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셉나와 엘리아김
이사야 22:15~25
셉나와 엘리아김은 역사적 실재 인물입니다. 이 두 사람은 이사야 당시 가장 최고위급 신하로서 왕을 보좌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사야 36장에 보면,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하여 여러 성읍을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정복하려고 랍사게 장군을 보내어 위협하였을 때 유다측 협상단으로 랍사게를 만난 사람들 세 사람의 명단에 이 두 사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셉나와 엘리아김은 실제로 당시 유다의 정부 각료로서 가장 중요한 직책을 감당하던 자들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 두 사람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돌연 개인적 예언을 주시는 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통상적으로 이사야 선지자는 나라와 민족의 큰 틀에서의 운명에 대하여 예언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개인의 운명에 대하여 예언하는 것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한 민족이나 한 나라나 큰 공동체의 흐름을 보고 계시면서도, 그러한 전체 상황 속에서 행하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과 삶에 대하여서도 여전히 시선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무너뜨리는 중에도 그 성읍 중에 여전히 의인으로서 자기의 신앙 양심을 지켜가며 그들의 악한 행위를 인하여 괴로워하며 옳다 여기지 않았던 롯을 하나님께서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합 왕과 이세벨 시대에 바알 숭배가 온 땅을 뒤덮을 때에 아합 왕궁에는 모두가 왕에게 아첨하며 그 왕의 바알 숭배에 동참하는 악한 종들만 있었지만, 그런 중에도 궁내대신 오바댜만큼은 왕의 바알 숭배를 옳다 여기지 않고 여호와의 종 백 명을 아합 왕의 흉악한 칼날에서 보호하여 두 군데의 굴에 오십 명씩 숨겨놓고 자기 사비를 들여서 그들을 먹이는 복된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바댜를 기억하였습니다. 또한 예레미야 시대에도 유다 백성들이 다들 악을 행하는 시대에도 저 구스 사람 내시 에벳멜렉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를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낸 일을 하나님은 기억하셨고 복을 주셨습니다. 또한 이방인 출신 겐 족속이었지만 오직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기를 변치 아니하였던 여호나답의 후손들인 레갑 족속들도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침략 중에도 보호하사 그들을 계속하여 보호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로 서게 해주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고 나머지 개인들과 한 가정이나 한 가문은 도매금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한 가문이나 한 개인들의 운명까지도 항상 관심을 갖고 지켜 보고 계시며, 그들의 언행심사를 자세하게 그 저울에 달아보시며, 그들의 앞길을 하나하나 자상하게 인도해가신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언을 하라고 명한 인물은 당시 유다 왕 다음에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는 셉나였는데, 그가 가진 권력은 국고를 맡은 직임과 왕궁을 맡은 직임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다윗 왕가의 궁내대신의 역할 뿐 아니라 나랏 살림을 맡은 재무대신의 역할까지 감당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직임을 왕으로부터 받았다면, 그는 왕과 백성들을 섬기는 이 귀하고 무거운 직임을 감당하려고 최선을 다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직임을 이용하여 엉뚱한 일에 힘을 쏟고 있었습니다. 그가 힘쓴 일은 무엇일까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의 책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네가 여기에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에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내었도다”
이 한 절의 예언의 말씀에 보면, ‘여기와, 여기에, 여기서’라고 ‘여기’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면 이 ‘여기’라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여기’라는 장소는 바위를 파서 만드는 묘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묘소가 돌을 파서 굴을 만들어 그 안에 시신을 놓아두어서 살이 다 썩고 없어지면 그 뼈만을 추려서 그 무덤 굴 안쪽에 이미 장례가 끝난 조상들의 뼈에 함께 던져 넣어서 장례를 완전히 마치곤 합니다. 일종의 가족묘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족묘를 만드는 것은 매우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많은 비용도 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 셉나는 자기가 맡은 중대한 국사는 팽개치고, 자기 개인의 가족묘를 화려하고 장대하게 만드는 일에 골몰하여 예루살렘 성문밖의 골짜기에 내려와서 자기 묘자리 만드는 공사 현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서 그 묘실 만드는 공사 현장에 찾아와서 현장 감독하고 있는 셉나를 향하여 이 책망의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에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 내었도다”
