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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9:1-11:36) 9:14-10:4
(3)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2(9:14-2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14)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15)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16)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17)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18).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19)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20)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21)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22)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23).
본문개관
로마서 9:14-23절의 주제는 9:6-13절에서 제기된 하나님의 주권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무엇을 뜻하며,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과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 14-23절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9:6-13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스마엘 대신 이삭을, 에서 대신 야곱을 주권적으로 선택하여 아브라함의 약속과 축복의 계승자가 되게 하셨다.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은 에서와 야곱이 출생하기 이전에 이미 결정되었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어떤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자유와 은혜에 기인한다. 여기서 자연히 그렇다면 하나님이 불의하시느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에서와 야곱의 경우처럼 둘 다 똑같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여 선택하고, 에서는 미워하여 포기하셨으므로 그들의 책임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바울은 그가 로마서에서 강한 부정을 언급할 때 종종 사용하는 어구(語句)인 “그럴 수 없느니라.”(3:4, 6, 31; 6:2,15; 7:7,13)를 사용하여, 하나님은 결코 불의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왜 하나님이 에서대신 야곱을 일반적으로 선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불의하지 않는가? 바울은 이 문제에 관한 적절한 해명을 위해 구약에 나타나 있는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의 경우를 인용하였다. 이를테면 모세(15-16), 애굽왕 바로(17-18), 토기장이와 그릇(19-23)의 경우를 인용하여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다. 바울의 답변의 요지는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요구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 중에 누구에게 자비를 베푸시거나 누구에게 심판을 자초하도록 내버려 두셨다면,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나 심판에 영향을 미친다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의 주권성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본문주해
①모세와 바로
로마서에서 여러 번 사용되고 있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3:5; 4:1; 6:1; 7:7; 8:31)라는 질문은 바울이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을 더욱 분명히 들어내도록 하기 위해 어떤 오해를 가정하는 수사학적인 질문이다. 이것은 바로 나오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라는 질문에서 확인된다. 즉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야곱을 선택하였다고 해서 하나님이 과연 불의하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로마서에서 강한 부정을 말할 때 자주 사용하는 어구인 “그럴 수 없느니라.”(3:4, 6, 31; 6:2,15; 7:7,13)라고 하면서 단호하게 부인한다. 하나님은 결코 불의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누구를 선택하고, 누구를 포기한다고 해도 그가 불의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다시 제기된다.
15-18절에서 바울은 7-13절에서 이삭과 야곱의 성경적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처럼, 다시 모세와 바로의 성경적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누구를 선택하고, 누구를 버려도 그분은 불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먼저 15절에서 모세의 경우를 들어 입중하고, 그 다음 17절에서 바로의 경우를 들어 입증한다. 바울은 먼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긴다.”(출 33:19)는 말씀을 인용한다.
출애굽기 문맥에서 모세에게 주신 야훼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께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그의 자비하심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자유에 따라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용을 통하여 바울은 16절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역사가 사람의 원함과 노력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유에 달려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13절에서 인용된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말씀에 나타나 있는 대로 하나님은 자신의 자비하심에 따라 행동하여도 불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5절에 나타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17-18절에 나타나는 바로의 경우에는 부정적인 측면을 보여준다. 17절에 나타나 있는 출애굽기 9:16절의 인용은 하나님께서 애굽땅에 6번 째 재앙을 내릴 때 모세를 통하여 바로왕에게 전달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바로 왕에게 하신 말씀,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는 에굽의 바로 왕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이스라엘백성들에게)과 심판(바로왕과 그의 백성들)의 능력을 나타내는 방편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용을 통하여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난 날 바로왕을 사용하여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출애굽의 구원의 역사를, 바로와 그의 백성들에게는 심판과 멸망의 역사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 날 불신앙의 유대인들을 통하여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역사를 가져오는 분임을 암시한다.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자세히 설명된다.
