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jmXF6OORqDk?si=zzCV1z8e_kS5Lx7_
안녕하세요 화정입니다
소박한 제 시와수필낭독방을 찾아와주시고 경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잠시나마 마음의 산책길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이번 백스물아홉 번째 글은 우정의 길은 숲길 같아서 라는 수필입니다. 친구가 있습니다.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달랐지만 같은 지역에서 살아 자주 만나고는 했었지요. 우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들어보세요
우정의 길은 숲길 같아서
횡단보도를 막 건너려는 찰나에 빨간불이 켜진다. 급하게 달려오던 그녀가 맞은편 쪽에 서 있다. 삼십 년 만에 친구를 마주하는 순간이다. 한번 눈을 맞추어보는데 손을 흔들어보는데 그녀인가? 아니 그녀 어머니인가? 잠시지만 착각 속에 빠져든다. 파란불이 켜지고 시합하듯 서로에게 달려간다. 손을 잡고 깡충깡충 뛴다. 횡단보도 라는 것도 잊은 채 말이다.
네 엄마인 줄 알았어 어쩌면 그리도 어머니와 닮았니? 지금의 우리가 삼십 년 전 어머니다. 삼십 년 전 우리가 지금의 자식이다. 우리가 어머니가 되고 자식들이 예전 우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 것이다. 내가 그녀를 보고 그녀인가 그녀 어머니인가 잠시 헛갈린 것은 당연했다. 딸 넷중 맏이인 그녀가 어머니를 빼다 닮은 것이다.
학교는 달랐지만 중고 시절에 같은 동네에 살았다. 그녀는 그녀 집에 살았고 나는 자취생이었다. 우리는 용돈이 생기면 근처에 튀김집과 떡볶기집으로 달려갔다. 학교 공부와 사춘기와 이러저러한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돌파구였다. 여고 졸업 후 나는 서울에 그녀는 수원에 있었으므로 자주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그녀는 결혼하였고 부산을 거쳐 마산에서 살았다. 부산에 신혼집을 찾아간 적도 있었다. 나는 남편 직장을 따라 부산과 울산과 하남을 거쳐 서울에 살고 있던 중이었다. 그녀가 서울로 이사를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삼십여 년이 쏜살같이 지나간 후였다. 바로 연락을 하였고 만났던 것이다.
그녀는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그녀가 중학생이 될 무렵 가족이 수원으로 이사를 하였다. 일 년여 정도 나는 그녀 집 문간방에서 자취를 하였다. 연탄불 조절이 서툰 탓에 아침밥을 굶는 날이 수두룩했는데, 그날도 일어나보니 연탄불은 희미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하필이면 소풍날이었다. 서글픔을 도시락 대신 가방에 넣고 고개를 떨군 채 대문을 나서는 나를 친구 어머니께서 쫓아 나오셨다. 말없이 김밥 도시락을 슬며시 건네 주셨다. 아침을 굶은 내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났다. 목구멍으로 울음이 차올랐다. 친구는 말했을 것이다. 오늘이 내 소풍날이라고 말이다. 연탄불에 겨우 밥을 해서 김치에 물을 부어 끓인 김치찌개를 먹었던 자취생에게 김밥은 그림에 떡이었다.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친구 어머니의 눈길과 손길이 느껴져 가슴께가 따스해진다.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참으로 남다른 분들이셨다. 서로에게 존댓말을 하셨다.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존댓말이야 당연한 일이었지만, 내 아버지나 옆집 아저씨가 아내에게 존댓말을 하는 일은 한 번도 보지 못하였다. 가부장제였던 그 시대에 남편이 아내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는 모습은 얼마나 신선한 충격이었던가. 서로를 존중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부부는 저러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내 나름대로의 부부상을 정립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일요일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두 분이 교회로 가시는 모습 또한 내게 귀감이 되었다. 자식들은 은연중에 부모를 따라 한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자취방이 나란히 있었다. 그때만 해도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이어서 수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학생들은 자취를 하였다. 연탄 아궁이 부엌은 마당 쪽으로 향해 있었다. 밥을 하는지 안 하는지는 조금만 눈여겨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주인이 자취생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쉽지 않다. 자식이 여섯이셨다. 그럼에도 친구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취생들을 살피시고 관심을 기울이셨다. 부모님 대신이셨다. 졸업 후 그분들을 찾아뵈어야지 생각은 있었지만 어영부영 세월은 지나가 버렸다. 지방에서 내가 한창 아이를 기르던 때에 친구 어머님은 암으로 돌아가셨다. 친구 아버지께서 아프실 때와 돌아가셨을 때 천만다행으로 나는 서울에 살고 있었고 찾아뵐 수 있었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이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며느릿감을 고를 때 부모님을 보라는 말이 생긴 것도 다 그 때문이 아니겠는가. 선한 눈매와 평온한 말씨는 옆에만 있어도 마음과 몸이 느슨해지면서 편안해졌다. 오랜만에 그녀가 전화를 했다. 쉬지 않고 부지런히 자격증을 따서 일을 하는 그녀였다. 직장이 쉬는 날이니 밥 한번 먹자는 거였다. 그즈음 나는 외로움으로 빙 둘러싸인 어둠 속으로 자꾸 숨어들고 싶어했다. 봄 햇살이 찬란해지는 만큼 마음은 컴컴해졌다. 자식들은 공부하느라 바빴고 남편은 지방에 근무 중이었다. 갱년기였을 것이다. 누군가 만나자고 말하면 이런저런 핑계부터 생각해 냈다. 그날은 아니었다.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석촌 호수 둘레를 걸었다. 여고 시절처럼 일 분이 아깝다는 듯 수다를 떨고 깔깔거리면서 말이다. 벚꽃들이 떨어진 지 오래이지만 그 대신 푸른 나무들이 울창하여 넓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롯데월드 쪽에서는 놀이기구를 타는 젊은이들의 괴성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석촌 호수 둘레길에는 잠시 짬을 낸 직장인 무리가 경쾌하게 걷고 있었다. 우리도 그 속도에 동참하였다. 친구가 안내한 보리굴비와 돌솥밥집은 정갈했다. 진수성찬이었다. 오늘 이라는 소중한 시간은 친구가 옆에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그래그래 끄떡여주는 친구가 있어서였다.
