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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호 목사
말과 행동이 함께하는 신앙생활 (디도서 1장 15-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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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각하는 선입견으로는,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폐쇄적이고, 이기적이고, 배타주의 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웃의 섬나라 일본을 폄하해서 말할 때, “속 좁고 쩨쩨한 민족”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섬나라 사람들은 다 속이 좁고 음흉한 면을 지니고 있을까요? 그런 면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들 나름대로 자주권을 지키려는 의지는 매우 강합니다. 섬나라인 일본이나 영국은 특히 남의 나라의 간섭이나 침략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남이 뭐라고 비웃듯 말든 자기들끼리 뭉치는 데는 도가 텄다고 할 정도로 꺾기 힘든 고집쟁이 들이 섬나라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는 그레데(현재지명 크레타, Creta)섬사람들도 고집이세고 말 안 듣기로 소문난 곳이었습니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 시 바나바와 함께 이곳에 들러 복음을 전했는데, 그레데 섬의 사역자인 디도가 살펴본 그레데 섬사람들의 모습은,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여 평안한 가정들을 온통 무너트리는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 특히 할례파 유대인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레데인들 중에 어떤 선지자도 말하기를,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1:12)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단단히 명령하기를, 그레데인들을 엄히 꾸짖고, 믿음을 온전하게 세워 가는데 힘쓰라고 당부합니다. 기질적으로 고집 센 사람들 틈에서 복음을 전하고, 믿음을 세워가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아마도 디도는 강단이 있는 사역자였을 겁니다. 때로는 불같은 성격으로 거칠게도 대하는 것이 효과적일 때도 있습니다. 순둥이 같고 마음이 유약한 사람들은 섬에서 사역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겁니다.
우리나라에도 ‘섬(島)’에서 전도하다 순교한 분이 한 분계십니다. 이 분은 디도와 같이 강한 성격을 지니지도 않았을 뿐더러, 여자분 이었습니다. 이름은 ‘문준경 전도사님(文俊卿, 1891~1950)’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순교자입니다. 문 전도사님은 전남 신안군 증도에서 태어나, 증도를 포함한 123개 섬에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거리를 다니셨는지, 1년에 9켤레의 고무신이 닳아 없어질 정도여서 문전도사님의 목회를, ‘고무신 목회’라고 부릅니다, 열심히 목회 하시던 중 6.25 전쟁 이 났고 섬에 진입한 공산군들은, 문 전도사님이 전도를 많이 했다는 이유로, ‘새끼를 많이 친 씨암탉’이라고 조롱했습니다. 결국 문전도사님은 공산군에 의해 죽창과 총살로 순교를 당하셨습니다. 증도에는 문 전도사님의 복음에 힘입어 현재 섬 인구의 90%가 예수님을 믿고 있고, 11개의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신안 증도에 가시면,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을 들러 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그레데섬 사람들의 행동을 비추어서 우리의 현재 삶의 태도를 돌아보게 합니다. 15절에서 보면, 마음과 양심이 더러워진 사람들은 자기들만 깨끗하다는 아집과 편견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일절 무시합니다. 나만 옳다는 독불장군식의 고집 때문에, 잘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막상 듣긴 들어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또, 16절에서, 말로는 무엇이든지 시인하면서, 행위로는 아무것도 복종하지 않는 이중적인 태도가 문제입니다. 한다고 해놓고 아예 안하고 있거나, 해 놓기는 하는데 성의 없이 대충 해놓으면, 차라리 안 하는 것만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도무지 실행에 옮기려 하지 않는 불순종이야말로 신앙을 자라나지 못하게 하는 주범중의 주범입니다.
사회생활 하면서도,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의 행동은 심한 배신감을 가져다주고, 분노를 유발합니다. 더욱이 철썩 같이 믿었던 사람이, 갑자기 돌변해서 엉뚱한 결론으로 몰아갈 때는 오만 정이 다 떨어집니다. 사람의 속은 아무도 모릅니다. 사람을 조롱할 때, “입만 살았다. 말은 잘한다”는 말이 가장 모욕적이고, 치욕적인 말입니다. 번지르르하게 말은 잘 하는데, 되어가는 것은 하나도 없고, 막상 하자고 하면 발을 빼는 치사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디도가 해야 할 일이 바로, 말만 하고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말씀대로 움직이게 하는 임무입니다. 복음 전도 과정에서 이 일이 제일 어렵고 고 난이도의 사역일 겁니다.
바울은, ‘말과 행동이 함께하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자들을 향해, “(말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들” 이라고 규정 하면서, 그들이 가증스럽고, 복종하지 않고,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들 이라고 혹독하게 비판을 가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까지 망가진 것은 ‘마음과 양심이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경우를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도 나쁜 짓을 많이 하다 보니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철면피 같이 살아가는 행동을 하면서도 하나도 부끄러움이 없이 살아갑니다. 이렇게 고질적으로 ‘말로만 하나님을 시인하고 행위로 부인하는 자들’에게는 강온 양공작전으로 마음을 돌이키게 해야 합니다.