여기서 보면, ‘너를 위하여, 자기를 위하여, 자기를 위하여’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셉나가 매우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그 개인 묘실을 조성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탐욕스럽게 그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명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묘실의 화려함과 그 규모들을 만들어서 죽은 뒤라도 사람들이 그 묘실을 보면서 그의 권세와 화려함과 직분의 드높음을 기억하며 찬양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향하여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에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는 셉나가 그렇게 많은 재물을 들이고 시간을 드리고 공력을 들여서 자기가 묻히고 자기 후손들이 묻힐 크고 장대한 가족 묘식을 만들었지만, 이 노력이 헛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셉나는 자신이 후일 자기 수한을 다 채운 후에 이 예루살렘에서 평안히 죽게 될 것이고, 그 후에는 자기 몸을 준비한 그 묘실에 평안히 안장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지만, 이 예상과는 전혀 달리 셉나는 그 묘실과 아무 상관 없이 천리 만리 머나먼 곳으로 끌려가서 거기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7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이 바로 그러한 뜻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너를 단단히 결박하고 장사같이 세게 던지되 반드시 너를 모질게 감싸서 공같이 광막한 곳에 던질 것이라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 네가 그곳에서 죽겠고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에 있으리라 내가 너를 네 관직에서 쫓아내며 네 지위에서 낮추리니”
여기서 보면, 하나님께서 셉나에 대하여 얼마나 거칠게 다루시는지, 단단히 결박하여 둥글게 만들어진 공처럼 만들어서 힘센 장사가 멀리 던져버리듯 그를 멀리 던지는데, 그 던져진 곳이 ‘광막한 곳’입니다. ‘광막한 곳’이라는 단어는 ‘평평하여 끝없이 펼쳐진 들판’ 같은 곳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산들이 많고 골짜기가 많은데, 이와 달리 드넓디 넓은 들판만이 끝없이 펼쳐진 개활지를 가리키는 것이 광막한 곳입니다. 이는 저 앗수르의 땅이나 바벨론의 드넓은 들판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여하튼 이 셉나는 이스라엘 밖의 드넓은 이방 땅에 내던져진 공처럼 굴러가서 거기서 죽게 되는 운명에 떨어집니다. 하나님은 셉나에게 ‘그곳에서’ 죽겠고 그의 영광의 수레도 ‘거기에’ 있으리라고 반복하여 ‘거기서’라는 말을 언급합니다. 아까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대목에서 세 번이나 ‘여기’라는 단어를 쓰시더니, 대조적으로 ‘거기서’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반복하여 쓰십니다. 그는 지금 여기서 헛된 일이 분요하며 자기 죽음 이후의 영광된 미래를 꿈꾸지만 사실 그는 비참한 최후를 전혀 다른 곳 외롭고 먼 이방의 변경 거기서 맞이하게 될 비참한 운명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타고 다니던 영광의 수레도 그 멀리까지 끌려가서 버려지는 운명에 처할 것입니다.
그가 이러한 신세가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셉나를 향하여 책망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가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불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릇이 안되는데도 많은 직임을 탐내어서 다 차지하였고 그 영광에 걸맞는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고자 힘써야 하는데, 도리어 그 영광과 권세를 악용하여 자기의 개인적인 영광을 드높이는데 시간과 물질을 다 쏟았던 것입니다. 셉나는 자기에게 귀한 직분을 맡겨준 왕에게 아첨하면서 틈틈이 여러 가지 즐거운 잔치를 벌여서 왕을 만족시켜주면서, 왕의 귀와 눈과 입을 막았고, 백성들의 진정한 안위와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 애쓰기보다는 그들을 착취하며 압제하면서 자기 개인의 만족과 영달을 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결국 그에게 관직에서 쫓아내시고 그의 지위를 낮추시겠으며 그의 결국은 그처럼 비참한 죽음을 황막한 타향에서 맞이하도록 하시겠다고 그 묘지 자리에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직접 예언해주신 것입니다.
