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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30) - 2025. 03.10(월) 03.12(수) |
이번 순례는 제주성지이다. 지난 2024년 12월 15일 대구 비산성당, 복자성당을 마지막으로 육지 성지 160개소 순례를 마치고 제주도 성지 7곳만 남았는데 이번 30회 마지막은 그곳에 간다. 아무래도 제주도를 한겨울에 가기도 그렇고 하여 두어 달을 늦춘 결과다. 그 일정은 다음과 같다.
10일 - 대정성지, 용수성지, 새미 은총의 동산, 관덕정
11일 - 황경한 묘(추자도)
12일 - 황사평성지, 김기량 순교비
순례 단원은 12명으로, 성당 단체 바오로회원 중 혼자든 부부든 동참을 희망하는 분들이고, 또 서울교구 친구 부부까지 포함된다. 그렇게 많은 수도 아니고 하여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추진하였다. 그 동안 페키지 상품이든, 답사단의 일원이든 모두 다른 사람이 계획한 것을 따르기만 했는데 직접 추진하다보니 총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무엇보다 마음의 부담이 컸다. 그동안 여행을 얼마나 쉽게 다녔는가를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2025년 3월 10일(월)
새벽 5시에 성당에 모여 승용차 두 대로 교우 10명이 출발했다. 서울 친구 신광철(모세) 하영심(헬레나) 부부는 제주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순례단 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연호(요한) 박여희(실비아), 문국진(베드로) 유경숙(헬레나), 이종상(다니엘) 김경남(레오나), 고민환(요셉),
장영진(라파엘), 송선희(루시아), 신정애(멜라)
06시 20분 김해공항 도착. 이른 시간이라 공항 식당에 가서 식사 후 출발 수속. 08시 15분 제주항공편으로 출발.
약 1시간을 비행하여 제주공항에 도착. 서울 교우 부부와 회동했다. 셔틀버스를 타고 렌트 회사에 가서 15인승 솔라티를 인수. 예약할 때는 회사명이 ‘제주 속으로’였는데 와보니 제주 유레카(Eureka)였다.
옛날 그리스 과학자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아르케메데스 원리를 발견하고 너무나 놀라워 옷을 벗은 채 바깥으로 달려나와 유레카(찾아냈다)를 외쳤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화이다. 말하자면 “렌트 관광객이 가장 좋은 회사를 찾았다”는 렌트 회사의 홍보 의도가 들어있는 상호이다.
우연하게도 렌트 회사 바로 가까이 숙소로 예약한 용두감 캐빈이 있어 짐을 모두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다닐 수 있어 좋다.
10시 반쯤 대정성지로 향발하여 약 1시간 만인 11시 30분 경 도착.
대정성지 - 외롭게 부른 신앙의 노래여 (정난주 마리아의 묘) |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 10
조선시대 제주도의 행정구역은 1목 2현이다. 오늘날의 제주시에 정3품 목사가 다스리는 제주목, 그리고 섬의 동남쪽과 서남쪽에 각각 종6품의 현감이 파견되었던 정의현(오늘의 표선면)과 대정현(오늘의 대정읍)이 그들이다.
정난주(일명 命連) 마리아는 경기도 마재의 나주 정씨 정해원의 아들 약현, 약전, 약종, 약용 중 장남 약현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 이씨는 우리나라 천주교 신앙 선조 이벽의 누이였다. 18세 때 황사영 알렉시오와 혼인, 황사영은 15세의 어린나이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장래가 촉망되던 인물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조선 천주교회에 된서리가 내리자 정 마리아의 남편 황사영은 조선교회의 실상을 외부에 알리고자 베론의 토굴 속에서 북경 교구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帛書)를 작성하였다. 이른바 황사영백서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일행이 북경에 출발하기 도 전에 발각되었고 이로 인하여 황사영은 그해 11월5일 능지처참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며 가족들도 연좌되어 시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 관비로, 아내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 관비로 가게 되었다. 두 살배기 아들 경한(景漢)은 나이가 너무 어려 처형을 면하였다.
정난주 마리아는 추운 동짓달 제주도를 향해 가던 중 추자도 가까이 왔을 때 어린 아들만은 노비를 면하게 할 생각으로 나졸에게 패물을 주면서 아들을 추자도에 내려놓고 떠나도록 애원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추자도 예초리(禮草里) 서남단 물산리 언덕배기에 어린 경한을 내려놓고 제주도로 떠났다. 조정에는 황경한이 제주도에 도착하기 전 뱃길에서 죽어 수장했다고 보고되었다.
