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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늬우스 스크랩 희망을 노래하는 여자, 양희은.
카덴자 추천 0 조회 4 07.11.12 00:47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어리다면 어린 나이지만 난 유난스럽게도 양희은의 노래가 좋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고 그냥 그녀의 목소리가 좋고, 그녀의 노래가 좋다. 그래서 쓰게 됐다. 희망을 노래하는 여자, 인생을 노래하는 여자, 시대를 노래하는 여자. 그래서 멋진 여자, '양희은' 에 대해서.

 

 

 


돈을 벌기 위해 가수가 되다.

 

 

1952년 8월 13일, 무더운 여름날에 양희은은 육군 대령 집안의 맏딸로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을 정도로 엘리트였던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양희은에게 클래식을 비롯해 많은 음악을 들려주었고 종로에서 노래 잘 부르기로 유명했던 어머니는 양희은을 데리고 항상 맑고 청아한 동요를 불렀다.

 

 

그러나 육군 대령집안의 이 평화로운 부유함은 채 10년도 가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1961년, 그녀의 나이 10살 때 부모는 이혼을 했고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집을 걸어 나와야했다. 아버지와 떨어지는 그 순간부터 가혹한 생존경쟁에 휩싸여야 했던 양희은은 동생 양희경과 함께 어머니의 일을 도우며 끼니를 연명해야 했고 어렵사리 마련한 가게에 화재가 나는 등 우여곡절을 몸소 겪어야했다.

 

 

어두웠던 그녀의 인생에 한줄기 빛이 들어온 때는 바로 19살 되던 1970년이었다. 단순히 "돈" 을 벌고 싶었던 그녀는 당시 "금수강산" 에 출연하고 있던 동창 송창식을 찾아갔고 처음으로 '노래' 라는 것을 부르게 된다. 가수 양희은.......한 시대를 풍미한 '포크가수' 양희은의 탄생이었다.

 

 


 


김민기를 만나고, 인생을 배우다.

 

 

송창식을 만난 1970년 그 때, 양희은은 그녀의 음악 세계와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한 명의 작곡가를 만나게 된다. 한국 대중문화 역사의 '살아있는' 천재, 김민기가 바로 그였다. 김민기가 누구인가. 한국 대중문화 역사 상 가장 투철했던 '시대정신' 을 가지고 있던 작곡가, 현실에 참여하고 독재에 저항했던 진정한 예술인. 그가 바로 김민기 아닌가.

 

 

-양희은과 김민기의 만남은 한국 포크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김민기씨와는 어떻게 만나게 되신 겁니까? 미리부터 알고 있었나요?


  "김민기씨도 YWCA의 청개구리에서 본 적이 있었어요. 그때 그는 도비두(도깨비 두 사람)라는 이름의 듀엣으로 활동하고 있었죠. 언젠가 무대에서 미국 포크그룹 피터 폴 앤 메리의 ‘난 로큰롤 음악이 좋아(I dig rock and roll music)’를 부르는 걸 봤는데 기타를 굉장히 잘 친다고 생각했어요.

 

그를 직접 찾아간 것은 경기여고 동창생들이 ‘사은 리사이틀’을 준비하던 때였어요. 기타 반주를 부탁하기 위해서였죠. 물어물어 공연장 무대 뒤로 찾아갔더니 직감적으로 절 알아보더군요. 대뜸 얼굴을 쳐다보면서 ‘너 아버지 없지?’ 하고 묻는 거예요. 아무튼 별난 사람이었습니다. 이후 저와 김민기 김윤태 임문일이 몰려 다녔죠."

 

 

유신독재가 시작되고 시대상황이 암울해지던 그 때, 김민기와 양희은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느 날 밤, 우연찮게 김민기를 찾아간 양희은은 김민기가 부르던 노래에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울렁거림을 느꼈다. 무엇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김민기는 부르던 노래의 악보를 갈갈이 찢어 바닥에 버렸지만 양희은은 테이프를 들고 그 악보를 일일이 다시 붙였다.

 

 

그 노래가 한국 가요계에 길이길이 남을 명곡 중의 명곡이 될 줄이야! 이 곡이 바로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로 유명한 노래, <아침이슬> 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971년, 양희은은 김민기의 곡 <아침이슬> 을 발표하며 전 세대를 아우르는 반향을 일으킨다. 통기타와 청바지, 또랑또랑하지만 맑고 청아한 목소리, 비굴한 시대의 빛나는 저항정신을 노래한 그녀의 <아침이슬> 은 박정희 정권의 억압과 강요된 굴종을 넘어서는 시대정신의 심벌이 됐고 그녀는 남자들이 장악한 포크계에서 유일하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성가수로 급성장했다.

