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오일장의 능금(2026.7.24.) 최종
송 유 창
베트남의 옛 수도 사이공 변두리에 아파트 한 채를 빌려 추위를 피해 한 달 살이를 왔다.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고 생각했지만, 두 시간이 빠른 한국은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을 것이다. 골목 담장을 타고 핀 부겐베리아 꽃을 휴대폰에 담으니, 거리의 쌀국수집과 골목에서 풍겨오는 음식 냄새가 아침을 알린다. 1970년대 한국의 아침 풍경과 흡사해 더욱 정감이 간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 허겁지겁 아침 한 끼를 때우던 어린 시절처럼 말이다.
빈증 마을 재래시장 어귀에서 사탕수수를 파는 리어카 행상을 만났다. 오죽(烏竹) 굵기만 한 사탕수수 껍질을 벗겨 바나나 토막처럼 잘라 판다. 가을이면 옥수숫대를 벗겨 먹던 생각이 나서 한 봉지를 샀다. 한토막 꺼내 씹으니 단물이 물씬나며 입속이 흥건하다. 겨우 단맛이 돌던 수수깡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이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발걸음마저 가벼워졌다.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오는 길 건널목에 열대과일을 파는 삼륜차가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손짓으로 인도에 차를 세우라고 하니 새까만 얼굴에 밀짚모자를 눌러쓴 아저씨가 씨익 웃는다. 차에 실린 능금 크기의 베트남 사과 몇 알을 고르자, 아저씨는 눈금이 거의 닳아버린 앉은뱅이저울을 내 쪽으로 밀었다. 이곳은 저울이 가격을 매기는 기준이다. 한국이라면 상품 가치가 없다고 버렸을 작고 검게 생긴 사과 다섯 알을 골랐다. 무게를 재더니 손짓으로 값을 알려 주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지갑을 내밀어 아저씨더러 직접 돈을 꺼내 가게 하니, 만 동짜리 두 장(1,000원)을 빼어갔다. 베트남 사과를 들고 아파트로 돌아오는 길, 중학생 시절 먹었던 대구 능금이 생각났다.
그때는 장남이 잘되어야 집안이 잘된다는 믿음이 강하던 시대였다. 오남매의 장남이라 제사 때마다 어른들이 나를 찾았다. 제사상의 ‘대구 능금’이 탐이 났으나, 제사가 끝나야 맛볼 수 있었다. 기다리다 잠이 오면 눈썹에 성냥개비를 꽂으라며 어른들이 골리기도 했다. 대부분 견디지 못하고 잠들기도 했지만, 제사가 끝난 뒤 먹던 능금 한 조각의 맛은 아직도 선명하다.
내가 능금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신 어머니는 늦게까지 공부하면 능금 한 알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돌이켜보면 아이에게 당근과 채찍의 방법으로, 능금으로 공부를 시키는 지혜를 일찍부터 아신 분이었다. 나는 능금을 기다리며 공부하는 척했지만, 전과 수련장 속에 만화책을 끼워 넣고 읽는 시간이 더 많았다.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어머니는 살 것이 없어도 오일장 날이면 꼭 장에 다녀오셨고, 나는 시험이 없는 날에도 능금을 기다리느라 쉽게 잠들지 못했다.
밤이 깊으면 공부방 문이 조용히 열렸다. 어머니는 말없이 방 안에 능금 한 알을 놓고 나가셨다. 동생들을 보살피라는 뜻이었는지 모르지만 그 능금은 하루도 빠지는 일이 없었다. 씻지도 않은 능금을 한입 베어 물면 두꺼운 껍질 사이로 단물이 배어 나왔다. 밤늦게 한 쪽씩 아껴 먹으며 만화만 읽었던 나 자신을 돌아보곤 했다. 공부하고 있을 것이라 믿어주신 어머니를 속인 다음 날 아침, 어머니를 마주하는 일이 괜히 죄스러웠다.
이제는 아들이 할머니 제삿날에 맞춰 사과를 택배로 보내온다. 어머니는 안 계시지만 박스를 열 때마다 능금 한 알 차지하려고 밤잠을 설쳤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크고 빛깔 좋은 것은 제사상에 올리려고 골라놓고, 나머지를 하루에 한 알씩 깎아 먹는 호사를 누린다. 그러나 요즘 사과는 커졌고 맛도 달라졌다. 변한 것은 사과뿐만이 아니라 세월일 텐데, 나는 아직도 그 시절의 능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인지 모른다.
동생들에게는 몰래 매일 밤 내게만 건네주시던 능금 한 알. 편애 같은 사랑이었다. 제사를 이어갈 장남이라 그랬을까. 아니면 종부(宗婦)인 어머니는 장손의 무게를 아셨기 때문이었을까. 이제는 어머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휴대폰 에 제삿날을 입력해 놓고 잊지 않고 제사를 모시는 것 말고는 말이다.
길거리 삼륜차에서 사 온 작은 사과를 씻어 한입 베어 문다. 베트남에서 사서 먹 는 사과는 예전 능금 맛이 아니었다. 그러나 방문을 열고 말없이 능금 한 알을 놓고 가시던 어머니의 기척만은, 세월이 흘러도 아직 내 마음속 오일장에 그대로 머물고 있다. 그래서인지 오일장 날만 되면, 능금 사러 점고개를 넘으시던 어머니 모습이 더 생생하게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