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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옥의 수필세계
- 인정과 서정의 꽃불, 여백과 여명의 등불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인간이란 원래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적 시대적 상황에 대해 일체 무관심하거나 초연한 상태로 살아가기가 어려운 존재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 그 자체가 역사적 시대적 상황의 한 부분이며, 그것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역사적 시대적 상황의 영향을 받으며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곧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항 속에 들어와 있는 물이 역사적 시대적 상황이라면 그 속에서 살아가는 물고기와도 같은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이영옥의 수필집 <가슴으로 가는 여행>는 바로 인간의 존재 조건, 실존을 겨냥하고 있는 수필이라는 데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수필의 문제는 잡문성의 극복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어떻게 수필에 문학성을 놓을 것인가 하는 점은 수필계에 있어 피할 수 없는 화두다. 무엇보다도 수필의 문학적 성취는 문학적으로 가치 있는 재료를 선택해서 어떻게 형상화하는가에서 좌우된다. 이런 차원에서 이 수필집은 작가의 인식처럼 독자로 하여금 세상과 소통하는 존재방식에 대해 되짚어보게 하는 호소력이 짙은 작품들의 집합체라 하겠다. 작가의 시선은 이름도 빛도 없이 따스한 온기를 향기처럼 퍼뜨려 세상을 꽃피우는 사람들을 향하고 있고, 작가가 채취한 언어들은 시골 온돌방처럼 따뜻한 온도가 느껴져서 더욱 이 수필집의 가치를 드높이게 한다.
세계화 시대를 맞아, 삶의 양식도 세계성의 징후를 보이고 있는 현실이다. 이영옥의 자녀도 외국에 나가 사는 것 같다. 이영옥은 미국 뉴욕에 거주하는 딸이 출산을 한 관계로 이 수필집이 나오면 급히 미국으로 떠나야 한다. 이 수필집의 문학적 성취로 인해서 그녀는 세종문학상도 거머쥐게 되었다. 외국에 나가게 되면 다른 나라의 선진 문화를 접하면서 사물들을 보는 시야도 한결 넓어지고 견해나 사고방식 등도 보다 폭넓고 다양해지리라 믿는다. 말하자면 우물 안에서 우물의 안쪽과 우물 밖으로 보이는 바깥 세상만을 바라보던 좁은 시각에서 우물 밖으로 나가 우물 바깥에 펼쳐져 있는 넓은 세계를 보면서 세상을 바라다보는 시야와 사고방식 등이 크게 확장될 것이다. 이미 여러 나라 여행을 통해서 지구가 평평한 원반 같다고 생각한 그리스시대의 시각으로서가 아니라 세계시민의 시각으로 세상을 잘 보고 있음이 이 수필집 발간으로 명확해졌다. 이제 수필은 무엇을 다루었느냐보다 어떻게 형상화했는가의 차원으로 접근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여러분은 해설을 따라 가다 보면, 작가의 내면적 소리는 물론 시대와 역사의 발신음이 작품 속을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일상에서 얻은 생각과 느낌을 절제된 정서로 표달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수필은 삶에 있어 중요한 가치인 비움과 열림의 미학을 문학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을 지닌다. 이 수필집의 주제적 지향성은 크게 세 범주로 나뉜다. 첫째 범주는 이영옥 수필의 거대한 물줄기로써 소망과 인연, 부부애와 가족애 등을 담고 있는 글이다. <끝까지 가고 싶은 사람>, <남겨진 가족사진>, <아버지의 비밀>, <어머니와 아들야>, <잦나무 향기> 등의 작품이며, 두 번째 부류는 토포필리아, 비움의 성찰과 여성 문제 등을 담고 있는 글들로 <마음비우기>, <또 다른 거울>, <임신유세>, 등이며, 세 번째 군으로 여행 이야기와 서정 그리고 사회의식의 노래라 할 수 있는 <눈꽃나라>, <목련꽃봉우리>, <빅토리아 폭포와 잠베지강>, <캄보디아 청년들>, <술 이야기>, <담을 넘어서>, <프로가이드와 함께>, <숫자가 아닌 이름을 불러주오>, <최춘선 할머니의 사명>, <금 팔러 가던 날>, <은쟁반에 금사과> 등의 작품들이 이에 속한다. 참여와 저항과 관련된 일화를 소재로 쓴 수필들이 대부분이다. 그녀의 묘사력에 기대지 않더라도 소재가 주는 친화력이 우선 작품수용을 쉽게 한다.
II
1. 유년의 추억과 그리움을 주제로 한 인간학
이영옥은 무엇이 삶의 논리이며, 우주의 심오한 질서인가를 되짚어보게 하는 작가다. 이 수필집은 이런 물음에 대한 문학적 해답을 찾는 데 목표를 둔 것 같다. 그녀의 수필적 관심은 ‘소망, 인연, 가족’ ‘자조, 성찰, 여성’ ‘종교, 여행, 의식’ 등의 관심에서 싹을 틔운다. 이영옥 수필은 작가의 인연과 생에 대한 뜨거운 감정이 반성적 성찰과 상호 삼투되어 동일시를 이루고, 자연과의 합일 속에서 생성된 건강한 사회의식이 작품 속에 문학적으로 용해되어 있어 공감과 감동을 준다. 가족을 소중히 여기고, 가슴 따뜻한 자기성찰의 모습을 기억의 저장창고에 쌓아두고 있어 영혼의 스파크가 휘황하게 번쩍인다. 문학이 독자의 감동을 목적으로 한다는 본질을 생각할 때 이와 같은 공감과 감동 창출은 필수적이며 또 연상으로 복잡한 내면의 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감각적 접근과 함께 다양한 비유의 구사도 필요할 것이다.