부드럽게 하는 방법은 ‘바른 교훈’을 하는 것이고, 강하게 하는 방법은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이 두 방법을 유효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행위로 부인하는 자들의 양심을 흔들어서 돌이키게 해야 합니다. 교훈과 책망은 무턱대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깊은 기도가 뒷받침 된 후에 교훈에 이르러야 하고, 성령이 주시는 채찍으로 책망해야 합니다. 교훈과 책망, 방법이 이렇다고 말은 하지만,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쉽게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12제자를 가르치는데 3년을 투자 했지만 한 명은 예수님을 배신하기 까지 했고, 나머지 11명도 예수님이 누구신가 조차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디도도 그레데 섬에서 사람들을 믿음으로 돌이키게 하는데 엄청난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부어야 했을 겁니다.
디도가 ‘바른 교훈’과 ‘책망’으로 사람들을 돌이키게 하는 과정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우선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는 일입니다. 주님이 하신 것처럼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방법입니다. 자기는 안하면서 다른 사람을 교훈해 봐야, “당신이나 잘하시오” 핀잔을 들을 것이고, 자신도 제대로 안하면서 “똑바로 하시오”라고 책망하게 되면 아마 십중팔구는 싸움이 일어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역자는 누구보다도 많이 기도하고, 누구보다도 많이 말씀을 가까이 하고, 누구보다도 자신의 행실을 지켜가고, 누구보다도 믿음의 본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디도에게 이런 점을 가장 많이 주문했을 것이고, 디도 자신도 이 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점검 하며 사역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생각해 볼 문제는, ‘말로(만) 하나님을 시인하고 행위로 부인하는 자들’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곧 ‘나’라는 인식하에 접근해야 합니다. 나는 왜, 말로만 주여!, 주여! 를 외치고, 정작 작은 일조차 실천하기를 주저하고 있는가? 나는 왜,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의 삶의 궤적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가? 나는 왜, 행위대로 심판한다는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나는 왜, 신앙의 열매를 맺어가는 것을 소홀히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말씀대로 다 이행하며 살 수만 있다면 말할 수 없이 기쁘고 행복하겠지만, 신앙생활이 로봇처럼 움직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또 자동 생산되는 규격 상품처럼 똑같은 공정 속에서 뚝딱뚝딱 생산되어 나오는 포장상품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사람은 개성이 있는 인격체입니다. 강요나 명령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행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순전히 감동에 의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일례로, 초보 신자가 교회 등록해서 교제 모임 참석 하는데 1년이 걸리고, 찬양대 등 봉사자로 참여 하는데 3년이 걸리고, 제자훈련 받고 자발적인 전도 생활하는데 5년이 걸리고, 온전한 십일조 하는데 7년이 걸리고, 성경일독이상 하는데 1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선배 목사님 한분은 제자 양육에 대해 집중하신 분입니다. 그 목사님이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로서,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이냐면, 쓸 만한 물건을 손에 쥐어주려고 애쓰는 것도 아니요, 맛있는 음식(말씀)가지 형태로 제공하려는 것도 아니요, 성도들 스스로가, 먹고 마실 말씀을 찾아서 자급자족 할 수 있는 생존능력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다 갖다 주고, 다 먹여 주면, 그 성도들은 유아기적 성장에 멈추어져 버립니다. 만약 부모 역활을 해온 목사가 떠나면, 성도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우왕좌왕 하다가 방향을 잃고, 온 종일 굶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스스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젓가락, 숟가락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 직무유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전적으로 동의 할 수 있는 말씀이고 목회자가 제대로 인식해야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은 제자 훈련을 오랫동안 해 오신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말씀도 해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인답게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제자로서의 삶을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제가 제자훈련을 해 보니, 제자 훈련 한 10년 쯤 받은 사람이, 비로소 스스로 양분을 흡수할 수 있는 잔뿌리가 생겨났습니다. 10년은 기본이니, 인내심을 가지고 성도들을 꾸준히 가르치십시오.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성도들과 함께 말씀대로 살려고 삶의 현장에서 뒹굴다 보면, 어느새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진정한 제자들이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내공이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단 한 번의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과거와 완벽하게 단절하고, 새로운 사명의 길을 간다는 것은 극히 드문 경우입니다. 신앙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 일생을 통해 아주 서서히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만큼 우리가 저지르는 수많은 죄가 발목을 잡고 있고, 세상에서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고, 내 자아와 자존심이 세고 강하다는 반증이 됩니다. 가끔씩 받는 반짝하는 은혜, 문득문득 스쳐 지나가는 감사, 희미하게 기억되는 오래 전에 느꼈던 사랑의 감정만을 가지고는 ‘말과 행동이 함께 하는 신앙생활’을 지속적으로 해 나갈 수 없습니다. 너무나도 동력이 약합니다.
