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명아 왕으로 등극하다
( 정상은 내려가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
1400년 11월 13일 수창궁에서 조선 제3대 왕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이방원이 태종으로 재탄생하는 날이다.
송악산 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겨울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성대하게 베풀어져야 할 즉위식이 스산하다.
수창궁 정전 앞에 문무백관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도열했지만 정작 축하해 주어야 할 아버지와 형은 자리에 없었다.
"상왕(上王)께서 적장자로 보위에 즉위한 지 이제 3년이다. 적사(嫡嗣)가 없어 미리 저부(儲副)를 세워야 한다고 하니 이에 소자가 동모제의 지친이고 또 개국에 공을 세우고 정사(定社)할 때 조그마한 공효가 있다 하여 나를 세자로 책봉하고 대임(大任)을 받으니 무섭고 두려워서 깊은 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종친, 재보, 대소신료들은 마음을 경건히 하여 내 덕을 도와 미치지 못하는 것을 바로잡도록 하라. 천지의 덕은 만물을 생산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왕자(王者)의 덕은 백성에게 은혜롭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하늘과 사람의 두 사이에 위치하여 위로 아래로 부끄러움이 없고자 하면 공경하고 어질게 하여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에게 부지런히 하는 것이다.
힘써 이 도에 따라서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겠다. 너희 신민들은 나의 지극한 포부를 받들도록 하라."
즉위교서를 반포하는 태종의 목소리가 떨렸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너무나 험난했던 것 같았다. 아버지의 회군으로 스물한 살 젊은이가 정변의 회오리에 휩쓸려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 가던 일. '하여가'로 회유하자 '단심가'로 응수하던 정몽주의 얼굴, 송현에서 파리한 모습의 정도전, 살려달라고 애원했을 방석, 왕도에서 시가전을 벌였던 방간형.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백성들의 축하 없는 즉위식 만백성의 경하를 받아야 할 즉위식을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개경인들의 눈초리도 알고 있었다.
경사를 외면하는 백성들이 두려웠다. 하지만 두렵다고 회피할 태종이 아니었다. 구겨진 백성들의 마음을 펴주는 것은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축하해 주는 이 별로 없는 즉위식에서 그래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었다. 하륜과 부인 민씨였다.
일찍이 왕재(王材)를 알아보고 밀착 접근했던 하륜. 18년 동안 변방을 떠돌며 오늘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이제야 가슴에 담고 있는 치세(治世)를 펼칠 수 있으니 자신이 천하를 손에 넣은 것만 같았다.
열일곱 어린 새색시가 두 살 연하 신랑에게 시집가 가슴 졸이며 살았던 민씨. 자신이 왕비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민부인. 때론 신랑이 좌절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따듯한 위로의 말을 잊지 않았던 민씨. 방원이 갈등의 기로에서 방황할 때 갑옷을 입혀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던 민부인. 그랬던 부인 민씨는 자신의 신랑이 면류관을 쓰고 용상에 앉아있는 모습을 바라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즉위식을 마친 태종 이방원은 각사(各司)의 관원을 거느리고 장단 마천(麻川)으로 아버지를 마중 나갔다. 방원의 즉위식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은 태조 이성계는 오대산에 다녀오는 길에 장단에 머물며 즉위식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종친과 대신들이 참여하여 주연을 베풀어 노여운 마음을 풀어주었다. 건배가 오고가는 연회가 무르익어갈 무렵 하륜이 태종에게 다가왔다. 정상 정복은 하산을 완료했을 때 완성되는 것.
"전하, 경하드립니다."
"공으로부터 전하라는 소리를 들으니 민망하구려."
"옥체를 보존하십시오."
"정상은 오래 머무를 곳이 못됩니다. 이제부터는 내려가는 길이라 알고 있소. 정상 정복은 야망으로 가능하지만 하산은 희망으로 부족하다 생각하오.
정상의 희열을 낸들 모르리오만은 죽어서 그 자리를 내려오는 것은 정상정복의 미완성이라 생각하오. 내려가는 길을 잘 보살펴주시오."
권좌를 물려받고 세습으로 물려주는 절대 왕정시대에 획기적인 발상이다. 역시 자력으로 정상에 오른 혁명가다운 생각이다.
하륜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 권좌에 오르는 날 내려갈 것을 생각한다니 무서운 위인이라 생각되었다. 서른셋 청년이 정상에 올랐다. 오르기 위하여 피와 땀을 많이 흘렸다.