수필이 어떻게 사실의 세계에 충실하면서도 이를 초월한 상상의 예술세계를 이런 기법으로 구축해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뛰어난 작품집의 하나가 바로 이영옥의 <은혜는 돌에 새겨라>라 하겠다. 이 논리를 전제로 할 때, 이영옥은 크리스찬으로서 오늘도 성실하게 자기를 바르게 세우는 일에 정진하는 구도자적인 여인이다. 첫 번째 강물은 인정의 향기가 서정이 되어 내면을 촉촉이 적시는 정감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대체적으로 수필작가는 창작과정에서 네 단계를 거친다. 소재 차원에서 감동적인 제재를 모으고 그에 대한 심오한 통찰과 관조과정을 거친 뒤, 그 결과를 미학적으로 재배열하고 구조화하여 독자에게 전달하는 서술과정을 거친다. 따라서 이영옥의 수필텍스트는 작가가 미적 감동을 목표로 재배열한 특수한 이야기가 된다. 제일 먼저 실린 수필 <끝까지 가고 싶은 사람>을 보자.
1) 우선 꼬인 데가 없는 순수한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
2) 지혜로운 사람과 가까이 하면 인생이 든든하다.
3) 긍정적인 사람과는 가까이할수록 삶이 밝아진다.
4) 가려운 데 잘 긁어주는 사람도 가까이 지내기에 좋은 사람이다.
5) 마지막으로 변덕이 없이 한결같은 사람을 빼놓을 수 없다.
6)내가 가까이 하고 싶고 끝까지 같이 가고 싶은 덕목을 갖춘 이런 사람은 실은 누구라도 흠모할 만한 사람이 아닐까. 나의 마음공부와 신앙훈련도 이런 사람이 되려는 것이리라. 신과의 진정한 만남을 통한 치유를 경험하고 누림과 헌신이 있는 사람의 모습이 이와 비슷하리라 여겨진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이 진짜가 진짜를 알아보듯이 먼저 이런 사람이 되어야 끝까지 함께하고 싶은 사람으로 선택되리라.
<끝까지 가고 싶은 사람>에서 -
그녀의 이 수필은 인연을 필연으로 이어가려는 작가의 가치관과 인간관이 잘 녹아있다. 함께 익어가면서 삶이 향기가 난다면 참으로 아름답고 축복된 일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녹녹치 않는 삶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이 축복만 주는 것이 아님을 안다. 이만큼 살다보니 사는 것은 거창하게 소리치거나 어깨에 힘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공부와 신앙훈련도 이런 사람이 되려는 것이리라.’는 언술은 작가가 어떤 사람인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수필은 일상을 소재로 해서 정서와 그를 통해 획득되는 깨달음을 유감없이 기술할 수 있는 글이다. 이 수필은 이러한 고유 영역과 특성을 논리성을 가지고 제대로 살렸기 때문에 향기를 지닐 수 있다. 1)에서 5)까지는 구체화라면, 6)은 일반화 부분이다. 사랑이 떠난 인간관계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논리적 문장 배열로 말해주고 있다.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고, 선택이다. 선택의 소중함을 수필적 소재로 취택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이런 차원에서 수필가가 그려내야 할 수필적 주제는 인간애의 정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인간이면 가져야 할 인간적인 자세가 어떤 것임을 엿볼 수 있게 해서 인식 구조로서의 문학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가족이란 세상의 다른 어떤 관계보다도 끈끈하고 지겹도록 구속하고 구속당하며 영향을 미치는 투명한 끈 같다. 가족이란 울타리와 분위기 안에서 인격이 형성되고 도덕 가치기준이 형성된다.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도 위급할 때면 나타나 수호천사가 된다. 자신을 지켜줄 마지막 보루 같은 것이어서 가족관계가 좋으면 무엇보다 든든한 자산이 될 것이다. 이산가족의 아픔을 가지고 태동한 우리 가족은 모두가 나름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던가. 가난의 설움도 간간히 스며있고 외로움이 배경이 되고 있지만 거부할 수 없는 자부심이 서려있는 게 묘하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우산 속에서 그래도 안온하게 살아왔음을 감사하게 된다. 여동생이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사진관에 가서 찍은 흑백사진으로 무채색 점들의 명암이 그 시절의 삶을 영롱하게 재현하여 말하는 것을 오래도록 듣게 된다.
<남겨진 가족사진> 중에서 -
위의 작품은 가족의 의미를 천착해 나가는 수필이다. 작가는 이 수필의 제목을 ‘남겨진 가족사진’이라고 정하고, 서두 첫 마디를 ‘유일하게 남은 가족사진이 어머니의 집 거실 벽에 걸려 있다’라고 적었다. 주어진 시간을 살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우리 기억의 한 켠에 속해 있는 체온보다 더 뜨거운 것으로 자리했던 인정의 샘물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가족의 의미를 ‘투명한 끈’으로, ‘수호천사’로, ‘마지막 보루’, ‘든든한 자산’으로 의미화해 가면서 마지막에 가서 ‘무채색 점들의 명암’이란 표현으로 지배적 정황을 만들어나가는 글솜씨가 보통이 넘는다. 전개부로 가면서, 차례차례 어머니, 아버지, 막내, 본인, 여동생, 언니 남동생 순서로 각자의 특성을 묘사하면서, 결말부에 가서, ‘색깔이 다른 다섯 형제가 어른이 되고 보니 많지도 않은 것 같다’,고 회상하고 ‘이 사진 속 얼굴들끼리 여행하며 옛날처럼 한 방에서 자 보면 좋겠다’는 소원을 갖는다. 구체화에서 일반화로 나아가는 문장전개로 볼 때, 이영옥은 기본기가 튼튼한 작가라 하겠다. 수필은 찬란하고 정결한 정신의 축제라 할 수 있다. 삶을 통한 선택된 체험의 미학적 형상화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가족에 대한 진솔한 내면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날 저녁 일반인들에게는 폐쇄된 은밀한 벚꽃나라, 해군통제부 구역을 거닐 수 있는 특혜를 마음껏 누렸다. 벚꽃나무들이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새로운 만남을 축하해 주었고 둘만의 오롯한 시간 속에 빠져들게 했다. 그리고는 예정에도 없던 하루를 더 그의 품 안에서 보냈다.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오드리 헵번이 부럽지 않을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나니 한 계절을 진해에서 보낸 것 같이 느껴졌다. 화려한 외출 이후 굳건하게 닫혀있던 마음의 성문이 열리고 한 잎 한 잎 분홍 사연이 오가며 취향과 기질이 완연히 다른 두 사람의 간격이 메꾸어졌다. 그의 서랍이 달콤한 언어들로 빼곡히 채워진 축복의 날에 우리는 자연스레 하나가 되었다.
