로서 도움을 요청하러 방문한 교황을 영접했다.
『카롤루스 1세는 '대제(大帝)'의 칭호가 붙어 라틴어로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로 표기되나 그의 왕국을 공동으로 계승한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각각 '샤를마뉴(Charlemagne)'와 '카를 마그누스(Karl Magnus)'로 다르게 부른다. 영어식으로는 '찰스 더 그레이트(Charles the Great)'라고도 한다. '마뉴(Magne)', '마그누스(Magnus)', '더 그레이트(the Great)'는 모두 우리나라 말로는 '대제(大帝)'로 번역되는데, 이렇게 카롤루스 1세가 다양하게 불리는 이유는 그만큼 서유럽 역사 전체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여 오늘날 많은 유럽의 국가들이 서로 그의 유산을 계승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의 왕조가문 이름인 카롤링거 왕조의 이름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교황은 롬바르드족 의 침탈에서 해방시켜준다는 피핀의 약속에 대한 댓가로 생드니 대성당에서 성유식(聖油式 : 머리에 기름을 부는 의식)을 집전해 피핀과 그의 두 아들 “샤를마뉴” 및 “카를로망”에게 왕의 칭호를 수여했다.
이후 피핀은 760년부터 해마다 원정을 해 아키텐지방(현재 루아르 강 남쪽의 프랑스)을 정복하여 피레네 산맥까지가 모두 프랑크 왕국의 영토로 복속한다.
이런 원정을 하였을때 장남 “샤를마뉴”가 늘 동행했다.
768년 피핀이 아키텐과 전쟁을 벌이다 죽자,
프랑크 왕국의 오랜 관습(아들들에게 영토를 분할하여 떼어 주는 관습)에 따라 왕국은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는데,
장남 샤를마뉴와 동생 카를로망과 왕국을 둘로 나누어 가졌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형제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일어나는데,
동생 카를로망은 롬바르드에게 도움을 청해 형 샤를마뉴에게 항거 했지만 결국 패하게 되었다.
이때 동생 편을 들었던 롬바르드 왕국을 멸하기 위해 공격하게 되는데,
롬바르드왕국은 모든 영토를 샤를에게 정복 당하고 수도인 파비아만이 남아서 포위가 된 상태였다.
이 공격이 아직 진행되고 있던 중 샤를마뉴는 로마로 가서 교황과 함께 774년의 부활절을 축하하고,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교황령으로 이양하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성베드로 성당에서 재차 약속을 하였고,
그 약속에 따라 롬바르드왕국에서 빼앗은 정복지 일부를 로마교황에게 기증하였는데,
이것을 우리 서양역사서에도 많이 서술되는 "피핀의 기증"이라고 한다.
이후 이곳을 “로마 교황령”이라고 하는데, 그가 실제로 넓혀준 교황의 땅은 조그마한 일부에 불과 했고 롬바르드 왕국을 전역에 대한 통치권은 자신이 차지했다.
샤를마뉴는 재위기간 중 열 차례의 큰 전쟁과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으며, 그 결과 프랑크의 영토를 두 배로 늘려 놓았음은 물론이고, 서유럽에서 영국, 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남부를 제외한 전부가 그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
결국 서유럽은 샤를에 의하여 거의 하나로 통일하게 되는데,
프랑크 족은 물론 다른 게르만족 일파인 알레만니족, 바이에른족, 작센족 모두가 프랑크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아바르 왕국(지금의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북부)에 속해 있던 나머지 공국들과 도나우 강 유역에 새로 건설된 슬라브족 국가들도 느슨하나마 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분열되었던 서유럽이 브리타니아(잉글랜드), 히스파니아(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남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프랑크 왕국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러던 중 그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3세가 전임 교황 하드리아노 1세의 일가친척들은 그를 매우 질시한 나머지 그를 살해하고 자기집안의 사람들로 하여금 후대를 도모할 음모를 꾸민다.
799년 4월 22일 암살자를 사주하여 대연도의 날 행사장에서 교황을 습격하는 사태가 벌어져 자객은 곧바로 혀가 내뽑히고, 눈을 찟어 살해하였지만 정국은 매우 불안 하였다.
