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들에게 좋은 술을 판다는 생각으로 영화를 합니다”
<킬러들의 수다> <달마야 놀자>로 요즘 흥행 상종가를 올리고 연기력을 인정받아
최고의 배우로 뜬 정진영. 그를 만나 <달마야 놀자>
촬영 뒷이야기와 가족 사랑, 그리고 서울대 운동권 출신의
진보연극배우에서 대중스타로 변신한 이유에 대해 들어보았다.
요즘 가장 주목받는 영화배우 중 한 사람이 정진영(39)이다. 98년 영화 <약속>을 통해 각종 영화제 남우조연상을 휩쓸더니, 최근 <킬러들의 수다>의 검사 역과 <달마야 놀자>에서 상좌승인 청명스님 역을 통해 흥행과 연기력을 동시에 보장하는 확실한 배우로 ‘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서울대 국문과를 나온 운동권 출신으로 한때 진보적인 연극·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이색경력이 있어 더욱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12월 중순 관객 4백만명을 훌쩍 뛰어넘으며 2001년 최고의 흥행영화 정상을 노리고 있는 <달마야 놀자>가 개봉된 후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그를 만났다. 영화 찍고 시간이 제법 지나서인지 영화에서 보던 푸르스름한 기운이 돌던 빡빡머리가 제법 까맣게 자라 있었다.
“그동안 개봉인사를 다니느라 바빴는데, 지금은 방에서 뒹굴고 있어요. 인기요? 글쎄, 잘 모르겠어요. 이제 세수는 하고 다녀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할까(웃음).”
사실 <달마야 놀자>를 제작하겠다는 말이 나왔을 때 ‘또 조폭영화냐?’며 조폭신드롬에 빌붙어 관객들의 주머니 돈을 노리는 아류영화라는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의 느낌이 어땠냐고 묻자 그 역시 “그래서 안 한다고 했어요”라고 잘라 말한다.
“매니저 없이 일을 하기 때문에 출연섭외가 들어온 대본은 제가 직접 다 봐요. 대본을 받았을 때 이미 <킬러들의 수다>를 찍고 있어서 별로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그래서 대충 읽었는데, 읽고 난 느낌 역시 ‘또 조폭이냐’였죠.”
출연을 사양하겠다고 하자 제작사 사장이 직접 만나자고 했다. 4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하고 일어서는데 사장이 마지막 말을 던졌다. “대본을 잘못 읽은 것 같으니 다시 한번 읽어보라”는 것이다.
“처음 읽었을 때, 가벼운 이야기를 하면서 진지한 것을 차용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사장은 거꾸로 무거운 이야기를 하기 위해 가벼운 것을 차용했다는 거예요.”
마침 <킬러…>의 촬영일정이 일주일 정도 연기되면서 시간이 남았다. 그는 방구석에 던져져 있던 대본을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보았다. 읽으면서 처음의 선입관이 사라지고 다른 조폭영화와는 달리 ‘뭔가 주제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하마터면 놓칠 뻔한 걸작 하나를 건지게 된 셈이다.
촬영은 알려진 대로 경남의 한 산사에서 진행되었다. 두달 가까이 남자들끼리만 모여 생활하다보니 다른 영화를 찍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고 한다. 매일 같이 공을 차고, 알까기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3·6·9게임도 하고…. 나중엔 배우들끼리 서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터져나올 정도였다는 것.
“다른 작품은 촬영장소가 계속 바뀌고, 배우들도 자기 신이 있을 때만 와서 찍고 가는 것에 비해 이 영화는 제한된 공간에 모든 출연자가 모여 북적거리며 지내다보니까 더 끈끈해진 것 같아요. 무엇보다 노스님 역을 맡은 김인문 선배를 비롯해 출연자들이 다 나이만 많았지 철들이 없잖아요(웃음).”
그래서일까, <달마야 놀자> 촬영이 끝나기도 전에 ‘속편을 찍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심지어 속편의 줄거리까지 벌써 만들어졌다. 출연자와 스태프들이 모여 술을 마시면서 “여기서는 깡패들이 절로 찾아왔으니까, 속편에서는 거꾸로 스님들이 세상에 나오면 어떨까”로부터 시작해 “깡패들이 운영하는 룸살롱에 스님들이 초대받아 놀러왔다가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좋겠다” 등등 한마디씩 한 것을 모으니까 그럴듯한 줄거리가 완성되었다.
“누군가 ‘속편 찍을 때 몸값들이 비싸져 캐스팅을 못하면 어쩌냐’고 하니까, ‘까짓거 비싸면 깜빵 간 것으로 하지 뭐’ 해서 한바탕 웃기도 했죠.”
<달마야 놀자> 촬영 끝나기도 전에 배우와 스태프들끼리 속편 줄거리 완성해
요즘 그는 아들과 노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고 한다. 집에서 함께 뒹굴고, 동화책도 읽어주며 그동안 못 놀아주었던 것을 한꺼번에 보충해주고 있는 셈이다. 오랜만의 휴식기간에 가족과 함께 여행할 계획도 세웠다.
“묘하게도 출연하는 영화마다 몇개월씩 가족과 떨어져 지방에서 생활해야 하는 작품이더라고요. 그러니까 더욱 보고싶죠. 아내는 돈만 많이 벌어다주면 아무래도 좋다고 하지만(웃음).”