대정현에 도착한 정 마리아는 관비(官婢)의 유배 생활을 시작하였다. 다행히 당시 관비를 담당하던 관리(官吏) 김씨 집안에서 정 마리아의 성품과 학식과 교양을 높이 사서 어린 아들 양육을 맡겼다. 이로 인해 정 마리아는 그 집안의 배려로 점차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나이가 많이 들게 되자 김씨 집안에서는 마리아를 '한양 할머니'라고 부르면서 양모와 같이 봉양하였다고 한다.
정 마리아는 유배된 후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비밀리에 기도 생활을 하였다. 김씨 집안에서는 마리아가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누구도 이를 막거나 고발하지는 않았다. 그의 일상 기도는 30여 년 동안 유배지에서 외롭게 부른 신앙의 노래였다. 정 마리아는 어린 아들을 추자도에 떼어놓았던 생이별의 아픔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였다.
그녀는 이곳에서 37년을 살다가 1838년 2월, 66세를 일기로 병사하자 김씨 집안에서는 그녀의 유해를 바로 이곳 모슬포 뒷산에 묻었다. 당시 정 마리아가 살던 집의 주인 김상집은 추자도의 황경한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 편지를 전했다. 사망 일시와 무덤 위치를 적은 이 편지는 지금도 남아 있다. 이로 보면 정난주 마리아가 살았을 적에 아들 황경한과 소통했을 가능성이 있다.
정난주 마리아는 비록 그녀가 천주교 신자로 처형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삶 전체가 순교자의 생애를 방불케 하는 굳건한 신앙의 증거자로 충분하기에 교회에서는 그녀를 순교자의 반열에 올려 공경하고 있다. 참고로 정난주의 시어머니인 이윤혜는 거제현 관비로 가서 14년을 살다가 1815년 2월에 죽었다.
1970년대 초, 교회사가 김구정과 김병준 신부는 수소문 끝에 정난주의 무덤을 찾아내었다. 김씨 집안에서 대를 이어가며 무덤을 돌보아 왔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 무덤은 1977년에 순교자 묘역으로 단장되었다. 그후 제주교구는 ‘백색 순교자’인 정난주의 모범을 본받기 위해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묘소를 새롭게 단장하고 성역화하여 오늘의 대정성지로 개발했다.
11시 30분경 대정성지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야자수가 늘어져서 이국적 정취를 자아낸다. 그리고 제주도의 화산석으로 만든 아치식 정문 역시 매우 독특한 정감을 준다.
아치식 정문 옆에는 어린 아들 경한을 안은 정난주 마리아상이 우아한 핑크색으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이 상은 2016년에 교구에서 세운 것으로 “평화의 모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라는 선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돌담문 안으로 들어서니 광장이 엄청 넓은데, 묘역을 중심으로 야외제대가 펼쳐진다. 중앙 광장 양 옆에는 돌담과 동백꽃으로 울타리를 이루고 울타리를 따라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었다.
묘역은 대형 십자가 앞에 정난주 마리아의 묘가 방형(方形)으로 조성되어 있고 그 앞에 제대가 있다. 그리고 제대 좌우에 독서대와 묘비가 있다.
한창 동백꽃이 지고 있다. 동백꽃은 왜 이리 잔인하게 질까? 마치 박해의 칼날에 순교자의 멱이 떨어지듯 송이 째 떨어진 꽃잎들, 나무 밑은 온통 순교자의 피로 물들고 있다. 하지만 칼날 같은 추위에 희생된 꽃송이로 인해 우리가 이처럼 따뜻한 신앙의 봄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나오는 길에 돌문 안쪽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주차장에 나오니 거기도 아기를 안은 정난주 마리아상이 또 하나 우리를 배웅한다. 모성애란 무엇일까? 분명 자신의 살점을 떼어내는 헤어짐의 아픔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식만큼은 노비가 아닌 양민으로 인간답게 살게 하려는 모진 꿈 - 이 또한 다른 이름의 모성애가 아닐까? 첫 순례로 깔끔하고 소박한 성지였다.
가장 눈물겨운 노래는 - 정난주 묘소에서 -
남편과 젖먹이 빼앗기고
멀리 이곳으로 귀양 오던 날은
캄캄한 밤이어서 슬펐을 것입니다.
