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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실세 말고 주권에 연결된 삶>의 줄거리:
언제 어디서든 삶의 현장에는 실세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실세의 측근 되기가 어쩌면 삶의 주된 과제가 된 느낌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실세에 연결되기보다 더 확실하고 손쉬운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실세에 연결되기를 금하시고 그 대신에 주권자에 연결되어야할 것으로 못박으십니다.
실세 말고 주권에 연결된 삶
(마가복음 8:14~21)
14.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21.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실세 말고 주권에 연결된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실세 말고 주권에 연결된 삶’
실세는 실제로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실세와 반대되는 말이 있다면 소위 바지사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명목상 세워두거나 명예직이나 한직에 세워둔 사람을 일컫습니다. 아무 일도 없고 실권도 없습니다. 제가 부목사로 지내는 동안에 별명이 있었습니다. 교회예산을 한 푼도 쓰지 않는 목사였습니다. 제게 할당된 보직들이 예산이 전혀 필요 없는 일들이었기에 동료 목사님들이 저를 한직목사라 불렀던 것을 기억합니다. 말 그대로 실세를 가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승만 정부 때의 실세는 이기붕 씨였고 박정희 정부 때의 실세는 김종필 씨나 이후락 씨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당 안에서도 이런 실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실세 장로님이 있고 실세 권사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실세라는 말을 좀 더 주관적인 입장에서 정의해보자면 사뭇 이해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실세란 “삶의 현장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잘 보여야 할 사람”입니다. 혹은 “내게 가치 있는 것과 관련해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세를 향한 사람들의 태도는 공통적이고 동일합니다. 좋아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 어떻게든지 실세를 가진 사람과의 관계를 맺기를 원하고 가까이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실세가 가진 영향력을 유리하게 끌어오려는 주도적인 노력을 하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실세의 마음에 들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실세를 향한 노력이 부정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첨이나 뇌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실세를 지향하는 마음은 신앙적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15절에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의하라는 말씀의 원문을 보면 “분리하여 물들지 않게 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분리시켜서 마음이 바리새인들의 교훈과 헤롯의 가르침에 감염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코로나19가 다소 진정되는 것 같았는데 이태원의 유흥업소로부터 지역사회로의 전염이 시작되면서 당국은 초비상상태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마음 놓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한 명의 확진자가 주변의 40명을 감염시키는 무서운 접촉성 전염력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바로 바리새인들의 교훈과 헤롯의 가르침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코로나19와 같이 경계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두 계파의 교훈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 동안 말씀을 통해 바리새인들의 외식은 자주 지적되어 왔습니다. 형식주의에서 비롯된 위선이 바로 예수님께서 비판하신 바리새인들의 교훈의 핵심적 문제였습니다. 본문에서 나타난 헤롯의 누룩 즉 헤롯당의 가르침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사두개인을 가리키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헤롯당에 많이 가입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쉽게 말해 세속주의 신앙관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위선이 문제이고 헤롯당은 세속주의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 공생애 당시에 유대를 다스리던 지배자는 헤롯 안티파스였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헤롯 대왕으로 잘 알려진 헤롯 1세의 아들입니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헤롯당은 바로 헤롯 대왕의 추종자들입니다. 헤롯 대왕은 예수님 당시에 존재했던 성전을 건축한 인물이기도 하였습니다. 헤롯 대왕은 뛰어난 정치력을 바탕으로 로마 황제로부터 유대의 통치권을 부여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을 분봉왕으로 세워 네 지역을 다스리도록 승계하였습니다. 이러한 헤롯 가문은 본래 이방인이었으나 결혼을 통해 반은 유대인 가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헤롯 가문과 그 추종자들인 헤롯 당원들은 명실 공히 유대사회의 실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비록 식민치하에 있었지만 유대 땅 안에서는 정치적 실세였던 것입니다.
헤롯 가문은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바탕으로 로마 정부와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유대인들에 대한 관계에서도 성전을 짓는 등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면서 실세로써의 자리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두개인을 중심으로 한 많은 유대인들이 헤롯 가문의 추종자가 되어서 헤롯당을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형식과 전통을 중시하던 바리새인들과는 다르게 세속주의 성향이 강했습니다. 한 마디로 실세철학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로마 지배하의 유대 땅에서 실세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헤롯의 가르침이란 바리새인들에 비해 노골적이었습니다. 사는 동안에 형통과 부귀영화를 가장 중시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가치들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실세를 파악하고 측근이 되고자 하는 것이 이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한편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아시다시피 위선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 또한 실세철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헤롯당과 비교하자면 노골적으로 드러내느냐 은근히 드러내느냐의 차이가 있었을 뿐입니다.