<꽃불> 중에서 -
앞의 작품에 등장인물이 가족이었다면, 이번 작품에 등장한 인물은 자신과 남편이다. 진해군항제에 초대한다는 엽서 한 장으로 진해로 달려간 것이 결국 부부의 연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추억이야기다. 연애담이라고나 할까. 이 수필이 주는 가치는 상상력의 공간이 광대하다는 점이다. 상상력은 곧 문학이다는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 감동으로 가는 통로로써 읽는 재미를 준다. 남편의 숙소에 들어갔을 때, 입담 좋은 주인아주머니의 ‘시샘어린 환영’을 받았다거나, ‘혼자 살고 있는 방에는 절도가 있었다.’라거나, 흑백 같은 ‘그의 방에 칼라를 입혀주고 싶다’는 표현이나,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오드리 햅번이 부럽지 않을 자유를 누리고 나니 한 계절을 진해에서 보낸 것 같이 느껴졌다’, 또는 ‘굳건하게 닫혀 있던 마음이 성문이 열리고 한 잎 한 잎 분홍 사연이 오가며 취향과 기질이 다른 두 사람의 간격이 메꾸어졌다.’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적인 면모를 가슴이 찡하게 울려오도록 보이지 않는 마음을 문학적으로 그려내는 솜씨가 대단해 보인다. 이 수필의 백미는 마지막 ‘그의 서랍이 달콤한 언어들로 빼곡히 채워진 축복의 날에 우리는 자연스레 하나가 되었다.’는 부분이다. 이 수필의 마지막은 더욱 감동적이다. “벚꽃은 순수 속에 남아있는 마지막 계절의 추억을 꺼내 또다시 뜨겁게 살도록 불을 지펴준다.” 얼마나 여운적인가. 작가는 이 벚꽃 추억을 ‘재산목록 1호’로 의미화함으로써 추억의 아름다움을 잘 형상화해내었다고 하겠다.
얼마 전 어머니의 칠순 생신 즈음에 어머니에게 전해진 선물이 마음을 징하게 했다. 삼십여 년 전 우리집에 세 들어 사시던 혜경이 엄마와 아버지 부부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어머니를 찾아와서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혜경이 엄마는 어머니 목에 금목걸이를 걸어주며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혜경이 아버지도 봉투를 내밀며 “이걸로 쌀 사 잡수세요” 하시더란다. 번듯한 자식들이 다섯이나 되는 어머니에게 쌀 걱정을 해주다니 의아스러웠다. 사연인즉, 공무원 박봉에 학생이 다섯인 집주인 네는 아이들 학교 보내는 것만도 쩔쩔매고 살았고, 세 들어 사는 이는 더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먹을 것이나 물건을 혜경이네와 나누는 일이 많았고 나도 혜경이의 공부와 숙제를 도와주며 형제같이 지냈다. 어머니는 종종 혜경이네 부엌에 몰래 들어가곤 하셨다. 쌀통에 쌀이 떨어졌나 확인하기 위해서였으니 집주인과 세입자가 피붙이 이상으로 가까웠다. 당신 아이들 등록금보다는 이웃이 굶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혜경이네가 살만해져서 이사 나갈 때 부모님께 은혜를 죽어도 못 잊을 거라며 눈물을 글썽이던 기억이 어렴풋한데 어머니의 칠순 생신에 맞춰 별러서 찾아온 것이다. 선물을 주고는 한을 푼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더란다.
<은혜는 돌에 새겨라> 중에서 -
수필은 가장 진솔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담는 그릇에 비유된다. 표제작은 작가와 그 어머니의 인품과 덕성이 거울에 비치듯 드러나 있는 글이다. 세입자와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가 큰 감동을 준다. 어떤 작품보다도 이 작품은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고 하겠다. 힘들게 살고 있는 세입자를 돌봐주는 작가의 어머니도 훌륭하지만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주인의 칠순잔치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찾아준 세입자 부부의 훈훈한 인간애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주인과 세입자가 갑을관계가 아니라 형제관계 이상의 연을 맺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역할이든 희생과 이해가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맑은 마음 속에 목련을 피워낼 수 있는 심성의 소유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들이 현실로 나타난 것에 우리는 안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작가는 이 글의 제목을 ‘은혜는 돌에 새겨라’고 한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마땅히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표상이 아닌가 여겨진다. 글은 곧 그 사람 자신이다.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우쭐거려도 현학적인 언변으로 뽐내도 안 된다. 이 수필의 풍경화처럼 마음을 열고 이웃과 호흡하며 맺은 인연을 삽화로 엮어 그려가는 이런 정스민 글들이 가장 아름다운 작품인 것이다.
2. 비움과 자조를 주제로 한 그림자의 인격화
이영옥 수필은 우리가 살아왔던 시간들 중에서 인간미가 서려 있던 시간들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수필의 특성 중 하나가 자조적 성격이다. 수필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보는 거와 같다. 이영옥의 수필이 거처하는 또 하나의 공간은 자기표백과 그림자의 인격화라 하겠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진정한 자아의 영토에서 낮추는 작가다. 생을 조용히 사유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춘 작가다. 인생을 칼칼하게 붓으로 멋지게 씻어내기 때문이다. 모든 수필이 지녀야 하는 공통적 요건 중에 하나가 대상을 바라보는 심미적 안목이라면, 이런 요소는 이영옥 수필에도 풍성하다. 수필은 어떤 문학보다 미학적 정서를 요구하는 글이므로 수필가는 정이 풍부한 사람이라야 한다. 무심한 사물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정은 인간의 심리 중에서 가장 원시적 요소다. 그러나 그것이 물상을 사랑하는 데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객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가능한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녀가 긍정적인 마인드로 그림자의 인격화 차원에서 소재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림자의 인격화란 자신의 내면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진실되게 인식하여 솔직하게 드러낼 때만 가능하다.<죽음 황홀한 백조의 노래> 나, <나의 눈물>, <환갑을 지나며>, <마음비우기> <또 다른 거울> 등은 여자의 자리에서 겪었던 내면의 그림자를 작가가 정면으로 바라보는 과정이 그려져 있는 글이다. 오늘의 자아가 형성되기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고 자기 내면의 물음에 답하는 과정이 아웃사이더에 대한 집착이나 집중보다 더욱 가치 있는 일이다. 주어진 시간을 살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우리 기억의 한켠에 속해 있는 체온보다 더 뜨거운 것으로 자리했던 자기의 그림자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며, 그림자를 의식화해서 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다’ 의 눈은 자신의 그림자를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제공한다. 그 자기를 찾아가는 모습의 실체화는 인간이 표현하면서 어떤 인격을 완성해가는지에 대한 연구가 적다는 차원에서, 우리 독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을 수 없다.
