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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6장 16-24절
지금은 근심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이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하나님을 보내실 것인데, 이것은 이때서야 비로소 성령 하나님께서 오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있었다고 할 때 그들이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 있게 된 것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신약에서야 비로소 성령 하나님께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오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성령 하나님은 늘 하나님의 택한 백성 가운데 오셔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을 일으키고 믿음에 합당한 고백을 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앞두고 말씀하고 계시는 이 내용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염두 해 둔 것이고, 오순절 성령 강림과 같은 사건, 다시 말해 그와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전무후무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오셔서 성령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옳고 그름을 따져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먼저 무엇이 죄인지를 드러내시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 이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죄와 함께 의에 대해서도 드러내시는데, 이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의입니다. 그런데 이 의를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시고 우리 의를 위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것은 한번 주어진 의가 다시금 되돌려지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셔서 다스리게 하십니다.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특별히 택자를 위하여 기도하기까지 하십니다. 이러한데 누가 그리스도의 의를 다시금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심판에 대한 부분은 더더욱 확정적입니다. 세상 임금, 다시 말해 마귀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패했습니다.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물론 미혹은 하겠지만 택한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만드는 일은 결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진리의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셔야지만 증거 되는 내용입니다. 증거 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증거 하신다는 겁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인데, 성령 하나님은 결코 스스로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오직 들은 것을 말씀합니다. 오직 들은 장래 일을 알리십니다. 그리하여 성령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게 되는데, 그 영광은 성부 하나님의 것을 예수 그리스도가 받아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받아 말한 것을 성령 하나님이 받아 말하는 것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이처럼 성령 하나님께서 오시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사도로서 주의 복음을 전해야 할 제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 예수님께서 하신 일,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일을 사도들이 하게 될 텐데,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사도들이 주체인 것은 아닙니다. 누가 주체시냐? 성령 하나님이 주체이십니다. 성령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은 채 역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체이십니다. 다만 성령 하나님께서 오시는 것은, 그것도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같은 방식으로 오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셔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금 말씀하시는데, 오늘 본문 16절을 보시면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지금 예수님께서는 반복적으로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할 것임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더라도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근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히려 성령 하나님을 약속하고 있는 만큼 성령 하나님을 구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한다는 말과,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고 한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일단 매튜 풀 주석은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한다’고 할 때 그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하신 것까지를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고 한 것은 최후 심판을 위해 재림하시는 것으로 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17절에서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 때문인데, 아버지께로 갔다가 다시금 오시는 것을 승천과 재림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한다’는 말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말하지만, 이어지는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고 한 말에 대해서는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때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나’를 보리라는 것 때문에 칼빈의 해석이 맞는가 생각할 수 있지만,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성령의 사역에 대한 강조가 있었다는 것과 그 성령을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다는 점에서 틀린 해석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부께서 일하시되 성자를 통해 일하신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성부가 주체이십니다. 이제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을 세우십니다. 사도로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해야 합니다. 이때 그들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하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지만 그분은 여전히 그의 사도들을 통해, 그리고 그가 보내시는 성령을 통해 일하십니다. 주체가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시지만 그것을 ‘나’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 주석은 어느 하나로 보기보다는 전체를 다 아울러 설명합니다. 즉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한다’고 할 때 그것은 그가 죽으심으로 볼 수 없다는 것과, 그가 부활하셨다가 다시 승천하시므로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어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고 하는 것은 죽음일 때는 부활이 있다는 것으로, 승천일 때는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뿐만 아니라 재림하시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사실 우리는 요한복음 14장에서 이와 비슷하게 말씀하시는 구절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18절과 19절을 보시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이때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하지만 너희는 나를 보리라는 것은 16절, 17절에 근거하자면 성령 하나님을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보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본다는 것이 아니라, 승천 이후 다시 나를 본다는 것은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단순히 내적으로만 역사한 것이 아니라 가시적으로 보이셨습니다. 그런 가시적 역사가 있어야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인가? 그렇게만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 적은 없지만 여전히 믿음 안에서 본다고 말할 수 있는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경우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면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마28:20). 인성을 취하신 모습으로 함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거짓된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6절은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칼빈의 해석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의 전체적인 맥락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만약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고 한 말씀을 매튜 풀 주석처럼 재림으로 이해한다면 이후 기도할 것을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와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재림에 이어지는 내용은 완성과 영광이고, 완성과 영광은 기도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있으면 내가 너희와 함께 함을 증명할 수 있는 성령 하나님이 너희에게 오실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고아가 아니요, 고아가 아니기 때문에 실족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12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르칠 것이 많지만 제자들이 감당할 수준에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서로 논의하게 됩니다. 17절과 18절을 보시면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고백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말씀은 처음 들은 말씀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도 말씀하신 적이 있으며(요7:33 참조), 동일한 말씀을 제자들에게도 하신 적이 있습니다(요13:33 참조). 