셉나의 일을 통하여 우리가 명심해야할 교훈은 이거입니다. 즉 나라와 백성과 하나님의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우리들은 거룩한 근심을 가져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셉나는 당시 왕의 최측근 보좌관으로서 대단한 권세와 영광을 누렸지만 실상 그는 왕과 왕의 가문에 대한 거룩한 염려를 갖지 않았습니다. 백성이 올린 각종 세금을 맡은 국고 맡은 권세를 가진 자가 되었지만, 그는 백성들의 고통과 그들의 고난을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수많은 전쟁의 고통과 삶의 불안정으로 인하여 백성들의 삶은 참으로 고단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아픔과 왕의 염려를 인하여 가슴 아파하며 염려해야 마땅한 그가 오직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일에만 골몰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악한 자가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가장 중대한 직임을 맡아 그 일에만 몰두해도 모자란 판국에, 지금 자기 개인의 묘실 만드는 것에만 온갖 수고를 다하고 있었으니 참 어처구니 없는 일 아닙니까? 당시 나라는 앗수르의 군대의 위협으로 망할 처지인데, 셉나는 애굽의 군대가 쳐들어와서 자기들을 지켜줄 것을 믿었거나 앗수르 정치인들과 사적으로 내통을 하고 있어서 그랬는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기는 수한을 다 채우고 이 예루살렘서 임종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족과 백성과 자기가 섬기는 왕과 왕의 가문인 왕족들의 안위에 대하여 아무런 염려와 근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기적이고 불충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십니다.
아모스 6장에 보면 이르기를,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포악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고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켜며 양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6:3~8상)
나라가 위급하고 지도자는 황급해하고 백성들은 발을 동동 구르는데, 자기는 등이 따뜻하고 배 부르다고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나 즐기고 방탕하게 지내면서 요셉의 환난 곧 동족의 환난을 인하여 근심하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공동체의 고난과 역경을 보면서 이기적인 마음을 품고 홀로 안일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사실상, 셉나가 섬기는 유다 공동체는 주의 백성, 주의 나라,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셉나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나라가 겪는 환난에 대하여 아무런 염려와 근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5:11,12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
고 하였습니다. 이 불경스러운 자 셉나는 하나님의 집을 섬기는 고귀한 직분과 권세를 맡았는데도 곧장 전쟁의 화마가 덮치고 자기가 맡은 나라의 모든 재화가 불타고 백성들이 다 칼에 맞아죽어가고 다윗 왕궁의 모든 식솔들이 다 포로로 끌려가고 다윗 가문이 다 멸족이 될 위기를 만났는데도, 그는 그 일들을 미리 대비하며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자기 자신과 자기 가문의 안일만을 추구하면서 뒷전으로 애굽 왕실과 결탁하고 앗수르 신하와 결탁하면서 자기 자신의 안위에만 힘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불신앙과 그의 악한 모습에 대하여 분노하시고 그를 결국 그 자리에서 내쫓으시고 그를 낮추시고 그 스스로 자신만만한 미래를 완전히 깨뜨리고 가장 비참한 말년과 죽음을 맞이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나 자신은 안전하고 평안하고 든든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교회가 안전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후퇴할 때, 주의 형제 자매가 환난을 만났을 때 함께 아파하며 근심하며 거룩한 염려를 갖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1:28,29에 이렇게 사도 바울이 자기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의 일도 잘 관리하며 가꿔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주의 일이기도 합니다. 자기 집안의 일을 엉망으로 하면서 주의 일을 한다고 덤벼들면 이것도 덕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자기 일은 주밀하게 정리 정돈하고 정성을 다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쏟으면서도, 주의 일은 늘 뒷전으로 미루고 자기의 역량의 부스러기, 자기 사랑과 시간과 관심의 찌꺼기만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며 섬긴다고 말한다면, 주님은 결코 속지 않으십니다.