죽음으로써 고통이나 연단의 종지부를 찍고 육체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죽음이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이라는 명제는 죽음을 맞는 사람에게도 남아있는 사람에게도 희망이 된다. 죽은 자는 남은 사람들에게 삶의 한 자락이라도 영향을 미치게 되니 이 땅에서도 삶은 이어진다고 하겠다. 살아있는 동안 했던 말과 행동과 행적들에 배어있는 나란 존재가 세상 어딘가에 얼마간은 남게 되니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동안 잘 못 살았던 것을 지워내려면 얼마나 많은 수고가 있어야 할까. 아직 나를 돌보고 내 삶의 궤적 속에 남은 얼룩을 지워볼 시간이 남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옛날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 소리로 외치게 했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태어나는 날을 몰랐듯이 죽음의 날도 일상 중에 홀연히 맞게 되리라. 백조는 죽기 직전에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죽음을 기피하거나 혐오하지 않고 죽음을 기억하며 살다가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멋지게 노래하며 죽을 수 있을까.
<죽음, 황홀한 백조의 노래> 중에서 -
수필은 일상을 소재로 해서 정서와 그를 통해 획득되는 깨달음을 유감없이 기술할 수 있는 글이다. 이 글은 수필의 고유 영역과 특성을 제대로 살려내고 있어서 향기를 지닌다. 살아가는 것 이외에는 그 무엇에 눈을 돌리거나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없는 단절과 소외로 특징되는 시대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고독과 외로움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죽음에 관한 수필을 쓴다는 것의 의미는 크지 않을 수 없다. 이 죽음에 관한 노래는 바로 죽음에 관한 사색과 성찰의 소중함을 그려내는 일이다. 이 글의 서두는 ‘죽음에 대해 거리낌이 없다는 것은 남다른 취향이다.’로 시작한다. 그녀는 시애틀 근처에 있는 공원묘지, 수많은 인생이 묻힌 묘지 사이를 걸으며 저절로 죽음을 사색하곤 했다. 묘비에 적힌 이름을 불러주고 나이를 가늠해 보고, 묘비명을 찬찬히 읽어보길 좋아한다. 그녀는 집 가까이에 묘지가 있는 것을 부러워하기까지 한다. 위의 인용 글은 결구문단으로써 그녀의 사생관이 어떠한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묘지의 물음들을 접하고, 죽음으로부터 삶의 의의를 깨닫게 한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글이다. “아직 나를 돌보고 내 삶의 궤적 속에 남은 얼룩을 지워볼 시간이 남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로부터 이 작품은 자기발견의 소중함이 어떤 것인가를 엿볼 수 있게 하기에 인식구조로서의 문학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첫 번 치자나무의 실패로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진실을 깨닫는다. 자식 농사에서도 지나친 관심과 조급함이 망치는 지름길이라 한다. 조기교육과는 동떨어진 나라에 살다가 귀국해서 아들이 유치원에 들어가니 한글로 써야하는 과제를 내주어 아들도 나도 당황했다. 따로 책이나 학습교구가 없이 눈에 보이는 세간살이와 자연이 놀잇감이었던 아이에게 한글 습득을 위한 책을 내미니 큰 관심을 보이며 금방 한글을 깨우쳤다. 조급해진 나는 독서지도, 각종 학습지, 두뇌개발교재를 직접 가르치며 아이를 채근하다보니 아이와 관계가 나빠져 갔다. 학교에서 내주는 과제를 하느라 쩔쩔매는 걸 보기가 안타까워 나서서 도와주면서 의존심만 자라게 만든 것도 같다. 엄마가 교사가 되기보다는 적당한 거리에서 절제하고 대신 사랑으로 꾸준히 지켜보아야 잘 자라리란 생각을 한다. 그 적당한 거리라는 게 참으로 어려운 것이어서 너무 가까이에서 집착하게 되거나 너무 멀리 있다가 꼭 도와주어야 할 시기를 놓치기 십상이다.
<마음비우기> 중에서 -
인간의 여러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욕심을 버리려는 반성적 성찰이다. 바로 자연의 섭리에 따르려는 삶에 대한 겸허다. 그녀가 이 수필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는 ‘중용’이다. 산다는 것은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려는 원심력과 그것과 대치되는 구심력의 절묘한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줄다리기의 위험한 연속행위와 갈등 속에서 오랜 시달림과 방황 끝에 마침내 스스로 낮추고 한없이 겸허해진 자아가 자리 잡게 된다. ‘자식 농사에서도 지나친 관심과 조급함이 망치는 지름길이라 한다.’는 이 깨달음의 모습은 자신의 모습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진수이며 삶의 영롱한 에센스가 될 것이다. 이 수필에는 무한한 원심력의 탄력 속에서 가까이 존재하는 일상의 그것과는 다른 특별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도 지금은 진리다. 이 수필을 읽고 나면, 뭐든 지나치면 좋지 않다는 과유불급의 진리를 알게 된다. 미점은 이뿐만 아니라 이 수필 속에는 인생에 대한 깊고 담담한 관조와 거리를 두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조망이 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혀주는 위안과 인간의 정신을 고원한 곳으로 끌어올려주는 깊이가 있다. 자신을 비운 자리에 순수를 채우는 일이 이영옥에겐 숙명 같은 일이다.
