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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회 사무엘 하권 1장-5장
2사무 1,1-16 다윗이 사울의 죽음을 애도하다
“사울이 죽은 뒤에, 다윗은 아말렉을 쳐부수고 돌아와 치클락에서 이틀을 묵었다”(1). 사무엘기 하권 1장 1절은 “사울이 죽은 뒤에”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 표현은 과거와 연속성은 있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때를 나타낸다(여호 1,1; 판관 1,1). 아말렉은 에사우의 자손들 가운데 하나로(창세 36,12) 에돔족과 관련이 있다. 성경에서 아말렉인들은 주로 광야의 유목민으로 팔레스타인 남부와 시나이 반도에서 산다. 가나안 정복 때부터 적대 관계였던 이스라엘과 아말렉은 전쟁에서 아말렉이 패한 후에야(2사무 1장) 적대 관계가 끝난다.
“사흘째 되는 날, 어떤 사람이 옷은 찢어지고 머리에는 흙이 묻은 채 사울의 진영에서 찾아왔다. 그가 다윗에게 나아가 땅에 엎드려 절을 하자”(2). 2절의 “어떤 사람”은 8절에서 “아말렉 사람”으로 밝혀진다. 그는 사울의 진영에서 찾아왔다고 하는데, 그가 전사로서 싸움에 임했는지 탈영병이었는지 다른 재능이 있어서 이스라엘 군대에 억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옷은 찢어지고 머리에 흙이 묻었다”는 것은 당시 관례적인 애도 관습이다. 이외에도 베옷을 입거나 슬피 울거나 땅에 엎드리거나 단식을 하는 등의 행동으로 애도를 표했다.
“다윗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서 말해 보아라.’ 하자, 그가 대답하였다. ‘싸움터에서 군사들이 달아났습니다. 또 많은 군사가 쓰러져 죽었는데, 사울 임금님과 요나탄 왕자님도 돌아가셨습니다”(4). 4절에서 아말렉인은 사울과 요나탄의 전사 소식을 알리면서 다른 아들들(1사무 31,2)은 언급하지 않는다. 이 아말렉인은 요나탄이 왕위 계승자이자 다윗의 친구였다는 사실을 비롯하여 이스라엘의 상황과 정치에 밝았던 것 같다.
5-10절에 아말렉 사람이 전하는 사울의 죽음은 사무엘기 상권 31장 1-7절의 보도와 다르다. 사무엘기 상권 31장에서는 사울이 장렬하게 자결한 것으로 아주 인상깊게 묘사되는데, 여기에서는 아말렉 사람이 사울의 명령에 따라 죽였다고 고의적으로 왜곡하는 듯하다. 아말렉인은 이스라엘의 지독한 원수이자 잔인한 침략자들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독자들은 이러한 고의적 왜곡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무엘기 상권 31장의 기사와 이 본문을 다 아는 독자라면 아마도 아말렉 사람이 개인적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 추측했을 것이다.
6절의 “길보아 산”은 약 500미터 높이의 석회암 산인데, 거기에 병거가 있다는 것은 좀 어울리지 않는다. 병거는 평지에서 싸움에 적합하도록 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울은 궁수들에게 큰 부상을 입었는데(1사무 31,3), 팔레스타인에서 병거 부대는 항상 활이 아니라 창으로 무장했다.
“제가 보기에도 그분께서는 쓰러지신 뒤에 다시 살아나실 것 같지 않아, 그분 곁으로 가서 그분을 돌아가시게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머리에 쓰신 왕관과 팔에 끼신 팔찌를 벗겨 여기 나리께 가져왔습니다”(10). 10절의 ‘왕관과 팔찌’는 임금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왕관은 그것을 쓴 사람과 직무에 대한 권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전시에는 일종의 띠와 같은 가벼운 것으로 착용했을 것이다. 아말렉 사람은 사울 가문보다는 다윗에게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겨 보상을 바라고 다윗에게 이 물건들을 가져왔을 것이다. 이 아말렉 사람은 다윗을 사울의 계승자로 본다는 사실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행동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 구절은 다윗이 사울 임금의 장식물을 입수하게 된 경위를 설명해 주기 때문에, 성경 저자는 아말렉 사람이 거짓을 말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본문을 보존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은 사울과 대결할 준비를 하여(1사무 28,1-2), 최후의 전투에 임하기 직전에 철수하였는데(1사무 29장), 이런 다윗의 행동에 대해 다윗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를 비난했을 것이며, 다윗이 입수한 임금의 장식품은 필리스타인들이 호의의 증표로 그에게 주었다고 주장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윗이 아말렉을 침공한 사실(1사무 30,1-2)과 아말렉 사람의 보고(2사무 1,1-16)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진격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을 것이다.
왕관과 팔찌를 가져온 이야기는 또 다른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제 옛 질서는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모험을 시작해야 할 때라는 의미이다. 즉, 왕관과 팔찌를 가져온 시점은 이스라엘의 임금은 죽고, 군대는 흩어졌으며, 사기는 떨어진 상황이다. 필리스티아인은 또다시 이스라엘 성읍들을 차지하게 되었고, 다윗의 본부 치클락은 잿더미가 되었다.
“그러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었다.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하였다”(11). 11절에서 ‘자기 옷을 찢는 것'은 어떤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에 보이는 반응이기에 3절 이후에 바로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더 적절했겠지만, 다윗은 그 아말렉 사람의 보고가 사실인지 확인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12절에서 ‘애도하고 울며 단식하는’ 것은 일반적인 애도의 표현들이다. 가족이나 공동체의 일원 중 한 사람이 죽으면 당연히 행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관례였다.
14절에서 다윗은 아말렉 사람에게 상을 주기는커녕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를 죽였다고 질책한다. 다윗은 아말렉 사람의 보고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사울의 죽음에 대한 최초의 보고이고, 그 사실에 대해 의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다윗은 그러한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행동한다.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11회 나오는데, 그중 10회가 모두 사무엘기에서 나온다. 이 표현은 주님과 임금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낸다. 기름부음의 중요한 결과 중 하나는 그 사람이 거룩해지는 것이다. 이 칭호는 사무엘기 하권 1장 1-16절의 내용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사무 1,17-27 다윗이 사울과 요나탄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를 짓다
17-27절에 소개되는 애가는 아름답고 예술성이 뛰어나다. 다윗이 사울과 요나탄의 죽음을 슬퍼하는 노래는 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인 애가 가운데 하나다. 이 애가에는 다윗이 요나탄과 맺은 우정에 대해 생각하는 애뜻함과 깊이가 담겨 있다. 사울도 이 애가에서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시는 크게 두 단락(19-24절과 25-27절)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에서는 사울과 요나탄의 운명과 행적을 다룬다. 후반부는 요나탄을 위한 애가로서 본격적인 장송가의 성격을 띤다.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탄을 생각하며 이런 애가를 지어 부르고는, ‘활의 노래’라 이름 붙여 유다의 자손들에게 가르치라고 일렀다. 그 애가는 ‘야사르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17-18). 17절에서 시의 주인공인 사울과 요나탄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네 번 언급된다. 그리고 ‘용사들(기보림)’이라는 표현이 네 번 나오는데(19.21.25.27절), 이는 이스라엘의 일반 용사들이 아니라 사울과 요나탄을 가리킨다. 일반 용사들의 운명은 그들 지도자들의 운명 속에 암시되어 있다.
