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봉의 ‘육우당’ 유묵
* 석야, 신 웅 순(시조시인 ․ 평론가 ․ 서예가, 중부대교수)
전남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323 소재 한석봉이 쓴 박흡 장군의 ‘육우당’ 정자 현판 글씨
이 정자는 조선중기 함양 박씨 박흡(朴洽 ?~1593) 장군이 지은 정자다. 그들의 6형제가 자란 곳으로 초창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선조대로 전해지고 있다. 박흡 장군의 자는 여윤, 호는 육우당이다. 그는 이 고장 구림에서 출생하여 임진왜란 때 김천일 장군과 같이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 싸움 등 여러 곳에서 큰 공을 세운 충절의 장군이다. 현재의 이 정자는 화재로 인해 280여년 전에 새로 중건한 건물이다. 육우당 현판은 어린 시절 영암지역에서 공부했던 석봉 한호의 글씨이다. 안평 대군ㆍ김구ㆍ양사언과 함께 조선 초 4대 서가로 꼽힌다. 한호(1543, 중종 38 ~ 1605, 선조38)의 호는 석봉이다. 석봉산 아래에서 살았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처음 태어났을 때 일관이 점을 치면서 말했다. “옥토(玉免)가 동방에 태어나면 낙양(洛陽)에 종이 값이 오르는 법인데, 이 아이는 반드시 글씨로 이름날 것이다.” 왕세정은 석봉의 글씨를 "성난 사자가 돌을 헤치는 듯, 목마른 천리마가 물 위를 내달리는 듯 힘차다" 라고 했다. 명나라 한림ㆍ주지번은 "석봉의 글씨는 능히 왕희지ㆍ안진경과 어깨를 겨룰만 하다"고 하였다. 임진왜란의 명장 이여송과 마귀 등도 그의 글씨를 주문해갈 정도였다고 한다. 선조는 한호의 큰 글씨를 보고 “기이하고 장대하기가 측량할 수 없다”고 감탄했다. 한미한 집안이었음에도 그가 출세의 길을 걸은 것은 선조의 호평 때문이었다. 석봉 뒤에는 스승 같은 어머니가 있어 조선 최고의 명필로 성장할 수 있었다. “너와 내가 내기를 하지꾸나.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씨를 써라.” 어머니는 등잔불을 껐다. 불을 켜고 보니 석봉의 글씨는 삐뚤어졌고 어머니의 떡은 똑 같았다. 석봉은 그 자리에서일어나 다시 발길을 돌렸다. 이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곳이 전남 영암 지역이다. 덕진면 영보리 일대는 한석봉이 스승 신희남을 따라와 공부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며 학산면 독천시장은 어머니가 떡장사를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짚방석 내지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불 켜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온다 아이야 박주산채 일 망정 없다말고 내어라
짚방석이라도 내놓으려하는데 낙엽 위에 앉겠다는 것이다. 관솔불 밝히려는데 달이 돋아오니 켜지 말라는 것이다. 얘야 잡곡으로 빚은 막걸리, 산에서 캐온 산나물이지만 없다 말고 내놓으라는 것이다. 짚방석 대신 낙엽, 솔불 대신 달빛이면 되지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겠느냐. 소박하고 운치가 있어 자연 그대로가 격식에 어울린다는 것이다. 국역 국조인물고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그의 인물됨이 어떠한지 알 수 있는 자료이다.
한 석봉은 사람됨이 중후하고 과묵하며, 술을 잘 마시어 술을 만나면 흠뻑 취하여 유유자적하 며 지칠 줄 모르고 읊조리었다. 높은 이름을 얻고 나서는 공경(公卿)들 사이에서도 예찬을 받았 다. 속이 너그럽고 시샘하는 것이 적어서 비록 입으로는 남의 좋고 나쁨을 말하지 않으나, 속으로 는 소신이 확고하여 뜻에 맞지 않으면 부드러운 말로 구차스럽게 비위를 맞춘 적이 없었다. 시를 지음에는 유독 이백의 시풍을 좋아하여 이따금씩 정취가 퍽 있었다.
한석봉은 왕희지, 안진경의 필법을 익혀 해ㆍ행ㆍ진ㆍ초 등 각 서체에 모두 뛰어났다. 종래의 중국 서체에서 벗어나 피나는 수련 끝에 독창적이고 호쾌한 석봉체를 확립했다. 그가 완성한 ‘석봉천자문’은 조선 천자문의 표준이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붓글씨의 표본이 되고 있다. 친필은 별로 남은 것이 없으나『허엽신도비』,『서경덕신도비』,『기자묘비』,『행주승전비』,『선죽교비』 등과 같은 비문들이 남아 있다.
문학신문 신웅순 시조시인의 유묵이야기. 2013.1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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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자료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