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또 하나의 파멸된 명예(B)
그는 수도원 옆을 돌아 솔밭을 빠져 곧장 암자로 걸어갔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는 아무도 암자에 들이지 못하게 되어 있었으나 그에게만은 문을 열어 주었다. 장로의 방에 들어서자 그의 가슴은 떨리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내가 여기서 나갔던 걸까? 그리고 또 무엇 때문에 장로는 나를 속세에 내보냈을까? 여기는 정적과 거룩함이 있는데 거기는 혼란과 암흑만 있어 발을 들여 놓기만 하면 곧 길을 잃고 방황할 수 밖엔 없는데,.......'
장로의 방엔 수도생 포르피리와 파이시 신부가 와 있었다. 파이시 신부는 오늘 하루 종일 매시간마다 조시마 장로의 용태를 알아보려고 드나 들었지만 장로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갈 뿐이었다. 이 말을 듣고 알료샤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 것 같았다. 날마다 하게 되어 있는, 수사들을 위한 저녁 담화조차도 오늘은 중지했을 정도였다.
언제나 저녁마다 예배가 끝나면 밤의 안식이 오기 전에 암자의 수사들이 장로의 방에 모여 그날 하루 동안에 범한 죄과며 죄스러운 공상, 사상, 유혹, 그리고 심지어는 동료 사이에 있었던 말다툼까지 죄다 큰 소리로 장로한테 고백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는 무릎을 꿇고 고백하는 사람도 있었다. 장로는 그것을 하나하나 해결하고 화해시키고 훈계를 하기도 하며 일일이 축복을 내려 돌려보내곤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수사들의 '참회'에 대하여 장로제도 반대자들은 비난의 화살을 퍼부으면서, 이것은 성비례(聖秘禮)로서의 참회의 신성을 더럽히는 것이니 거의 '독신죄(瀆神罪)'와도 다를 것이 없다는 등 부당한 주장을 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러한 참회는 좋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없을 뿐더러 실제로 사람들을 오히려 죄악과 유혹으로 이끌 뿐이라고 교구장(敎區長)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기까지 했었다.
사실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장로의 암자에 모이는 것을 고통으로 생각하여 마지못해 찾아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거만하고 반항적인 인간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 억지로 모이는 것이었다.
또 소문에 의하면 수사들 중에는 그날 저녁 참회의 모임에 출석하기 전에 미리 짜고, '나는 오늘 아침에 자네한테 화를 냈다고 할 테니 자네도 적당히 맞장구를 치게' 하는 식으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적당히 차례를 메우려는 자들도 있었다.
사실 이런 일이 가끔 있다는 것을 알료샤도 알고 있었다. 그는 또 암자의 수사들이 자기 가족한테서 받는 편지를 장로가 먼저 뜯어 보는 습관에 대해 몹시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이 자발적인 복종과 구제를 목적으로 한 교훈 아래 자유롭고도 성실하게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매우 불성실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거짓되게 가장 하는 일 까지 있었다.
그렇지만 수사들 중에서도 나이 많고 경험 많은 사람들은 '진심으로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이 수도원 담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이러한 복종과 고행이 구제의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어 위대한 이익을 얻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을 고통으로 생각하여 불평하는 사람들은 수도사라고 할 수 없으니까 수도원에 들어온 것 부터가 잘못이다. 그들이 있을 곳은 속세인 것이다. 죄악이나 악마는 속세에서만이 아니라 수도원 안에서도 유혹의 손을 뻗치고 있다. 따라서 죄과를 묵인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라고 판단하여 자기 주장을 고집하고 있었다.
"너무 쇠약해져서 혼수 상태에 계시는 거다" 하고 파이시 신부는 알료샤를 축복한 후 이렇게 속삭였다. "깨워 드리기조차 곤란할 정도야. 그럴 필요도 없긴 하지만. 아까 5분 가량 눈을 뜨시고 이 축복을 모두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셨어. 그리고 모두에겐 저녁 예배 때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당부하고 내일 한 번 더 성찬을 받고 싶으시다고 말씀하시더구나.