이때 카룰루스의 대사가
프랑크 왕국(프랑크왕국 령 파더보른)으로 교황을 피신시킨다.
이때 교황이 샤를에게 몸을 의탁한 것으로 계기로 샤를과 교황청 사이의 전략적 제휴가 이루어졌다. 샤를은 800년 11월에 직접 강력한 군사를 이끌고 교황과 함께 로마로 들어가 교황을 반대하는 정파가 포함된 교회회의를 주선하고,
이회에서 반대파를 제거해 주게 되는데,
교황 레오3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성유식을 집전하여 카롤루스 1세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황제대관식”을 거행하고 예전의 로마제국 황제처럼 로마 황제로 임명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의 수호자로 삼는다.
물론 이때 동 로마(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콧방귀를 뀌었음 당연하다.
806년 샤를은 게르만족의 전통적인 관습대로 제국을 분할하여 모든 아들에게 나누어 줄 계획이었지만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셋째 아들이 모두 죽고 마는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루트비히”를 공동황제로 내세우고 814년 1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다른 형제들이 이미 사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샤를 사후 제국을 루트비히 1세가 단독으로 이어받을 수 있었으나 루트비히 1세 사후에 그의 세 아들에 의해 제국은 결국 분할되었다.
나뉘어진 프랑크 왕국은 각각 동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으로 불렸으며, 카톨링거 왕조(샤를마뉴 집안의 혈통)에 의해 왕통이 한동안 계승되었지만 중프랑크계는 875년에, 동프랑크계는 911년에, 서프랑크계는 987년에 각각 샤를계통의 적장자가 단절되고 만다.
동 프랑크에서는 작센의 공작 하인리히 1세가 왕으로 선출되었고 그의 아들 오토1세가 현제의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중북부를 다스리는 신성로마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그 이후콘라트 1세를 거쳐 작센왕조 독일왕국이 성립되어 오늘날 독일의 모태가 되었고,
서프랑크에서는 카페왕조 프랑크왕국이 성립되어 오늘날의 프랑스로 발전하게 된다.
중프랑크 왕국 만은 다시 이탈리아(롬바르드)와 로타링기아, 프로방스, 부르군트로 분리되었고 이후 이탈리아는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에게 번갈아 편입된 끝에 제후들이 난립하게 되었으며, 로타링기아는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으로 분할되었고 프로방스와 부르군트는 875년 서 프랑크 왕국으로 편입된다.
다시 말하면 중프랑크 왕국은 위에서 말한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의 둘로 갈리게 된다는 이야기 이다.
독일의 오토 1세가 동프랑크와 중부랑크의 일부를 복속함에 따라 이탈리아 북부를 장악하자 당시 로마교황 요하네스 12세는 오토 1세에게 로마 황제의 대관식을 치뤄주는 대신에 그토록 염원하던 교황령의 독립을 보장받았다.
신성 로마제국이란 이름이 그렇게 해서 나왔다고 하는데,
정작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독일의 왕은 교황과의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약속을 어기고 로마로 군대를 보내 침공하므로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북부를 자신의 영토라고 교황에게 못 박음질하였다.
이런 속내에는 독일 왕 자신들이 일개 “독일의 왕”이 아니라 로마황제를 승계했다며 “로마제국의 황제” 라고 알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어서 한 행동이었다.
이때 이탈리아반도를 보면 동로마 제국이 지배하던 이탈리아 남부지방 중 시칠리아 섬은 잠시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았으나 9세기 초부터 유입된 노르만인의 차지가 되었다. 이후 노르만인은 1130년에 이탈리아 남부지방까지 통일하여 시칠리아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1194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6세가 결혼을 통한 상속권을 통해 시칠리아 왕을 겸하게 되면서 이탈리아 전체가 신성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후 1266년 프랑스의 앙주가문의 샤를이 시칠리아 왕국을 침공하여 점령하면서 다시 신성로마제국과 분리되었다. 하지만 앙주가의 샤를도 1282년에는 시칠리아 반란을 계기로 시칠리아 섬을 아라곤 왕국에게 빼앗기면서 나폴리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남부만을 통치하게 되는데 이것이 나폴리 왕국이다.