빌립보서 2:19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의 동역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합니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들이 다 자기의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 2:19~22)
주의 일을 다 함께 하여도 충성된 마음으로 하는가 아니면 자기 일을 먼저 내세우면서 하는가 하는 점을 사도 바울은 눈여겨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섬기며, 교회를 섬기는 중에도 주님은 다 보고 계시고 달아보고 계시며 우리 중심을 다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우리 마음 중심이 셉나 같은 사람,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그 대신 진실로 충성된 사람,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바로 그렇게 충성되고 신실한 일꾼을 오늘 본문 말씀 20절에 하나님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 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향하여 하나님은 ‘내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이라고 부르는 호칭을 붙여준 사람은 모세, 여호수아와 같은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진실하게 하나님께 전적으로 충성을 다한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내 종’이라고 부르신 바 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충성스러운 일꾼인 엘리아김을 부르시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21절 상반절을 읽겠습니다.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 힘 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여기서 옷과 띠를 바꿔 입히는 것은 곧 셉나의 모든 직분, 권력을 엘리아김에게 넘겨준다는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바꿔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원하는 자에게 권세를 주시되 순식간에 그렇게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절대로 저 사람은 권력을 잃지 않겠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서 빼앗아서 저 사람에게 주실진대,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여로보암에게서 빼앗아서 그 부하에게 주시며, 아합 가문에게서 빼앗아서 예후 장군에게 주시기로 작정하실진대, 누가 하나님의 손을 막을 수 있던가요? 그가 원하시는 자를 높이며, 그가 작정하신 자를 낮추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세상사를 바라보면서 저럴 수가 있는가 하는 순식간의 일들을 볼진대, 너무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일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행하셨음을 깨닫고 두려워하며 겸손함으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랬을 때 이 엘리아김은 어떻게 행할까요? 셉나처럼 불충하고 악하고 이기적이고 육신의 쾌락을 위하여 그 직무를 악용할까요? 21절 하반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의 집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아비의 마음, 어미의 마음을 가지고 섬길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께서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항상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의 마음, 헌신의 마음으로 섬기는 자가됩시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께서 권세를 주시는데, 다윗 집의 열쇠를 주십니다. 22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엘리아김에게 다윗 왕실의 모든 제반사를 맡아서 섬기는 귀중한 권한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가의 국가 경영의 일과 집안의 궁중 대사도 다 그가 담당하여 관여하는 권한을 준 것입니다. 그가 닫으면 열 자가 없고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과거 요셉이 애굽 왕 바로 밑에서 행한 것과 같은 막강한 권세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충성된 자에게는 이러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충성된 자가 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모두 다윗 집인 교회에서 귀하게 쓰임받은 일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충성스럽게 맡겨진 직분에 헌신했을 때 주어지는 복이 어떤 것일까요? 23절과 2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그의 아버지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그 후손과 족속 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모든 항아리까지니라”
여기서 그렇게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내 종’이라고 사랑스럽게 불러지며, 셉나의 자리를 대신 맡아서 일하게 된 엘리아김이 충성을 다할 때 어떤 은혜가 주어지냐면, 못이 단단한 곳에 깊이 박힘같이 그를 견고하게 해주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못이 얼마나 단단하게 잘 박혔는지, 그는 그 아버지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되는 영광의 근원이 됩니다. 또한 그의 집안의 모든 영광이 그 못에 걸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 집안의 모든 그릇 곧 종지로부터 모든 항아리까지 걸리도록 허락하시는데, 종지와 항아리는 모두 보잘것없는 인물을 상징합니다. 보잘것 없고 연약하여도 바로 엘리아김이라는 충성되고 복된 일꾼 덕분에 모두가 귀하게 영광스러운 반열에 속하게 되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ㅁ니다. 모두가 그 집안 사람이라고 하면 다들 인정해주고 존경해주고 잘대우해주는 복을 받고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 덕분에 귀하게 여겨주는 은혜를 주십니다.