환한 낮이어서 슬펐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온 사람은
늘 하늘을 말하는 법입니까?
천길 절벽 앞에서도
기도로 눈 뜨며 하늘 보는 법입니까?
가장 눈물겨운 노래는
가장 깊은 바다로 가라앉고
나는 시리게 밀려오는 바다소리 들으며
가슴에다 촛불 하나 켭니다.
멀리로 멀리로 돌아오는 바닷바람
나는 작은 풀잎에 기대고
깨끗한 눈물 한 방울로
설레며 설레며 서고 싶습니다. (김영수)
11시 50분. 용수 성지로 가기에 앞서 일단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인근에는 식당이 없어 모슬포로 가서 찾은 곳이 할멈밥상 모슬포점. 생선구이 단일 메뉴인데 10가지에 가까운 생선구이에 제육볶음이 따라 나온다. 식사 후 용수성지로 이동. 12시 20분경 도착.
용수성지 - 성 김대건 신부 제주 표착 기념성당 |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4266
제주도 한경면 용수리 포구는 한국인 최초의 신부이며 103위 순교성인들의 으뜸을 장식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가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서해 바다로 귀국하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착했던 곳이다.
부제 때 일시 귀국했던 김대건은 작은 선박 하나를 구입하여 라파엘호라 명명하고 1845년 4월 30일 신자11명과 제물포항(현 인천항)을 떠나 상해로 갔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17일 상해 김가항(金家巷) 성당에서 후일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이 된 페레올(Ferreol)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8월 31일 조선 입국을 위해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Daveluy) 신부를 모시고 함께 갔던 신자들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항을 떠났다. 나중 다블뤼 신부가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이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실로 조선교구의 운명이 달린 항해였다.
그들은 출항한 지 3일 만에 서해에서 풍랑을 만나 거의 한 달 동안 절망적인 표류를 하다가 9월 28일 제주도 서쪽 용수리 포구에 도착하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여기서 2∼3일 정도 배를 수리하고 먹을 음식 등을 준비하여 10월 1일 곧바로 다시 출항하여 약 열흘 만인 10월 12일 금강 하류의 황산포 나바위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 동안 잊혀졌던 용수리는 1999년 9월 19일,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김대건 신부의 선교열정을 기리기 위해 김대건 신부가 표착했던 용수리 포구를 성지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학계의 권위 있는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라파엘호의 구조를 확인하고 이를 복원했다.(길이 13.5m, 폭 4.8m, 깊이 2.1m). 이 배는 인근 선창성당 마당에 보존 전시하다가 2016년 11월에 건립된 김대건 신부 순교기념관 옆 잔디광장에 전시하고 있다.
또한 2008년 9월 20일에는 기념관 바로 옆에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 기념성당을 건립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기념성당의 정면은 성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중국 상해의 김가항 성당을 재현했으며, 지붕은 거센 파도와 라파엘호를 형상화했다. 또 등대 모양의 종탑은 어둠속에서 빛을 비춰 밝은 곳으로 인도하는 가톨릭교회와 김대건 신부의 선교의지를 상징하고 있다. 라파엘호 옆에는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상을 세웠다.
이어 제주교구는 2010년 9월 25일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 165주년을 기념하여 잔디광장에 김대건 신부 조각상을 세우고 축복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2017년 10월 28일에는 2006년 건립한 김대건 신부 표착기념관을 리모델링하고 사제관을 신축해 축복식을 가졌다.
1시 30분 경 성지 도착. 입구에서 성당까지는 직선으로 난 길이 꽤 멀다. 넓은 잔디밭이 좌우로 펼쳐지고 맨 앞에 2010년에 세운 높다란 김대건 신부의 상이 우리를 환영해 주신다. 갓과 두루마기 차림의 선비 복장은 이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전국의 어느 곳에서든 이런 복장 차림이다.
그 뒤로는 멀리 좌우에 두 건물이 보이는데 왼쪽 흰색 건물은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 기념성당이고 오른쪽은 김대건 신부 순교기념관이다.
잔디밭 주변에는 라파엘호와 김대건 신부의 미니어쳐가 있고 그 너머는 회색빛 바다와 하늘이 한빛이다. 여기 저기 별이 새겨져 있고 별 모양의 벤치가 보이는데 이는 아마도 이곳이 바닷가이고 김대건 신부가 표류할 때 보호해주신 바다의 별 성모님(스텔라)의 은총을 나타내기 위함으로 추정된다.
