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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기쁨 막는 불, 관계 막는 불>의 줄거리:
예수님이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아담 타락 때에 하나님이 이 땅에 던져 놓으신 불이 이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불에 또 다시 두 번째 불이 이 땅에 임한 셈입니다. 첫 번째 불은 이 세상 안에서 맺는 관계를 통해 기쁨을 얻으려는 시도를 막는 불이었다면, 두 번째 불은 이런 관계 맺기의 성향 자체를 불살라 버리는 불입니다.
기쁨 막는 불, 관계 막는 불
(누가복음 12:49~53)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기쁨 막는 불, 관계 막는 불>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기쁨 막는 불, 관계 막는 불’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불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내리신 불은 기쁨을 막는 불이고,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던지신 불은 관계를 막는 불입니다. 기쁨 막는 불, 관계 막는 불의 두 가지 불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49절에서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어떤 의미일까요? 불이 무엇인가를 놓고 학자들 간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영적활동이라 합니다. 심판이나 AD.70년경에 일어난 로마의 침략 혹은 신자와 불신자 간의 적대감이라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문맥을 잘 살펴본다면 어려운 내용이 아닙니다. 이렇게 의견이 분분한 상황 자체가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불이 무엇인지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51절을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예수님이 땅에 던지고자 하신 불이 무엇인지는 명확합니다. 세상에서 인간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막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한편 49절 하반부의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는 부분에 대해서도 해석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각각의 의견을 살펴볼 필요도 없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이루실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둔다면 말씀의 의미는 명확해집니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이라는 가정으로부터 예수님께서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지만 아직 던진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 십자가 사건 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나게 될 십자가 사건이 지극히 고통스러운 일임을 아셨기에 지금이라도 다 이루어진 일이라면 너무 좋겠다는 심정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은 마치 입시를 앞둔 수험생의 마음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험생활이 지겹고 괴로운 수험생들은 시험 결과가 어떠하든지 시험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지만 이 일이 너무나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우심을 아셨기에 그 일이 끝나기만 하면 더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심정에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에 놓고 불이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던지시는 불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내리신 불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불의 의미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사람은 판단하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리며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에덴의 특징입니다. 이렇게만 하면 세상 짐을 지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주체성에 의해서 삶의 모든 부분들이 이끌려지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기쁨 즉 에덴동산의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타락하였고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이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경계하도록 하셨습니다. 에덴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에서 기쁨 독점권을 가진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에덴 밖에서는 기쁨을 얻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을 가지도록 지음 받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마음을 채워서 기쁨과 만족을 얻는 것이 생명의 상태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기쁨과 만족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에덴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진정한 기쁨과 만족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기쁨과 만족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인간은 기쁨과 만족이 없는 상태를 묵인하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은 에덴 밖에서 마주하는 대상들로 마음을 채우고자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에게 먼저 보였던 것은 아내 하와였고 하와에게 먼저 보였던 것은 남편 아담이었습니다. 이들은 부부관계에서 기쁨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부부관계에서 에덴을 찾아 들어가 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덴에 불 칼을 두셨습니다. 마음이 에덴에 들어가고자 하면 반드시 불 칼에 타게 됩니다. 부부관계에서 기쁨을 얻으려 하면 할수록 에덴의 불 칼에 닿은 마음이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인과 아벨을 낳았을 때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졌습니다.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부모로서 자녀를 통해 기쁨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에덴으로 재진입을 시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형이 동생을 죽이는 사건을 통해 아담과 하와의 마음은 또다시 새카맣게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 밖에서 살아가게 된 사람들의 마음의 특징입니다.