유심히 바라본 거울 속의 얼굴이 타인처럼 느껴진다. 기대에 어긋난 얼굴이기 때문이다. 길은 길로 통해 있듯 거울 속에 또 다른 마음의 거울이 있음을 본다. 그리고 내 삶의 궤적을 거울 속 얼굴에서 하나하나 읽어낸다. 얼굴 속에는 지난날의 무지와 슬픔, 나태와 조급, 자만과 좌절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얼굴은 얼굴로 말 할뿐 변명의 여지가 없다.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의 수치를 보던 날 같이 어딘가로 숨고픈 심정이다. 거울 앞에서 자신을 비춰보는 일이 까마득한 옛일로 여겨진다. 거울 없이도 지낼 수 있을 만큼 젊고 자신 있었던 것인가? 외모에 관심이 두지 않는 내게 가진 자의 여유라고 핀잔을 주는 이도 있지만, 자신을 돌아볼 여유 없이 떠밀려 살아왔다는 것이 큰 이유가 될 것이다.
<또 다른 거울> 중에서 -
훌륭한 작가가 되려면 우선 다섯 가지를 가져야 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거울’이다. 자조적인 문학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는 수필은 자기 조명을 통해 겸허한 자신을 쓰다듬는 자기 성찰의 모습에서 독자는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영옥 작가가 본격수필이라는 화두를 달고 수필시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이런 멋진 글이 나올 수 있었을까. ‘거울 없이도 지낼 수 있을 만큼 젊고 자신 있었던 것인가.’하고 되묻는 것은 자기 자신과의 진실한 대면을 통해 작가가 인간적 향내를 풍기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그림자의 인격화는 이영옥 수필이 지닌 가치 평가에 적지 않은 시사를 던져준다고 하겠다. 수필쓰기는 자기 속에 내장되어 있는 기억을 불러내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거울>은 바로 숨어 있는 실체를 파악하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얼굴 속에는 지난 날의 무지와 슬픔, 나태와 조급, 자만과 좌절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에 거울은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고통의 근원을 해결하기 위해서 한 개인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유효하게 쓰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수필은 찬란하고 정결한 정신의 축제라 할 수 있다. 삶을 통한 선택된 체험의 미학적 형상화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진솔한 내면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얼굴은 얼굴로 말 할뿐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작가의 말처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은 바로 자신의 내면에 있는 그림자다. 자신의 그림자를 의식세계로 이끌고 나와서 자신의 인격으로 통합하고자 인격의 폭을 넓히고 의식의 시야를 확보하려는 작가의 노력은 ‘수경사무’의 교훈을 준다. 바로 이 대목에서 문학적 향취가 풍겨나는 것이다.
늦더위가 한풀 꺾일 즈음, 어머니와 읍내 장에 가서 광목천을 끊어다가 기저귀 길이로 잘라 끝부분을 휘갑치기로 손질해서는 가마솥에 넣고 푹푹 삶아 부드럽게 해서 마당에 쭈욱 널면 바람에 펄럭이는 하얀 기저귀가 마냥 보기 좋았다. 우렁찬 고고성을 울리며 첫째가 태어날 때까지 멀리서 오지 않는 남편이 야속하기만 했다. 아이의 백일이 가까워서야 첫 대면한 남편은 아버지가 됐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지 "이놈아, 네가 내 아들이냐?“ 연신 물으며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중요한 시기에 남편과 함께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우리 부부의 권태기를 늦추었던 게 아닌가 한다.
옛날에는 생긴 대로 낳다보니 아이 귀한 줄 몰라 유세부리기도 어려웠으나 요즘엔 한둘만 낳으니 때를 놓치면 할 수도 없는 임신유세다. 지나고나니 둘째 때라도 유세를 부려볼 걸 하는 후회가 든다. 서양에는 그런 문화가 없다고 하니 억압과 희생이 많은 한국여자들에게만 있는 놓치기 아까운 한 때의 특권인가보다. 임신부들이 유세를 맘껏 부리고라도 건강한 아이를 쑥쑥 많이 낳았으면 좋겠다.
<임신유세> 중에서 -
수필은 삶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뿌리로 하여 그 가치를 펼치고, 잎을 키우는 한 그루 나무다. 그래서 이영옥에게 자신의 삶만큼 절실한 관심의 대상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심심하면, 무언가 일거리를 만들고 소일할 거리를 만들고 싶어한다. ‘임신유세’도 일종의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문학은 한 마디의 말과 구와 절과 문장의 바른 해석이 따라야 하고, 전체 주제 파악이 있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의 수필에 비해서 이영옥의 경우는 작자의 창의적 상상력만큼 독자도 많은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려내는 것만 보지 말고 그 뒤에 가려진 우리 인간이 잃어버린,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들 그리고 더 나가서 그 속에서 울고 웃는 작가의 삶과 애환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임신유세 같은 것도 옛날에는 부릴 수도 없었는데, 요즘에는 한둘이 낳으니, 부릴 수 있는 유세가 임신유세라니 그 발상이 참 재밌다. 맹자는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 해도 오물을 뒤집어쓰면 사람들이 모두 코를 막고 이를 지나친다고 말한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훌륭한 뜻을 담았다 하더라도 올바른 표현을 얻지 못한다면 독자들은 외면하여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억압과 희생이 많은 한국여자들에게만 있는 놓치기 아까운 한 때의 특권’이라고 임신유세를 멋지게 의미화는 이 진술은 이영옥 수필의 문학적 가치와 함께 그녀의 고고한 정신세계까지 엿볼 수 있게 하는 압권의 문장인 것이다.
3. 여행과 여백, 공동주체로 빛나는 사회의식
세 번째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이영옥 수필의 출발점은 ‘떠남’과 ‘사회의식’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자기 사고의 한계를 벗어난 사물을 만날 때가 있다. 만물에 민감한 촉수를 가진 작가의 눈으로 대상이 다가올 때, 그 순간 작가는 감동으로 이어지는 짜릿한 전율을 느끼게 된다. 이영옥의 수필은 일상적 삶의 구속으로부터 자유인이 되기를 원하는 자의 기록이다. 작가가 수필을 쓰면서 생활의 안정과 행복을 느끼는 데는 여행이란 ‘떠남’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행을 떠나서 자연을 만남으로서 비로소 한 편의 수필이 완성됨을 볼 때, 작가에게 여행은 문인으로서의 존재를 의식하게 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일상의 행복을 느끼게 하는 제일의 질료라 하겠다.