이탈리아 반도는 지형적으로 지중해의 중심에 위치하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여 있는 지리적인 이점 때문에 역사적으로 많은 상업도시가 발달할 수 있었다.
11세기부터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지중해 교역의 중심도시가 되었고 밀라노와 피렌체와 같은 내륙도시도 발달하였다. 그러나 형식상 이탈리아 북부는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였기 때문에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특히 신성로마제국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프리드리히 1세가 샤를마뉴 대제나 오토 대제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집고 넘어가기 위한 방편으로 여섯번이나 이탈리아 반도의 원정전쟁을 감행한다.
그런데 이런 폭압에 항거하여 1167년 밀라노를 중심으로 한 롬바르디아 도시동맹이 만들어 지게 되었고,
마침내 1176년 레냐노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1세의 게르만 세력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후 1183년 콘스탄츠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들은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각 도시의 자치를 보장받게 되었다.
단테를 설명하면서 올린 글과 마찬가지로
13세기에 서임권을 둘러싼 황제권과 교황권의 대립 속에서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 여러 도시들도 기벨린(황제파)과 겔프(교황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기본적으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코무네라고 하는 자치공동체의 의해 통채되는 공화제였으나 기벨린파와 겔프파의 당파싸움이 계속되며 혼란이 발생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비상체제의 필요성이 대두하였고 이런 배경 속에서 일부 도시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시뇨리아(참주정)이다. 시뇨리아는 자치도시 내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권을 위임받은 독재자로서 처음에는 공동체의 대표자 성격이었으나 임기가 종신제로 바뀌고 그 지위와 권력이 세습되기 시작하였으며 최종적으로 로마 교황이나 신성로마황제로부터 작위를 부여받게 되면서 군주제 형태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정치적으로는 혼란이 있었으나 십자군 전쟁을 통해 확대된 교역으로 경제력이 발달하고 도시 인구가 팽창하기 시작하면서 그 세력이 더욱 커져갔다. 당시 인구가 2만 이상인 도시가 이탈리아 북부에만 23개나 출현하였는데 당시 인구를 생각할 때 엄청난 숫자였다. 베네치아, 제노바, 밀라노 등이 큰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특히 피렌체는 인구가 10만에 육박하여 유럽 전체 중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각 도시국가들은 자차권을 인정 받았으나 계속 신성로마제국의 굴레는 벗어나지 못하였고, 프랑스의 침공에 따른 정국 불안은 계속된다.
피렌체가 공화정이 된 역사를 약간이나마 알고 가야 하는 것이 이렇게나 많은 역사적 사실을 읍고 가야 하는지 한참을 망설이다가 열거 하였는데 제대로 맞는지 모르겠지만 틀리더라도 대충은 그렇다는 이야기니 양해하기를 바란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돈을 버는 기회는 혼란과 함께온다는 말이 있듯이 피렌체는 항상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또한 교황 세명이 서로 자기가 진짜교황이라고 나서는 바람에 이시기를 "교황 대분열"시대 라고도 하는데, 종교적으로도 상당한 혼란기였다.
메디치 가문은 이때를 기회로 삼은 것 같다.
우리가 흔히 메디치 가문 하면, 1400년대 중반 피렌체를 근거지로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 되는 코시모(Cosimo de' Medici, 1389~1464년)를 가장 먼저 연상하게 되지만,
원래 메디치 가문은 고향인 ‘무젤로(Mugello)’라는 지역 에서 부동산 매매와 대부업(당시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다시 축적하게 되자, 1100년대 초반 피렌체로 이주해왔다.
농촌에서 대도시로 이사 온 메디치가문은 피렌체에 모직 작업장 두 곳을 근거로 아르테 델라 라나(Arte della Lana, 양모 상인 길드)의 회원이 되었으며, 여기에서 대부업을 하려면 의무적으로 은행가 길드(Arte del Cambio)에 가입해야 했으므로 이 가문도 은행가 길드에 가입했다고 한다.