이 시는 ‘애가’인데, 이 애가는 장례 애가 혹은 장송가로 시편에서 많이 발견되는 애가와는 다르다. 전자는 실제의 죽음과 죽은 자를 위해 노래하고 과거를 회상하며 하느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함께 애도할 것을 요구한다. 반면, 후자는 미래를 내다보며 근본적으로 하느님께 탄원한다.
18절에서 시의 제목이 “활의 노래”로 밝혀지는데, 활은 요나탄이 즐겨 사용하던 무기이다. 이 시를 인용한 “야사르의 책”은 여호수아기 10장 12-13절에도 나오지만 이 책에 대해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 ‘주님의 전쟁기’(민수 21,14)와 비슷하게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웅적 위협을 다른 고대 명시선 정도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야사르의 책” 대신 “올바른 이의 책”이라고 옮길 수 있다.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살해되어 언덕 위에 누워 있구나.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졌는가?”(19). 19절의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졌는가?”는 일종의 후렴구로 세 번 반복된다(19.25.27절). 이 후렴구는 절규에 가까우나 수사적 의문문으로도 볼 수 있다.
20절의 두 개의 2행절로 구성되었는데, 2행절은 각기 같은 뜻을 반복하는 구조이다. 갓과 아스클론은 아마도 필리스티아를 대표하는 성읍들이었을 것이다. 갓은 다윗이 망명을 청했던 곳이고, 아스클론은 항구로 잘 알려진 성읍이었다. 이 절은 불가능한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문학적 기교로 간절한 열망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필리스티아인은 자기네 승전 소식을 이미 전국에 알렸었다(1사무 31,9). “할례 받지 않은 자”라는 표현은 ‘이민족’과 같은 말로,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 가운데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필리스티아인들뿐이었다. 이 말은 필리스티아인의 별칭으로 경멸의 어조를 띤다.
“길보아의 산들아 너희 위에, 그 비옥한 밭에 이슬도 비도 내리지 마라. 거기에서 용사들의 방패가 더럽혀지고 사울의 방패가 기름칠도 않은 채 버려졌다”(21). 21절에서는 패배의 장소인 길보아 산들에 저주를 선포한다. “사울의 방패는 더 이상 기름칠도 하지 않은 채 버려졌다”는 것은 사울의 죽음으로 인해 사울은 더 이상 기름부음 받은 임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요나탄의 활은 살해된 자들의 피와 용사들의 굳기름을 묻히지 않고서는 돌아온 적이 없고 사울의 칼은 허공을 치고 되돌아온 적이 없었네”(22). 22절은 긴 2행절로 사울과 요나탄의 영웅적 위업이 칭송된다. ‘피’와 ‘굳기름’은 희생 제물과 연관되어 사용되는 단어들로, 요나탄의 승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희생제물로서 연상된다. 그리고 사울과 요나탄은 가리켰던 ‘용사들’이라는 표현이 여기서는 그들의 적들을 가리킨다. 이는 적들이 대단하면 대단할수록 그들을 무찌른 자의 승리가 더욱 위대해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딸들아 사울을 생각하며 울어라. 그는 너희에게 장식 달린 진홍색 옷을 입혀 주고 너희 예복에 금붙이를 달아 주었다(24). 24절은 20ㄴ절과 대조된다. 즉, 필리스티아인들의 딸들의 기쁨과 이스라엘의 딸들의 슬픔이 대조된다. ‘진홍색 옷’은 임금들과 부유층의 옷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금붙이’와 함께 사울이 수많은 전투에서 얻었을 풍성한 전리품을 의미한다. 여기엔 과장법이 있으나 암시적으로 사울 통치의 특징을 물질적 번영으로 규정한 것이기도 하다.
“나의 형 요나탄 형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프오. 형은 나에게 그토록 소중하였고 나에 대한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소”(26). 26절에서는 다윗과 요나탄 사이의 아름다운 우정을 노래한다.
이 시는 사울과 요나탄의 삶과 행위를 객관적으로 표사하지는 않지만 당대 사울 통치 경험을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다. 이스라엘 초대 임금의 통치는 비교적 번성한 시기이며 제한적이나마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사울의 왕권은 다윗 통치와 왕국으로 가는 길을 예비한다.
2사무 2,1-7 다윗이 유다의 임금이 되다
“그 뒤 다윗이 주님께 여쭈어 보았다. ‘유다의 성읍들 가운데 한 곳으로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그에게 ‘올라가거라.’ 하고 이르셨다. 다윗이 다시 ‘어디로 올라가야 합니까?’ 하고 여쭈어 보자, 그분께서는 ‘헤브론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1).
이 본문에서는 다윗이 헤브론을 얻고 신속하게 유다의 임금이 되는 장면을 다룬다. 이 본문의 주요 관심사는 ‘다윗이 헤브론으로 가게 된 것은 주님께서 인도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데 있다. 저자는 당시 다윗과 필리스티아인의 관계라든지 헤브론을 차지하게 된 의미 같은 것을 설명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임금’이 된다는 것이 다윗의 생애에서 참으로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매우 간결하게 언급한다. 또한 다윗 권력 상승 전승에서는 그가 헤브론에서 유다의 임금이 된 것은 전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는 과정의 첫 단계에 불과한 것으로 본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1절의 목적은 다윗이 사울과 요나탄의 죽음을 애도한 후 첫 번째 한 행동이 주님께 여쭙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주님께 여쭙는 방법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예언자나 사제를 통했을 수도 있고, 제비 뽑기 형태로 이루어졌거나 단순히 기도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탈출기(28,6)의 사제의 의복에 관한 규정에서 소개되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사제를 통해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경우 에폿이 사용되었을 것이다(1사무 23,9; 30,7). 그와 함께 제비뽑기 도구로 사용되었던 우림과 툼밈 역시 사제의 옷에 달도록 되어 있었다(탈출 28,30).
헤브론은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구릉지에 자리 잡은, 유다에서 제일가는 성읍으로 아브라함(창세 23장)과 야곱(창세 35,27)과 관계가 있는 고대 성읍이다. 사라와 아브라함을 이 성읍 근처에서 장사 지냈고, 여호수아기 15장 13-14절과 판관기 1장 20절에 따르면 칼렙 부족이 이 성읍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윗이 헤브론으로 간 것은 필리스티아의 승인에 따라 이루어졌을 것이다. 다윗의 새 왕조는 필리스티아의 속국이 되었다. 사울의 죽음으로 필리스티아인들은 유다를 포함하여 팔레스타인 지역 대부분을 지배하게 된 것으로 이해한다. 이는 다윗 집안과 사울 집안의 싸움이 계속된(2사무 3,1) 이유이기도 하다.