정휴 스님은 “사람도 물도 오랫동안 한곳에 머물러 있으면 썩기 마련이다. 인생은 강물처럼 흘러야 새로운 만남을 체험할 수 있다.”고 했다. 고정된 틀로써는 전체를 보는 시야가 좁아지고 고집을 갖게 되며 본질을 직관하는 시력이 약해진다. 왜냐하면 고집은 정신적인 군살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떠남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들 기행수필은 판에 박은 듯한 안내문 같은 정보 전달, 소개 형태의 기행 형식에서 탈피하고 있어 예술적 감흥을 준다. 주제의식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 감촉, 개인적 체취가 강하게 풍겨 기행수필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이영옥은 <빅토리아폭포와 잠베지강>이란 수필의 마지막에, ‘얼마나 더 이런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지구의 삶을 마치기까지 조물주가 만드신 모든 땅을 구석구석 밟아보고자 하는 야무진 꿈이 이루어져가니 감사한 마음이다.’라고 적고 있다. 모든 진실이 그 안에 있고, 모든 인간적인 체온이 그 안에 있고, 신비한 힘 또한 그 안에 있다. 땅은 생활에 지친 현대인에게 위안과 안식을 주는 힘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작가가 자신의 수필적인 재료를 땅을 밟는 여행에 둔 것은 지혜로운 선택이라고 하겠다. 작가의 내부에는 언제나 자리 잡은 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그녀에게 있어서 떠남은 단지 공간이나 시간의 이동만은 아니다.
과욕, 집착, 기득권, 악습, 구태 같은 이런 것들로부터 떠남이 이영옥이 추구하는 여행의 본질이다. 미래는 떠남을 실행한 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임을 이 수필은 말해주는데, 돌아갈 수 없는 길을 향해 떠나온 작가의 자연적인 삶과 문명적인 삶을 두루 경험한 기억 속에는 원시의 향수가 살아 있다. 그리움의 텃밭은 언제나 지나간 시간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기억의 시간에 대한 반추를 통해 이영옥은 애틋한 애정, 원시의 순수를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빅토리아폭포와 잠베지강’은 바로 그러한 존재다. 지구촌 어디를 가나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니 떠남에 대한 기대치도 계속 높아진다.
물속에서 물개나 돌고래, 악어 등이 출몰하고 강가 언덕에서는 코끼리나 물소들도 볼 수 있었다. 생명감이 넘치는 땅이다. 자연이 인간의 손을 타지 않아 이런 청정함과 생동감을 만끽하게 해준다. 배는 천천히 움직이며 바깥 풍경들이 각자의 상념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충분한 여유를 준다. 잠베지강의 24시간과 일 년을 상상하면서 한 순간도 같지 않은 새로운 변화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길에서 아프리카-잠비아-잠베지강물 위에서 잠시 쉬게 하시는 사랑이 달콤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이 맛보지 못하는 낭만적인 시간을 외국인이 와서 누리고 가는 게 미안해지기도 했다. 변화무쌍한 하늘도화지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도 마음의 시름을 다 씻어주는 것 같았다. 어느덧 하늘이 붉게 물들어 마음도 붉어질 무렵 시원해진 바람을 맞으며 하선하니 꿈을 꾸다가 나온 것 같다.
<빅토리아폭포와 잠베지강> 중에서 -
이영옥의 인간사와 같이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 있다면, 아마 ‘타자-되기’일 것이다. 이 수필에서 작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길에서 아프리카-잠비아-잠베지강물 위에서 잠시 쉬게 하시는 사랑이 달콤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외국여행은 자기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단초를 제공해준다. 이영옥의수필은 상상력과 미의식의 관계를 통해 구축되고 있어 우리는 체험이 문학적으로 어떻게 변용되는지 그 과정을 행복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의 수필을 통해 한 작가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고민했던 갈증처럼 채워지지 않는 추구의 시간을 떠남으로 승화시켜내는 지혜를 함께 읽어나갈 수 있다.
이 여행수필에서, 그녀는 삶의 영역에서 갖는 사색과 여유의 가치를 ‘떠남’이라는 제재로 형상화하여 힐링의 미학으로 잘 의미화하고 있다.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강한 떠나고자 하는 의욕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꿈’이라는 어휘를 끌어와 ‘떠남의 미학’을 보여준다. 원시의 땅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삶의 영역이며 우리의 지친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터전이 된다. 인용 예문에서 볼 수 있듯이, 발자국이 새겨지는 삶의 자리에는, 유한한 삶 자체에 대한 고민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몸부림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여행 속의 깨달음을 진리로 연결하는 그녀의 여유에 찬 삶이 주는 감동은 안식의 문학이라는 수필 고유의 특성을 전해준다.
세 번째 동네는 좀 더 열악해보였으나 맨 발의 아이들이 많이 나와 있어 반가웠다. 외국인인 우리를 그리 낯설어하지 않고 친근하게 다가왔다. 이 동네에서 저 맨발로 학교에 다니려면 두 시간은 걸어야할 거리였다. 콘드완의 집은 조손 가정이었다. 할머니는 마침 나와 동갑이었는데 덩치가 있는 데다 곤고한 삶의 짐을 지고 있어서인지 열 살은 더 위로 보였다. 자신의 자녀들과 딸의 자녀들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사위가 에이즈인 걸 모르고 딸을 결혼시켰는데 이년 만에 사위가 죽고 딸도 에이즈로 병원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프리카대륙이 에이즈로 몸살을 앓는데도 결혼할 때 차마 그것을 확인하지 않는 이들이 순박하다 해야 할지 미개하다 해야 할지 답답해진다. 영어도 꽤 잘하고 생각도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할머니여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둑해서 그런지 검은 얼굴의 할머니와 식구들의 눈이 희망 하나 붙잡은 듯 반짝거린다. 이곳 가족들과 헤어질 즈음엔 전혀 이질감이 안 느껴지고 친근하게 보였다. 선교사 체질인가 싶을 만큼 새로운 환경에 거부감이 없고 여기서 살아도 되겠다는 마음마저 든다.
