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채와 사랑채 사이 중문 앞에 내외 차단벽이 이채로우며, 사랑채인 학림헌(鶴林軒)은 당시지방 수령이 있는 관아와 너무 멀었으므로, 지방 유지였던 집 주인에게 행정권을 위임해준 향소 역할을 했던 곳이다. 때문에 학림헌의 천정은 당시 관청의 그것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축담에는 손 씻는 돌 세면대. 소피를 보는 돌거북 등이 있다. 후원 텃밭에 있는 井자 모양의 화강석 우물 뚜껑에 난 3개의 구멍은 천지인을 뜻하며 당시 석공의 솜씨를 자랑한다.
이 지역에서 출토되는 자연석(개석)으로 쌓여져 있는 담장은 주변의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고성최필간고택도 예전에는 빈 집으로 있었고,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던 최영덕씨가 주말마다 내려와서 가꾸었는데, 지금은 은퇴하여 고성최필간고택을 이용하여 문화재 숙박체험 사업을 하고 있다.
경남 고성군 하일면 학림리 학동에 있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08호 육영재는 1994년 7월 4일 지정되었다.
고성종회 통덕랑공(흥호)파 학림리 문중에서 후손들의 학문지도와 육성을 위해 세운 건물이다.
입구 솟을대문과 본관, 사랑채, 곡간채 등이 사방으로 배치되어 있다.
본관은 앞면 6칸, 옆면 2칸 건물로 기둥은 지름이 50㎝나 되는 원형기둥이다.
문짝은 매우 정교하고 독특한 모습이며 좌우에 있는 방의 천장은 소나무를 조각하여 만든 것으로 매우 특이한 조형 양식을 보이고 있다.
원래는 1723년(경종 3)에 후손들의 영재육성을 위해 마련한 초가집으로 시작되었는데, 학생 수가 불어나자 1845년(헌종 11년) 이곳에 현재의 건물을 세웠다.
4동의 목조와가 건물이 동서남북으로 배치되어 있다. 경내에는 당시 학동들이 사용하던 고서(古書) 300여 권이 소장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신 교육기관이 생길 때가지 학교를 운영하여 많은 한학자를 배출하여 집안에 약 20여권의 문집(文集)이 나왔다.
한국전쟁 때 하일초등학교가 폭격으로 없어지고 나서 한 동안 하일초등학교 대신에 육영재를 학교로 사용했다고 한다.
육영재는 마을에서 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장소에 있는데, 경내가 매우 넓고 규모가 커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서당하고는 많이 다르다.
육영재를 통해서도 이 가문이 얼마나 부유한 가문인지 확인할 수 있다.
경남 고성군 하일면 학림리 학동에 있는 등록문화재 제258호 고성학동마을옛담장은 2006년 6월 19일 등록되었다.
길이 : 토담길이 약 2,300m.
재료 : 돌담(납작돌), 토석담.
형식 : 점판암 계통 돌과 황토로 바른층 쌓기.
형성 : 17세기 후반 형성.
주민 : 50세대(108명) 거주.
학동마을 옛 담장은 수태산에서 채취한 2~3cm 두께의 납작돌과 황토로 쌓아 다른 마을의 담장과는 차별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토석담은 0.4~1m 높이까지 큰 납작돌을 쌓고, 그 위에 작은 납작돌과 진흙을 쌓아 올린 뒤 맨 위에 큰 판석을 올려 만들었다.
건물의 기단이나 닭장, 후원의 돈대 등에도 이와 같은 방식이 사용되어 담장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 주변 대숲과도 잘 어우러져 남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내고 있다.
현재 마을 뒤에는 수태산 줄기가, 마을 앞에는 좌이산이 솟아 있는 소위 좌청룡우백호의 지세이며 마을 옆으로는 학림천이 흐르고 있어 전통마을의 배산임수형 입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상당부분 새마을운동 당시 슬레이트 기와로 개량되었으나 일부 전통가옥이 보존되어 있어 전통마을로서 면모를 갖추고 있다.
남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마을 주변 대숲과 잘 어우러져 수백년을 거슬러 고성(古城)으로 끌어들이는 듯한 마을 안길의 긴 돌담길은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고 있으며, 황토빛 돌담길을따라 걷노라면 아련한 고향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학동마을은 문성공계 안렴사공파 고성종회 통덕랑공(흥호)파 가문이 얼마나 영화를 누렸는지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이다.
이 마을에는 비지정문화재로서 서비공(西扉公) 최우순(崔宇淳)의 순국 기념 서비정(西扉亭)과 서비최선생순의비(西扉崔先生殉義碑)가 있다.
서비정은 정자라기보다는 제각에 가깝다고 생각되어 책을 만들 때 비지정문화재에 포함하지 않았다.
서비공 최우순은 통덕랑공(흥호)파 23세로,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분함을 참지 못하여 두문불출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면서 마을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역사를 가르쳤다. 1911년 일본 헌병이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恩賜金)을 전달하려 하였으나 끝까지 거부하였다.
일본헌병이 밤이 되어도 돌아가지 않고, 은사금을 끝까지 거부하면 체포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일본헌병이 잠이 들자 궁궐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조국의 광복을 기원하며 음독 자결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