부부가 서로에게서 기쁨을 얻으려 한다는 것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붙잡고 에덴으로 진입하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녀로부터 기쁨을 얻으려 한다는 것은 자녀와의 관계를 붙잡고 에덴으로 진입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입하려다 보면 반드시 마음은 불 칼에 타게 됩니다. 내가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붙잡은 모든 관계의 대상들로부터 마음은 새카맣게 불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내리신 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인류에게 예수님은 또다시 불을 던지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관계를 붙잡고 에덴으로 진입해 들어가다가 마음이 불에 새카맣게 탔을 때의 문제는 남편이나 아내가 아닙니다. 남편이나 아내라는 관계를 통해서 기쁨을 얻으려고 한 내 마음이 문제입니다. 남편 자리에 칭기즈칸이 들어가도 안 되고, 알렉산더가 들어가도 안 되고, 아브라함 링컨이 들어가도 안 되고 세종대왕이 들어가도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들어오더라도 기쁨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시도하는 체질과 성향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음이 에덴의 불 칼에 맞아서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남편이 아내의 속을 새카맣게 태운다고 생각하고, 아내가 남편의 속을 새카맣게 태운다고 생각합니다. 자녀가 부모의 속을 새카맣게 태운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마음에 담을 수 있는 세상의 모든 대상들이 마음을 새카맣게 태울 수 있습니다. 돈을 마음에 담은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돈을 통해 마음을 에덴으로 들여보내고자 하지만 돈도 벌리지 않고 돈을 벌어도 마음에는 진정한 기쁨과 만족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때 문제는 돈이 아닙니다. 돈은 벌리든지 벌리지 않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내 마음이 새카맣게 타는 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에덴의 불 칼에 맞아서 새카맣게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돈으로는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오셔서 하시고자 하신 일은 관계의 성향에 불을 던지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대신에 사람과의 관계를 맺어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는 성향과 체질을 근원적으로 불살라 없애기 위하여 불을 던지시겠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타락 후에 하나님이 내리신 불은 기쁨을 막는 불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세상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였으나 기쁨을 얻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 성향과 체질 자체를 제거하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51절을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문제시하신 것은 관계 자체가 아닙니다. 관계에서 기쁨을 얻으려는 성향과 체질입니다. 분쟁하게 하려 하신다는 것은 이러한 관계에서 기쁨을 얻으려는 시도 자체를 지긋지긋하게 여기도록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53절을 보면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아들이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어머니가 딸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딸도 어머니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며느리도 시어머니를 못마땅하게 여기게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주로 부모가 자녀를 못마땅하게 여겨서 닦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녀들도 부모를 못마땅하게 여기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듯 서로를 못마땅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관계를 맺는 이유는 마음 채움 때문입니다. 마음이 비어있기에 눈에 보이는 대상들과의 관계를 통해 마음을 채워보고자 하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때 가장 우선적으로 보이는 대상이 남편이고 아내이며 자녀입니다. 그 결과 빈 마음을 채워달라며 닦달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남편이든 아내든 자녀든 마음 채움을 위해서는 효용 제로의 상태를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족을 통해서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얻고자 합니다. 가족이 잘되면 나도 기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생각에 일침을 가하십니다. 내 마음의 기쁨과 만족에 대해서는 가족은 남과 다름없게 하시겠는 것입니다. 52절을 보면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비단 가족관계에 국한시키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단 한 명의 사람도 예외 없이 관계를 통한 마음 채움은 무용지물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요약해보자면 “가족은 남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는 남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내 마음이 기쁘고 만족하기 위해서는 나와 가족이 잘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불을 받아들인 사람들에서는 이러한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가족은 내 마음의 기쁨과 만족에 대해서는 완전히 남과 같습니다. 오히려 육체의 오감에 가장 많이 포착됨으로써 내 마음에 기쁨과 만족을 기대하게 만들어서 예수님이 주시려는 하늘 기쁨과 만족을 차단하는 원수라 할 수 있습니다. 가족이 원수인 이유는 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은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가족이 채울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제 가족은 하나님을 밀어내는 원수가 됩니다. 예수님의 불은 바로 이러한 관계에 대한 의존성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50절에서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던지실 불과 관련하여 세례를 언급하고 계십니다.