헤브론은 다윗이 차지하기 전에는 칼렙 부족에 속했으며 유다 지파의 영역 밖에 있었다. 이때까지의 헤브론은 원로나 족장이 다스렸을 것이다. 다윗은 나발에게 그의 양 떼를 괴롭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대가를 요구했듯, 헤브론 성읍 사람들에게도 군사적 행동이나 무력 시위로 자신의 보호권을 강요했을 수 있다. 이들도 나발처럼(나발도 칼렙 부족에 속했다) “도대체 다윗이 누구며 이사이의 아들이 누구냐?”(1사무 25,10)라고 외치고 싶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다윗이 헤브론을 차지했다는 것은 그 지역 전체의 통치자가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600여 명의 장정등과 그 가족들이 다윗과 함께 그곳에 정착했다는 것은 다윗의 군대와 그 식솔들의 수가 2,000명 가까이 되었음을 뜻한다. 당시 성읍들은 비교적 작은 곳으로 이처럼 많은 정착민을 일시에 수용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자 유다 사람들이 와, 거기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유다 집안의 임금으로 세웠다. 다윗은 사울의 장례를 치른 이들이 야베스 길앗 사람들이라는 소식을 듣고”(4). 4절의 “유다 사람들”은 원래 사울 왕국의 일부였다. 그래서 이사이의 아들들이 사울의 군에 복무했다. 그런데 사울이 패배하고 아브네르가 요르단 서편으로 철수한 다음부터 사울 가문은 유다 지파를 지배할 수 없었다. 다윗이 헤브론의 통치자가 되자, 얼마 후 유다 사람들(헤브론 사람들이 아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의 임금으로 삼았다. 이때까지 기름부음은 세속적 의식이었는데, 솔로몬 이후부터 비로소 사제들이 그 의식을 수행하게 되었다. 더 후대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대사제가 이 의식을 수행했을 것이다.
4ㄴ-7절에서는 야베스 길앗 사람들에게 보낸 다윗의 메시지를 다룬다. 그런데 다윗이 보낸 메시지에 야베스 길앗 사람들이 어떤 응답을 했는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부정적 응답이어서 성경 저자가 삭제했다는 설도 있으나, 만일 그 설이 맞다면 이 본문 전체가 삭제되어야 했을 것이다.
야베스 길앗은 이스 보셋이 있는 이스라엘의 수도 마하나임과 멀지 않은 곳으로, 그들이 이스 보셋을 등지고 다윗과 유대 관계를 맺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윗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정치적 조건은 물론 다른 어떤 조건도 없이 다윗은 야베스 길앗 사람들과 우호 관계가 맺어지길 바랐을 것이다.
4ㄴ절의 야베스 길앗은 요르단 동편의 중요한 성읍이었다. 야베스 길앗 사람들의 용감한 행위는 사무엘기 상권 31장 11-13절에 자세히 나온다. 그들의 행동은 사울의 통치 초기에 사울이 자신들을 암몬 사람들에게서 구해 준 데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1사무 11,1-11).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고대인들에게는 시신이 장사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된다는 것은 커다란 불명예였다.
“여러분의 주군 사울이 세상을 떠났지만, 주먹을 불끈 쥐고 용기를 내십시오. 유다 집안이 나에게 기름을 부어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았습니다”(7). 5ㄴ-7절은 다윗의 실질적 메시지다. 다윗의 메시지는 전형 형식을 띤다. 이 서신은 다윗의 즉위 직후에 보냈을 것이다. 5절에서 야베스 길앗 사람들이 주군 사울에게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다윗이 주님께 복을 비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6절에서 야베스 길앗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그들을 유익하게 해 주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한 것은 다윗이 사울의 책임을 떠맡고 있음을 드러낸다. 즉 다윗은 이 말로써 자신이 사울의 진정한 계승자임을 암시적으로 주장한 셈이다. 7절에서는 야베스 길앗 사람들의 임금은 죽었지만 다윗 자신이 사울의 뒤를 이어 유다의 임금이 되었으므로 그들에게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그들을 격려한다. 다윗이 야베스 길앗 사람들을 격려한 주된 목적은 자신의 실질적인 세력 확대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4ㄴ-7절은 다윗과 야베스 길앗 사람들에 관해서만 기록하고 있지만, 당시 배경과 7절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이스라엘 전체에 보내는 메시지이다. 유다를 통치할 새로운 임금의 첫 번째 행적은 이스라엘의 한 부족에게 호의와 위로를 베푸는 것이다. 이는 다윗 자신은 유다 사람이지만 마음은 온 이스라엘에게로 향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곧, 다윗은 다시 주님을 거역하지 않고 주님과 뜻을 같이하며 그분과 함께 행하는 인물로 소개되었다(6절). 그러므로 다윗은 이스라엘 내에서 왕위 찬탈을 위한 반역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윗은 다만 우호의 손길을 펼치고, 유다 지파가 그랬듯이 이스라엘 지파들도 적당한 때에 자신에게로 와 주기를 기대한 것이다.
2사무 2,8-11 이스 보셋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다
8-11절은 1-4ㄴ절의 구조와 유사하면서도 대조를 이룬다. 8절에서 이스 보셋이 마하나임으로 간 것은 3절에서 다윗이 헤브론으로 간 것과 대조를 이루며, 9절에서 이스 보셋이 왕위에 오른 것은 4ㄱ절에서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것과 대조를 이룬다. 1-4ㄱ절은 주님의 축복이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되고, 8-11절의 사실은 주님께서 거절하신 결과로 나타난다.
“사울 군대의 장수이며 네르의 아들인 아브네르가 사울의 아들 이스 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갔다”(8). 8절은 앞에 나온 사건들과 거의 같은 시대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아브네르와 이스 보셋의 관계는 좀 불분명하지만, 이스 보셋의 부친 사울과 아브네르가 사촌지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사무14,50). 아브네르는 여러 전투에서 사울을 수행했고(1사무 17,55; 20,25; 26,5) 사울 군대의 장수로 경험 많은 용사였다. 사울이 죽은 후 그는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고, 이스 보셋은 단지 명목상 우두머리에 불과했다.
이스 보셋은 이스위(1사무 14,49), 에스바알(1역대 8,33; 9,39)과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히브리 말 이스위는 ‘주님의 사람’이라는 뜻의 그리스 말에 예시우(이스이우)로 번역되어 결국 에스바알과 같은 뜻을 지닌다. 바알은 본래 ‘주, 주인’이라는 뜻으로, 에스바알은 ‘바알의 사람’ 곧 ‘주님의 사람’과 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알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숭배 금지된 우상이기 때문에 ‘수치’라는 뜻의 히브리 말 ‘보셋’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스 보셋과 에스바알은 ‘수치의 사람’ 또는 ‘부끄러운 사람’을 가리키는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마하나임은 요르단 동편의 중요한 성읍으로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지났던 곳이다(창세 32장). 정확한 위치는 알기 어려우나 요르단 강에서는 상당히 멀리 떨어졌고(2사무 2,29), 야뽁 강에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을 것이다. 마하나임은 솔로몬 시대에 행정 구역의 중심지였다(1열왕 4,14).