바다를 향하여 난 광장의 화단에는 벌써 성급한 각종 꽃들이 활짝 피어 성지를 장식하는데, 일본 문화에 밝은 고 요셉 형제는 어느 틈에 이런 꽃송이를 두고 하이쿠 한 가락을 붙인다. 하이쿠란 일본 전통의 초미니 단시로 극도로 제한된 5·7·5 음수율이 17자로 표현된다. 순간적 의미와 감동을 포착하는 시로, 기도라면 화살기도와 같은 시이다.
용수리 성당 겨울 지나고
국내사제 첫미사 하늘에 감사해서
꽃에 앉은 벌 웃는답니다.
십자가의 길
잔디밭 둘레에 십자가의 길이 나있는데 돌에 예수님의 고행상을 새긴 비석형 십사처들이다.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 기념성당
이름 그대로 김대건 신부 일행이 죽음의 표류를 하다가 뜻하지 않게 남쪽나라 제주도에 도착함을 기념하는 성당으로 2008년에 세웠다.
앞서 말했듯 기념성당의 정면은 성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중국 상해의 김가항(金家巷) 성당의 모습을 재현했다. 상해의 김가항 성당은 개발과정에서 지금은 없어졌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매우 아쉽기에 당시 헐려진 김가항 성당의 일부 부재를 가져다가 그 모습대로 재현한 성당이 수원교구의 은이성당이다.
용수성당의 지붕은 거센 파도를 헤쳐가는 라파엘호의 모습이다. 또 배의 돛대격인 높이 솟은 등대 모양의 종탑은 어둠속에서 빛을 비춰 밝은 곳으로 인도하는 가톨릭교회와 김대건 신부의 선교의지를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성당 옆에는 행해를 도와주신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상을 세웠다.
성전 내부는 이외로 널직하게 느껴지는데 천장과 제대 후면 중앙 벽면은 흰색이고 벽면과 회중석(교우석)은 나무색으로 단촐하다. 제대 아래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성 모방 신부의 유해가 보존되어 성당의 품격과 무게를 더해 주고 벽면에는 김대건 신부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상이 걸렸다.
양쪽 벽면에는 아름다운 아치형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고, 청동 조각상 같은 십자가의 길 14처가 양쪽에 벽면에 배치되어 있다.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 기념관
다시 밖에 나오면 거대한 배가 한 척 막아선다.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지은 김대건 신부 기념관이다. 순교기념관은 2006년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약 800평 규모로 지은 전시관이다. 여기에는 김대건 신부의 편지 사본 등을 위시한 관련 자료와 제주 천주교 역사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오늘이 쉬는 월요일이라 관람할 수 없었다. 복원 라파엘호로 이동.
라파엘호
이 배는 김대건 신부 일행이 1845년 제물포(현 인천)에서 상해로 갈 때 타고 갔다가 다시 돌아올 때 탔던 무동력 목선으로 길을 안내하는 대천사 이름을 따서 라파엘 호라고 하였다. 8월 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8월 31일 자신에게 서품을 준 페레올 주교(후일 조선교구 3대 교구장)와 다블뤼 신부(후일 조선교구 5대 교구장), 성 황석두 루카 등 13명과 함께 이 배를 타고 상해를 출발하였으나 폭풍을 만나 표류하던 끝에 이곳 용수리 해안에 도착하였다. 며칠을 쉬며 출항을 준비하여 항해 하여 10월 12일, 전북 금강 하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하였다.
제주교구는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이 배를 고증을 거쳐 복원하여 이곳에 옮겨 전시하고 있다.
복원 라파엘호 옆 연못 위 언덕에는 큼직한 성모상이 서 계신다. 이 성모상은 1830년 프랑스 뤼뒤박에 있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의 딸 수녀원의 카타리나 수녀에게 발현하여 자신의 상을 새긴 기적의 패를 온 세상에 보급 전파하라고 하신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이시다.
김대건 신부는 폭풍을 만나 난파와 침몰의 위험성이 있을 때마다 기적의 패에 새겨진 성모님께 기도하고 또 일행을 격려하여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표류한 것도 어쩌면 경계가 심하여 위험했던 본토의 항구를 피해서 안전한 이곳에 도착하도록 하신 성모님의 배려 아닌가 한다.
2시경 용수성지 순례를 마치고 다음 성지인 새미 은총의 동산으로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