한번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도, 요한복음 14장에서도, 요한복음 16장에서도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고 계신 내용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제자들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진리의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여러분,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지만 진리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의 조명 없이는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기록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의 내용이 무엇을 말하는지 어느 정도 지각이 있으면 알 수는 있습니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하는구나! 창조주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구나! 그런데 피조물 가운데 사람이 타락했고, 타락한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죽게 하셨구나! 지각이 있다면 이런 내용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는 것을 깨달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악한 영인 마귀도 압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 19절에서는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을 통해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믿음으로 고백되는 데 있습니다. 믿음으로 고백되기 위해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9-10)
어쨌든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19절 이하의 말씀은 하시는데, 우선 19절과 20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어 서로 묻지만 누구도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이제 물을 수 있는 대상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저들의 마음을 아시고 20절로 가르치십니다. 너희가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공관복음서에 보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리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금식하라, 슬퍼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곡하고 애통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씀드린 바 있는 것처럼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요15:18 참조).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죄를 드러내시기 때문에 미워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는 것은 세상이 기뻐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한결같습니다. 어떤 점에서 한결같은가? 멸망의 길을 걸어가는 데 있어 한결 같습니다. 죄와 함께 멸망을 향해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죄와 함께 하는 것을 책망하십니다. 죄를 짓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고, 결국 영원한 심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의 죄를 정확하게 보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어둠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반길 수 없습니다.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로 여깁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고 할 때 세상은 그 사실이 반가운 것입니다.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가 사라졌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특히 세상의 임금이 마귀라고 할 때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의 승리인 것처럼 착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더 기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뭔가를 계획하셨지만 그 계획을 자신이 막았다고 생각하여, 그래서 하나님을 이겼다고 생각하여 더 기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잠깐입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결코 마귀에게 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죽음을 통하여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할 것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음만이 아니라 죽음 이후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의를 주실 것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실 것이지만 죽음에서 끝나지 않고 부활하실 것이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확증을 위해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까지 앉히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내용을 담아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기쁨에 대하여 비유적으로 설명하시면서 더욱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21절과 22절입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성경은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여자를 저주하실 때 해산의 수고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창3:16). 그 수고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해산할 때가 가까우면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할까 생각하면서 근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해산의 수고와 고통 이후 아기를 낳으면 아기를 낳았다는 것, 생명을 낳았다는 그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않습니다. 물론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고의 고통보다 무엇이 더 큰가? 생명을 낳았다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의 오심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을 때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슬픔에 잠길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제자들이 꿈꾸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치적 메시아로 로마로부터 해방하여 다시금 이스라엘 나라가 모든 나라 위에 우뚝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메시아로 기대하던 예수 그리스도가 죽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있는 저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소망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애통할 수밖에 없고 근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십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십니다. 승천할 때만 해도 제자들은 정치적 메시아 입장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시는 것이 지금이냐고 묻습니다. 부활하신 것 자체가 기쁜 일이기는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하신 이 말씀의 내용이 적용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언제 이 말씀이 적용됩니까? 승천하시고 난 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나는 때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기쁨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전 제자들의 기쁨은 정치적 메시아와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 것이 기쁨이고, 그의 죽음은 슬픔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살아 로마로부터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여 모든 나라 위에 세워지는 것, 그것이 그들에게는 기쁨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모든 나라 위에 세워지고 난 뒤 제자들이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 그것이 어떤 면에서 그들이 소망하고 있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세상적으로 잘 되는 것이 그들에게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막힐 때 슬픔이요, 근심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을 보내심으로 진리를 깨닫게 하실 때의 기쁨은 어떤 것입니까? 단순히 세상적으로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 그리고 그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살 것을 소망하는 것, 이것이 참된 기쁨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인간의 가장 큰 슬픔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고, 그 죽음은 영원한 사망으로 결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죄인임을 알지 못하고, 죄인이기에 사망이 결과 된다는 것을 모릅니다. 바로 이런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부름을 받은 자들이 누군가?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이요, 주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교회요 성도인 것입니다.