아브네르가 왜 임시 수도를 마하나임으로 정했는지 그 이유는 설명되지 않아 추측할 수밖에 없다. 필리스티아의 지배 아래 들어갔던 요르단 서편과는 달리 마하나임은 아마도 필리스티아의 영향권 밖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하나임에는 벤야민 지파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그들의 충성스러운 지지를 기대했을 수도 있다.
“거기에서 그는 이스 보셋을 길앗과 아수르족과 이즈르엘, 에프라임과 벤야민과 온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9). 9절은 이스 보셋이 임금이 된 경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스 보셋은 아브네르의 손에 임금이 되었다. 주님께서 지명하지도 않았고, 백성들도 환영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왕직을 수행하는 데 반드시 있어야 할 두 가지 기본적인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아브네르는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이지만, 임금을 세우는 일은 그 혼자 단행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마도 아브네르가 다윗과 제의를 계획하면서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의논한 것으로 보아서(2사무 3,17) 그 원로들이 이스 보셋이 왕위에 오르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후에 다윗은 이스 보셋을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라고 하지 않고, “의로운 사람”(2사무 4,11)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스 보셋을 살해한 행위를 사울을 죽인 행위보다 더 악한 행동으로 강조한 것(2사무 4,10-11)으로 미루어 이스 보셋을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로 인정했었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벤야민 지파 사람들은 이스 보셋을 합법적 임금으로 인정했을 것이다.
이스 보셋은 요르단 동편에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음에도, 9절에서 요르단 서편 지파들까지 열거되는 것은 이스 보셋의 주장을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스 보셋은 자기 지파인 벤야민 지차조차 감당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10ㄱ절과 11절의 연대기적 자표는 후대 이스라엘과 유다 임금 기사들에 대한 서문형식을 지닌 것으로 보아 신명기계 역사가가 추가한 부분이다. “이스 보셋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된 것은 마흔 살 때 였다.”는 부분은 성경 저자가 잘못 기록했거나 정확한 숫자가 아닌 대략적 숫자일 것이다. 사울의 장남 요나탄은 한 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그 밖의 형제들은 너무 어려서 자녀가 없었다. 따라서 이스 보셋은 사울의 막내로 어려서 최후의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또한 아브네르가 이스 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갔다는 사실(2사무 2,8)로 미루어 보아도 그가 사십 세가 된 장년이 아니라 어린 소년이었을 거라는 추측이 더 적절하다.
이스 보셋이 2년 동안 다스렸다는 기록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다윗과 이스보셋이 거의 같은 시기에 각자 통치를 시작한 것 같고, 이스 보셋이 죽은 직후 다윗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된 것 같은 인상인데, 헤브론에서 다윗의 통치 기간은 7년 6개월로 이스보셋의 통치기간과 차이가 난다. 이는 이스 보셋 측 사람들이 이스 보셋이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다윗과 적대 관계를 유지했음을 짐작케 한다(2사무 3,1). 따라서 이스 보셋이 죽은 후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기 전까지의 공백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윗 임금과 이스 보셋 임금의 통치 기간은 불확실하나, 다윗의 통치 시작을 대략 기원전 1000년경으로 보고, 이스 보셋의 통치도 다윗과 거의 같은 시기로 본다. 성경 저자에게 이스 보셋의 통치보다 중요한 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려 하는데, 그 자리에 이스 보셋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8-11절은 아브네르, 이스 보셋 그리고 그들이 활동 중심지 마하나임을 소개함으로써 내란의 일화(2,12-3,1)데 대한 일종의 서막 기능을 한다.
북부 지파들에게 갑작스레 닥친 지도력의 공백은 사울의 군대 사령관인 아브네르로 하여금 전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이스 보셋을 왕좌에 앉힌 것은 북구 지파의 백성들이 아니라 바로 아브네르였다. 이스 보셋은 임금이 되기에 부적격자였으나 아브네르는 자신이 임금이 되려는 계획을 정당화하고자 그를 미끼로 이용했다.
2사무 2,12-3,1 유다와 이스라엘이 기브온에서 싸우다
사무엘기 하권 2장 12절-3장 1절에는 아브네르 휘하의 군사들과 다윗의 사령관 요압 휘하의 군사들 사이에 벌어지는 최초의 충돌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네르의 아들 아브네르와, 사울의 아들 이스 보셋의 부하들은 마하나임에서 기브온으로 출정하였다. 츠루야의 아들 요압도 다윗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출정하여 기브온 못 가에서 그들과 마주쳤는데, 한편은 못 이쪽에, 다른 편은 못 저쪽에 자리 잡았다”(12-13).
이 전투에서 아브네르는 요압의 동생 아사엘을 죽이는데, 요압은 후에 이 일을 근거로 아브네르의 제거를 정당화한다. 아브네르와 요압 사이에 일종의 내란이 발발한 것이다. 이 전쟁이 얼마나 지속되었으며, 양편이 각각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그곳에는 츠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사이와 아사엘이 있었는데, 아사엘은 들에 사는 영양처럼 달음박질이 빨랐다”(18).
츠루야란 이름의 뜻은 '분열됨'으로 다윗의 누이이다. 유대인의 관습에 따르면,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그 계대(係代)를 말하게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18절에서 요압, 아비사이, 아사엘이 '츠루야의 아들'로 기록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든 듯하다. 츠루야가 특별히 뛰어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요압, 아비사이, 아사엘과 다윗과의 친분 관계를 보다 강조하기 위함이다.
요압이란 이름의 뜻은 '주님은 아버지이심'이다. 이러한 요압은 다윗 왕조의 중심 인물이며 또한 본서에 빈번히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다윗의 조카로서 다윗이 왕이 되기 전부터 다윗을 추종했으며, 이스라엘의 통치 영역을 확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요압은 아비사이의 동기로서(1사무 26,6), 아비사이처럼 포악하다. 그는 다윗의 군대를 지휘하고, 암몬을 정복하였다. 다윗에게 충성하였지만 거칠고 신중하지 못한 탓으로 압살롬이 죽은 뒤 군대를 지휘하는 권한을 두고 한때는 아마사가 요압의 자리를 대신한다. 요압은 압살론을 예루살렘으로 큰 구실을 하였으나, 압살롬의 반란을 허용하지는 않았다. 요압은 아마사를 없애고 다시 군대의 장수가 된다. 그러나 그가 저리른 살인죄들과 특히 아도니야에게 보내는 지지(1열왕 1,7) 탓으로, 그는 솔로몬의 명령에 따라 처형당한다. 저자는 아브네르가 이스 보셋을 배반하려고 했는데도 요압이 그를 살해한 것은 잘못이었음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면서 저자는 요압이 아브네르를 죽인 것은 동생 이사엘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었다고 해명한다.
아비사이는 '선물의 아비'란 뜻이다. 아비사이 역시 형 요압과 함께 일생 동안 다윗 왕조에 충성을 다한 자이다. 그는 요압과 더불어 다윗 군대의 유력한 장군이 되어 압살롬의 반역을 평정하며 다윗의 목숨을 구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그는 혼자서 창으로 삼백 명의 적군을 무찌른 일로 유명하다. 그는 요압과 마찬가지로 포악하였다.