친구 딸이 결혼할 무렵까지 우리는 그렇게 심심치 않게 만나 수다를 떨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하느님 앞에 무릎 꿇고 살아가는 그녀는 늘 감사하는 자세였으며 평화로웠다. 그러한 날들이 지속되리라 여겼지만, 시간은 흘러갔고 우리는 늙어갔다. 그녀 남편이 암 진단을 받았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였다. 그 와중에도 내 딸아이 결혼식에 참석해서 나를 울컥하게 했다. 그녀 남편이 아프신지 일 년도 채 못 되어 그녀를 장례식장에서 만났다. 남편이 옆에 없다는 사실에도 적응하기 어려웠겠지만, 남편이 벌여놓은 사업이 하도 복잡해서 정리하는 일이 어렵다고 그녀는 하소연하였다. 바쁜 딸을 대신해서 손녀딸을 전적으로 돌보는 일까지 해내는 중이었다.
그녀의 남편이 돌아가시고 두 달쯤 지나서 얼굴도 보고 위로도 할 겸 그녀를 만나고 싶었으나 카톡을 보내도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사십 년 어깨를 맞대고 살아온 남편의 부재가 만들어낸 허전함 때문일 것이다. 기다리기로 했다. 일 년에 한 두 번 카툭으로 친구에게 안부 인사를 보냈다. 친구야 잘 지내지? 아프지 않은거지 그러면 감사하지. 단답형의 인사가 날아왔다. 그래 너도 잘 있지? 그것으로 끝이었다. 한번은 아예 그 단순한 대답도 없었다. 그녀가 아플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 나는 그녀를 알고 있는 친구들을 수소문해 소식을 듣기도 했다. 은연중에 그녀에게 상처를 준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되짚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4년이 무심하게 지나갔다.
다시 봄이 왔다. 유채색으로 변해 가는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창가를 서성이는 날이 많아졌다. 밖으로 달려 나가는 날도 많아졌다. 벚꽃이 개천가를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났고 봄 햇살은 분홍빛이었고 삼삼오오 사람들의 물결이 줄을 이었다. 친구가 생각났다. 아픈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카톡을 보냈다. 봄은 오고 꽃은 피고 계절은 여전한데 친구야 너도 여전하지? 건강하게 지내고 있지? 놀랍게도 답장이 바로 왔다. 그래 반갑다 맘은 늘 네 곁에 있는데 지난 2월 말에 전주에 와서 손녀 봐주고 있어.
반가워서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오호 전주? 딸 직장 따라 나섰구나. 친구의 딸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도 손녀딸 7개월이라서 딸네집 들락거리는 중이야 건강하면 감사한 일이지 우리 나이에. 그치? 손녀딸이 벌써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단다. 예쁘게 꾸미는 일에 빠져 산단다.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요렇게 조렇게 만지는 것을 좋아한단다. 귀찮아죽겠어 라고 말하는 그녀의 입가에 맴도는 웃음이 느껴졌다. 손녀의 사진을 주고 받았다. 그녀를 닮은 듯 딸을 닮은 듯 귀티 나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마음의 빗장을 벗겨내고 살며시 얼굴을 내밀어 미소 짓고 있음을 보았다. 우정의 길이 사라질까 전전긍긍했던 4년 동안의 시간은 지나간 것이다. 손녀와 손자 이야기로 시작을 하고 끝맺음을 하였지만 그녀가 보낸 카톡에서 우정의 싹을 보았다. 그녀가 인생의 굴곡을 잘 지나왔음을 감사했다. 우정의 길은 다시 가꾸어 가면 될 일이니 말이다.
어제 저녁 그녀가 내 카톡방을 또 다녀갔다. 종자골 텃밭에서 찍은 손자와 손녀 사진을 카톡방에 올렸는데 그녀는 좋아요 버튼을 꾹 눌러 주었던 것이다. 어릴 적 처음 마주친 신작로처럼 우정의 길이 훤히 뚫리는 느낌이었다. 우정의 길은 숲길 같아서 오고 가지 않으면 풀들이 자라나 길이 없어진다’ 고 했다. 내 카톡방에 그녀가 눌러 놓은 좋아요 는 그녀의 마음이 내게 온 것이요 또한 내 기쁜 마음이 그녀에게 도달한 것이니, 조붓이 열리는 숲길, 우정의 길이 보이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