 

 

스무 살, 막 터질듯한 꽃봉오리 같은 그녀가 시대를 울리고, 사람을 울리고, 결국 역사를 울렸던 것은 결국 김민기가 있었기 때문이었겠지만 김민기의 <아침이슬><세노야 세노야>가 70년대 가장 사랑받는 포크송으로 기록될 수 있었던 것 역시 가수 양희은이 있었기 때문 아니었을지. 세간에서 말하는 것 처럼 그들의 만남은 '역사적 동체' 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김민기씨와는 1971년 첫 앨범과 이듬해 앨범, 1978년의 앨범까지 모두 세 차례 작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양희은씨 노래인생 전체를 보면 짧다고도 할 수 있는 기간이지만, 일반인들에게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하나로 묶인 ‘역사적 동체(同體)’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음악적 측면에서 양희은씨는 김민기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리고 김민기씨는 양희은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김민기씨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그를 천재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와의 작업은 제 음악인생의 처음인 동시에 절정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의 감수성은 당시 기준에서 볼 때 너무도 맑았으니까요. 다른 음악가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서정성은 지금도 놀라울 정도지요.

 

 ‘아침이슬’을 비롯한 그의 곡들이 시대상황 덕분에 이름을 얻게 된 부분도 있겠지만, 노래가 오래가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손을 보면서) 노래도 사람의 손금처럼 생명선이 있다고 전 믿어요. 1년짜리가 있는가 하면, 10년짜리 노래도 있고 50년 가는 노래가 있는 법이죠. 오래 가는 노래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뛰어난 인물입니다. 물론 그는 저에 대해 ‘희은이는 노래를 못해. 그게 노래냐?’ 하고 말하곤 하죠. 그 사람 맘에 드는 게 세상에 뭐 있나요?"

 

 



암, 그리고 투병.

 

 

김민기와 이주원이라는 한 세대의 천재들을 만나면서 70년대 가장 뛰어난 포크가수로 성장한 양희은은 통속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시대를 노래했다. '긴급조치 9호' 가 발동되면서 <아침이슬><상록수> 를 비롯해 그녀의 많은 곡들이 금지곡으로 선정됐지만 대중들은 길거리에서, 대학교에서, 집안에서, 마음속에서 그녀의 노래를 끊임없이 불렀다.

 

 

"노래로 할 이야기가 사랑밖에 없다면 난 노래를 하지 않았다." 던 양희은의 당찬 포부는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중앙 정보부의 감시를 받으며 도피 생활을 하던 김민기와 그의 '페르소나' 라는 죄목으로 끊임없이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야 했던 양희은. 그들의 인생이 70년대의 아픔을 대변했다는 사실은 역사로 기록될 만큼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높은 음반 판매량을 자랑했지만 당시 상황으로 돈을 벌지 못했던 양희은은 여전히 가난했고 결국 81년 숨가쁜 가수 생활을 잠시 접고 1년간의 여행길에 오른다. 1년 동안의 유럽 여행으로 그녀는 한국을 떠났지만 '자유' 를 노래하고 '희망' 을 노래하고 '우리' 를 노래하는 그녀의 노래는 여전히 대한민국에 생동감있게 살아있었다.

 

 

하지만 1년만에 그녀는 예전의 밝고 건강한 모습이 아닌 환자의 모습으로 고국에 쓸쓸히 돌아왔다. 병명은 난소암 말기. 그녀의 인생에 불어닥친 가장 큰 시련이었다.

 

 

 -1981년 유럽 배낭여행을 떠나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한창 가수와 방송활동을 병행하던 시기에 외국으로 떠나기는 힘들었을 텐데요. 시기적으로는 신군부의 권력장악이나 5공화국 출범과 맞물리는데 그런 상황과 연관이 있었던가요?


  "직접적으로는 아닙니다. 물론 당시 상황에 심정이 답답해졌을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1970년대 중반 포크의 흐름이 막혀버린 상황이었고, 라디오 DJ를 하는 순간에도 방송국에는 정보부 요원이 2인1조로 배치되어 절 감시하곤 했으니까요.

 

가끔 ‘김민기 언제 봤어?’ ‘그 친구 어디 있는지 모르나?’ 하고 묻기도 했죠.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꼭 그런 게 아니어도 전 저대로 끊임없이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던 때였습니다. ‘썩은 나이’ 서른이 되면서 뭔가 새로운 것을 찾고 싶었어요. 타성에 젖는 게 싫어서 가수를 그만두고 전업을 고려했습니다. 마침 그 무렵 아는 분의 도움으로 보세의류회사 의류기획실장으로 적을 두고 있었고, 덕분에 여권을 얻을 수 있었어요."

 

 

 


희경아.....나 간다.....잘 있어.....

 

 

82년, 청바지에 통기타를 들고 노래하던 소녀는 조용히 병상에 누웠다. 두 번에 걸친 수술과 힘겨운 항암 치료로 머리카락은 빠지고 예전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는 힘을 잃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힘겨운 투병생활 속에서도 그녀는 84년 <하얀 목련> 을 발표해 공전의 히트를 쳤고 '희망' 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희망' 은 '절망' 이 되고 '웃음' 은 '슬픔' 이 될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라 하던가. 어느날 밤, TV 탤런트이자 뮤지컬 배우로 유명한 동생 양희경이 병실을 지키고 있던 날에 양희은은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다. 옆에선 동생 양희경이 곤히 잠들어 있었고 양희은은 천장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희경아.....언니 먼저 간다.......잘 있어.........."