이 은행가 길드(Arte del Cambio)의 권위는 1252년 이 길드에서 금화를 발행하면서부터 점점 더 커졌다.
이 금화가 바로 그 유명한 “피오리노 도로”로, 국제적으로는 플로렌스 또는 “플로린”으로 알려지게 되는데, 그 가치는 모든 무역에서 결제 통화인 국제적 기축통화로 인정받게 되어 그 신뢰도가 매우 높았으므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14~15세기경 약 USD 20 달러정도라고 하니 그 가치가 매우 높았다고 할 수 있다.
[왼쪽부터 메디치가 문장- 조반니 디 비치(1360-1429),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로렌초 일 포폴라노(1463-1503),교황 레오10세 조반니 데 메디치](1476-1521),교황 클레멘스7세[줄리오 데 메디치](1478-1534),코시모 1세(1519-1574),카트린 드 메디시스(1519-1589),마리 드 메디시스(1573-1642)]
위에 올린 글과 같이 이 가문의 이야기의 시작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 1360~1429)로 부터 시작한다.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는 그의 아내 피카르타 부에리(Piccarda Bueri)와 사이에 두 아들 코시모와 로렌초를 낳는다.
이 사람들에 의해 메디치 가문이 번성하여 르네상스를 꽃 피운 주역이 되는데,
아마도 그 때 그들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입에 이렇게 자주 오르내리는 사실을 정녕 몰랐을 것이다.
그 이전의 그러니까 조반니 디 비치 이전의 메디치 가문은 1314년에 증조부 아베라르도 메디치가 “시뇨리아” 의 수장직을 하고 이후 가문이 사양길로 접어들다가, 1370년, 1378년 두 차레에 걸처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가 곤팔로이에레로 선출되어 가문이 일어났으나, 앞 글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1378년 “치옴피의 난”이 일어나 평민, 즉 일반 노동자인 “미누토 포폴로”(작은 시민)들에게는 인기가 있어 메디치가가 표방한 서민에게 우호적인 정책 등으로 정치적으로 입지를 굳히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귀족층인 그란디(큰 시민)들이 합세하여 치옴피를 파멸시킴으로 메디치가문도 정치적으로 점차 입지가 줄어드는 길을 걷는다.
귀족층(그란디 : 큰 시민)들이 장악한 피렌체는 그런 메디치 가문( 일반 노동자를 두둔하는)을 항상 주목하였고,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는 이 따가운 시선과 의혹을 잠재우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는 “미누토 포폴로”(작은 시민)들의 입장을 두둔하고 있었고 인기가 많았지만 그는 이런 사실을 항상 숨기고 다녔다.
그는 매우 신중하여 남들에게 항상 겸손함과 나약함으로 위장한다.
그는 피렌체 시민들이 신흥 부호와 권력자를 싫어 한다는 것을 알고는 급속히 성장해 가는 은행업으로 돈을 벌면서도 되도록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며, 다음 글에도 소개 하겠지만 후대의 메디치 가문에 유훈이 되는 “시선에서 벗어나라.”, “권력 앞에 복종하라.”, “신중하게 행동하라”를 남기게 된다.
메디치의 가문은 피렌체의 모직 무역업(수출입)과 환전 및 대부업을 겸임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큰 부호가 되었을까?
그것은 무역업을 하면서 세밀한 정보망을 통해 세계적인 기류를 사전에 파악하여 남들이 모르는 정보와 지식으로 대처하였기에 더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었고,
특히 환전과 대부업을 함으로 수출입대금의 환전에서 큰 이문과 고객의 신뢰를 받으므로 더욱이 번창하였다.
그런데 단지 그것만 가지고 큰 부호가 될 수 없었고 크게 성장하게 된 이야기의 바탕은 다음과 같다.
그들 집안이 이탈리아 역사에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 1360~1429)가 당시 최고은행을 가지고 있던 먼 친척(10촌지간)이었던 비에리 디 캄비오초 데 메디치의 은행에 견습사원으로 들아가면서 시작된다.
