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모든 마을에는 農樂이 있었다. 마을의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나, 비가 안 와 기우제를 지낼 때나, 추석이나 정월 대보름 같은 명절날에 놀이를 벌일 때, 그리고 농사나 집을 집거나 할 때면 농악이 있었다. 아니 농악을 쳤다. 이 농악에 빠질 수없는 전통악기가 넷 있다. 꽹과리와 장고, 북, 징이다. 근래에 농악을 바탕으로 잘 알려진 이른바 ‘사물놀이’의 ‘四物’이 바로 이 넷 악기이다.
이들 모두 농악과 사물놀이에 없어서는 안 될 악기들이지만, 그 가운데 꽹과리는 농악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리듬 악기이다. 농악판을 바탕으로 한 전문 놀이패인 ‘남사당’에서도 마찬가지다. 꽹과리는 꾀꼬리 소리내기로 만들어진 악기라는 고구려의 설화도 있지만, 그만큼 농악에서 판을 리드하는, 꾀꼬리 소리의 악기 역할을 한다. 농악을 하는 풍물패 중에서 꽹과리 치는 사람을 ‘쇠재비’ 또는 그냥 ‘쇠’라고 하고, 이 가운데 그 수준이 높은 쇠재비를 ‘뜬쇠’라고 부른다. 우리의 전통 꽹과리 명인들은 모두 ‘뜬쇠’들이다.
사물놀이 ‘진쇠’를 이끌고 있는 김복만도 ‘뜬쇠’이다. ‘진쇠’는 ‘진짜 뜬쇠’라는 뜻이다. 그만큼 꽹과리에 있어서는 최고의 경지에 오른 자부심이 담긴 이름이다. 근 40년간 꽹과리를 치고 있는 김복만에게 꽹과리는 어떤 존재일까. 좀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진쇠’다운 말이 나온다. 한마디로 말해 ‘하늘’이라는 것이다.“모든 음악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농악은 음양의 조화를 최고의 것으로 치고 있지요. 꽹과리는 양, 즉 태양의 기운을 갖고 있는 악기입니다. 이에 비해 북 등 가죽악기는 음, 즉 땅의 기운을 갖고 있습니다.
꽹과리는 하늘의 기운을 상징하기 때문에 천상의 神을 불러내려 인간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神을 달래서 즐겁게 놀 수 있게 하는 게 가죽악기이고요. 쇠, 즉 꽹과리가 신을 부르고, 신이 오면 즐겁게 달래 재미있게 놀게 해 다시 보내는 게 우리의 전통 농악이지요.”
김복만의 꽹과리에 대한 이러한 풀이는 고구려 설화를 바탕으로 한 우리의 무속신앙에 연유한다. 이를테면 꽹과리가 꾀꼬리(鶯) 소리내기로 만들어졌다는 설화가 그것인데, 전라도 농악의 ‘앵산굿’에서는 꽹과리 소리를 ‘영산다드레기’라고 하여 鶯새, 즉 꾀꼬리 소리를 천신을 불러 내리는 제사 시에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靈山’은 불교이름으로 ‘앵산’을 그렇게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고1때 ‘뜬쇠’로 명성 높던 명인 송순갑에게 빠져 그가 꽹과리를 처음 잡은 건 11살적의 초등학교 때부터이다. 충남 신탄진이 고향인 그는 당시 처음부터 꽹과리를 잡은 건 아니다. 학교의 어느 교실에서 울려 나오는 농악의 신명나는 가락에 이끌려 농악반에 들어갔는데, 그 과정이 그렇다. 처음엔 상모돌리기와 무동춤 등을 익히게 하는데, 한 3년 정도 그런 기예를 익히고 난 후 악기를 만지게 된다는 것. 징과 북 등 다른 악기도 다 만져봤는데, 그 가운데 꽹과리에 제일 이끌린다. 물론 농악 기예는 두루두루 잘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
|
|
|
▲ ‘김덕수 사물놀이패’와 함께 한 김복만.(좌에서 두 번째, 그 왼쪽이 김덕수) |
|
“농악의 기본적인 것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즐겁고 신나는 소리에 끌리면서 놀이의 형태로는 제일 좋다는 생각에 꽹과리를 잡은 것이고, 그렇게 해서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계속 올라갔던 것이지요.” 사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김복만의 꽹과리 수업은 어릴 적부터 체계적이고 잘 배웠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스승은 당시 이미 ‘뜬쇠’로 명성이 높던 꽹과리 명인 송순갑(1910~2001) 선생이다. 그가 꽹과리에 본격적으로 빠져든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무렵이다. 스승의 꽹과리 소리 때문이다. 그 때부터 학교도 안 가고 스승만 따라 다녔다. “스승의 소리는 어떤 꽹과리를 치셔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꽹과리가 어느 정도 지나면 소리가 깨지는데, 스승이 치는 소리는 변함이 없었다는 거지요. 꽹과리의 어느 부분을 치면 그런 소리가 나는지를 배우려고 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었지요. 스승의 꽹과리와 우리 농악에 대한 높은 정신세계, 음악세계를 모르고, 단순히 어디를 치면 저 소리가 나겠지 하며 따라다닌 거지요.”