세례는 항상 죽음을 포함하기에 예수님이 받으실 세례란 곧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에 대해 답답하다고 하신 이유는 십자가의 사건이 그토록 괴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실 일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아들이신 예수님을 죽여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의 75억 인구가 최고로 싫어하는 일들을 다 모아놓는다 하여도 하나님의 싫어하심에 미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토록 십자가 사건을 답답하게 여기신 이유는 사람들이 인간관계를 통하여 에덴에 진입하려고 하는 저주받은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 채움을 추구하는 것은 타락 전이나 타락 후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타락 전에는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울 수 있었으나 타락한 후에는 마음이 더럽혀져 하나님으로 채울 수 없게 되었고 그 자리를 인간관계로 채우게 되었습니다. 이 시도를 근절시키기 위해서 예수님도 인간 세상으로 오셔서 저주받은 상태를 출발점으로 삼으셔야만 했습니다.
본래 삼위일체를 이루고 계셨던 예수님은 하나님이 안 계시는 저주받은 상태로 내려오셔야만 했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셔야만 했습니다. 저주받은 상태란 곧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상태입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만 버림을 당하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도 버림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음은 곧 세상을 탈출하는 세례의 역사였고 이를 통해 부활의 자리에 도달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을 따라 부활의 자리까지 이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버림당하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과 관계 맺던 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남편도 아내도 자녀도 세상에 속해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가족들과의 관계도 부인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의 자리에 이르면 그 자리는 세상과 관계는 없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기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루시려는 역사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육신을 입고 살아가기에 사람과 관계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마음이 하나님과만 관계할 때에 에덴은 회복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남편에 대해서든 아내에 대해서든 내가 맺는 모든 관계는 죄의 결과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누군가를 담고 기쁨과 만족을 구하는 것 자체가 죄악입니다.
사람은 본래 사람과 직접 관계를 맺도록 지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아담은 하와에 대해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판단을 받아 하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하와도 남편인 아담을 앞에 두고도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이 주시는 판단을 받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간관계 또한 역시 하나님이 맺어 가셔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과 관계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인간관계를 맺어 가시는 삶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대로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성향 자체를 불살라 버리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모든 관계를 태워 버리는 불입니다. 부부관계, 부모자식 관계, 형제자매 관계, 친구관계, 애인관계를 비롯한 모든 관계는 불살라져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첫 번째 하나님께서 내리신 불은 기쁨을 막는 불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것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됨으로써 하나님 자리에 사람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인간관계를 붙잡고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게 되었지만 하나님 외에는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분이 없기에 관계를 맺을 때마다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연애를 해도 불꽃이 튈 때는 좋지만 서로의 생각을 주장하게 되면 애인은 속을 태우는 존재가 됩니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이별의 슬픔만 남았네.”라는 노래가사가 나올 만도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랑의 기쁨은 순간에 사라집니다. 사랑이 괴로워서 이별을 해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있어도 속이 타고 헤어져도 속이 찢어집니다. 이것이 인간관계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 던지시는 불은 관계를 태우는 불입니다. 인간관계는 본래 인간끼리 맺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에 나간다고 해서 사장님과 직접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됩니다. 직접 관계를 맺고자 하는 저주받은 상태는 십자가에서 부인되어야만 합니다. 사장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나를 불태워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던지시는 불은 번제단의 불입니다. 나를 활활 태워 죽이는 불입니다. 세상에서의 관계에 대한 나의 마음이 죽고 나면 부활의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남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사장님 앞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장님에 대한 관계를 맺게 하십니다. 사장님에 대해 생각하게 하시고 말하게 하십니다.
인간관계는 하나님이 맺으셔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주력하면 됩니다. 내가 인간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저주받은 상태에 놓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마음이 새카맣게 타들어갈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인간관계를 맺으려는 나의 성향과 체질 자체가 십자가에서 불살라져 잿더미를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 대신에 인간과 관계를 맺어 에덴으로 진입하려는 그릇되고 악한 시도가 마음을 새카맣게 태움을 알았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이러한 성향을 태워 죽이게 하시며 부활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관계하며, 하나님께서 나의 인간관계를 맺으시는 에덴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