그는 맨 바닥의 견습사원으로 열심히 일하면서 업무를 숙련시킨다.
이후 시일이 지나면서 비에리의 사업에 작은 지분을 확보하고 동업자의 번영에 따라 본인의 수익도 점차 커지게 된다.
1393년 조반니는 자립하면서 로마에 점포를 열었고, 이후 1395년과 1397년 피렌체와 베네치아 그리고 나폴리에 지점을 개설한다.
그는 중앙의 정치무대를 납작 엎드려 남들의 시선을 피하며, 견습 사원으로 체득한 은행업 노하우를 맘껏 발휘하여 큰 재산을 모으기 시작한다.
조그만 은행에서 크게 성장하는 발판이 되는 것은 그 이면에 다름 아닌 절대권력자인 교황의 비호를 받는 일이었고 그로인해 더욱 번성해 나갔기 때문이었다.
피렌체는 극히 민주적이지만 반면 반민주적인 것이 많았다.
정치의 중앙무대는 귀족이 아니라 상인들의 집단이 좌우하는 상인조합들(길드)의 나라이다.
원래 피렌체의 귀족들은 11세기나 12세기 봉건시대부터 내려오는 가문들이 많았다.
이런 봉건 귀족가문은 우베르티, 구이디, 토르나퀸치, 리카솔리, 파치, 부온델몬티, 아디마리 등의 가문인데, 이들은 피렌체가 상업화되는 13세기 초 부터 사업을 벌여 가문을 지탱하였고,
귀족과는 달리 신흥 부자들,
스트로이치, 알비치 등과 우리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메디치 가문이 합세하게 되는데,
이들 부르주아 가문들이 13세기 말 부터 득세하게 된다.
위에서 올린바와 같이 피렌체는 극히 민주이면서 알 수 없는 비민주적 형태이다.
피렌체의 정치적 파당은 언제 험난한 정쟁을 몰고 올지 모르는 큰 폭탄과도 같았기 때문에 조반니는 늘 상 이를 염두에 두고 항상 몸을 낮추고 사람들의 눈에 띠지 않으려 했지만 그 사업이 점점 커져감으로 도저히 막을 수 많은 없었다.
그의 일상은 피렌체의 저택과 시골의 별장에서 거주하면서 일반 상인들처럼 공적인 생활을 피하고 정산소에서 은행업을 보면서 조용히 오가며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공룡만 해지는 몸집을 더 이상 감출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중에 그의 증손자 로렌초도 말했지만 “피렌체에서 관직이나 정치적 권위 없이 재산만 가지고 있다는 것은 파멸의 길을 열어 놓는 것과 마찬가지였다.”라고 하는 것처럼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이라면 정부에 관여해야 더욱 번성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조용한 삶을 좋아하는 조반니라도 이점을 메디치 가문은 결코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조반니는 1402년 피렌체 은행가 길드의 회장으로 추대되고,
1402년, 1408년, 1411년 대의원에 해당하는 “프리오리”직을 맡았고, 1421년에는 의장인 “곤팔로이에레”직을 맡게 된다.
메디치 가문이 은행업에 뛰어 들었지만 남들보다 잘나가는 이유가 있었다.
위에서도 이야기 하였지만 교황청과의 거래였는데,
당시 은행업의 가장 큰 고객은 바티칸이었다.
먼 지역에서 교황의 조세를 거두는 일이나,
여러 가지 통화를 쓰는 용처에 따라 환전 하는일,
교황의 일시적인 필요에 따라 현금을 조달하는 사업(구호기금, 전쟁수행기금, 원조기금)
교황청 내부 자산을 관리하는 사업 등
그 규모와 자금규모가 엄청남에 따라 그 이익이 막대하고도 남았다.
그 당시 알베르티(Alberti), 리치(Rizi), 스피니(Spini) 등의 피렌체 은행가 가문들이 교항청의 재정 담당을 하고 있었고,
메디치가의 은행의 사업은 소량에 그치고 있었다.
어느날 로마지점에 한 사내가 들어선다.