결국 그는 고 2때 꽹과리에 목숨을 걸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노력하고 쳐도 스승의 소리에는 근접도 못할뿐더러, 최소한 자신이 원하는 소리마저 나오기 않았기 때문에 숱한 회의 끝에 학교도 집어치우고 오로지 꽹과리에만 집착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또 다른 계기도 있다. 고 2때 대전에서 공연을 가진 ‘김덕수 사물놀이패’ 공연을 보고 꽹과리, 징, 북, 장고의 울림이 놀이에 그치지 않고 한데 어우러져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받은 충격이다. 이 계기는 훗날 그가 스승으로 모시는 김덕수와 ‘뜬쇠’ 故 김용배와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그 때 아버지에게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이 꽹과리로 목숨 한번 걸어 보겠습니다. 집에서 난리가 났지요.” 아버지는 그저 자식이 취미정도로 꽹과리를 하는 것으로 여겼다. 번듯한 안동김씨 가문의 장남이 광대 같은 짓거리에 목숨을 걸겠다고 하니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이미 김복만의 마음에는 어찌할 수 없는 쇠말뚝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를 꽹과리의 세계로 이끈 운명적인 계기가 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이다. 그는 고교 졸업과 함께 단국대 국악과 장학생으로 뽑힌다. 필기시험을 보는 절차가 남아 있었다. 시험 날 새벽, 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그는 대학진학을 포기한다. 아버지 생전에도 사업이 순탄치 않아 집안 형편이 여러모로 어려웠다. 그는 대학 대신 전수덕 선생이 1985년 창단한 마당패 ‘뜬쇠’에 들어간다. 최연소의 나이로 이 세계 프로 데뷔를 한 것이다. 그리고 승승장구 한다. 1980년대 말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김복만의 기예는 빛을 발한다. CF에도 출연했고, 그를 알아보는 대중들도 많아졌다.
그러나 그 것도 잠시다. 목숨을 걸다시피 해 갈고 닦은 꽹과리 소리,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승승장구에 대한 회의가 다시 스멀거리며 그를 짓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도 계기가 있다. 스승인 송순갑 선생이 돌아가시기 몇 해 전 그를 조용히 불렀다. “복만아, 꽹과리에서 꽹과리 소리가 나지 않아야 한다.” 이 무슨 말인가. 꽹과리에서 꽹과리 소리가 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리고 1986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 김용배 선생이 죽기 사흘 전 남긴 “복만아, 웃다리쇠가 아니면 안 되는 소리가 있다”는 말. 그것은 다름이 아니다. 자만에 빠지지 말고 공부를 하라는 것이었다. 두 스승의 이 말은 공부를 더 하라는 뜻과 함께 꽹과리를 치는 마음자세에 관한 경구이기도 했다. 그는 김용배 선생이 별세한 후 충격과 함께 다시 공부해야겠구나 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잘 나가던 시절, 마음 움직인 스승의 유언 “프로로 데뷔해 한참 잘 나가고 있을 때 김용배 스승의 자살소식을 들었지요. 충격 속에 공연을 계속하는데, 이상하게 스승의 말이 걸리는 거예요. 그리고 스승의 말처럼 웃다리 풍물을 하는데 진짜 딱 하나가 안 되더라고요. 스승은 진즉 그 걸 알고 유언삼아 마지막으로 지적해 주신 것이었지요.” 우리의 전통 농악풍물은 지역별로 크게 두 부류로 나눈다. 충청도 이북으로부터 경기지역까지의 중부 풍물놀이를 ‘웃다리’라고 하고, 호남과 영남지역의 풍물을 ‘아랫다리’라고 한다. 아랫다리는 다시 호남의 경우 좌. 우도 풍물로 나뉘고, 영남은 경상도 농악, 혹은 영남농악이라는 게 김복만의 설명이다. 이 가운데 최고로 치는 게 바로 웃다리 풍물이다. 풍물가락 중에서 기교가 어렵고 세련돼 있고, 타 지방에서 흉내를 낼 수 없는 풍물로, 이 바닥 최고의 쟁이로 일컫는 명인들, 예컨대 송순갑. 김덕수. 김용배 등이 모두 웃다리 출신들이다. 웃다리쇠는 웃다리풍의 꽹과리 소리를 말한다.
“송순갑, 김용배 두 스승이 유언삼아 한 그 말을 나중에 깨닫고는 내가 참 헛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꽹과리에 대한 공부를 다시 하자하고 홀로 독공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다시 마음을 독하게 먹고 꽹과리 공부에 들어간다. 밤 12시까지 연습하고 다시 새벽 5시에 일어나 꽹과리를 치고 또 쳤다. 같이 합숙하던 단원들이 미쳤다고 할 정도였다. “나는 그래, 미쳐야 할 수 있고 또 내가 산다 그렇게 생각했지요. 밤이고 새벽이고 꽹과리를 쳐대니 다른 사람들이 미칠 지경이었지요. 단원 중에 나를 죽이고 싶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한 6개월가량 그 짓을 했다. 이 독공과정을 통해 그는 마침내 ‘그 무엇’을 얻는다. “힘을 놔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힘으로 하고 힘으로 치는 게 잘 하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그 게 아니고 힘을 빼야한다는 것, 그 걸 느낀 겁니다. 나는 왜 안 될까하고 스스로 숱하게 질책을 하는 과정에서 뭔가 머리를 치는 겁니다. 아, 힘을 놔야하는 부분에서 못 놨던 것이지요.” 김복만의 말인즉슨 농악은 음양의 조화가 중요한데, 양이 꽉 차면 음으로 넘어가듯, 어느 단계에 가면 음으로 넘어가야 하는 건데 그는 양만 고집하고 꽹과리를 두들겼다는 것이다.
