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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기하며 놀던 고향
내 고향은 춘천이고 춘천하면 봉의산과 소양강을 떠올리게 된다.
원창고개에서 바라보이는 춘천은 아늑하게 자리 잡은 분지로서 그 가운데에는 춘천의 진산이라고 하는 봉의산이 자리하고 있으며 봉의산 북쪽을 휘돌아 나온 소양강의 물줄기는 신연강을 거쳐서 청평댐으로 뻗어 나갔지만 지금은 의암댐으로 인해 춘천은 호반의 도시로 탈바꿈이 되었다.
지금도 옛날을 회상해 보면 거울같이 맑게 흐르던 소양강에는 십리에 이르러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는가 하면 늦은 봄이면 물종자리들이 돌 틈에다 집을 짓고 새끼를 쳤는데 얼마나 그 발놀림이 빠른지 감탄을 할 정도였다. 그 뿐인가 목이 긴 황새들이 강 여가리에서 고기를 한가하게 잡는가 하면 주둥이가 긴 물총새들은 하늘높이 떠서 날갯짓을 하다가 총알처럼 내리 꼬치며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낚아채는 것을 볼 수가 있었으니 그렇게 아름다운 정경을 어디엘 가야 볼 수가 있을까?
그 백사장이 햇볕을 받게 되면 갖가지 모래밭의 운석이 하늘의 별처럼 반짝였으며 크고 작은 돌멩이들은 옥구슬처럼 광채를 발하였다.
강줄기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여울목에 도달하는데 거기에는 여름 내내 게바리 낚시꾼이 고기를 잡았고 또 한쪽에서는 어항을 놓고 천렵을 하며 세월을 낚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그것은 한때의 과거일 뿐이고 바다처럼 넓은 호수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자연적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인력에 의해서 모든 것은 자취를 감춘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토록 아름다웠던 환경이 변화한다는 것은 많은 아쉬움을 갖게 하며 그로 인한 미련은 오래도록 우리의 뇌리 속에 남아 있다.
소양강 물줄기며 그 넓던 백사장이 물속으로 들어간 것도 따지고 보면 그 당시로서는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전력공급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그 세월이 벌써 70여년이 넘었으니 인간은 변화 속에서 적응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가난하고 못살던 우리나라가 전기를 얻는 바람에 사회기반 시설의 투자를 할 수가 있게 되었고 공장이 돌아가는 바람에 국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으니 그것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잃은 것을 말하라면 참으로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을 것이다.
물속으로 들어간 지역에서는 조상들의 묘를 파서 옮겨야 했으며 대대로 물려받은 농토며 유형무형의 문화재를 비롯해서 각 개인마다 정들어 살던 집이며 소장하던 귀중한 자료들이 모두 수장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서 뿔뿔이 헤어지고 말았으니 어디 가서 이분들이 다시 만난다는 기약도 없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정들었던 일가친척이며 콩 한쪽도 나누어 먹던 이웃들과 헤어지자니 눈물은 얼마나 많이 흘렸을 것이며 집시처럼 정처 없는 곳으로 떠나자니 그 발길이 얼마나 무거웠을 것이랴!.
우리 조상들은 그러지 않아도 일제의 36년 동안의 압정에 못 이겨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해외로 가족과 헤어져서 망명을 간 동포들도 많지만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수탈정책으로 인하여 우리가 지은 농산물은 공출이란 명목으로 모조리 일본인에게 빼앗겼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젊은 청년들은 징용으로 끌려가서 탄광과 전선의 노무자로 투입이 되었는가 하면 초등학교에 다니는 5.6학년 여학생들을 군수품 제작을 위해 정신대를 모집한다 속이고는 일본 군인들의 성노리개로 삼았으니 그들이 저질은 범죄에 대한 죗값을 톡톡히 받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내가 살던 곳은 춘천농고가 있는 이른바 가라메기라고 하는 마을로 옛날의 길을 말한다면 소양강 다리에서 화천으로 가는 길에 제사공장을 지나 6.25직전까지 7연대가 주둔했던 지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의 마을이었다.