그는 ‘발다사레 코사(Baldassare Cossa)’라는 사람으로 나폴리 출신의 해적이며,
명문인 볼로냐 대학에서 가짜 법학박사 학위를 돈으로 사들여 잘 포장된 사기꾼에 불과 했다.
그런 그가 은행거래를 시작하려 했지만 신용이 없다는 이유로 다른 은행들에서 거절당하자 메디치 은행을 찾게 된다.
메디치 은행의 로마지점은 피렌체의 은행주 조반니에게 연락을 하게 되고 조반니는 중대한 결심으로 그에게 원하는 만큼 신용대출을 해주었다.
후에 사기꾼 코사가 추기경에 임명되고, 1410년에 ‘발다사레 코사’는 교황 요한 23세로 취임하게 된다.
발다사레 코사가 교황이되는 사건은
앞에서 올렸고 이후 다시 설명하겠지만 교황이 세명이나 되는 황당한 이야기를 올렸었다.
이 시기를 “교회 대분열”시대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행운인지 아니면 악운인지 모르지만 교황에 임명된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이탈리아의 로마 교황청과 프랑스의 아비뇽 교황청(Avignon)으로 분열돼 있었다. 교황도 두 명이었다. 그래서 1409년 피사에서 교회 분열을 종식하자는 취지로 공의회가 열린다. 이 공의회를 “피사 공의회”라고 하는데,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2세(Gregorius XII)와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Benedictus XIII) 모두를 폐위시키고 제 3자인 새 교황 알렉산데르 5세(Alexander V)를 선출할 것을 결의했으며, 이에 따라 새로 선출된 교황은 공의회를 즉시 폐회시키고 돌아갔다.
그런데 패위 된 두 교황들이 공의회의 판결을 수락하지 않으면서 교황은 오히려 3명으로 늘어 나게 된다.
피사에서 선출된 알렉산데르 5세가 1년 만에 서거한다.
발다사레 코사 추기경은 그 뒤를 이어 로마 카토릭교회의 교황 요한 23세(Ioannes XXIII)로 선출되었다.
일개 해적에서 교황이 된 것은 어떤 사가들은 메디치가문의 후원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진실은 모르겠으나, 그 사건으로 인해 엄청난 이득을 보는 것은 당연 메디치 가문이었다.
우선 교황청의 공식 주거래은행은 메디치 은행으로 변경됨에 따라 제일 잘나가는 은행으로 도약하는 발판이 된다.
교황이란 말 그대로 황제나 다름없는 지위를 가졌다.
이때 유럽은 프랑크 왕국의 분열과 함께 성립된 신성로마제국이라는 큰 독일제국과 프랑스 그리고 두 나라보다 미약한 엥글로섹슨의 영국이 힘겨루기를 하던 시기 였다.
이시기 당연 제국의 황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일컬었고,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영국과 끊임없는 마찰을 빚고 있었고, 이탈리아 반도는 그들의 양식거리처럼 수탈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반도는 각 도시가 국가처럼 독립하여 중,소 도시들이 국가를 이루고 있었고 조그마한 이해득실 이라도 정쟁을 일으켜 항시 전쟁의 소요에 휩쌓여 있었다.
전쟁이라고 할 수 없는 전쟁인 것이 도시국가이다 보니 많은 군대는 없었지만 수백에서 수천의 군대가 있었고 서로 의 도움으로 합쳤다가 이해과 결과에 따라 다시 적국이 되기를 반복하였다.
도시국가중 매우강한 국가가 현재의 슬로베니아 일부 및 크로아티아해안에 걸쳐저 있는 베네치아공화국과 밀라노공국 , 그리고 나폴리왕국, 로마를 포함한 교황령, 제노바공화국, 피렌체공화국, 시에나공화국과 옆에 붙은 조그마한 피옴피노, 루카공화국, 사부아공국, 몬세레트, 만토바, 페라라공국, 시칠리아와 샤르데냐, 코르시카를 아우르는 아라곤왕국등이 그 주요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위에서 말한 발다사레 코사가 교황이 되는 사건은 그 이유를 간단히 살펴보면,
교황이 세명이나 배출되는 희귀한 시대적 배경에서 나온다.
