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16절-20절: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16절: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시41:에서 다윗이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라고 예언했는데, 이 예언이 16절에서 가룟유다에게서 이뤄졌다고 한다.
그러면 창세 이후 구약시대의 선지자나 솔로몬 등이 예언한 게 오늘날 자기에게 이뤄진 것을 느끼느냐? 그 예언이 지금의 자기에게 분명히 이뤄지고 있는 거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도 자기에게 부정적이던 긍적적이던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것을 의식을 못 하고 있다.
다윗이 예언할 때 ‘유다’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배반할 것이라는 말이 없어서 가룟유다가 자신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을 몰랐을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가룟유다가 알아듣도록 여러 번 말씀해 주셨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보다 자기 미래의 영광이나 돈을 더 사랑하면 그 성질이 살인자 편에 속했다는 거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자기가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말씀을 자기에게 하는 말씀인 줄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말씀을 깨달으면 이 말씀을 자기의 현실에서 써먹어야 한다. 말씀을 깨닫지 못하거나 깨달은 말씀으로 자기를 살피고 고칠 줄 모르면 고통을 당하거나 얻어맞게 된다. 곡식을 창고에 가득 채우고 ‘내 영혼이 이제 먹고 마시고 쉬자’ 하니 이 사람에게 ‘오늘 밤에 너를 데리고 가면 네 창고에 있는 게 누구 것이 되겠느냐’고 했는데 사람들이 여전히 이 소원 목적으로 달려가고 있다.
가룟유다의 이 사건을 기록해서 우리로 읽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보라는 거다. 교장 선생님이 애먹이는 학생을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이 학생은......’하면 이것을 듣고 보는 학생은 ‘나는 저래서는 안 되겠다’라고 해야 한다. 그러라고 여러 학생 앞에서 지적하는 거다.
오늘날 교인들이 하나님께서 가룟유다를 아예 지옥에 갈 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가룟유다는 지옥에 갔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이런 불공평하고 불의한 분이냐? 하나님께서 가룟유다를 돈을 좋아해서 지옥에 갈 자로 만들어놓고 ‘너는 왜 돈을 좋아하고 세상을 좋아하느냐? 그러니 지옥에 가거라’라고 한다면 구원보다, 진리이치보다 돈을 더 좋아하고 세상을 좋아하는 지금의 자기는 어디로 가느냐? 성경에 가룟유다를 기록해 놓은 것은 가룟유다가 지옥에 갔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예수 믿으면서 가룟유다의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가룟유다 짓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하는 거다.
성경을 보면서 자신을 쳐다보고 고치지 못하면 이 사람은 이단이 아니라 백 단도 된다. 예수 믿으면서 예수를 닮지 못한 것은 주님과 이질성이요 이단성이다. 이질성과 이단성은 주님을 닮지 못한 성분이기 때문에 이것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 말을 안 들으면 매질이 들어가고, 워낙 말을 안 들으면 쫓아내 버린다. 하나님의 집에서는 ‘네가 그렇게 오래 예수를 믿었는데 나를 닮은 게 어디 있느냐?’라고 하시며 매질이 들어온다. 하나님은 흠과 티가 없다.
예수님에게는 죽은 거, 죽어가는 거, 앞으로 죽을 게 전혀 없다. 전부는 산 거다. 당신의 언행심사는 전부가 산 말씀이다. 이 정신이 우리 속에 들어가는 게 성령님의 감화를 입는 거다. 예수 믿으면서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가룟유다를 지옥에 가는 것으로 만들어놓았다고 하지 않는다. 가룟유다가 예수를 팔아먹은 게 하나님께서 가룟유다를 지옥에 가는 것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와의 관계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부가 자기에게 하는 말씀으로 알고 날마다 자기를 절대적인 말씀의 이치에 맞춰 가야 한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어디가 잘못됐는지, 자기가 무엇이 잘못됐는지, 가정이 뭐가 잘못됐는지, 국가가 뭐가 잘못됐는지 금방 안다. 그러나 자신의 속마음을 못 보는 자들은 가룟유다를 지옥에 갔다고 하면서 가룟유다가 한 일을 또 하게 된다. 그래서 가룟유다를 데리고 와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다. ‘네가 가룟유다처럼 돈을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너도 앞으로 그런 일을 할 거다’라는 거다.
17절: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가룟유다는 열두 제자이면서 사도가 되기 전에 목을 달아매서 죽었다. 예수를 팔아먹지 않았으면 사도가 될 수 있는 것인데 예수를 팔아먹고 사도가 되지 못했다. 이게 무엇을 말해주는 거냐? 목사가 물질선 인정선 목숨선을 초월하지 못하면 어떻게 교인을 가르치겠느냐? 아브라함은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니까 당장 떠났다. 초월해 버렸다. 이런 신앙정신이라야 예수를 팔아먹지 않는다.
성경을 바로 깨달으면 ‘교회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죽이는구나’하는 것을 안다. 뱀은 먹이를 씹지도 않고 머리부터 삼킨다. 교훈 면에서 교인들에게 세상정신이 들어가게 하는 것은 거짓 종이요, 이단자요, 적그리스도다. 이런 교훈은 영생의 말씀이 아니라 독극물이다.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가룟유다는 봉사의 한 직분을 맡았었는데, 유월절 전날에 이 자리에 같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유월절에 쓸 물품을 사러 간 줄 알았던 모양이다. 이게 예수를 파는 날이다.
