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4: 27 차례를 따라 -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
사도 시대의 집회에서도 방언을 하는 것은 세 사람을 넘지 말아야 했고 또 반드시 통역하는 자가 있을 때만 공집회에서 허용되었다.
1]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방언을 말 할 때는 발표자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으로 제한하고 반드시 순서에 따라야 한다. 그러하지 아니하고 중구난방으로 말한다면 혼란에 빠질 수 있다.
2]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통역하는 자도 여러 사람이 함께 통역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혼자 하는 것이 혼란을 방지할 수 있다.
고전 14: 28 통역자가 없으면 -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
1]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1) 방언하는 자들은,
① 공중 질서를 지키기 위하여 한 사람씩 차서(次序)있게 할 것이고,
② 듣는 회중이 알게 하려면 그 말하는 방언을 통역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지시한 것은, 후대 교회보다 그때 초대 교회의 실정에 맞추어 한 것이다. 현대 교회에서 이렇게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현대 교회의 방언이 사도들의 역사(役事)로 나타났던 그것과 같은 수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아브라함 카이퍼
세계 삼대 칼빈주의 학자 중 하나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말하기를, "방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데 성령께서 말하게 하는 대로 말한 것이다. 그것은, 하늘 방언인데(천사의 방언은 아님), 죄악의 영향을 초월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또 말하기를, "방언의 이적이 오순절에는 완전하게 나타났으나 그 후에는 불완전하였다. 이것은 마치, 우리 마음에 받는 은혜가 처음엔 중생의 강한 것으로 나타나고, 그 후에는 비교적 현저하지 않은 영력(靈力)만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오순절에는 완전한 방언의 이적이 나타났고, 그 후에 지방 교회에서는 비교적 약한 분량으로 나타났다"고 하였다(The Work of the Holy Spirit, pp.134-135).
교회 시대(특별히 현대)의 방언 운동에 대하여 한가지 주의하여야 될 것은, 위에 카이퍼(A.Kuyper)가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이 사도적 역사의 완전성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적 이적은, 병자를 고칠 때 그 취급된 병자가 다 고침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시대의 신유는 그렇지 못하여 어떤 병자는 고치나 어떤 병자는 못 고치는 정도이다. 오늘날 참된 방언이 있다면, 그것이 그런 정도의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사도의 직접 지도가 없는 지금(교회시대)에 있어서 방언의 성격의 진위(眞僞)를 참으로 알 분이 누구이기에 교회에서 방언을 통역에 의하여 공식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고전 14: 29 예언하는 자 -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
이 부분의 말씀은,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직접 계시(啓示)를 받은 일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들이 예배 석상에서 그 받은 계시를 회중(會衆)에게 전달할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공중 질서(公衆秩序)를 무시하지 않고 전달되도록 할 것이었다. 한 집회에 너무 많은 사람이 예언하지 않도록 할 것과 하나씩 하도록 한 것은, 질서 있게 하므로 유익을 받도록 한 것이다.
1]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사도 시대의 공예배 시 예언도 둘이나 셋이 말하게 하고 다른 이들은 판단해야 했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권면과 위로를 받아야 했다.
2]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여기서 다른 사람이란 예언하는 능력을 소지한 신자를 의미한다. 즉 발표하는 자를 제외한 예언자는 발표자의 예언을 같이 듣고 그 예언이 성령의 의한 여부를 분별하여야 한다.
이러한 절차를 제시함은 교회 내의 질서를 세우는 데 그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