특별히 22절에서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다시 너희를 본다고 할 때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 하나님을 보내셔서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고, 그때서야 비로소 참된 기쁨을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있는 자가 있는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비록 요한복음 15장 18절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지라도 그 기쁨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2절에서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지라도, 유대인들이 너희를 이단으로 여길지라도 내가 너희에게 준 이 기쁨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너희를 출교할 뿐만 아니라 죽이는 일이 있어도 내가 너희에게 준 이 기쁨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확증하시고,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구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 이전에 성취하실 확실성 때문에 성령을 통하여 택한 백성이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구원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역사하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성취 이후라면 어떠하겠습니까?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성취가 있다고 해서 마귀가 활동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사도 베드로는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향하여 어떻게 권면합니까?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5:9) 방금도 말했지만 고난이 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일이 있고, 출교도 하고, 때로는 죽이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죽이기까지 하는 일은 없지만 복음에 대한 세상은 반응은 언제나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다고 해서 우리 안에 주신 기쁨을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있는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만큼 믿음이 좋아서입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그런 믿음을 주심으로 그렇다고 말한다면 틀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앞서 하나님의 견인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5:10) 즉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는 이유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터를 견고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하십니다.
이런 내용은 로마서 8장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6절부터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6-18)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누가 증명 하시는가? 성령 하나님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상속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습니다. 그 상속은 영광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은 이 땅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가서야 받습니다. 이 땅에서는 영광을 위한 고난이 있을 뿐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고난과 영광을 비교할 때 장차 주어질 영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까지 말씀합니다. 앞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과 같지 않습니까! 해산하는 여인이 해산할 날이 오면 두려워하지만 낳고 난 뒤에는 해산의 수고보다 기쁨이 크게 때문에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고난이 더 큰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을 실제로 누리게 되면 지금의 모든 고난은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지금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오셔서 참된 기쁨을 주시겠지만 그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우리에게는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쁨을 빼앗고자 하는 것이 마귀요, 세상입니다. 그러나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실력으로만 본다면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 26절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이것이 31절 이하로 가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1-35) 비록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지만(롬8:36),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롬8:37).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까지 확신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한 마디로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시면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게 되는 그때는, 다시 말해 내가 너희와 함께 함을 성령을 통해 나타내실 때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할 것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구하라고도 말씀하십니다. 구하면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늘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한 그 내용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7-19) 하나님을 알지만 더 풍성히 알도록 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지를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만 알면 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 하나님 지식으로 풍성해지도록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을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된 믿음이 있지만 그 믿음의 풍성함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당연한 결과인데,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한 바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성령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역사하여 진리를 더욱 깨닫게 하시는 것이지만, 그런 역사로 있다고 해서 저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 하나님께 하나님 지식을 구하지 않는 것을 괜찮은 것인 양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작정을 말할 때 하나님이 정했기 때문에 죄도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말하는 것 자체도 죄요 악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구하라고 하십니다. 구하면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지식을 구하면 받는다는 것이요, 받으면 하나님 지식으로 말미암아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실 때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지만, 하나님 지식을 구하여 받게 되면 그 기쁨은 더욱 충만해 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내 이름으로’라는 표현인데,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께 구하여 받는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것입니다.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하나님과 타락한 사람 사이에는 늘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물론 구약은 명확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실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 율법 안에 있었습니다. 신약은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근거로 아버지께 구하도록 하십니다. 그리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구한 것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주시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지식에 합당한 것은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깨닫게 하시기 전까지 가졌던 정치적 메시아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라는 세상적인 의미에서 잘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지식에 합당한 것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두신 기쁨이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두신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 지식과 그 지식에 걸맞은 것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비록 하나님 나라가 아닌 지상에서의 삶이기에 고난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런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안에서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제자들의 행보를 보십시오. 고난조차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주의 복음을 증거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 모두가 사도는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목사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들을 통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무엇이 성도의 참된 기쁨인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하면 복음에 합당한 삶 아니겠습니까? 말씀에 합당한 삶, 여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의 충만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