이렇게 교회가 분열된 사건의 시초는
프랑스 국왕들은 교황과 밀접한 공생 관계를 유지했다.
왜냐하면 프랑스 국왕의 입장에서는 교황의 지지를 얻으면 독일 왕과 같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처럼 신성한 권위를 높일 수 있었고,
특히나 교황의 입장에서는 독일 황제와 대립하고 있는 처지라 프랑스 국왕의 후원이 절실히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남왕으로 알려진 필립 4세(필리프4세 : Philippe IV)가 1294년부터 1303년까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와, 1302년부터 1304년까지는 플랑드르와 전쟁을 벌였다. 이러한 대외 전쟁 수행에 필요한 경비 마련을 위해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했다.
이 세금 과세로 인해 프랑스 국왕과 교황 사이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필립 4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사망하자 친 프랑스적인 교황 클레멘스 5세를 추대하고 1309년에는 아예 교황청을 교황령 로마에서 프랑스의 아비뇽(이때는 아비뇽이 교황령 영지)으로 옮겼다. 이 사건을 고대 유대인의 바빌론 유수에 비유해 교황의 '아비뇽 유수'라고 부른다.
교황청이 로마가 아닌 아비뇽으로 옮겨지게 된 것은 필리프4세의 강요뿐만이 아니라, 이탈리아 내 교황령의 사회정세 불안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교황령 안에서는 교황파와 반교황파가 갈려 극심한 내분에 휩싸여 있었다. 특히 친 프랑스계의 글레멘스 5세가 선출된 이후에는 로마의 오르시니 가문과 콜로나 가문의 대립 투쟁으로 내분이 더욱 심화돼 무정부상태에 빠져 도저히 로마에 머물 처지가 못 되었다.
이후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1377년 아비뇽의 교황청이 다시 로마로 돌아가고, 이탈리아 시민의 압력을 받은 추기경 회의는 우르바누스 6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런데 또다시 추기경들과 우르바누스 6세가 대립하게 되자 추기경들은 다시 새 교황 클레멘트 7세를 선출하여 교황청을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또 옮겨 버렸다. 이로 인해 로마와 아비뇽에 두 개의 교황청이 세워지는 사태가 되었는데, 이것을 '교회의 대분열(1378~1417년)'이라고 부른다.
이런 대분열은 1417년 “콘스탄츠 공의회”(1414년~1418년)가 새 교황 마르틴 5세를 선출함으로써 끝났지만, 이미 실추된 교황의 위신과 종교적 권위는 회복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 결과 교황권이 추락되었고, 교황은 세속적 국왕과 대결하기에 너무 미약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런 시대적 혼란한 이야기를 소개 하는 것은
어떻게 한미하였던 메디치 가문이 은행업으로 크게 성공하였느냐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위에서 이야기한 1414년 독일 콘스탄츠에서 공의회를 개최한다.
이 공의회는 1414년에서 1418년까지 3년 5개월간에 걸쳐 독일의 콘스탄츠에서 개최된 중세 최대의 공의회라 한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그문트(Siegmund)가 압력을 행사해 교황 요한 23세(발다사레 코사)가 소집하여 열리게 되었다.
3개의 교회 통합을 시도하였는데, 요한23세는 공의회가 자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공의회를 파기할 목적으로 떠나 버렸다.
자기가 공의회를 떠나면 회의가 무산 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황제는 회의를 강행시키고, 평민복장으로 피하던 요한 23세를 체포하여 죄를 물어 강제퇴위(1415년) 시키고 당시 3만5천 플로린3(Florin: 피렌체 통화)이라는 막대한 벌금형을 선고하고 하이델베르크 성에 투옥시킨다.
나머지 두명 그레고리오 12세(Gregorius XII)는 자신을 교황으로 인정하면 물러나 조용히 살겠다는 약속을 함에 따라 그의 청을 들어 주어 명예롭게 후선으로 물러나게 하였고(1415년), 퇴위를 거부한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Benedictus XIII) 는 강제퇴위(1417년) 시켰다.