다만 정치적인 관계에서 이들은 적대적인 입장이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헤롯당은 노골적으로 실세에 가담하기를 추구한 자들입니다.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는 외세와 손잡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바리새인들은 똑같이 세상 것들을 좋아하였으나 철저한 민족주의자들로써 외세에 대해 배타적이고 부정적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철저한 민족주의의 근간은 선민의식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불리는 조상들의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민족주의를 주장하였고, 식민치하에 있으면서도 로마정권과의 정치적 타협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또한 실세철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헤롯당과 똑같이 이 세상의 가치를 좋게 여겼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선민임을 주장하면서도 이방인들과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의 이중성을 예수님께서는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비난하셨습니다. 뱀이 배를 땅에 붙이고 기어 다니듯이 마음을 땅에 붙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4절에서는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누가복음 11장 43절에서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시며 이들이 사회적 존경과 칭찬을 좋아했음을 비판하셨습니다. 재물과 권력은 곧 기득권입니다. 이들의 목표는 엘리트계층으로써 사회적 기득권의 유지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회적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실세에 빌붙고자 했습니다. 다만 이들이 파악한 실세는 헤롯당과는 달랐습니다. 이들이 실세로 여겼던 것은 조상들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적으로 비판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헤롯당과 똑같이 세상의 가치였기 때문입니다. 헤롯당이 정치적 실세를 수단삼아 세상의 가치를 얻고자 했다면, 바리새인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실세삼아 세상의 가치를 얻고자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모양을 갖추었기 때문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쉽게 파악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땅에 있는 실권자들이나 정치적 세력을 실세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을 실세로 여겼다는 점이 영적으로 건전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율법을 가르치고 장로의 전통을 만들어 지켜나갔던 이유가 중요합니다. 바리새인들의 행실이란 헤롯당이 실세인 헤롯가문에 아첨하던 모습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율법을 지키는 이유는 하나님께 아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과 하나님께 아첨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첨하는 것은 목적하는 바가 하나님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손에 넣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의 가치들이었습니다. 세상의 가치들을 쉽게 손에 넣는 일에 하나님께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의 가치를 주시고 영향력을 미치시는 분으로도 믿었습니다. 이러한 이해 자체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가치라는 점입니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이유는 하나님을 어르고 달래기 위함이었습니다. 장로의 전통을 만들어서 지키고, 구제하고, 십일조를 내고, 금식하는 등의 모든 일들이 결국 땅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손에 넣기 위해 실세라 여기는 하나님에 대한 아첨이었고 뇌물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헤롯당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마치 코로나19처럼 접촉해서는 안 되는 더러운 것으로 여기고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굳이 우열을 따지자면 예수님께서는 헤롯을 여우라 부르셨고 바리새인들은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칭하셨습니다. 바리새인에 대한 경계가 더욱 심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헤롯당과 똑같은 실세철학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선적으로 이를 감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외세를 배타적으로 물리치고 선민의식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독사 즉 사탄의 새끼들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율법을 준수하며 충성과 봉사와 구제를 강조합니다. 헌금을 내고 십일조를 하며 금식도 일주일에 두 번씩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행위가 사탄의 가르침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실세로 이해하고 세상의 가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실제로 만족과 기쁨을 준다고 믿었던 대상은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가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실세가 아닌 주권자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실세로 믿는 것과 하나님을 주권자로 믿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돈을 위해서는 하나님께 잘 보여서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주권자로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주권자로 믿는다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의 대상을 세상에서 찾지 않습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 분을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기도 합니다. 지금 당장은 하나님으로 온전히 채워지지 않아서 기쁨과 만족을 느낄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만으로 채워질 수 있음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질 때에 세상의 가치를 얻기 위한 실세를 찾고자 하는 마음은 사라집니다. 마음이 채워지고 기쁨과 만족이 생기는 이유를 하나님에게서 찾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실세를 찾을 이유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유일한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믿을 때에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주권과 연결됩니다. 기쁨과 만족은 하늘에서 결정될 일로 계산이 끝났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주권만 나타나기를 바라게 됩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을 실세와 연결시키려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주권과 연결되어야만 합니다. 가정에 있든 회사에 있든 친구를 만나든 단체에 참여하든 그 현장에 기쁨과 만족의 이유는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삶의 현장에서는 기쁨거리라 믿어지는 대상을 손에 넣고자 실세를 파악할 필요도 없고, 설령 실세라 여겨지는 대상이 있더라도 그 측근이 되고자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실세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으며, 실세를 움직이고자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뇌물도 아첨도 아부도 필요 없습니다.