바울은 18절에서 바로왕의 실례에 나타난 교훈을 이끌어낸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긍휼)를(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어떤 사람에게는 그를 강팍케 하여 공의의 심판을 자초하게(바로의 경우)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그의 공의, 이 양자는 사랑과 동시에 거룩함을 가지신 하나님의 성품에 기인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목적을 위하여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풀어 구원을, 어떤 사람에게는 공의를 행사하여 심판을 행사한다. 구원과 심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따른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영역이지 사람이 좌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주권이 무조건적으로 인간의 책임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든, 심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든 다 같이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며,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자초하는 사람들이다.
3:23절과 5:12절에서 선언된 것처럼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죄인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그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풀어 구원에로 인도하고, 바로 왕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그가 행하는 악한 행위를 더욱 가중시켜 심판을 자초하게 한다. 그러므로 구원에로 인도된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심판으로 인도된 사람은 그 자신의 범죄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다. 물론 이 인간의 책임이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이상 그의 자유와 책임도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 아래에 있는 것이지 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②토기장이의 비유
19-23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을, 어떤 사람에게는 심판을 가져오게 할 때, 심판을 받게 되는 당사자가 제기할 수 있는 질문, 왜 하나님이 나에게는 이렇게 심판을 주시는가 하면서 불평할 수 있지 않겠느냐를 예상하고 그에 대한 답변을 제시한다. 바울은 20절에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그의 만드신 피조물이기 때문에,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행위에 대하여 이렇게 저렇게 따질 수 있는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즉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며 모든 사람이 다 그 자신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자신의 자비를 나타내는 방편으로, 어떤 사람을 그의 공의를 나타내는 방편으로 삼았다고 해서, 이미 그 자신의 죄로 인해 심판을 당하게 되어 있던 사람이 왜 나에게 심판을 주시는가하면서 하나님께 따질 수 없다는 것이다.
21절 이하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잘 알려진 토기장의의 비유를 통하여 이 문제를 계속해서 설명한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를 가지고 그 중에 일부를 귀히 쓸 그릇으로 만들고, 다른 일부를 천한 그릇으로 만든다고 해서 천한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왜 나를 천한 그릇으로 만들었느냐고 불평하며 따질 권리가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공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어떤 사람을 진노의 그릇으로, 그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어떤 사람을 자비(긍휼)의 그릇으로 삼는다고 해서 각각 그 그릇들이 하나님께 불평하며 따질 수 없다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에 대하여 그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당대 유대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도록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비의 그릇이 되었고,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도록 예수를 믿지 않아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이 되었다고 해서,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불평하다고 따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힌다.
(4) 하나님의 주권적 부르심(9:24-29)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24)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25)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26)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27)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28)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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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9:14-23절에서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선택과 공의에 의한 버림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였으므로 9:24절 이하에서는 보다 실제적인 문제에 관여한다. 그것은 두 문제이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들을 자기 백성으로 부르셨는가하는 문제이고, 또 하나는 바울 당대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왜 예수를 믿지 않고 있으며, 바울처럼 소수의 유대인들만이 예수를 믿고 있는가?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어떻게 되는가하는 문제이다.
이미 살펴본 대로 바울은 9장에서 예상되는 질문을 제기하고 그리고 다양한 구약성경 본문을 인용하여 질문에 대한 답변을 주고 있다. 9-13절에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구약의 족장들에 관한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그리고 14-18절에서는 모세와 바로에 관한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선택과 버림이 결코 불의하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이제 9:24절 이하에서는 호세아, 이사야 등 구약의 선지자들에 관한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바울 당대 이방인들과 소수의 유대인들을 자기 백성으로 부르셨다고 해서,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신 분임을 입증한다. 모든 구약 인용들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바울 당대의 주후 1세기의 교회 안에 제기되는 질문들과 관련이 있지만, 바울의 구약인용을 보면 먼 곳(창세기)에서부터 점점 가까이(호세아), 희미한 것에서부터 좀 더 분명한 것에로의 이동이 있다.
