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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조춘숙
말 씀 사무엘하 23장 1-7절
제 목 영원하신 하나님언약[24]
다윗은 찬양의 시로 하나님을 높여드렸습니다.
인간이 어떤 말로 하나님의 위대함과 공의로우심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다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찬양할 뿐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통해 깨달은 것을 후손들에게 해 주는 마지막 말이라는 말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여 드리는 것조차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한다고 고백을 해도 그것조차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고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을 믿는 자, 하나님의 영원하신 언약을 믿는 자,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 자만이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유언을 하듯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고백하며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에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인생의 끝에서야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유언을 할 때 인간은 더 솔직해지고 진실해집니다.
더구나 사랑하는 자녀에게 유언을 할 때에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자녀를 더 이상 도울 수 없다면 안타까움과 아쉬움과 염려가 더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들이 홀로 설 수 있도록 강하게 키워야 합니다.자녀들은 부모의 말씀을 마음에 잘 담아 두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에 십자가위에서 제자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제자는 예수님 말씀대로 어머니를 자기집에 모셨다고 요한복음 19장 26-27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오신 성자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믿음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세상에 오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귀한 육의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시던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을지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죽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낳고 기르신 마리아의 헌신은 하늘의 축복을 받고 누릴 충분한 이유가 있는 여인입니다.
사랑하는 육의 어머니를 두고 가야하는 예수님의 마음은 많이 고통스럽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요한에게 부탁하는 그 마음이 바로 다윗이 느낀 마음일 것입니다.
자신은 이제 늙어서 힘이 없지만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백성들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은 동일한 것입니다.
부모가 만난 하나님을 자녀들이 믿어 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부모의 마음은 예수님과 다윗의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윗의 이런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 23장을 본다면 하나님의 언약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것이며, 언약밖에 있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영원하다는 것을 믿고 읽어야만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인지 그리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악한 자들이 받는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23장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2절에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다고 말한 것은 하나님의 신 즉 성령께서 다윗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가를 직접 계시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통해 직접 계시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던 다윗이 메시야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를 통해 볼 수 있는 메시야의 나라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으며,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습니다.
메시야가 통치하시는 나라는 흑암의 고통과 죄악이 물러간 돋는 해의 깨끗한 아침 빛과 같이 빛나고 영원한 기쁨과 근심과 염려가 걷힌 구름 없는 아침과 같이 아름답습니다.
어둠 한 점 없는 광명의 나라가 바로 메시야가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비가 내린 후에 햇빛이 나면 나무들이 더 잘 자라는 것처럼 새 생명을 가진 씨들이 땅을 뚫고 움트며 나올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받는 놀라운 축복을 그린 것입니다.
하지만 6절에 사악한 자는 다 내어 버리울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메시야가 통치하는 아름다운 나라를 소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않는 자는 가시나무처럼 어떤 곳에도 쓸 수 없는 아무 쓸모없는 것입니다.
사단과 결탁하여 하나님께 반역하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세상의 욕심과 정욕과 불만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그 세상의 가시를 철 연장으로 잘라 불에 던질 것입니다.
에스겔 28장 24절 이스라엘족속에게는 그 사면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 중에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 그들이 나를 주 여호와인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끊임없이 괴롭힌 이방나라들을 가시라고 하시며 그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축복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메시야의 나라가 도래하면 가시처럼 성도를 괴롭히던 사악한 자들은 모두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사악한 자들이 받는 불의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성도들은 본 것처럼 만진 것처럼 심각하게 인지해야 합니다.
그 심판 역시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화려하게 잘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메시야의 나라를 곧잘 잊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원하신 언약을 잊지 않는 성도라면 구원의 축복과 심판의 공포를 반드시 알고 구별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영원하다는 것을 안다면 다윗의 용사들이 하나같이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승리했다는 것이 보일 것입니다.
다윗은 용사들의 공로를 하나씩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센사람 아디노라고 하는 군지휘관은 단번에 팔백명을 쳐 죽였고 아호아사람 엘르아살은 블레셋의 진용에 놀라 이스라엘사람이 모두 높은 고지로 도망치고 있는 그 때 혼자서 블레셋과 싸워 승리하였습니다.