아사엘이란 '하느님께서 만드심'이란 뜻이다. 요압과 아비사이의 동생으로서 다윗의 30용사 중 한 사람이다(23,24). 다윗의 군대 장관이었기도 한 그는 특히 발 빠르기로 유명하였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이스 보셋의 대장 아브네르에게 살해당하고 마는 불운을 격는다(23절). “아브네르가 다시 아사엘에게 “내 뒤는 그만 쫓고 물러서라. 내가 너를 쳐 땅바닥에 쓰러지게 할 까닭이 없지 않느냐? 그렇게 되면 네 형 요압 앞에서 내가 어떻게 머리를 들겠느냐?” 하고 말하였다. 그래도 아사엘은 물러서기를 마다하였다. 그래서 아브네르는 창끝으로 그의 배를 찔렀다. 창이 등을 뚫고 나오자 그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 아사엘이 쓰러져 죽은 자리에 다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곳에 멈추어 섰다”(22-23).
아브네르는 아사엘과의 싸움을 피하기 위한 것임에는 분명하다. 즉 아브네르는 행여라도 자신과의 싸움에서 아사엘이 다치거나 죽는 것을 염려한 것이다. 그러나 그와 관련 아브네르이 굳이 요압을 들먹거린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때문에 학자들마다 견해를 달리하고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전에 아브네르과 요압은 친구 관계였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즉, 다윗이 사울왕의 핍박으로 인해 도피하기 이전에는 이들이 서로 군대의 동료로서 우정을 나누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아브네르이 대세가 다윗측에게로 기우는 것을 확인한 후 앞으로 자신이 요압의 세력하에 들어가게 될 때 그 후환을 염려하여 이 같은 말을 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아브네르가 요압의 사나운 성질을 잘 알고 있어서 그의 복수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이같이 말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들은 어디까지나 확실한 증거를 댈 수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이 추측들 모두가 가능성이 없는 것들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 가지 견해들을 종합하여 22절을 해석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이다.
단지 다윗의 부하들이 아브네르의 부하들보다 강했다는 말이 있지만(3,1), 결정적인 승자가 누구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2사무 3,2-5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들
다윗은 헤브론에서 여섯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 암논은 배다른 여동생 타마르를 범하게 되어, 압살론에 죽음을 당하게 된다. 킬압은 1역대 3,1에서 '다니엘'(Daniel)로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암논과 압살롬이 죽은 후 네째 아들 아도니야가 다윗의 장남 행세를 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1열왕 1,5-10)그도 일찍 죽은 것 같다. 압살롬은 암논을 살해하고 다윗에게 반역을 일으켰다가 요압의 손에 죽고 만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수르 임금 탈마이 딸 마아카이 있다. '그수르'(Geshur)은 요르단 강 상류의 동쪽 지경에 위치하고 있던 작은 독립국으로, 당시 다윗 왕가와는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다윗은 이 나라의 공주 마아카와 정략 결혼을 한 셈인데, 그 결과는 오히려 훗날 큰 반역을 일으킬 압살롬을 낳게 된 것이다. 즉 어떤 이유에서든 아내를 많이 거느리는 것은 명백히 신정 국가의 왕에 대한 율법에 위배되는 행동으로서, 다윗은 이 일로 인해 마침내 큰 곤욕을 치루게 된 것이다(15장).
아도니야는 훗날 이복 동생 솔로몬과 왕위 쟁탈전을 벌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마는 비정한 인물이다. 스파트야라는 이름의 뜻은 '주님께서 심판하셨다'이다. 그러나 이트르암(5절)과 더불어 그 행적은 달리 알려진 것이 없다.
2사무 3,6-21 아브네르가 이스 보셋을 배반하다
“사울 집안과 다윗 집안 사이에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아브네르는 사울 집안에서 점점 강해졌다”(6). 이스 보셋와 아브네르의 불화는 사울의 후궁 리츠파를 아브네르가 차지하였다. 이에 이스 보셋은 “장군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후궁을 범하였소?”라고 말한다. 이스 보셋의 질문에 대한 아브네르의 분노에 찬 답변이다. “이스 보셋의 말에 아브네르가 몹시 화를 내며 대꾸하였다. ‘내가 유다의 개 대가리란 말이오? 오늘날까지 나는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안과 그분의 형제들과 친구들에게 충성을 다하였고, 당신을 다윗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소. 그런데도 당신은 오늘 한낱 여자에 관한 잘못을 들어 나를 꾸짖으시오?”(8). 유다인들은 개를 경멸의 대상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의식법상 사체(死體)에 닿기만 해도 부정하다고 생각하였는데, 개는 썩은 고기나 시체를 먹는 동물로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의 대가리'이란 '하찮은 사람', '형편 없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결국 8절은 '내가 유다 편에 선 반역자, 곧 형편없는 사람이냐'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아브네르는 사울 왕실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3,6), 스스로 왕위에 오를 뜻을 품었다가(3,7-11) 이스 보셋의 반항에 부딪치자 그를 저버리고 다윗에게로 돌아선다(3,12-16).
“이스 보셋은 아브네르를 두려워하여 그에게 다시는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하였다. ”(11). 당시 이스 보셋이 명색만 왕이었을 뿐 아무런 권력도 지니지 못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는 구절이다. 만일 이스보셋에게 실제적 통수권이 있었다면 그는 자신에게 공식적으로 반역을 선포하고 나선 아브네르에게 대한 체포 명령을 그 즉시로 내렸을 것이다.
“아브네르는 다윗에게 자기 대신 사자를 보내어 이렇게 전하였다. ‘이 땅이 누구 것입니까? 저와 계약을 맺어 주십시오. 제가 임금님의 편이 되어 온 이스라엘을 임금님께 돌아가게 하겠습니다”(12). “이 땅이 누구 것입니까?”라는 아브네르의 이 말에는 복선(伏線)이 깔린 이중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즉 이 말의 표면적 뜻은 '이 모든 이스라엘의 땅은 바로 다윗 당신의 것입니다'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하지만 실제로 이스라엘 땅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아브네르입니다'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즉 아브네르는 이 같은 말로써 다윗이 통일 왕국의 위업을 순조로이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아마 아브네르는 이같은 제의를 통하여 다윗으로부터 적절한 보상과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으려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분명 다윗의 왕권을 허락하신 하느님의 뜻과 주권을 이해치 못한 행동이다. 즉 아브네르는 능히 자신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다윗이 아브네르와의 화친을 맺는 조건으로 건네는 요구이다. 그런데 이처럼 다윗이 미칼을 자기에게 데려오라고 했던 이유에 대하여 혹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을 펴기도 한다. 즉 다윗이 정략적인 차원에서 다시금 사울 왕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는 견해이다. 물론 우리는 그같은 측면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곧 다윗이 아직도 미칼을 사랑하여 잊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첫째, 미칼은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포피 백 개를 바치고 정혼한 여인이며(14절), 둘째, 그녀는 사울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여인이었으며, 세째, 그녀 자신이 다윗을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이유로 지금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다윗이 다시금 미칼을 되찾게 된다면 그것은 곧 사울에 의해 부당하게 박탈된 자신의 공적 권리와 신분을 회복하게 된다는 의의를 지닌다.