그의 가족사랑은 남다르다. <달마야 놀자> 촬영할 때도 그의 방에는 항상 ‘백수시절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자기를 선택해준 고마운’ 아내와 ‘뜻밖에’ 생긴 아이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가족이 언론에 공개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가족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싶다는 것. 그래서 애초 가족인터뷰로 하자는 기자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아내와는 97년에 만나 결혼했는데, 만남이 좀 복잡해요. 제 대학선배의 대학원 동창의 여동생이었어요. 우연히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는데, 주위에서 잘 어울린다고 그래요. 하지만 나이 차이도 일곱살이나 나는데다, 당시 저는 백수상태라 용기를 못 냈죠. 그렇게 몇 번 만났는데, 어느 날 그러는 거예요, ‘우리 만남의 내용과 형식을 분명히 하자’고. 그래서 ‘그럼 결혼할까?’ 하니까 ‘그러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60일 만에 결혼식을 올렸어요. 그해에 왠지 결혼을 할 것 같더니 정말 운명처럼 하게 되더라고요.”
그가 살던 자취방에서 시작한 신혼생활. 당시 정진영도 아내도 무직 상태였다. 더구나 한 3년쯤 후에나 아이를 낳으려던 계획과 달리 갑자기 아이가 들어섰다. 당연히 돈이 필요했다. 이럴 경우 보통의 아내들이라면 남편이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 이성은씨는 남편에게 배고픈 연극배우의 길을 가라고 권유했다. “당신은 배우가 잘 어울리는 것 같으니까 다시 연극을 하세요.” 그 한마디가 오늘의 영화배우 정진영을 있게 했다.
대학 시절, 서울대 연극회에서 연극을 한 정진영은 80년대 말부터 진보적인 색채의 극단에서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출연한 연극 <노동자를 싣고 가는 아홉대의 버스>는 당시 생산직 노동자라면 안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노동연극이었다. 또한, 그는 92년 당시 학교교육 현실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다뤄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영화 <닫힌 교문을 열며>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닫힌…>은 당시 정부의 탄압으로 극장 상영은 고사하고 녹음실을 빌릴 수 없어 녹음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학가를 돌며 영상을 틀고 배우들이 변사처럼 직접 대사를 하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상영하기도 했다.
서울대 운동권 출신으로, 진보연극·영화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가 지금은 대중영화의 한가운데 서있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는 뜻밖에 과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과거의 개인적인 경력들로 관객들에게 선입관을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자꾸 과거에 이랬다는 치장을 하고 싶지 않아요. 단지 지금은 깡패 역할이 잘 어울리는 배우일 뿐이에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말을 이었다.
“자꾸 사람들이 과거의 저와 지금의 저를 한 궤적에서 보려고 하는데, 그러면 제가 솔직히 뭐라고 말할 게 없어요. 제가 과거 연극을 했을 때의 에너지와 지금 배우로서의 에너지는 전혀 달라요.”
그는 과거의 에너지는 93년경 다 소진했고, 더 이상 무대에 설 의미를 상실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말을 빌리면 ‘진보연극판에서 튕겨져 나갔다.’ 그는 자세한 언급은 피했지만 그 역시 80년대를 고민했던 386세대들의 좌절과 가슴앓이를 심각하게 겪었던 모양이다.
그후 여행도 다니고, 르포 작가가 되어 잡지에 글도 쓰고, 대하드라마 <카레이스키>의 보조작가로 일하기도 하면서 5년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떠올린 것이 영화.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하고, 연출을 배우기 위해 고등학교 은사이기도 한 이창동 감독이 만드는 영화 <초록물고기>에 막일을 하는 연출부원으로 합류했다.
관객들에게 2시간 동안 위안이 되는 영화 만들고 싶어
<초록물고기> 연출부 경험은 그를 밑바닥까지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으로 정치의식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작업을 하면서 전에는 허용할 수 없을 것 같던 다른 세상을 받아들이게 됐다.
“쉽게 말하면 이거예요. 과거엔 변혁의 도구로 연극을 했어요. 그래서 배가 고파도 행복했어요. 그때는 먹고사는 것에 대해 비웃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먹고사는 것이 가장 신성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할까, 그래서 당당하게 그 신성함을 위해 연기를 하는 것이죠.”
그는 1년 동안 공들여 완성해놓은 시나리오를 다시 펼쳐보았다. 시나리오엔 자신의 주장만 나열되어 있을 뿐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나와 있지 않았다. 그때 비로소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내 얘기만 들어보라고 하는 건 말이 안된다”는 깊은 자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인생에 변화가 왔다. 97년경 우연찮게 다시 연극무대에 서게 되었다. 연기에 대한 에너지가 소진돼 다시는 연기를 못할 줄 알았는데, 몸속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발견하고 힘을 북돋워준 것이 아내였다.
그는 과거와 지금의 차이를 이렇게 정리했다.
“과거엔 연극이나 영화가 이 사회를 치유하기 위한 약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젠 영화가 약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할까요. 지금은 영화가 술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술은 약은 안되지만 사람들에게 활력을 주고 새로운 힘을 창출하는 에너지가 되잖아요. 물론 나쁜 술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만. 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술을 팔고 싶어요. 2시간 동안 위안을 주는 영화를 만들자는 생각으로 일합니다.”
그는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순간순간 열심히 살다보면 어디엔가 서있지 않을까요”라고 했다. 언뜻 운명론자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만큼 자신의 삶에 대해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의미일 게다.
“시나리오는 계속 쓰고 있어요. 영화라는 게 시나리오만 있다고 되는 건 아니예요. 배우와 스태프 수십명이 한마음으로 완성하는 종합예술이에요. 제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거부하지는 않죠.”
벌써부터 그가 만들 영화가 어떤 것일까 기대하는 것은 너무 이른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