이러한 이동을 통해서 바울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혈통이나, 그 사람이 언약백성이라는 신분 여하에 달려 있다기보다도,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에 있음을 강조한다. 즉 결정권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9:24절에서 23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자비의 그릇을 자기 당대 예수 믿는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에게 적용시킨다. 바울은 여기서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비록 그들의 수가 현재 많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입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런 다음 25-26절에서 호세아 2:23, 1:10절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부르신 근거에 관하여 설명하고, 이어서 이사야 28:22, 1:9절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소수의 유대인들을 부르신 근거에 관하여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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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두 그릇,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
22-23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두 그릇, 곧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과 긍휼(자비)의 그릇을 준비하셨다. 전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능력을 나타내고 있으며, 후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은 마치 토기장이가 진흙덩이를 가지고 자기 좋을 대로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은 두 그릇을 만들었다. 24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만드신 이 긍휼의 그릇으로 자신을 포함한 일부 유대인과 일부 이방인들이 불러졌다고 말한다. 여기 불러졌다는 말은 8:28, 30절에 언급된 것처럼 하나님의 효과적인 구원에로의 부르심이다. 왜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배제되고, 그 대신 소수의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부르심을 입었는가? 바울은 먼저 25-26절에서 호세아 2:23, 1:10절을 이용하여 이방인들의 부르심에 대하여 설명한다.
호세아서의 두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되었다가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된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두 본문을 모두 이방인에게 적용시킨다. 호세아서 2:23절에서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 한자를 사랑한 자”로 불러 진자는 이스라엘의 북방 왕국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대상을 지금 이방인들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고 있는 교회가 회복된 이스라엘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의 북방 왕국을 이방인에게 적용시킨 것 같다.
호세아 1:10절도 마찬가지이다. 호세아 1:10절에서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은 여전히 이스라엘 땅을 가리킨다. 그러나 바울은 이 땅을 이방 선교지에 적용시킨다. 왜냐하면 이방인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과 신분과 성을 초월하여 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교회 공동체에 소속되었기 때문이다(갈 3:28). 사실 이방인들이 구원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이미 구약 창세기에서부터 약속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라고 약속하셨는데, 아브라함의 약속에 언급된 “땅의 모든 족속”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구원 역시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②이스라엘의 남은 자
27-29절에서 바울은 24절의 첫 부분에서 언급된, “유대인 중에서 부름을 받은 자”를 확증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게 방향을 돌린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 사상은 구약의 예언서들 안에 나타나고 있는 중요한 신학사상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심판 아래 처하여 있었지만, 그 중에 얼마를 하나님은 남겨 두셔서 이스라엘을 계승하도록 하셨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이사야 10:22-23절을 인용하여, 자기 당대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를 영접하지 아니하는 불신앙의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유대인들이 예수 믿고 있는 것을 구약의 선자들이 예언한 남은 자와 일치시킨다.
이사야 선지자는 10:20-22절에서 이렇게 예언하고 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 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 찌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이사야에 따르면 많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오직 소수의 남은 자만이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며, 소수의 남은 자를 제외한 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무서운 공의의 심판이 작정되어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사야의 본문을 자기 당대 유대인들의 불신앙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는데 활용하기보다 소수의 믿는 유대인들을 남은 자와 관련시겼다. 그래서 그가 9장에서부터 계속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성을 입증하는데 활용하고 있다. 이점은 28절의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는 말씀에서 확인된다.
바울의 마지막 구약 인용은 29절에 소개되고 있는 대로 이사야 1:9절이다. 이사야서에서 이 본문은 범죄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긍휼)를 강조하고 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배반하였고 부패하였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중에 일부라도 남겨주는 자비를 베풀어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완전히 멸절될 처지에 있었다. 바울은 이 본문을 자기 당대 유대인들에게 적용시킨다. 이사야 선지자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처럼 바울 당대 이스라엘 민족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완전히 멸절될 처지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당시에도 하나님께서 그의 자비하심으로 남은 자를 남겨두신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은 소수의 믿는 유대인을 남겨두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당대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성은 선지자들 시대에 남은 자들을 통하여 지켜졌던 것처럼, 바울 당대에도 믿는 유대인들을 통하여 지켜지고 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폐하지 않는다.
