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 모험의 전도 / 고린도전서 9:19-27
전도는 편안한 일이 아니라 위험이 따르는 일이다.
아프리카의 식인 부족에 전도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그 외 아프리카 국가들에서의 전도 위험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야만적인 지역은 물론이고, 소위 문명화된 국가에서조차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는다.
미국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전도 활동을 한 지 백 년이 지나도록 한 명의 개종자도 얻지 못하자, 선교사들은 자신들도 중국인처럼 머리를 깎고 중국 옷을 입기로 결정했다. 그 후에야 비로소 개종자를 얻을 수 있었다.
청년회에서 농촌 전도를 갔을 때, 여름에 나무 그늘 아래 사람들을 모아놓고 전도해도 한 명도 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청년회 사람들이 서양식 양복을 입고 와서 아무리 사람들을 불러도 섞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도에는 상호 이해와 조화가 필수적이다. 전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의 거리감이나 감정적 장벽이 있으면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는다. 일본인들이 조선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서로 간의 조화가 중요하다. 바울도 이런 방법을 통해 상호 이해를 추구했다.
사람을 얻고 싶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 들어가야 한다. 노예를 얻고 싶다면 노예의 입장에서, 유대인을 얻고 싶다면 유대인의 입장에서,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면 그들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바울은 이를 실천했기에 성공했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저 그들에게 동화되어 버리곤 한다.
김창준 목사는 유물주의자와 소통하더니 결국 완전히 그들의 세계에 빠져들고 말았다. 얼마 전에 해리스 박사가 청루(青樓)에 들어갔는데, 그 이유는 기생 중 한 명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모른 채 해리스가 청루에 다닌다는 소식이 신문에 게재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위험이란 맹수나 도적, 칼이나 매질과 같은 것이 아니라, 겉으로는 아무런 위험이 없어 보이지만 내면은 위험한 상황을 의미한다.
이은성이 평양에 전도하러 갔을 때, 그곳 기생에게 유혹당해 실족했다. 불교학자와 자주 어울리면 쉽게 물들고, 어떤 철학자와 함께 지내다 보면 그 철학자가 된다. 필자의 집에도 불교학자가 자주 왔는데, 그 사람은 필자를 자신의 종교로 끌어들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얼마 전 최병헌 목사가 말하길, "내가 예수교를 믿지 않았더라면 불교를 믿을 뻔했다"라고 했다. 이에 필자는 반박했다. "기독교를 불교와 동일시하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우리의 종교는 불교나 유교와 동화될 수 있는 종교가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인간이 만든 것이다. 우리의 종교는 창세 이전부터 시작되어 인류의 마음속 깊이 감추어 있는 진리다. 변하려야 변할 수 없고, 고치려야 고칠 수 없는 본질적으로 드러난 진리다.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이는 영원히 죽지 않는 도(道)를 가진다. 누가 하늘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며, 해와 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위험해도, 박해가 있어도, 죽더라도 살 것이며, 십자가 아래로 기어들어가 싸우면서 전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그것은 캄캄한 세상, 곧 마귀의 세상일 뿐이므로 전도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성인들이 이러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들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하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본장 16절에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