질문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나는 왜? 말로만 하고 행동은 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가? 에 대해서 답을 찾아봅니다. 기도가 부족해서일까요? 믿음이 약화 되어서 일까요? 제자훈련을 안 받거나 부족하게 받아서 일까요? 이런 이유들도 다 복합적인 요인이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가 그데데섬 사람들처럼 말로만 시인하고 행위로는 부인하는 행동을 하는 직접적인 원인은 기본이 안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기본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많이 듣고 있고, 나름대로 알고 있고, 암송하는 구절까지 있습니다. 그럼에도 말씀이 구체와 되어 삶의 방향을 잡아주고,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그 원인이 듣고, 보고, 암송한 말씀들이 내가 자라나는 신앙의 토양에 흡수되지 않고, 버려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 감동적인 은혜의 말씀을 들었다고 해도, 뒤돌아서서 잊어버리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주일 예배에 나와서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가슴을 울린 말씀이 있다 하여도, 교회 문 밖을 나가선 순간 그 말씀의 본문은커녕, 설교의 제목조차도 기억나지 않는다면, 그렇게도 감동을 주었던 말씀이라도 내 삶에 어떠한 영향력도 미치지 못합니다. 더 나아가서, 내가 한 주간을 살면서 갈급함 때문이나, 궁금증 때문이나, 혹은 주기적인 목표에 따라서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는 습관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한국교회 대부분의 성도가 일주일 동안 단 한절의 성경 말씀도 가까이 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일 년이 지나도 자신의 의지로 인해 성경을 한 장 이상 읽지 않는 성도가 95% 이상에 이른다는 심각한 조사도 있습니다. 일 년이 십 년이 되고, 십 년이 사십 년이 되면 그냥 말씀 없이 허무하게인생을 마치는 것입니다. 말씀이 나와 전~혀 함께 하지 않는데, 행동으로 옮길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 합니다. 만약에, 말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행동하는데 열심을 내게 되면 오히려 불행한 결과만 낳게 될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전혀 가까이 하지 않고, 말씀을 전혀 적용하지 않고 살아가면서도 너무나도 편안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눈감고 운전하는 사람, 음식을 입에 넣고 씹지 않는 사람, 엘리베이터 타고 층수 안 누르는 사람, 종이 컵 거꾸로 들고 정수기 물 따르는 사람, 맹수가 다가오는데 헤드폰 끼고 음악 듣는 사람”들입니다. 말씀 없이는, 죽거나, 다치거나, 성과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신앙생활이 말로만 그치는 경우는 100% 말씀의 기본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나와 전혀 동행하지 않는데도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게으름과 나태함에 익숙해져 있다는 진단이 나옵니다. 우리의 일상 신앙생활 중에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십시오. 기도, 예배, 전도, 전도, 봉사 등 모든 신앙생활을 온전한 마음과 정신으로 지속해 나가도록 기초와 뼈대를 잡아주는 것이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을 무기로 하는 기도가 온전히 하나님을 뜻을 구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근거가 되는 예배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말씀이 능력이 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전도가 뭇 영혼을 이끌어 냅니다. 말씀 주심에 감사하여 반응하는 봉사가 모든 사람에게 덕이 됩니다. 말씀 없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교회나, 가정이나, 개인생활에서 말씀이 없이 독단적으로 결정되고 이루어지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말씀이 하나도 뒷받침 되지 않는 나 혼자만의 열심으로 쌓아가는 신앙생활은 사상누각(砂上樓閣)일 뿐입니다. 주님도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 7:26,27) 그레데 섬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대로,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로만 시인하고 행위로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평가 받은 것입니다.
그레데 섬의 사람들은 특별이 기질이 강하고 고집이 세서 거짓말하고, 악한 짐승처럼 행동하고,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가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 가지입니다. 말씀 없이 그저 무덤덤하게 신앙생활 하는 우리의 모습을 깨우쳐 주시려고 오늘 말씀을 은혜로 주신 줄로 믿고, 마음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로 낙인찍히는 불행한 일이 없어야 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말씀은 우리를 일깨워 주고 다시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만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바른 교훈’과 ‘책망’의 말씀으로 심어 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후로는, 말씀이신 예수님, 말씀의 능력을 확인시켜 준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말(입)로도 우리 주님을 100% 시인하고, 또한 행위(행동)으로도 100% 주님 뜻에 맞게 순종하여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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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말로만 주님을 시인하고, 행동으로는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불순종의 시간들을 회개 합니다. 우리를 선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셔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부끄럽지 않은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이 기준이 되고, 말씀과 동행하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말과 행동을 지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