<아, 아프리카> 중에서 -
이 수필의 제목은 감탄사로 시작하고 있다. 어지간하게 감탄하지 않고는 감탄사를 쓸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스물네 시간 비행 끝에 다다른 아프리카가 남다르게 다가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콜레라가 창궐하는 아프리카로 선교여행을 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는 이곳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며, ‘전혀 이질감이 안 느껴지고 친근하게 보였다. 선교사 체질인가 싶을 만큼 새로운 환경에 거부감이 없고 여기서 살아도 되겠다는 마음마저 든다.’ 고 썼다. 이와 같은 작가의 고백으로 그녀가 얼마나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강한 휴머니즘이 우리를 공감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삶이 지니고 있는 허위의 껍질을 벗기는 것이 수필의 소명이지만, 힘든 오지 선교여행을 하면서 삶의 지혜를 얻지 못한다면, 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녀는 떠남을 통해 존재의 근원적 깊이에 더 가까이 가 닿으려는 보편적 욕망을 풍요롭게 보여주고 있다. 에이즈 걸린 사위를 얻은 한 할머니의 슬픈 인생에 관한 진술을 통해 그녀는 인생의 진리를 깨우친다. 감동은 자기만의 독특한 체험에서 나온다. ‘경험’을 넘어선 ‘체험’은 생경함과 신선함을 주면서 감동을 주기 때문에 수필미학을 구축하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살아도 되겠다는 마음마저 든다.’는 마지막 문장은 이영옥의 인간적 매력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학생들의 과거와 현재보다도 훨씬 멋진 삶을 그릴 수 있는 것은 지울 수 없는 통일에의 열망과 그날에 맛볼 가슴 벅찬 감격과 학생들의 빛나는 존재감일 것이다. 친정 같고 고향 같은 학교의 행사장을 찾아온 졸업생들을 보니 여명학교가 진주양식장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적응을 위한 아프고도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나면 영롱한 빛을 내는 진주들로 탄생되는 것이다. 선생님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여명학교의 차기 10년의 비전으로 <통일준비학교>를 선포한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길게 남는다. 정신은 하늘을 향하고 삶은 십자가를 향할 때 하나님께서 기적을 이루어주실 것이다.
<미라클, 여명학교> 중에서 -
이영옥의 관심 분야는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궁금하다. 아프리카 오지 선교활동에다 북한이탈 주민들에게까지 측은지심이 뻗히고 있다. 이러니 수필이 주는 맛이 어찌 손맛뿐이겠는가. 향기 또한 가득하다. ‘꽃제비’ 이야기가 삽화로 들어 있어 더욱 감동을 준다. 매일 아침 ‘미라클’을 외치며 일상을 바로 세우고 싶다는 그들의 염원과 도전정신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겠다. ‘졸업생 S 씨 이야기는 활짝 핀 기적의 꽃이다’로 시작하는 예시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이 돋보인다. 문학의 목적이 감동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적 실체를 따라가다가 그 뒤에 숨겨진 북한 이탈 주민이 안고 있는 삶의 무게를 독자 자신이 상상력으로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흙에서 보석을 발견했을 경우와 같을 것이다.
이 단락의 마지막에다 대안학교 교장 선생님의 멋진 말씀을 배치했는데, ‘정신은 하늘을 향하고 삶은 십자가를 향할 때 하나님께서 기적을 이루어주실 것이다.’는 말이다. 이런 표현들을 통해 작가의 내면에 들끓는 무거운 생각들이 작가를 희망과 기대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 점을 발견한다면, 놀라움과 감동은 매우 클 것이다. ‘졸업생들이 찾아오는 여명학교를 진주양식장’으로 의미화한 이 대목이 감동적일 수밖에 없다. 작가는 자신이 어떻게 세상에 기여할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고민하고 있다. 겸손한 반성적 성찰로 공감의 확대를 노린 전략이 좋다. 그럼으로써 그녀의 수필은 우리가 살아왔던 시간들 중에서 가장 인간미가 서려 있던 시간들에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수필의 중요한 내적 특성 중의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은 저항성이다. 수필의 상당수 작품들이 현실참여를 통한, 구원의 문학이라는 특성에 기초하여 설정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가치에 현혹되어 영혼을 잃어가고 있다. 이런 경향성을 잘 파악하고, 안식의 문학, 영혼의 문학인 수필의 목적을 제대로 살려서 독자의식을 새롭게 바로 세워주고자 한다든지,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현실인식이나 그 실천 의지가 없는 인생은 실로 아무 것도 아니다. 이토록 귀한 열정과 깨어있는 의식을 가지고 있기에 그녀는 독자를 깊은 숲속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 깨끗한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이 수필집의 문학적 가치는 수필적 화자의 긍정의식에 녹아있는 미적 사유가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다는 데 있다. 관념이나 도피의 노래가 아니라 열린 의식의 반영을 노래한 작가로서 그녀는 일상의 체험과 구도의 길에서 얻은 지혜를 건강한 생명의 축가로 치환하기에 미의식은 물론 상상력과 여운을 증강시킨다.
<늑대와 함께 춤을>이란 영화는 사람 이름이 제목이 된 경우인데 영화에는 여러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이름이 나온다. ‘구르는 천둥’ ‘일어서는 주먹’ ‘헤픈 웃음’ ‘곰 네 마리’ ‘머릿속의 바람’ 등 개성 만점의 이름이기에 기억하기 쉽고 그의 존재가 완전히 인정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태어날 때 바람이 몹시 불면 ‘바람의 아들’이 되고 행동이 부산하면 ‘어디로 갈지 몰라’ 가 되는 식이니 그가 이룬 업적이나 재능, 겪은 사건에 따라 수시로 이름이 바뀌기도 했다. 그들이 서로 의미있는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면 인디언이 미개할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진지하고 철학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반 이름을 1, 2, 3 ... 으로 하지 않고 정(貞) 숙(淑) 명(明) 인(仁) 덕(德) 진(眞) 선(善) 미(美) 예(藝) 지(智) 로 했었다. 그 반 이름을 가지고 일 년을 지내면서 자신도 모르게 반 이름을 의식하게 되고 그 덕성을 몸에 지니려고 했었다.