 

 

지루한 항암치료와 대 수술로 인해 말할 힘조차 없었기에 입모양만 겨우 움직이던 그 때 기적처럼 동생 양희경이 벌떡 일어났다.

 

 

"언니, 나 두고 어디가!"

 

 

그것이 양희경이 깨자마자 외친 소리였고 양희은은 다행히 응급조치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도 듣지 못할 그 목소리를 잠들어있던 동생 양희경만은 들었던 것이다. 양희은의 말대로 "기적" 이라고 밖엔 말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그래서인지 항상 양희은, 양희경 자매는 말한다. 피가 물보다 진하다고.

 

 



결혼을 하고, 이민을 가고, 그리고 40대.

 

 

기적적으로 난소암을 극복하고 건강을 되찾은 양희은은 87년, 지금의 남편 조중문씨를 만나 미국으로 떠났다. 난소암으로 임신이 불가능했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줬고 만난지 3주만에 초스피드로 결혼에 골인했다. 양희은에게는 무엇보다도 안식처가 필요했고 남편은 그런 양희은에게 가장 적합한 존재였다.

 

 

근 10여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생활을 했던 양희은은 93년 다시 한국으로 조용히 돌아왔다. 70년대 일그러진 시대의 대항마로 자유를 노래했던 소녀는 30대에 암을 앓고 결혼을 하고 이민을 가고 40대가 되서야 다시 대중의 품에 안기게 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비슷한 시기에 김민기 역시 자유의 몸이 되어 극단을 세우고 예술혼을 불태웠으니 이들의 끊을 수 없는 '인연' 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다.

 

 

한국으로 돌아와 그녀가 다시 시작했던 일은 당연히 '노래' 였다. 95년도에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 이 히트하면서 동생 양희경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자 "예전엔 희경이가 내 동생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희경이 언니가 됐네." 라고 말할 정도로 시대는 급격하게 바뀌었지만 90년대에도 여전히 그녀의 노래는 미디어와 안방의 중심을 '관통' 했다.

 

 

그녀는 라이브 홀을 만들어 라이브 문화를 선도했고 전 관객수 매진을 기록하면서 공연 제작자들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서태지가 나오고, H.O.T.가 나오고, 핑클이 나오던 그 시절에도 여전히 양희은은 "포크음악계의 대모" 였고 "살아있는 전설" 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공연관계자들은 "양희은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공연문화의 흐름이 바뀌었다." 라는 평가를 자주하고는 한다.

 

 

그녀가 지금 '공로상' 을 받고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에 노래했던 가수" 였기 때문이 아니라 공연 문화를 개척하고 한국 대중문화사를 다시 쓴 "개척자" 이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 가수들은 과거에 비해 수명이 짧습니다. 신세대 가수 중에서 양희은씨처럼 30년을 견딜 사람은 없다고 단언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고요. 선배로서 그들에게 어떤 얘기를 들려주고 싶습니까?
 

 "전 돈을 버리고 ‘롱런’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가수와 돈의 관계는 기묘해서 노래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 이미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수는 인기든 위세든 내려갈 때 돈이 벌린다는 거예요. 또한 제가 오래갈 수 있었던 것은 ‘보여주는 게’ 뜸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제게 TV는 언제나 낯선 물건이었습니다. 뭐든 그렇지만 많이 보여주면 나중에는 보고 싶지 않은 법이죠."

 

 

 

 

 그녀가 노래하는 이유.

 

 

이렇게 끊임없이 그녀가 노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양희은이 던져놓는 해답은 간단하다.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의 노래는 "무서운 숙제" 이기 때문이라고.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운명, 하늘이 내려준 무섭고도 무거운 숙제. 그렇기에 자신은 3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노래를 계속 할 수 밖엔 없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말이 정답이 아닐까.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도 유구히 흘러내려온 그녀의 노래,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인생은 어쩌면 정말 하늘이 내려 준 "숙제" 와도 같은 것일테니까.  

 

 

그래서 난 그녀의 노래를 너무나도 사랑한다. <아침이슬><하얀목련><작은연못><세노야 세노야><백구><늙은 군인의 노래><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바로 85년 발표곡 <한계령> 이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발표된 이 곡을 23년이 지난 지금, 23살인 내가 듣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내가 지금 듣고 있는 노래가 10년 뒤, 20년 뒤에도 여전히 '양희은' 의 노래이기에 가치롭고 아름다운 노래이기를 바라며 이 글을 끝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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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7.11.12 04:37

    첫댓글 난 찔레꽃 피면, 서울 가는길, 우리가 오를 봉우리를 이 세곡을 갠적으로 최고라 뽑는다. 하얀목련은 필자의 실수라 하겠다. 대중과 영합한 곡. 최고의 절창을 보여준 여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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