그리고 알렉세이, 네 얘기도 하시면서 이젠 아주 이곳을 떠났느냐고 물으시기에 지금 잠시 읍내에 나가 있다고 대답했더니, '그래서 나도 그를 축복해 주었던 거야. 알료샤가 있을 곳은 바로 그곳이니까 당분간은 여기 머물러 있지 않는 편이 좋아' 하고 말씀하시더라. 참으로 사랑과 배려에 넘치는 어조였어.
네가 받은 영광이 어떤 건지 너는 알겠니? 그런데 장로님께서 너더러 당분간 속세에 나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신 건 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건 너의 운명에 대해 무언가를 예감하셧기 때문일 거야!
하지만 알렉세이, 네가 속세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장로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복종의 의무로 보아야지 결코 공허한 속세의 향락이나 경박한 행동을 하라는 뜻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게다. 이 점을 명심해 둬라."
파이시 신부는 나갔다. 장로가 비록 하루 이틀 더 산다 해도 이제 곧 이 세상을 떠나리라는 것은 알료샤로서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비롯하여 호홀라코바 모녀와 카테리나, 그리고 형을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수도원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장로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 옆에 붙어 있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의 가슴은 애정으로 불타올랐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깊이 존경하고 있는 분을, 더구나 임종의 자리에 누워 계신 그분을 수도원에 남겨 두고 읍내로 나가 잠시 동안 이긴 했지만 그분의 일을 까맣게 잊을 수 있었던 자기 자신을 꾸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장로의 침실에 들어가자 무릎을 꿇고 잠들어 있는 장로를 향해 이마가 마루에 닿도록 절을 했다. 장로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히 숨을 쉬면서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그 얼굴은 말 할 수 없이 평온했다.
옆 방으로 물러나자(그것은 오늘 아침 장로가 손님을 맞았던 그 방이었다). 알료샤는 그저 구두만을 벗었을 뿐 옷도 제대로 갈아 입지 않고 딱딱하고 좁은 가죽 소파 위에 누웠다. 그는 벌써 오래 전부터 베개만을 들고와서 밤마다 이 소파를 잠자리로 삼고 있었다. 아버지가 큰 소리로 말 한 그 이불은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하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는 그저 자기의 법의를 벗어 담요 대신 덮었다. 그러나 잠을 자기 전에 그는 무릎을 꿇고 오랫동안 기도를 드렸다. 그 열렬한 기도 속에서 그가 하느님께 기원한 것은 자기 마음의 의혹을 풀어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하느님을 찬미하고 난 후면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찾아들던 기쁜 환희의 감동을 다시 되찾기를 갈망했을 뿐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의 기도는 언제나 하느님에 대한 찬미만으로 충만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환희의 감동은 언제나 상쾌하고도 평온한 꿈을 가져다 주곤 했다,
그런 식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문득 호주머니 속에서 무언가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까 카테리나의 하녀가 뒤쫒아와서 그에게 전해 준 조그만 장미빛 봉투였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봉투를 뜯었다. 그 속에는 '리즈'라고 서명한 편지가 들어 있었다.
리즈란 바로 오늘 아침 장로 앞에서 그토록 알료샤를 조롱하던 호홀라코바 부인의 어린 딸이다.
아렉세이 표도르비치, 저는 아무도 모르게 이 편지를 쓰고 있어요. 어머니까지도 모르고 계세요. 이것이 얼마나 나쁜 짓이라는 건 저도 잘 알아요. 그렇지만 제 마음속에 생긴 이것을 당신한테 말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못 살 것만 같아요. 이 일은 우리 두 사람 이외에는 당분간 아무도 모르게 해주세요.
그러나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어떻게 당신한테 전해야 좋을까요? 종이는 얼굴을 붉히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예요. 종이도 지금 저처럼 새빨개져 있는걸요.
그리운 알료샤,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제가 아직 어렸을 때 부터, 당신이 지금과는 전혀 다르던 모스크바 시절부터 저는 당신을 사랑해 왔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한평생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저는 당신과 한 몸이 되어, 늙으면 함께 이 세상을 떠나겠다고 마음속으로 당신을 선택한 거예요. 물론 여기에는 반드시 수도원을 나와 주셔야 한다는 조건이 있어요. 우리들의 나이가 문제 된다면 법률로 정한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해요. 그때까지는 저도 완쾌해서 혼자 걸을 수도 있고 춤도 출 수 있겠지요. 반드시 그렇게 될 거예요.