서류에는 편의상 번호나 숫자로 처리한다 해도 면전에서는 이름을 불러준다면 훨씬 인간적인 맛이 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숫자가 아닌 이름을> 중에서 -
수필은 본질적으로 ‘비판성’에 기대고 있어야 한다. 수필에서의 비판적 사고는 지적 작용의 밑거름이 되어 정서와 신비의 이미지를 자아낸다. 그러면서 수필의 고상성과 고결성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비판정신이 깔려있지 않는 수필은 신변잡사나 사색의 부질없는 유희에 끝나기 쉽다. 또 한낱 생활의 보고가 아니면 넋두리에 떨어질 위험성 또한 없지 않다. 이 수필에서 비판하는 대상은 이름을 부르지 않고 숫자로 대신하는 풍토다.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낸다. 따라서 숫자로 부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름을 불러 줄 때 하나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 점을 파고 들어갔다. 비판은 비판받는 사람을 반성하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아무리 좋은 논리도 비판을 받지 않으면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렵다. 우리 주변에는 문제 있는 관행이 아직도 많다. 아마 상식과 맞지 않는 것은 앞으로 오랫동안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녀는 수필을 통해 암울한 시대상과 자신의 목소리를 잘 읽게 해준다. 작가는 이런 과감한 전환이 더 많은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에 유념하고 있다.
이 외에도 문학적 성취가 빛나는 수필들이 많다. <눈꽃나라>, <오매 단풍들었네>, <목련꽃 봉오리> 등의 작품은 서정성이 짙다. 작가는 이들 수필 속에서 특별한 소통 능력을 보여준다. 그것은 자연과 소통하는 작가의 영성을 이르는 말이다. 작가의 영성은 우주의 본질세계로부터 들려오는 진리의 소리나 절대자의 음성을 수신할 수 있는 우주의 인식능력을 가리킨다. 르네 자라르에 따르면, 현대인은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다. <로또 복권의 두 얼굴>은 하루아침 한방으로 인생역전을 꿈꾸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는 수필이다. 작가는 단순히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고 있어 공감을 자아낸다. 한방을 부추기는 광고를 추방해버리자는 특단의 조치를 권하고 있다. <이 밥 먹과 밥이 되어>는 밥퍼공동체에 가서 한 끼 밥의 의미를 살피는 글이다. 노숙자 또는 독거노인에게 주어지는 이 밥을 먹는 것에 대해, 작가는 ‘밥을 먹는 것은 우주와 사람이 손잡고 이루어내는 거사에 동참하는 것’이라 의미화하였다. 밥이 되는 삶을 고민하는 작가가 어찌 멋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금 팔러 가던 날>은 IMF 사태를 맞은 국가부도위기 앞에서 국민들이 나라를 위해 금을 내팔 거라고 줄을 서있는 모습을 보고 국가의 의미를 생각해 보며 국가나 개인이 잘되기를 빌어주는 수필이다.
III
이 수필집은 글로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깨어있는 의식으로 세상의 보이지 않는 면을 발견하고자 하는 지성이 번득이고 있다. 사회의 등불이 되지 못하고,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되지 못하는 수필은 일반 수필은 될 수 있어도 사실상 훌륭한 수필은 결코 될 수 없다는 ‘앙가주망’의 작가의식이 빛난다. 수필작가가 작품으로 자신의 삶과 철학을 보여주고, 자신의 인생관과 문학관을 솔직하게 고백한다는 점에서, 작품은 작가와의 가장 인간적인 만남의 장을 열어주는 통로다.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한 작가의 철학과 작가정신은 문맥 속에서 빛나지 않을 수 없다. 무력한 서민의 애환을 그리고 있는 글에서부터 행복으로부터 추방당한 음지, 그 영역의 존재에 측은지심을 놓는 수필 등 이 수필집에는 다양한 글들이 실려 있다. 이영옥은 이렇게 다양한 렌즈로 세상을 비춰보고 있다. 어쩌면 일찍이 식물과 흙과 햇볕과 물과 그리고 함께 일하며 살아온 체험이 없었다면 어떤 대상에서나 섬세한 감성 따사로운 눈빛, 그리고 치우치지 않는 균형의 미학을 터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문인적 자질이란 대상에 대한 치열한 해석과 그 조형성에 의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자본주의 물결 속에 저항하면서도 적응할 줄 알고 시멘트 바닥에서도 민들레 피는 고향 언덕을 생각해 낼 줄 알고 어떤 역사적 대상 앞에서도 그 내면에 함묵하고 있는 진실의 정어리를 꺼내어 조형화할 줄을 안다. 인간과 자연에 대하여 애잔하면서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도 감지된다. 그녀가 살아온 삶의 진실과 자연에 대한 서정, 유년의 추억과 가족사 같은 것에서 따뜻한 마음과 세상을 바라보는 감성이 잘 번져 있다. 수필나무에 삶의 뿌리를 내려놓고, 그를 바탕으로 배움을 실천하며, 행복의 나무를 키우고 있다. 어찌 그 뿐이겠는가. 지식인으로, 봉사자로서 우리 사회의 그늘지고 어두운 곳을 펜 끝으로 정조준하며, 작가로서 등불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 수필집은 문학정신의 결정체가 아닌가 여겨질 정도로 인식과 형상이 잘 조화되어 있다. 그래서 햇살 내리비치는 볕 좋은 날의 행복한 소녀 같은 이영옥의 다음 수필집에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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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신의색을 만들수 있는
글이 꽤나 어려운일 이란것을
교수님의많은 가르침에
도움이 될거라 생각합니다
건강하십시요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방문해 주시니 이 방에 온기가 스며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