헤롯당과 바리새인들은 동일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실세로 파악되는 대상에게 끊임없이 뇌물을 바치고 아첨하고 아부를 떨어서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생을 일관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세에 아부하지 않는 삶의 예를 보여주셨습니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의 상황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재판자리에 앉아있는 빌라도는 예수님의 생사결정권을 가진 실세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빌라도를 안중에도 두지 않으십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실세인 빌라도의 환심을 사기 위해 변명이라도 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목숨은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9장 9~10절을 보면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빌라도는 스스로가 실세임을 자처하였던 것입니다. 빌라도가 지금까지 보아온 모든 사람들은 실세 앞에서 무릎 꿇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잘 보이려 애를 썼고 측근이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셨고 빌라도는 이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11절의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빌라도에게는 예수님을 놓아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었습니다. 이 재판 상황에서 분명히 빌라도는 실세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실세에 신경 쓰지 않으셨습니다. 눈치도 보지 않으셨고 측근이 되고자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실세와 연결시키려고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실세 위에 주권자이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심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의 대상을 찾지 않는다면 이를 얻기 위해 실세에 의지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믿음이 굳건하다면 아직 하나님으로 기쁨과 만족을 얻지 못한 상태일지라도 변화는 일어납니다. 삶의 현장에서 실세의 측근이 되고자 하고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삶은 중단됩니다. 하나님만이 기쁨과 만족이 되신다는 굳건한 믿음으로부터 삶의 현장은 하나님의 주권과 연결될 준비가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은 세상적인 실세와 연결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연결되어야만 합니다. 나의 삶과 이 세상 전체를 고려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최선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못하고 세상으로 마음을 채우려한다면 하나님을 실세로 파악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실세로 파악하게 된다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가치들을 손에 넣기 위해 하나님을 주도적으로 이용하게 될 뿐입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에 대한 모든 열정은 뇌물이고 아첨이고 아부가 되어버립니다. 또한 그러한 가르침은 독사 즉 사탄의 가르침이 되어버립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큰 열정을 이야기하더라도 마음에서 세상의 가치들을 좋아한다면 하나님을 실세로 여기고 이용하려는 사탄의 가르침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하시는 역할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좋아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은 그 하나님을 갖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님을 실세로 여겨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스스로를 주시기 위해 허락하신 은혜가 예수님이십니다. 실세는 주도적으로 이용해야 될 대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조건적인 은혜로 베풀어주신 선물이시며 하나님 갖기의 길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돈에게 인격이 있다면 마음에서 돈을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찾아가고자 할 것입니다. 돈이 재벌회장을 내 앞에 가져다 놓고 회장님 주머니의 돈을 내게 다 주게 만들었습니다. 이때에 재벌회장은 아첨해야 될 실세가 아닌 선물로 여겨질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예는 실제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개념만을 이용해 본다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선물로 허락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은혜의 통로로 받아들여서 하나님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실세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통해 십자가 생활화를 해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하나님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신 이 길은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내신 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생활화를 함으로써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삶의 현장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다를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승진과 연봉이 최고의 가치이고, 학교에서는 성적이 가치이고, 면허시험장에서는 합격이 가치이고, 병원에서는 건강이 가치이고, 가정에서는 가족들의 형통이 가치입니다. 이러한 가치들이 삶의 현장마다 도사리다가 우리와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선언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는 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든 가치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 살아계신 하나님만이 나의 기쁨과 만족이 되신다.”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게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 생활화를 할 때에 마음에는 이 세상의 모든 실세들로부터 완전한 자유가 주어지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실세의 측근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은 실세와 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삶을 연결하는 자들입니다. 그 주권아래에 세상의 실세들이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에 온전한 자유를 찾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실세철학으로부터 마음을 분리하고 접촉을 끊어내라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주권과 연결되어야만 합니다. 그 방법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세상의 가치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우리의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럴 때에 삶의 현장은 하나님의 주권과 연결이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대로 삶이 진행되어 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세철학에 물들지 말고 하나님의 주권과 연결하는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모든 가치들에 대해 철저히 죽게 하여 주셔서, 우리의 마음은 주님과 연합하여 하늘로 올라가고 몸이 처해있는 삶의 현장은 하나님의 주권에 연결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주권이 세상의 모든 실세들을 주관하심을 알고 또한 나의 삶을 이끌어 가심을 보면서 찬송하고 감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주님 사랑하시는 목사님을 보배롭게 쓰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참으로 귀한 생명의 말씀을 전하여 주심에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꾸벅^^
항상 강건하시고 사용하시는 주님으로 더욱 평안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