18절-20절: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과를 먹으라고 했는데 생명과는 안 먹고 선악과를 먹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에 불의다. 그 결과로 모든 인류가 죄 가운데 살게 되었다. 에덴동산에서 생명과를 먹으라고 한 것은 ‘진리이치의 말씀을 먹어라. 구원을 먹어라. 예수를 먹어라’ 이 말이다. 진리의 교훈을 먹는 게 예수를 믿는 거다. 그런데도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대신 돈을 위해 예수를 팔고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세상은 하나님 앞에 의라고 내세울 게 없다. 전부가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고 타락된 지식에서 나온 것이라서 영원히 가는 법이 아니다. 그래서 이 법을 아무리 잘 지켜도 천국에 못 들어간다. 세상의 법은 가견적 현상적 임시성에 속한 의다. 세상사람들은 이 법으로 살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이 법을 주격으로 하고 살면 불의가 된다. 우리는 생명의 법, 생명의 의로 사는 거다.
국가법보다 높은 것은 일반 도덕법이고, 이 일반 도덕법보다 더 높은 것은 양심법이고, 이 양심법보다 더 높은 것은 종교법이고, 이 종교법보다 더 높은 것은 진리법, 생명법이다. 믿는 사람은 진리법 생명법을 지킨다. 세상이 타락 되었지만 일반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따르는 양심이 아닌 선악과 따먹고 나온 법을 지키더라도 살만한 세상이 된다. 그러나 이 법을 아무리 잘 지켜도 천국에 못 들어간다.
예수님의 몸이 가룟유다 자기 거냐? 다른 사람에게도 필요한 예수님이고, 구원이고, 축복이고, 말씀이고, 하늘나라의 축복이 들어있고, 하나님의 것인데도 가룟유다가 이 예수를 팔아먹었다. 그러면 스승을, 구원을 팔아먹고 잘 먹고 잘살았느냐?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 양심을 이기지 못해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겠느냐?
하나님의 옳음을 내어주고 그 대가를 받는 것은 불의다. 영원한 것을 내어주고 임시적인 것으로 바꿔 먹는 것은 불의다. 생명을 내버리고 물질적 사망적인 것을 받는 것은 불의다. 구원을 내버리고 멸망을 받는 거, 천국을 내주고 세상 불탈 것을 받는 거, 하나님을 내어주고 세상을 얻는 거, 자기가 살려고 예수이름을 이용하는 거, 이게 다 불의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법 앞에, 창조의 목적 면에서 불의다. 우리는 옳은 것에는 자기의 목숨을 내놓고 나가야 한다.
가룟유다는 자기가 예수님을 은 30에 판 행동의 결과로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는 것을 보고 양심이 고통스럽고 찔려서 그 돈을 성전 안에 던져 버렸는데, 대제사장은 이 돈을 주워다가 헌금함에 넣지 않고 공동묘지를 샀다. 이 공동묘지 이름이 ‘피밭’이라. 저주의 밭이요, 죽음의 밭이요, 사망의 밭이라.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이 있는 건데, 인간이 이 목적이 없이 사는 것은 몇 년을 살던 가는 곳이 피밭이다. 인간창조의 목적을 놓고 영의 눈으로 보면 이런 사람의 정신 사상은 저주와 죽음의 밭이다.
세상 소원 목적으로 예수를 믿고 헌금을 내는 것은 자기의 몸을 세상에 팔아서 내는 창기의 돈이 되는 거고, 이것은 자기의 구원을 판 것과 다름이 없는 거고, 나를 살리려고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니 불의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헌금은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사기 쳐서 내는 헌금도 안 받으신다. 숨겨놓고 체면치레로 일부만 하는 헌금도 안 받으신다. 이런 것 모두는 구원운동 생명운동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사망운동이다.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 한 사람이 알면 다 안다. 한 사람에게 ‘이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아라’라고 신신당부를 해도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한 말까지 퍼져나간다. 그러니 말조심을 해야 한다. 그런데도 말조심을 못 해서 문제가 일어나면 싸우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라. 나만 바로 서면 하나님께서 처리하신다.
성경이 들어가는 곳에는 각 집이던, 개인이던, 각 나라던 가룟유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있었다는 거, 그러면서도 돈 욕심을 품고 살았다는 거, 그리고 예수님을 돈으로 바꿨다는 거, 그리고 결과적으로 저주받은 밭의 소유가 자가 되었다는 것을 다 안다. 가룟유다의 정신을 가진 사람의 마음 밭에는 생산이 없고, 사는 것은 없이 죽는 것뿐이고, 전부가 사망이고 저주다. 이게 피밭이다.
가룟유다의 마음 가운데는 세상을 소원 목적한 돈이 가득 들어있다. 이런 가룟유다가 봉사직을 가졌었다. 즉 교회에서 직분을 가지고 있었던 거다. 오늘날 교회 안에 가룟유다의 돈을 좋아하는 정신을 가진 자들이 많다. 돈 때문에, 부자가 되려고 예수를 믿는 게 가룟유다의 정신이다.
성경에 자기의 이름이 없다고 해서 안심하면 안 된다. 시편에 가룟유다라는 이름이 없었지만 돈을 좋아하는 유다가 이 예언에 걸렸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세상 것을 얻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면 가룟유다의 피밭으로 가게 된다. 그러니 가룟유다에게 손가락질하지 말아라. 이 손가락질이 돈을 좋아하는 너에게로 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