하지만 정상은 오래 머물 곳이 못된다고 생각했다. 정상정복은 하산이 완료되었을 때 진정한 정상정복이라는 그의 신념은 훗날 양녕대군 폐위 파동을 거치며 세종에게 선위되어 가시화 되었고 현실화 되었다.
"법도를 바로잡아 태평성대를 이루소서."
"법은 원칙의 아랫 것이고 폭력은 법의 아랫 것입니다. 법이 필요없는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은 것이 짐의 소망이오.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 말이오. 원칙을 벗어 날을 때 제재하는 수단이 법 아니겠소? 그러하지 아니하오? 하공!"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륜은 머리를 조아리며 지당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하륜은 성리학을 필두로 유, 불, 선을 섭렵했다. 뿐만 아니라 도참(圖讖)과 잡설(雜說)에 능해 당대의 도사라는 별칭을 들었다.
이러한 하륜의 입을 얼어붙게 한 태종 이방원의 논리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방원 역시 성리학을 공부했고 불온한 서적이라 지목받았던 맹자(孟子)를 책장이 헤지도록 독파했으며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끼고 살았던 인물이다.
"원칙이 원칙을 벗어나 법도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특수 상황에서는 법의 아랫것인 폭력이 정당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 슬픈 일이지만 현실입니다. 이러한 일은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겠지요."
이것이 그의 법률관이었다.
법이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특수 상황에서는 법의 하위개념인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아버지를 권좌에서 끌어내릴 때 극명하게 나타났다.
광화문 앞 노상에 천막을 치고 아버지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아낼 때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었다. 적장자를 벗어난 권좌는 원칙 없는 권력이라 규정했다.
원칙 없는 아버지는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개국한 것으로 소임을 다 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원칙에서 벗어난 권력은 그 좌(座)에서 부패하기 전에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정치관이었다. 부패하기 시작한 권좌는 소금도 약발을 받지 않으며 폭력을 부른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원칙은 법의 상위 가치이고 폭력은 법의 하위 개념이라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직계를 먼저 잡아라 삽혈동맹
태종은 흩어진 민심을 돌리기 위해서는 따르는 직계를 다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암(馬巖)의 단(壇)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들을 불러내어 삽혈동맹(歃血同盟)의 맹세식을 가졌다.
살아있는 사슴을 잡아 서로 그 피를 돌려 마시고 벌건 입술로 서약(誓約)을 꼭 지킨다는 단심(丹心)을 신(神)에게 맹세하는 의식을 삽혈동맹(歃血同盟)이라 부른다.
"조선국왕 이휘는 삼가 훈신 의안 대군 이화, 상당군 이저, 완산군 이천우, 문하좌정승 이거이, 우정승 하윤, 판삼군부사 이무를 거느리고 황천상제(皇天上帝), 종묘, 사직, 산천백신(山川百神)의 영(靈)에 감히 고합니다.
어질지 못한 내가 오늘에 이른 것은 실로 종친과 충의한 신하들이 힘을 합하여 난을 평정하고 익대 좌명(翊戴佐命)한 힘에 힘입은 바이니 그 큰 공을 아름답게 여기어 영원토록 잊기 어렵습니다. 이에 유사에 명하여 상전을 거행하고 길한 날을 가려서 밝은 신령께 제사하여 맹호(盟好)를 맺습니다.
맹세한 뒤에는 길이 한마음으로 서로 도와 환난을 구제하고 과실을 바로잡아 시종일의로써 왕업을 보존하여 자손만대에 오늘을 잊지 말 것이다. “
혹시라도 이익를 꾀하여 해(害)를 피하고 사(私)를 껴서 공(公)을 배반하고 맹호(盟好)를 범(犯)하고 기망변사(欺罔變詐)하고 음모참소(陰謀讒害)하면 신명(神明)께서 반드시 죽이어 앙화(殃禍)가 자손만대에 미칠 것이며 범한 것이 사직(社稷)에 관계되는 자는 마땅히 법으로 논할 것이니 내가 감히 어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취(自取)인 것입니다.
각각 맹세한 말을 공경하여 영원히 이 정성을 지킬지니라."
철혈통치를 예고하는 의식이었다. 맹세식에 참석한 모두 돌처럼 굳었다.
허나, 흩어지면 모아지고 모아지면 흩어지는 것이 세력이라고 했다던가. 이거이가 하륜을 탄핵하고 나섰다.
인사가 만사인데 하륜이 인사를 전단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태종은 하륜을 영삼사사로 임명하고 하륜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