아브네르는 다윗과 협정을 맺고 북부 지파들을 다윗에게 넘기겠다고 약속하는데, 여기서 이루어진 묵계는 요압을 대신해서 아브네르가 사령관이 된다는 것이었다. 한편 다윗은 사울의 작은딸이자 자신의 아내였던 미칼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스 보셋은 다윗의 요구를 승낙하고 미칼을 그에게 보낸다.
아브네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윗을 임금으로 맞아들이는 것이 지헤로운 일임을 설득시키고 나서(3,17-19), 설득에 성공했음을 다윗에게 알리자(3,20-21) 다윗은 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요압은 사령관 직책을 빼앗길 판이어서 달가워하지 않는다.
2사무 3,22-39 요압이 아브네르를 죽이다
요압은 아브네르를 죽일만한 합법적인 구실을 갖고 있었던 까닭에 아브네르를 죽인다. “아브네르가 헤브론으로 돌아오자, 요압은 그와 더불어 조용히 이야기하겠다고 그를 성문 안쪽으로 데려갔다. 그런 다음 요압은 거기에서 그의 배를 찔렀다. 아브네르는 이렇게 요압의 동생 아사엘의 피를 흘린 탓에 죽었다”(27). 요압은 아비네르에게 조용히 말할 것이 있다고 부른다. 이는 요압이 마치 아브네르에게 개인적으로 은밀히 얘기할 것이 있는 것처럼 꾸며 그를 유도한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요압이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행동이다. 왜냐하면 그가 진정 자기의 동생 아사엘의 복수를 하려 했다면 좀더 당당히 아브네르과 맞서야 했기 때문이다
다윗은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대처하여 북부 지파들의 마음을 산다. 다윗은 왕의 신분으로서 마치 자신이 상주(喪主)인 양 아브네르의 장례식을 주도하며 상여 뒤를 따라간 것은 곧 아브네르의 장례식의 국장(國葬)으로 치뤄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다윗이 이처럼 아브네르의 장례식에 특별히 신경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곧 백성들의 의혹을 불식(拂拭)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즉 아브네르의 죽음은 다윗이 요압과 짜고서 행한 짓으로 오해받기 충분하였다. 때문에 다윗을 불신한 이스라엘 지파들은 다시금 이스 보셋과 결탁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브네르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함으로써, 그의 죽음이 자신과는 무관함을 백성들에게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37절).
아브네르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다윗의 행동을 본 백성들이, 그제서야 다윗이 요압과 결탁하여 아브네르을 죽였을 것이라는 의혹을 푼 것을 뜻한다(37절). 그리하여 다시금 백성들이 다윗을 신뢰하며 호의(好意)를 갖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다윗의 진실된 행동은 오히려 위기를 극복하고 온 백성들의 마음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진실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달을 수 있다.
다윗은 아브네르의 죽음에 공식적인 애도를 표명하고, 조가를 지어 바쳤으며, 영웅으로 대접하여 장례를 치러 준다(3,26-39).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은 오늘 이스라엘에서 위대한 장수 하나가 쓰러진 것을 모르오? 내가 비록 기름부음 받은 임금이지만 오늘은 이렇게 약하구려. 츠루야의 아들들인 이 사람들이 나에게는 너무 벅차오. 주님께서 악을 저지르는 자에게 그 악에 따라 갚아 주시기를 바랄 뿐이오”(38-39). 이처럼 다윗이 아브네르 살해 사건을 보고 받자마자(28절) 즉시 요압을 처벌하지 않고 대신 하느님께 심판을 맡긴 까닭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즉 군대의 총사령관으로서 요압이 지니고 있던 강력한 세력 때문이다. 그리고 다윗이 요압을 처벌할 경우 발생할지도 모를 유다 지파의 내분 때문이다. 또한 모든 이스라엘의 통일에 있어서 요압과 같은 용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상의 이유들 때문에 다윗이 처벌을 일시 유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압을 사면(赦免)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다윗은 죽기 전 솔로몬에게 유언하기를, 끝내 회개치 않고 왕국에 대한 반역 행위를 계속 저질렀던 요압을 처형토록 지시하였기 때문이다(1열왕 2장).
2사무 4,1-12 이스 보셋이 죽다
“아브네르가 헤브론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사울의 아들 이스 보셋은 두 손에 맥이 빠졌다. 온 이스라엘도 혼란에 빠졌다”(1). 북부 지파 사람들에게 지도자라고는 약하고 무능한 이스 보셋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우둔한 기회주의자 두 사람(레캅과 바아나)이 다윗의 칭찬을 들을 양으로 이스 보셋을 암살한다(4,1-8). 다윗은 사울을 죽였노라고 내세우던 사람을 처형한 것과 똑같이 이스 보셋을 암살한 자들 역시 공개적으로 처형한다(4,9-12). 그리고 이스 보셋을 아브네르 무덤 곁에 장사 지낸다.
“다윗이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부하들은 그들을 죽인 다음 그들의 손과 발을 자르고 헤브론의 못가에 달아 매었다. 그러나 이스 보셋의 머리는 거두어 헤브론에 있는 아브네르의 무덤에 장사 지냈다.”(12).
2사무 5,1-5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다
사무엘기 하권 5장-12장 대목은 다윗을 온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묘사한다. 이 대목에서는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하느님에 의해 선택된 임금이지만 여전히 나약하고 죄 많은 인물인 다윗을 묘사하기 위해 많은 이야기가 결합된다. 하느님은 사울의 죄와 달리 다윗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그를 배척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신다. 그의 지도력 아래 이스라엘이 통일되고 주변의 적들이 정복되었으며 예루살렘은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가 된다. 또한 계약 궤가 하느님 백성 사이에서 하느님 현존의 상징으로 다시 등장한다. 다윗은 압살롬과 세바의 반역 때문에 잠시 통치를 하지 못한 것을 제외하고는 솔로몬이 그를 계승할 때까지 곧 기원전 1010년부터 970년까지 임금으로서 나라를 다스린다.
5,1-5절 본문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는 과정을 두 단계로 보여 준다. 첫 번째 단계(1-2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다윗에게 청하는데, 이는 예비적 대표 파견에 해당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3절)는 북부 지파들의 공식 대표단인 ‘원로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1-2절에서는 다윗 옹립의 정당성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이 나타난다. 즉 다윗이 그들과 골육이라는 것, 사울 임금 때도 다윗이 더없이 유능한 장수였다는 것, 주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몰려가서 말하였다. ‘우리는 임금님의 골육입니다”(1). 1절의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문자 그대로 헤브론에 모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도 모든 지파의 지도자들이 모였을 것이다. ‘골육’은 혈연 관계를 의미하는 데, 다윗과 미칼의 결혼을 전제한 것일 수 있다.