꽹과리를 치면 ‘무아의 경지’로 들어갑니다. 마음과 육신의 분리가 이뤄지는 거죠. 이 경우 몸은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저의 자아가 연주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소리가 안 들립니다. 뭔가 멈춰있는 가운데 내가 연주를 하는 것입니다. 큰 스승님의 말씀은 그런 경지를 이야기하신 것이지요
결국 김복만은 이를 통해 힘을 놓고 빼야하는 꽹과리의 오묘한 음의 세계를 터득하며 소리의 부드러움과 그 부드러움 속의 강함을 배우면서 자신만의 음악을 찾게 된다. 그에게는 오늘날 ‘꽹과리의 神’이라는 호칭이 따라 다니는데, 이 호칭에는 꽹과리에서 김복만이 터득한 ‘입신의 경지’가 느껴진다. 김복만에게서 느끼는 ‘입신의 경지’는 무속적인 느낌을 준다. 앞에서 언급했듯 꽹과리 자체가 무속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악기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는 사실 꽹과리를 하는 과정에서 神病을 앓는 독특한 체험을 겪기도 했다. 그의 나이 35세 한창 때 찾아온 巫病은 심각한 것이었다. 박수무당이 될 수 없는 처지에서 결국 그가 택한 방법은 그 무병을 누르는 것이었다. 내림굿 안 받으려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神이 못 오게 큰 무당이 하는 큰 굿을 세 번이나 한 후에 이를 극복했다는 것. 3년이나 걸린 세월이었다.
|
|
|
|
▲ 지난 7월 26일 개최된 자신의 이름을 건 생애 첫 발표회인 ‘김복만 스테이지 1’ 공연 포스터. |
|
‘꽹과리의 神’과 무아의 경지 이 과정에서 큰 스승인 송문갑 선생이 주신 “꽹과리에서 꽹과리 소리가 나지 말아야한다”는 말의 참뜻을 터득한다. 궁극적으로 꽹과리에서 중요한 것은 기교나 기술적인 소리가 아니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마음의 소리’를 담아야 그 게 꽹과리의 참소리라는 것이다. ‘마음의 소리’는 곧 ‘무아의 경지’이고 이것은 ‘입신의 경지’에 다름 아니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나는 꽹과리를 치면 곧 무아의 경지로 들어갑니다. 그 경지로 들어가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空의 세계에 들어가는데 거기에 있으면 ‘그 분’이 오시는 걸 느낍니다. 실질적으로 내가 연주를 하지만 또 다른 내가 있는 것이지요.” 그의 말인즉슨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면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자신이 꽹과리를 친다는 것인데, 듣기에 난해하다. 그는 덧붙인다.
“마음과 육신의 분리가 이뤄지는 거죠. 이 경우 몸은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저의 자아가 연주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소리가 안 들립니다. 뭔가 멈춰있는 가운데 내가 연주를 하는 것입니다. 큰 스승의 말씀은 그런 경지를 이야기하신 것이지요.” ‘꽹과리의 神’ 김복만은 꽹과리 연주만 하는 게 아니다. 꽹과리도 잘 만든다. 그는 4년 전부터 방짜유기 무형문화재인 이종덕 선생으로부터 꽹과리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다. 이제는 혼자서도 잘 만들지만, 이즈음도 매주 한차례 시간을 내어 이종덕 선생의 대장간이 있는 김제로 향한다. 그가 직접 꽹과리 제작에 공을 기울이는 것은 어릴 적 스승들로부터 듣던 그 소리를 내어보고 싶어서다.
이에 더해 자신이 재현해낸 그 꽹과리 소리를 과학적으로 테이터베이스化 해 대중들에게 보급하고 싶은 바람도 갖고 있다. 김복만은 현재 사물놀이 ‘진쇠’를 이끌고 있다. ‘진쇠’는 사물놀이 뿐 아니라 남사당놀이의 인형극, 탈춤, 풍물, 줄타기 등 여섯 마당과 마당놀이를 보여주는 종합풍물패로, 1990년에 만들어 올해로 23년 째 이어져오고 있다. 현재 그가 꽹과리를, 김경수가 장고를, 이윤구가 북을, 그리고 길기옥이 징을 맡고 있다. 그는 풍물패공연과 함께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연희과 겸임교수로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서울국악예술고에서도 10여년을 가리켰다. 그가 꽹과리로부터 받은 신명과 행복감을 널리 알리고 전하기 위해서다.
김영철 편집위원 darby4284@kyosu.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