마치 요셉 덕분에 애굽에서 그 형제들이 안정을 얻고 평안을 얻었던 것과 같습니다. 다윗 덕분에 그 집안이 다 복을 받았듯이, 또 사울의 큰 아들 요나단의 충성스러움 덕분에 그 후손인 므비보셋과 그 후손들이 다윗 왕조 시대에 다 귀하게 여김받듯이, 다윗을 잘 섬겼던 마하나임의 귀족 바르실래 덕분에 그 후손들이 다 존귀한 존경을 받았듯이, 요나답 덕분에 그 후손 레갑 자손이 다 복을 받았듯이, 한 사람 덕분에 그 후손들이 다 영광스럽게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못과 그릇의 비유는 우리 구주 예수님의 존귀하신 충성으로 인하여 그를 믿는 자들이 받는 복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 못에 걸린 모든 자들은 다 존귀와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되되, 종지 그릇과 같이 미약하고 항아리 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그릇과 같은 우리들까지도 다 함께 그 단단한 못에 걸려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천국 기업에 참여할 복을 누리며 그 영광에 동참할 은혜를 누림과 같습니다. 할렐루야. 단단한 못과 같이 충성스럽게 자기를 하나님께 바쳤던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 못에 종지 그릇 같이 못난 우리를 걸어두사 영원히 떨어지지 않게 매달아 놓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영원히 찬양합니다.
그런데 이 엘리아김의 권세와 영광은 영원할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2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는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으리니 그 못이 부러져 떨어지므로 그 위에 걸린 물건이 부서지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만군의 여호와는 만유의 주권을 가지신 대주재자 하나님을 일컬을 때 언급되는 하나님의 호칭입니다. 그 대주재자 하나님께서 선포합니다. ‘그 날에는’ 하나님의 개입하시는 그 날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그 역사의 변곡점이 되는 날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심판하사 바벨론에 파시는 날입니다.
그 날에는 나라 전체가 다 무너지는 날입니다. 그 때에는 엘리아김의 권세와 영광도 무너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단단히 박혀놓았던 그 못이 삭아서 부러져 떨어지게 될 것이요 그 못에 걸린 모든 종지와 항아리까지 더 떨어져 부서지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여기서 부러진 못은 셉나를 가리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셉나거나 엘리아김이거나 간에 중심교훈은 동일합니다. 그 중심 교훈은 아무리 잘 박힌 못이라도 결국은 부러지고 그에게 속한 그릇들이 다 떨어지고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권세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광은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시편 146:3~5 말씀에,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권세는 유한하지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왕의 어깨에 맨 정사와 권세는 영원합니다. 그는 정사를 매었고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은 무궁하며 그 왕좌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영원히 굳게 세우십니다. 그 나라를 쇠하지 아니하며 망하지 아니하며 세세토록 존재합니다.
다니엘 7:14 말씀에서도 예언하기를,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고 예수님이 다스릴 나라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걸린 못은 결코 삭지 않습니다. 결코 부러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도중에 떨어져 부서지거나 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에게 걸린 우리를 끝까지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종지 그릇 같이 못난 우리들을 끝까지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인간 지도자는 아무리 충성된 자라도 끝까지 책임져주지 못합니다. 요셉이 아무리 충성되었으나 그가 죽으니까 그의 형제들의 가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신세가 되었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끝까지 책임져주시고 애굽에서 건져내주셨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인간의 유한함을 깊이 명심하고,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하나님처럼 신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전존재를 드려 의지하고 매달려야 할 분은 오직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못 충성된 하나님의 청지기이신 우리 구주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를 의지할 때 우리들은 어떤 경우에도 잃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을 신뢰하고 더욱 충성합시다. 또한 주님께서 섬기도록 인도하신 몸된 교회에서 더욱 충성합시다. 그리할진대, 주님께서도 계시록 3:21 말씀처럼, 예수님의 영광의 보좌에 우리를 불러 함께 앉게 해주시는 복을 우리 모두에게 베풀어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