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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이야기 스크랩 근암서원 이야기
아라 추천 0 조회 21 14.09.07 16: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근암서원(近巖書院)
소 재 지 :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148-2
(원소재지 : 산북면 서중리)
건 축 주 :  신잠
건축시기 :  1544
중건시기 :  1984
훼철시기 :  1868
소 유 자 :  (관리자 : 지역유림)

건축 이야기
근암서원(近?書院)은 조선 중종 갑진년(1544년)에 상주 목사이던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이 건립한 근암서당이 그 처음이다. 그 뒤 현종 을사년(1665년)에 우암 홍언충 선생을 봉안하여 원이 되었으며, 현종 기유년(1669년)에 한음 이덕형 선생을 추배하여 서원이라 선액되었다. 그 뒤로 숙종 임오년(1702년)에 사담 김홍민 선생, 목재 홍여하 선생, 정종 병오년(1786년)에 활재 이구 선생, 식산 이만부 선생, 청대 권상일 선생을 추배하여 칠현서원이 되었다 고종 무진년(1868년)에 조정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으나 1974년부터 부설 공사를 시작하여 1984년 10월에 준공되었다.

산양에서 단양 방면으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가다 봉정리를 지나면서 고개 하나를 넘게 된다. 그리고 그 고개를 넘자마자 바로 서중리가 나온다. 고갯길을 내려가다 왼쪽 마을을 보면 마을 뒤편으로 우뚝 서 있는 서원이 보인다. 근암서원은 문경 지역 최초의 서원으로 7현을 배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처음 서원을 건립할 때는 기둥 하나 세우는 데도 장정 수십 명이 달라붙을 만큼 건물 규모가 컸다고 전해질 정도로 규모나 권위 면에서 가장 크고 뛰어난 서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모습은 단지 현판으로 서원을 알아볼 수 있을 뿐 초라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서원 철폐와 동시에 서원 관련 자료의 대부분이 일실(逸失)되었는데도 일부 유물이 남아 유형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유물은 18세기 영남학파를 대표한 유학자인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과 관련한 것으로 그 내용은 권상일의 일록(日錄) 12책, 교첩(敎牒)·교지류(敎旨類) 70여 장, 전적 과 유물, 그리고 근암서원 관련 책판(冊版) 등이다. 이곳에는 고호림(高皓林)이 지은 「복원사실(復元事實)」, 장병규(張炳逵)가 지은「복원기(復元記)」와 이원영(李源榮)이 지은「존성당중건상량문(尊性堂重建上樑文)」등의 기문이 걸려 있으며, 부훤당(負暄堂) 김해(金楷)의 문집에 「근암서원문루중창상량문(近?書院門樓重創上樑文)」이 전한다.

건축 구성
현재의 건물은 1970년대에 복원된 건물로 전면에는 평기와로 팔작지붕을 올린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강당이 있으며, 강당 뒤에는 내삼문과 경현사(景賢祠)로 이루어진 사당의 공간이 별도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역시 현재의 건물만으로는 옛 모습을 짐작하기 어렵고 다만 경현사에 사용한 주춧돌이나 경내에 남아 있는 석재를 통하여 과거의 규모와 권위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관련이야기
- 근암서원
점촌에서 예천 방향으로 34번 국도를 타고 가다보면 왼쪽으로 단양, 김용사 방면으로 가는 지방도로를 만날 수 있다. 이 도로를 따라 산양면 봉정리 마을을 지나면 바로 야트막한 고갯길이 나오고, 그 고개 바로 너머가 근암서원이 있는 서중리 마을이다. 고갯길을 내려가는 도중에 왼쪽 언덕배기에 근암서원 경현사 건물이 우뚝하니 보이고, 그 주변으로 제법 가구 수가 있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큰길 가에서 근암서원은 직선거리로 불과 50여 m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도로에서 보이기 때문에 찾기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

마을 안길을 거치지 않고 서원 옆길로 바로 들어갈 수도 있으나, 마을의 옛 내력을 느끼려면 아래쪽에서 서원 앞마을 안길을 거쳐 가보는 것도 괜찮다. 마을 안길을 들어서면 먼저 상당한 내력이 있을 법한 사당 두 채가 눈에 띄고, 현대적으로 개조한 민가에서도 군데군데 고가의 흔적이 드러나 이 마을이 결코 범상한 마을이 아님을 단번에 느낄 수 있다.

현재 서원은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무언가 어수선하다. 서원은 강당의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짐작되는 본채와 본채 뒤쪽으로 별도의 공간에 마련된 사당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강당 주변은 민가와 서원의 구획을 제대로 하지 않아 정리되지 못한 분위기에 상당히 의아스럽다. 그런데도 강당 툇마루에 올라서면 멀리 산북으로 열린 평지를 따라 조성된 논밭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주변으로 우뚝우뚝 솟아 있는 산들이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그리고 가장 북쪽으로 뾰족하게 솟아오른 천주산이 보인다.

내삼문을 지나 사당으로 들어서면 강당 주변의 어수선한 분위기와 달리 담장 안으로 잘 정돈된 공간을 만날 수 있다. 또 이곳은 강당에서 몇 계단 올라서 있는 데다 주변 민가의 방해를 그다지 받지 않아 마을 전경과 주변 경관을 조망하기에도 한결 수월하다.