(5) 믿음에 의한 의와 율법에 의한 의(9:30-10: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30)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31)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32)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33)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1)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2)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3)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4).”
본문개관
9장에서 바울이 계속 제기한 핵심적인 문제는 왜 바울 당대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 메시아로 보낸 예수를 여전히 믿지 않고 있으며, 반면에 본래 죄인이고 언약밖에 있었던 이방인들이 왜 예수를 믿어 구원의 축복에 참여하고 있는가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바울은 앞(9:1-29)에서 여러 구약의 인물들과 선자들의 예언의 말씀들을 인용하여 답변을 하였다. 답변의 요지는 하나님은 주권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의 축복을, 어떤 사람에게는 공의의 심판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바울은 9:30절부터 인간의 책임과 불신앙의 문제를 가지고 답변을 시도한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답변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끌어낸 답변이라면, 인간의 불신앙과 책임에 의한 답변은 인간 편에서 끌어낸 답변이다. 여기서 바울은 한 사람이 구원을 받느냐 안받느냐하는 문제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지만, 이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책임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 당대 유대인들이 복음에 응답한 수많은 이방인 신자들과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유대인 당사자들의 책임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본문 9:30-10:4절은 9:30-33절, 10:1-4절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분은 바울 당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이 마련하신 의, 곧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도달하는 믿음의 의를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율법을 통한 행위의 의를 추구하였기 때문임을 강조한다(9:30-33). 둘째 부분은 이스라엘민족이 구원의 축복을 누리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이 저들의 구원을 위해 마련하신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의 의를 세우려하기 때문임을 밝힌다(10:1-4). 여기서 바울은 율법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방편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나 율법을 통한 의를 아무리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서는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천명한다. 어떻든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지 않아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하신 의를 받아들이지도, 믿지도 않는 자들의 책임이다.
본문주해
①믿음에 의한 의와 율법에 의한 의
9:31-32절에서 바울은 먼저 의를 얻은 이방인들과 의를 얻지 못한 이스라엘백성들을 서로 대조시킨다. 1:18-32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방인들은 본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인 의를 좇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그들은 불경과 불의를 통해 하나님께 범죄 하였고,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다는 복음이 선포되었을 때, 이방인들은 이 복음을 받아드려 하나님의 의를 얻었다. 전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피조물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죄를 범했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믿음에서 난 의”라고 말한다. 반면에 ‘의의 법’ 곧 율법을 의의 길로 간주하고, 율법을 통해 열심히 의를 추구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율법이 가르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다메섹 사건 이전에 바울이 하나님에 대한 강렬한 열심을 가지고 율법의 의를 추구하였지만(갈 1:13-14l 빌 3:6),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마련하신 자기의 의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영접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핍박하여 하나님이 마련하신 의를 무시하고 도전하였단 것처럼, 바울 당대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한 열심을 가졌지만 오히려 그 열심히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하신 하나님의 의를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왜 바울 당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율법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의, 곧 종말론적인 구원을 얻는 수단으로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말론적인 구원의 의는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될 것을 이미 성경은 말하고 있다(참조 갈 3:8; 롬 3:26-27). 율법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계승할 수 있는 언약백성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는 수단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이 의도와는 달리 율법을 통한 의를 추구하고 있다. 또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그 누구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갈 3:10). 그로인해 그들은 약속을 계승할 수 있는 언약백성의 신분을 상실하고, 오히려 율법의 저주아래 있다. 율법의 저주를 벗어나고, 약속을 계승할 수 있는 언약백성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약속대로 그들을 위해 메시야를 보냈지만 그들은 여전히 메시야를 믿지 못하고 있다.
32-33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보다 직접적으로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의를 얻는 유일한 길로 마련하신 믿음의 길,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행위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여기 ‘믿음에 의한 추구’와 ‘행위에 의한 추구’의 대조는 바울은 30-31절에서 말한 “믿음의 의”와 “율법의 의”의 대조와 연결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율법을 통해 의를 추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마련하신 의를 추구하지 않고 인간의 행의로 의를 추구하는 것과 동일시한다.