이만하면 제가 얼마나 곰곰이 생각했는지를 아시계죠? 그러나 꼭 한 가지는 아무래도 짐작이 가지 않는군요. 이 편지를 읽고 당신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는 거지요. 저는 늘 웃거나 장난치기를 좋아해서 오늘 아침에도 당신을 화나게 만들었어요,........ 그렇지만 맹세해도 좋아요. 저는 지금 펜을 잡기 전에 성모 마리아 앞에서 기도를 드렸죠. 지금도 역시 기도를 드리고 있어요. 지금 저는 울고 싶은 심정이예요.
저의 비밀은 이제 당신의 손에 쥐었어요. 내일 당신이 오시면 저는 어떻게 당신을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아, 알렉세이 표도르비치, 제가 만약 당신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또 오늘 아침 처럼 참지를 못하고 바보처럼 웃어 버리면 어떡하죠? 당신은 아마 저를 남을 놀릴 줄 밖에 모르는 심술궂은 여자라 생각하고 이 편지도 믿으려 들지 않으시겠지요. 그러니까 만약 저를 가엾게 여기신다면, 내일 저희 집에 들어 오실 때 제발 부탁이니 제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말아 주세요. 당신과 눈이 마주치면 저는 틀림없이 웃음을 터트릴 것만 같으니까요. 게다가 당신은 그 기다란 법의를 입고 계시잖느냐 말예요,......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오싹 소름이 끼쳐요. 그러니까 방에 들어오시거든 얼마동안은 저를 보지 마시고 어머니나 창문 쪽을 보시도록 하세요,........
저는 드디어 이렇게 사랑의 편지를 쓰고 말았군요. 아아, 제가 무슨 짓을 한 걸까요!알료샤, 제발 저를 경멸하지 말아 주세요. 만일 저의 행위가 몹시 나쁜 짓이어서 당신을 괴롭혀 드렸다면 제발 그 점을 용서해 주세요. 어쩌면 저의 명예는 영원히 파멸되어 버렸는지도 모릅니다만, 그 비밀은 지금 당신의 수중에 들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 꼭 울고 말 거예요! 그럼 '두려운' 재회까지 안녕!
리즈
추신 : 알료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와 주셔야 해요!
알료샤는 놀라움 속에서 이 편지를 읽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끝까지 읽어 보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갑자기 조용하고도 감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흠칫 몸을 떨었다. 지금의 미소가 죄악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에 그는 또다시 조용하고도 행복스러운 미소를 띄웠다. 그러고는 천천히 편지를 봉투속에 넣고는 성호를 긋고 자리에 누웠다. 그러자 마음의 동요가 곧 가시고 말았다. '하느님, 오늘 제가 만나고 온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어 평정을 잃은 그 불행한 사람들을 구해 주옵소서.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바른길로 인도해 주옵소서. 모든 길은 주님의 손안에 있나이다. 주님의 길로 그 사람들을 구해 주옵서서. 주님은 사랑이옵니다. 제발 그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내려 주옵소서!'
알료샤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성호를 긋고 포근히 잠이 들었다.
첫댓글 "죄와 벌" 이 생각나요.... 죄를 통하여 구원되는 인간의 모습이 성스럽기도 하고 애처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요,...'죄와 벌' 참으로 음울했던 작품이라 기억됩니다.
다시 읽고 싶네요~~^^
알료샤는 대부분의 사람들에 호감을 갖게 되는 사람인가 보네요
그렇지요,...모나리자님. 그러나 두고 봐야지요^^ 그 인물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궁금합니다.
워낙 인간이란 동물은 신비한 존재이니까요~~^^ 과연 영원히 좋은 인물로 작가가 놔둘지,..
인성은 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존재이니까요.^^
잘 읽었습니다.~
재미 있나요?,..지루하진 않나요?
전 아주 재미 있고 진진해서, 요즈음 이 작품 읽고 쓰는 맛에 산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