그리고 1417년 새로운 교황이 취임하게 된다. 이 교황이 ‘마르티노 5세(Martinus V)’이다.
당시 조반니의 장남 ‘코시모 데 메디치’도 요한 23세를 수행하여 따라 갔다가 교황이 잡혀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코시모는 아버지 조반니에게 이런 사실을 알린다.
그 당시 피렌체에서 연 수입이 150플로린 정도면 풍요롭지는 않아도 그저 잘 사는 편이었다고 하는데 벌금이 3만5천 플로린이라면 엄청난 액수의 벌금이었던 셈이다.
교황에서 패위 되고 병들고 가진 것 없는 요한23세,
메디치 은행의 매우 귀중했던 고객이었던 점을 감안해 조반니 디 비치는 자신의 장남인 코시모 데 메디치와 뜻을 모아 요한 23세에게 벌금 낼 돈을 대출해 주기로 한다. 물론 요한 23세는 돈을 갚을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메디치가의 아버지와 아들은 큰 손해를 감수하고 대출을 해준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 교황 요한 23세는 하이델베르크 성에 3년 간 투옥되었다가 조반니의 결정에 의해 피렌체로 들어오게 되고,
그가 얼마 안 남은여생을 편안히 지낼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교황 마르티노 5세에게 사면을 부탁하여 투스쿨룸의 주교로 임명하게 했다.
물론 교황 마르티노 5세의 완강한 거부가 있었지만 그를 설득하는 것이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교회에 가장 많은 성금과 후원금을 내어놓는 집안이 바로 메디치 가문이라 그의 부탁은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도 교황은 들어 줄 수 밖에 없었다.
조반니는 교황도 아니고 일개 주교가 된 그에게 피렌체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생계비를 지원하였다. 또한 요한 23세가 죽자. 당대 최고의 건축가(미켈로초와 도나텔로)에게 의뢰하여 교황 영묘를 제작하여 성 요한 세례당에 안치하게 된다.
당시 피렌체에 머물던 교황 마르티노 5세는 그의 묘비에 교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메디치 가에서 부탁하면 교황도 어쩔 수 없이 들어 주기에 가능했다.
그의 묘에는 IOANNES QVONDAM PAPA XXIIIus OBIIT FLORENTIE (요한 전 교황 23세, 피렌체에서 죽다) 라고 세겨져 있다.
요한 23세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교황 연대기에도 빠져 있지만 매디치가의 성장기반을 닦아준 사람이므로 그들은 당연히 교황이라 부르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요한 23세는 임종 직전의 메디치 가문에게 자신이 교황이었을 때 보여주었던 그 신의를 자신이 어려웠을 때에도 져버리지 않은 것에 대해 크게 감동하고 자신의 마지막 재산인 ‘성 세례 요한의 손가락’을 기증했다고 한다.
지금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박물관에 그 손가락이 기증되어서 전시되어 있다. 메디치 가문이 손가락을 치켜 올리고 있는 성 세례 요한을 의뢰한 이유가 바로 바로 한번 맺은 신의를 절대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은행업” 다시 말한다면 돈 장사(금융업)의 정의는 '신용'과 '재량'에 있고 고객과 대부업자 사이에 두터운 ‘신뢰(信賴)’라 할 수 있다.
조반니 디 비치는 한때 최대 고객이었던 요한23세에게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의리를 지켰다. 메디치 은행은 단기적으로 큰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고객관계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신용의 상징으로 부각되면서 메디치 가문은 절대로 한번 맺은 신의를 버리지 않음을 넓리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지켜본 귀족들과 교황 마르티누스 5세는 메디치 은행을 교황청의 주거래은행으로 변경하기에 이른다.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멀리 내다본 조반니 디 비치의 결정은 탁월한 신의 한 수였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메디치 가문의 은행업은 전성기를 맞게 된다.
"아래 그림은 메디치가문의 가계도이다."
"이 가계도를 작성하면서 여러서적을 보고 작성하였는데 메디치가문을 아는데 큰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