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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 매달린 버스 안내양] 1920년대 버스의 도입과 함께 나타난 버스 안내양은 아직 치마저고리가 익숙하던 시절, 등장과 동시에 세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그녀들의 옷차림과 상냥한 미소는 뭇 사내들뿐만 아니라 같은 여성들에게도 문화적 쇼크였을 것이다. 당시의 버스 안내양들은 17~18세 전후였고, 아직 부모님 곁에서 응석 부릴 나이에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부득이하게 도시로 나와 버스를 탈 수밖에 없던 철부지 소녀들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처음 등장한 버스 안내양은 해방이 되고는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그 대신 남자들이 차장으로 등장하는데, 그들에게서 친절한 서비스는 기대할 수 없었다. 오히려 욱하는 성질에 손님들과 멱살을 잡기 일쑤였다. 이에 1961년, 버스 안내양 제도가 재도입된다. 이때에도 버스 안내양들의 대부분은 지방에서 대도시로 돈을 벌기 위해 올라온 누이들이었다. 그녀들은 돈을 벌어 고향 가족의 생계까지도 일부 책임지던 씩씩한 아가씨들이었다. 그녀들은 온몸으로 밀려드는 손님들을 차 속으로 밀어 넣고, 정작 자신들은 버스 출입구 손잡이에만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야만 했다. 버스에 구겨 넣어진 사람들의 불만과 성추행에 가까운 짓궂은 학생들의 손장난을 버텨야 했고, 어린아이의 차비를 내지 않으려는 엄마와, 회수권 열 장을 교묘하게 잘라 열한 장으로 만든 학생들과도 실랑이를 해야만 했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욕설을 퍼붓는 취객들 때문에 눈물을 쏟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렇게 버스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버스 안내양도 버스에 앞문이 생기고, 사람들이 그 앞문에 있는 수거함에 차비를 넣기 시작하면서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제는 사라진 옛 추억,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만 가는 ‘탕탕!’, ‘오라이’ 소리. 가끔 버스를 탈 때면 그때 그 시절 버스 안내양이 문뜩 생각나곤 한다. 밝은 웃음으로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즐거움을 주던 버스 안내양, 그녀들의 환한 미소를 떠올리며 그 시절로 추억 여행을 떠나 보자.
친구들은 고등학교도 마치지 않고 부산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버스 안내양들이었다. 부산에 온 진숙 씨도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한 버스 회사로 들어갔다. 회사 면접은 간단했다. 버스 안내양이 모자랐기 때문에 등본 한 통이면 면접을 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증명사진을 붙인 이력서도 필요 없었다. 지금과 같은 입사 체계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여기서 조금 일하다가 싫증나거나 대우가 좋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미련 없이 옮겨 다닐 수 있었다. 진숙 씨도 27세까지 8년가량 일하면서 거친 회사가 다섯 군데나 된다. 어쨌든 그렇게 면접을 보고 며칠 견습 생활을 한 후 바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처음 탔던 버스는 태화여객 59번, 당시 구포에서 에덴 공원까지 가는 노선이었다. 59번 버스는 지금도 있는데, 현재는 노선이 조금 달라져서 화명동에서 주례를 거쳐 부산역으로 달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