“전에 사울이 우리의 임금이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출전하신 이는 임금님이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될 것이다.’ 하고 임금님께 말씀하셨습니다”(2). 2절의 ‘출전하다’는 군사적인 용어로 지휘자의 활동을 의미한다. 지도자들(원로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울 통치 기간에도 다윗은 어떤 면에서 숨겨진 메시아였다. 이는 다윗의 탁월한 군사적인 업적을 의미한다. 고대 세계에서 임금은 ‘목자’로 불렸다. 주님을 목자로 묘사하는 표현들이 나오지만(시편 23,1-3; 이사 40,11), ‘목자’라는 호칭으로는 아주 드물게 사용되었다(창세 48,15; 49,24).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모두 헤브론으로 임금을 찾아가자, 다윗 임금은 헤브론에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 그들과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3). 3절에서는 다윗의 즉위를 간략히 설명한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계약을 맺는다. 상호 간의 의무에 대한 합의가 아니라 다윗이 이스라엘에게 여러 의무를 부과했거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떤 약속을 보장하고 주님 앞에서 보증했을 것이다. 이 계약이나 의무 규정이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에 실제적 통일을 이룩한 것은 아니었다. 두 나라가 독립을 유지하면서 다윗의 지도하에 연합을 이루었던 것이다(2사무 20,1; 1열왕 12,16). 그러나 계약을 통해서 상호 관계가 상당히 진전되었을 것이다. 여기서는 사제의 도움을 받지 않고 원로들이 직접 다윗에게 기름 붓는 의식을 거행한 것 같다. 기름 붓는 예식은 기름병(1사무 10,1; 2열왕 9,1)이나 뿔(1사무 16,1; 1열왕 1,39)에 담긴 기름을 ‘기름부음 받을 이’의 머리에 붓는 것이다.
현 위치에서 3절을 보면 얼핏 이스 보셋이 살해되자 곧바로 이스라엘 원로들이 헤브론에 와서 다윗을 이스라엘 임금으로 기름 부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사무엘기 하권 2장 10-11절과 5장 4-5절을 보면 5년의 공백 기간이 있었던 것 같다. 즉 다윗이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기 전에 일종의 공백 기간이 있었으며, 이스라엘에 대한 통치를 점진적으로 확립해 갔을 것이다. 통일이 오랜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역대기상권 12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1-3절은 긴 역사를 요약한 내용이라 하겠다. 1-3절은 다윗의 이스라엘 통치가 두 가지 중요한 요인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즉, 주님의 선택(2ㄴ절)과 다윗의 자질과 능력에 대한 백성들의 인식이 그것이다. 이는 신학적인 면과 정치적인 면 모두에서 다윗 통치의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다윗은 서른 살에 임금이 되어 마흔 해 동안 다스렸다. 그는 헤브론에서 일곱 해 여섯 달 동안 유다를 다스린 다음, 예루살렘에서 서른세 해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4-5). 4-5절은 다윗 통치에 관한 통계 자료로, 신명기계 역사가의 첨가 부분이자 다윗의 이스라엘 통치에 대한 서론이기도 하다. 4절의 “서른 살”은 인생의 전성기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도 “서른 살쯤”에 공생활을 시작하셨다(루카 3,23)고 한다. ‘마흔(사십)’은 자주 사용되는 어림수이다. 사십 년은 한 세대를 나카내는 기간으로, 다음 세대에 의해 완전히 대체되는 기간을 의미한다. 5절의 “일곱 해 여섯 달”은 다른 숫자에 비해 정확한 정보로 보인다.
이 예식으로 다윗은 최초로 전체 지파들의 임금이 되고 열두 지파들은 그를 자기네 유일한 지도자로 인정한다. 이제 그들은 사무엘로 대표되는 옛 통치 형태에서 벗어나서 왕정 체제로 옮겨 간다. 사무엘은 대다수 지파들에게 권위를 가진 것으로 나타나지만 분명히 임금은 아니었다. 사울은 모든 지파를 자기 휘하에 결속시키기 직전까지 이르렀으나 다윗과 유다의 지지를 보존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주의해야 할 사실은 다윗이 모든 지파들의 임금으로 군림하기는 하지만, 그의 칭호는 두 지역의 분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다윗은 유다(남부)와 이스라엘(북부)의 임금인 것이다.
2사무 5,6-12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다
이 본문은 예루살렘과 다윗이 명성을 떨치는 내용을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 동시에 다윗이 달성한 승리와 번영은 주님의 축복이었음을 명시한다(10절; 2사무 5,20). 하느님께서 다윗 왕국을 세우셨을 때 다윗의 주된 관심은 백성들의 구원이었다(2사무 3,18).
“다윗 임금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에 사는 여부스족을 치려 하자, 여부스 주민들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너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도 너쯤은 물리칠 수 있다.’ 그들은 다윗이 거기에 들어올 수 없으리라고 여겼던 것이다”(6). 6절의 “부하들”이란 헤브론에서 다윗이 조직한 군사들이다. ‘예루살렘’은 우가리트 신화에 나오는 새벽과 여명의 신 ‘살렘’과 관계가 있으며, ‘살렘(신)의 기초 세움’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시대에 이 이름의 한 요소인 ‘살렘’이 히브리 말 샬롬(평화)과 결합되었다.
예루살렘은 중앙 산악 지대의 분수령에 위치한 전형적인 산악 요새로, 동쪽에는 키드론 골짜기, 서쪽에는 티로포에온 골짜기, 남쪽에는 힌놈 골짜기 등 삼면이 골짜기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이다. 다윗 당시 예루살렘은 이미 유명한 고대 성읍이었는데,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전 유다와 이스라엘이 이 성읍 주변 지역을 지배했지만, 이들은 휴전 상태였던 것 같다. 이 성읍에 살던 사람들은 가나안 사람들 중 하나인 여부스족이었다.
6절의 “눈 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에 관한 언급은 무척 난해하다. 여부스 주민들은 자기들의 성이 난공불락이기 때문에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이라도 그 성읍을 방어하고 다윗 군대를 물리칠 수 있으리라 자신했을 것이다. 따라서 6절은 항복하라는 다윗의 위협에 대한 여부스 주민들의 답변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8절에서 다윗은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여부스 주민들과 동일하게 취급하면서 명령한다. 그래서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은 전쟁을 하기 전에 상대에게 퍼부은 비웃음과 욕설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윗은 시온 산성을 점령하였다. 그곳이 바로 다윗 성이다”(7). 7절의 “시온 산성”은 예루살렘에 대한 가나안식 이름으로, 다윗이 이곳을 정복한 후 “다윗 성”이라 이름 지었다. 그 후 이 ‘시온’이라는 명칭은 없어지지 않고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전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날 다윗이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여부스족을 치려는 자는 지하 수로로 올라가, 이 다윗이 미워하는 저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을 쳐라.’ 여기에서 ‘다리저는 이와 눈먼 이는 궁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 생겨났다”(8). 8절에서는 시온 산성을 정복한 사실을 간략하게 전해준다. 아마 원본은 더 자세했겠지만 성경 편집자가 줄였거나 사본이 훼손되어 짧아졌을 것이다.