어떤 주석가들은 바울이 여기서 말한 ‘율법의 의’와 이와 관련된 ‘행위의 의’를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으려는 공로행위가 아닌 언약백성의 신분을 유지하려는 정체성의 표현이나 민족적 의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322) 물론 이런 면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본문에서 말한 ‘행위의 의’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지킴으로 개인적으로 인정을 받으려는 개인적인 동기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인과 민족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서로 분리시키기 힘들다. 바울이 빌립보서 3:6절에서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라고 말할 때(역시 갈 1:13-14), 어떻게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동기를 배제시킬 수 있겠는가? 바울은 빌립보서 3:9절에서 3:6절에서 말한 율법의 의를 가리켜 분명히 “내가 가진 의”라고 말하고 있다.323)
왜 바울 당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마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의를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행위의 의를 추구하고 있는가? 바울은 이사야 8:14절과 28:16절을 함께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에게 부딪히는 돌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본래 이사야 8:14절의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은 하나님께서 앗수르왕을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사야 28:16절의 “시험한 돌, 귀하고 견고한 기초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킨다. 이처럼 이사야에서 돌은 한편으로 심판을, 다른 한편으로 구원의 통로로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돌을 메시야에게 적용시켜 메시야가 그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가져오는 돌이 되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적극적으로 말해서 구원을 받게 하는 돌이 된다고 말한다.
사실상 돌과 메시야를 연결시키는 것은 이미 예수의 악한 농부의 비유에서 언급되고 있고(마 21:42-44; 눅 20:17-20), 신약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예를 들면, 벧전 2:6-8). 바울이 고린도전서 1:23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는 유대인들이 기대하였던 힘과 권력을 행사하는 영광의 메시야가 아니라, 오히려 고난과 죽음을 당하는 고난의 메시야였기 때문에, 예수 당대 유대인들은 예수를 자신들의 메시아로 받아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메시아로 영접하지 않는 그들에게 책임이 있다.
②율법의 마침인 그리스도
10:1절에서 바울은 거듭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가 결코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그들의 멸망을 옆에서 방관만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나중에 11:25-26절에서 이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말한다. 2절에서 바울은 자기 당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열심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사실상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기전에는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한 것도, 그가 조상들의 유전에 대하여 열심을 가진 것도 모두 하나님에 대한 이 열심 때문이었다(갈 1:13-14; 빌 3:6). 그러나 이 열심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의를 세우려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는 행위였다(3절). 다메섹 사건 이전의 바울 자신의 삶이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율법을 따라 하나님에 대한 열심 때문에 초대 크리스천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을 섰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는데 앞장을 선 것이 되고 만 것이다. 그의 행위는 결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를 거부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는 행위로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4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하나님의 의를 얻는 유일한 길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리스도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는 모든 자에게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어떤 주석가는 이 말을 예수를 통하여 율법의 역할이 끝났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어떤 주석가는 예수가 율법의 성취이며 율법의 목적과 절정이 됨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라는 말은 ‘끝’과 ‘목적’의 두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의 절정이기 때문에 율법은 더 이상 ‘칭의’는 물론 성화의 수단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율법의 성취를 성령을 통하여 또한 계속해서 이루어 가시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은 부정적인 관점에서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삶에 결정권을 가지지 못하는 종지부를 찍었을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관점에서는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삶 가운데서 그 궁극적인 목적이 실현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악트마이어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정당하다고 하겠다: “그리스도가 창조자와 피조물 간의 관계에 있어서 율법의 처음 의도된 역할의 성취이며, 또 그 관계에 있어 율법의 주된 기능의 마침이 되는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느니라.’(4절)라고 말했을 때 이 두 가지를 다 의미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율법이 세워진 목표와 목적, 즉 하나님을 믿는 것의 목적인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게 되는 수단으로서의 율법의 마침이 되는 것이다.”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