또 하랄사람 삼마는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농사를 망치기 위해서 사기가 충전해서 왔을 때 모든 사람이 두려워서 도망했지만 삼마는 밭 가운데 서서 블레셋 사람을 막아내었으므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다윗에게는 많은 장수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전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다 혼자서 팔백명과 대적했고, 사기가 충전한 블레셋사람들을 혼자서 막아내었다고 기록하므로써 그 구원이 모두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셨다고 다윗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전쟁이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음을 성도들은 알고 삶의 전쟁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15-17절 하나님의 언약이 영원하다는 것을 중심에 둔다면 다윗이 누가 성문 곁 우물물을 나로 하여금 마시게 하겠느냐고 한 말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 악한 말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블레셋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베들레헴을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근처 산성에 있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심신이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고향의 물이 마시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고향으로 돌아가 편히 지내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늘 시원한 우물물을 마실 때는 쉽게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랐습니다.
마음대로 물을 마실 수 없는 환경에 처하자 다윗은 더욱 그 물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왕의 말을 들은 세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돌파하고 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왔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다윗에게 생명을 바친 충성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부하들이 피를 흘리며 길어온 물을 마실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 부어드리며 회개하였습니다.
17절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세 용사의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왕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해결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성문 곁에 있는 우물이라면 블레셋 군사들의 방비가 철저한 장소였을 것이므로 세 용사는 죽을 각오를 하고 출발했습니다.
블레셋사람들을 죽이며 길을 내어 우물로 향하는 그들의 마음은 왕을 위하는 충성이었습니다.
이 마음이 바로 다윗이 악한 일을 행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어떤 영혼이라 할지라도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다윗 개인의 욕망을 위해서 그들의 피를 흘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언약을 믿는 다윗이라면 당연히 세 용사가 적진을 향해 출발할 때 막아야 했고, 자신의 욕심을 거두어야 했습니다.
만약 세 용사가 돌아오지 못했다면 다윗은 하나님께 살인죄를 저지르는 악행을 저지른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목회자들도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성도들을 이용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세상을 받아들여서 성도의 수를 힘으로 삼고, 건물의 크기로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성도들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 용사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흘리는 피는 하나님께서 왕으로 계신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도리어 축복이 될 것입니다.
이것처럼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 전도하고, 모인 성도의 수가 많아 건물을 이전해야 하는 것은 축복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개인의 욕심으로 피를 흘리게 한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즉시 하나님께 온전히 드렸습니다.
부하들이 적진을 뚫고 물을 길어 왔다는 것은 결국 그들의 피와 다름 없기 때문에 한방울도 마시지 않고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다윗은 처음에는 잘 몰라서 죄를 지었을지언정 바로 깨닫고 행동으로 옮기는 이런 모습은 참 배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순간 바로 돌이키는 이런 모습은 참 아름다운 것입니다.
여러분 목회자와 직분자들이 잘못 된 생각과 판단을 하면 성도들은 피를 흘릴 수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언약이 영원하다는 것을 믿고 큰 그릇을 준비하지 못한다면 나로 인해 그 누군가 피를 흘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무심코 던진 말을 듣고 세 용사가 자신의 목숨을 거는 것처럼 목회자와 앞서서 일하는 직분자들이 무심코 던진 말에 연약한 성도들이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죄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가장이 잘못 된 판단과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가족들이 피를 흘릴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내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내 감정대로 내 욕심대로 자녀를 이끌어가고 가정을 이끌면 하나님께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심에 나 자신을 세웠을 때는 다윗과 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면 절대로 나를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이용하는 악한 행동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축복을 받으셨습니까?
그 축복이 여러분의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열매가 여러분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거든 다윗이 마지막 남긴 말씀을 잘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세워보신다면 왜 축복을 나에게 주셨는지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영원하기에 오늘 주어진 모든 시간을 잘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언약안에서 믿음을 지키는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010,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