“그날”은 다윗 부하들이 여부스인의 요새를 정복한 날을 가리킨다. 역대기 상권 11장 4-9절에 의하면, 다윗은 “누구든지 제일 먼저 여부스족을 쳐 죽이는 이가 우두머리와 장수가 될 것”(6절)이라고 말했고, “츠루야의 아들 요압이 제일 먼저 올라가 우두머리가 되었다.”(6절)고 한다. 역대기계 역사가는 이 본문이 너무 난해하였기에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이 이야기를 첨가시켰을 것이다. 이는 시온 산성 정복에 요압이 영웅적 업적을 세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누구든지 여부스 족을 치려는 자는 지하 수로로 올라가”라는 말은,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곳의 물 공급원(지하 수로)을 차지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아마도 다윗 부하들은 여부스인들을 물의 공급원에서 차단시켰거나 수로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여부스인들의 항복을 받아 내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지하수로는 모두 세 종류가 있는데, 키드론 골짜기의 기혼 샘의 물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워런의 수직 통로, 실로암 수로, 히즈키야 터널이 그것이다. 워런 수직 통로는 1867년 워런이 처음 발견했는데, 많은 학자들은 바로 이 터널이 이 본문에 나타난 지하 수로일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통로는 다윗 시대 이후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실로암 수로는 기혼 샘의 물을 저지대의 힌놈 골짜기에 저장하기 위해 건설된 400미터 길이의 수로이다. 이 수로는 성 밖에 위치해 있어서 전시에 적군이 포위할 경우 사용할 수 없었다. 히즈키야 터널은 이름이 말해 주듯 히즈키야 임금이 만든 것으로 기혼 샘의 물을 성 안의 실로암 저수장까지 흐르도록 바위를 파서 만든 터널이다.
“다윗이 미워하는 저 다리저는 이와 눈먼 이들”은 6절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신체의 일부가 불편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쳐부수어야 할 적을 말한다.
9절에서는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그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여부스인들은 추방당하거나 집단으로 살해당하지도 않았다. 다윗이 통치할 당시 예루살렘에는 여부스인들이 훨씬 더 많이 살았을 것이다. 에제키엘 시대까지도 예루살렘을 “너는 가나안 땅 출신이다. 너의 아버지는 아모리 남자고 너의 어머니는 히타이트 여자다.”(에제 16,3)라고 말했다.
‘밀로’(9절)의 의미와 위치는 불확실하다.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밀로는 인공적으로 옹벽이나 그 밖에 다른 기초로 떠받친 계단 모형을 말한다. 열왕기 상권 9장 5절과 24절 등을 보면 밀로를 건축한 사람은 솔로몬이다. 우리 본문에서는 이런 결과를 미리 예상하고 밀로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 같다. 다윗 시대 이전에 이런 밀로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솔로몬이 그것을 다시 건축하거나 기존의 구조물을 보수하고 확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윗은 세력이 점점 커졌다. 주 만군의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10). 10절은, 다윗의 성공은 주님께서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이라는 신학적 해설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을 ‘권력 상승 전승’의 결론으로 본다.
“티로 임금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단과 함께 향백나무와 목수와 석수들을 보내어, 다윗에게 궁을 지어 주게 하였다”(11). 11절에서 티로 임금 히람이 향백나무와 목수와 석수들을 보낸 것은, 사전에 다윗과 히람 사이에 보다 광범위한 조약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페니키아는 이스라엘로부터 식량을 공급받고(1열왕 5,23), 이스라엘 영토를 통과하는 무역로의 안전을 확보했다. 이런 협력관계 안에서 이스라엘은 무역을 할 수 있었고, 또 페니키아로부터 물질문명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현재 문맥에서 이 구절이 전하려는 바는 티로의 부요하고 영향력 있는 임금이 즉시 사절단과 자재와 기술자들을 보낼 정도로 다윗의 업적에 감동했다는 것이다.
향백나무는 내구성이 강하기로 유명하며 지붕 재료, 판자 재료, 기둥 등으로 사용되었다. 이것들은 레바논 산지에서 수입되었으며, 뗏목으로 엮어서 예루살렘과 가까운 항구인 야포로 운반되었다(2역대 2,15).
“그리하여 다윗은 주님께서 자기를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튼튼히 세우시고,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자기 왕권을 높여 주신 것을 알게 되었다”(12). 12절은 10절과 마찬가지로, 다윗의 물질적인 성공과 번영은 하느님의 축복으로 인식된다.
2사무 5,13-16 다윗의 아내들과 아들들
13-16절에서는 다윗의 후궁들과 아내들과 아들들이 소개된다. 특히 아들들의 명단은 임금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음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실례이다. 그러나 아들들의 명단은 아내들의 아들들만 소개했을 가능성이 있다(1역대 3,9 참조). 또한 여러 어머니의 맏아들만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아들들은 사무엘기 하권 3장 2-5절에 소개된 여섯 명의 아들에 이어 열한 명의 아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의 이름은 삼무아, 소밥, 나탄, 솔로몬, 엘리사마, 엘야다, 엘리펠렛이다”(14-16). 다윗의 아들은 계보상 17명이다. 차기 임금 솔로몬의 왕위 계승 서열은 열 번째였다.
헤브론에서 태어난 아들들 중에는 두 아들의 이름에 주님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으나(아도니야, 스파트야),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아들들 중에는 주님과 관련된 이름이 없다. 다윗의 아내들이 예루살렘 출신(즉, 여부스 여인들)이었다면 이 아들들의 이름에 주님의 이름이 내포되지 않은 것을 이해할 만하다. 왜냐하면 대개의 경우 어머니가 이름을 지어 주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결혼은 외교적인 탸협을 의미한다. 다윗은 결혼을 통해서 중요한 가문들과 관계를 견고히 세웠으며 왕가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확보하였다. 시편에 의하면 많은 아들들은 가문의 힘이다(시편 127,3-5). 그러나 다윗의 경우 많은 아들들이 불화와 골칫거리의 원인이 되었다. 특히 압살롬, 암논, 아도니야가 그러했다.
2사무 5,17-25 다윗이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워 이기다
다윗이 유다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었던 기원전 1000년경에는 주변에 있는 강대국들이 매우 약화된 상태였다. 이스라엘 서남쪽에는 이집트가 있었고 북동쪽에는 아시리아가 있어서 이스라엘 주변의 작은 왕국들은 항상 이들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다. 그런데 다윗 시대에는 이 강대국들이 저마다 국내 문제로 고심하느라 주변 작은 왕국들을 통제할 힘도 여유도 없었다. 이 기회에 작은 왕국들은 저마다 이집트와 아시리아로부터 자체 방어를 할 수 있는 크고 강력한 왕국을 세우려고 국토 확장의 꿈을 꾸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다윗도 생존을 위해 국경선을 확장해야 했다. 다윗은 우선 필리스티아인들을 무찔렀고(2사무 5,17-25), 다음에는 주변 모든 나라들을 발밑에 종속시켜(2사무 8,1-14) 마침내 아시리아 국경에서부터 이집트 국경에까지 닿는 제국을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다윗은 자기 왕국 안에서는 물론 모든 국경선 일대에서도 평화를 누리는 태평시대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