무엇보다 이곳 사당의 주춧돌이나 축대석으로 사용한 석재 중에는 부분적으로 옛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있어 눈길을 끄는데, 그중에서 규모도 작지 않을뿐더러 매우 정교하게 다듬은 것들이 있어 이 서원이 훼철되기 전에는 상당한 규모와 격조가 대단하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관련인물
- 제사인물
홍언충(洪彦忠)
자는 직경이요, 호는 우암이며 관은 부림이다. 대제학과 좌참찬을 지낸 연산조 직신 문광공 허백당 홍귀달의 아들이다. 성종 계사년(1473년)에 태어났고, 연산 을묘년(1495년)에 사마시 동년 별시 을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 홍문관 정자를 거쳐 교서 교리를 하다 예조정랑이 되었다 갑자사화(1504년)에 거제도에 유배되었는데 하루는 섬 안에 사사가 있다는 소문이 나서 모두 피하려 창황하였으나 우암 선생 형제는 태연자약하며 말하기를, “군명은 하늘이다. 하늘을 가히 도망칠 수 있느냐.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하였다 한다. 중종반정 후에 풀려났으나 그 뒤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후진을 양성하다 불행히도 36세에 졸하였다. 선생은 도학이 높고 엄정 충직하여 후학의 사표로 추앙받았다.

이덕형(李德馨)
호는 한음이요 본관은 광주이다. 중종 신축년(1541년)에 태어났으며, 선조 경진년(1580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로 벼슬을 하여 경인년(1590년)에 직제학이 되었고 임진년(1592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해 4월에 왜란이 일어났으며 평양 대동강에서 일본인 현소 등과 담판을 지었으며, 침략의 불의함을 통매하고 왕명으로 요동에 가서 제병에 노력하고 명나라 병사가 내려왔을 때는 접반사가 되어 나라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무술년(1598년)에 우의정, 신축년(1601년)에 도체찰사, 임인년(1602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광해조에 영창대군 옥사가 간신들의 농간으로 야기됨에 직언으로 극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한 지 수일에 병을 얻어 졸하니 나이 53세였다. 시는 문익공이다.

김홍민(金弘敏)
자는 임부요, 호는 사담이며 본관은 상산이다. 집현전 부제학 상직의 6대손이며, 옥과 현감 범의 아들이다. 중종 경자년(1540년)에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총명하였다. 선조 경오년(1570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론을 시작으로 수찬, 응교, 집의, 청주 목사 등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에는 보은에서 창의하여 6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고, 충보군이라 이름 하여 상주의 적이 호서로 오는 길을 막았다. 벼슬길에 있을 때는 도리로 행하고 집 안에서는 효도와 우애와 화목으로 일생을 지냈으며, 『주서절요』, 『근사록』, 『소학』 등을 깊이 연구하였고, 갑오년(1594년)에 졸하였다.

홍여하(洪汝何)
자는 백원이요, 호는 목재이며 관은 부림이니 문광공 홍귀달의 5세손이요, 대사간 호의 아들로 1620년에 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우복 정경세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큰 선비가 될 것이다”고 하였는데 효종 갑오년(1954년)에 등과하여 검열, 전적, 정언, 좌랑, 사간을 지냈다. 정언으로서 왕의 언동을 간하니 효종이 가납하였다. 그 뒤로 당로자들의 꺼림을 받아 고유 찰방에서 파직되었다 무술년(1658년)에 경성판관으로 부임하여 어진 정사를 폈으며, 을해년에 성학 치도의 요를 상소하고 병마사 권우의 무고로 황간에 유배되었다 그다음 해에 방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15년을 후진을 양성하는 데에 전념하였다. 사서에 통하고 주서에 전심하여 그 식견을 따를 이가 없었다. 숙종이 병조정랑에 특제하였으나 병이 중하여 나아가지 않고 졸하니 나이 55세였다. 저서로 『사서발범구역』, 『주역구역』, 『휘찬려사』, 『동사제강』 등 많이 있다.

이구(李?)
자는 대방이요, 호는 활재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효령대군의 8세손이며 정랑 광흡의 아들이다. 광해 계축년(1613년)에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제자백가서』를 탐독하다 외조부 칠봉 황시간의 권유를 받고 성현의 학문을 탐구하게 되었다. 정주학과 퇴도학에 전념하여 과거를 버리고 산간에서 후진에게 이기의 진수를 논강하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갑오년(1654년)에 졸하니 42세였다.

이만부(李萬敷)
자는 중서요, 호는 식산이며 본관은 연안이다. 가은 심의 증손이요 박천옥의 아들이다. 현종 갑진년(1664년)에 출생하였다. 정주학을 탐구하고 혁혁한 집안이면서도 분화를 멀리하고 오직 성학에만 몰두하여 저술에 힘쓰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남긴 저서는 지금까지 자손이 보관 전수하고 있다. 계축년(1733년)에 졸하었다.

권상일(權相一)
자는 태중이요, 호는 청대이며 관은 안동이니 구학재 구의 증손이요, 증이판(贈吏判) 심(深)의 아들이다. 숙종 기미년(1679년)에 출생하였다. 숙종 경인년(1710년)에 등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로부터 이의(吏議) 부제학, 대사헌을 역임하고 지중추에 이르고 기사(耆社)에 입(入)하여 찬수 당상이 되어 국사를 수찬하였다. 영조가 어필 16자를 하사 격려하였다. 영조 정미년(1727년)에 만경현령이었을 때 다음 해에 무신(1728년)의 난이 일어났는데 미리 민정을 살펴 적변이 일어날 것을 알고 상부에 보고하고 성지를 수축하며 유비무환의 대비를 하였으므로 경내가 무사하였다. 고향에서는 퇴계 선생을 사법(師法)으로 하여 이기호발(理氣互發)을 논하고 경연에도 첨하였다. 저술로서 『근사록집해』 등 여러 권을 남겼으며, 영조 기묘년(1759년)에 졸하니 수가 80세였고, 시호는 희정(僖靖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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