“가라메기”란 마을 이름이 생긴 연유에 대해서 어르신들은 아주 오랜 옛날에 마을 한가운데에 커다란 가래나무가 있어서 그것이 마을 이름으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이 “가라메기” 마을과 길을 가운데로 춘천농고 안에 위치한 마을을 “마장리”라고 불렀는데 전설에 의하면 김 씨네 조상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살고 있을 때의 일로 어느 늦가을 새벽에 큰며느리가 아들을 순산하게 되었는데 젖을 빨던 아기가 사흘 만에 안방 시렁에 올라가서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부부는 놀라서 얼른 아들을 내려서 안고 보니 겨드랑에서 날개가 돋아나고 있어 아무래도 이것이 길조가 아니라는 생각에서 아들의 겨드랑에 나 있는 날개를 불로 짖자 아이는 바로 숨이 졌는데 그 시각에 난데없이 천둥번개가 치면서 소나기가 쏟아지더니 “ 으흐흥 ”하는 말소리가 대문 밖에서 들려 부부가 나가서 보니 큰 호말이 눈을 부라리다가 죽는 찬 라였던 것이다.
이 말은 이 댁에서 장수가 나자 모시려고 왔던 말이며 장수가 죽게 되자 말도 따라 죽었다는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말의 시체를 양지 바른 곳에 묻고 제사를 지내게 되니 그 다음부터 이 마을의 이름이 “마장리”가 되었으며 6.25사변 전까지도 묘가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가라메기” 마을에는 아름드리 귀룽나무 한그루가 구부정하게 서 있었는데 여기를 성황당이라고 해서 동네 어른들은 귀한 장소로 여기며 정월이 되면 떡을 해서 고사를 드렸다.
이 성황당 앞으로 통하는 길이 화천과 철원으로 가는 신작로였는데 차가 많이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교통사고가 끊이지 않게 되자 사람들은 성황당을 없애면서부터 이런 시고가 일어난다고 하여 마을에서는 해마다 거리 제사를 성대하게 지내고 있다.
차도 별반 없던 일정 때에는 이 길로 목탄차가 하나둘 지나다녔고 장작을 나르는 소가 끄는 마차들이 하루 종일 이 길을 메우다시피 하였다.
귀룽나무가 서 있는 성황당 밑에는 붉고 흰 댕기의 헝겊들이 줄곧 매달려 바람에 나부꼈고 왼 새끼를 꼬아서 나무 기둥을 둘렀는가 하면 지푸라기로 만든 인형 옆에는 흰 쌀밥을 차려 놓기도 하여 그곳을 지나던 아이들은 무서워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는 달음박질을 쳐서 도망을 갔다.
집이래야 30여 호가 되던 마을은 집집마다 농사를 짓는 집이 대부분이었고 모두가 가난하게 살았지만 김 영화네 한 집만은 농토도 많고 부자로 살아 동네사람들이 이 댁에서 타작이라도 한다면 온 식구들이 가서 밥을 먹었다.
우리 집은 이 마을의 끄트머리 영화네 집 뒤에 있었고 집 뒤란에는 용마루를 넘는 살구나무와 밤나무가 있어서 봄가을이면 살구와 밤을 얼마든지 따서 먹을 수가 있었다.
그때 나는 아직 학교에 입학을 하기 전이었는데 어느 해 살구가 익을 무렵 살구나무 위를 올라가서 보니 때까치가 새끼를 쳐서 막 날개가 나고 있었다.
나는 새끼를 잡고 싶어서 손을 뻗쳤으나 손이 닿지를 않자 작대기를 가지고 올라가서 집을 흔들어대니 새 새끼가 모두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멀쩡한 새집을 왜 헐어서 새끼를 죽게 하느냐면서 눈물이 쑥 빠지도록 야단을 치셨다.
그때야말로 새의 죽고 사는 것을 제대로 분간도 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로 그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는 새집에 손을 대지 않았다
어렸을 때에 우리 마을에는 내 또래가 일 곱 명이었는데 이들은 사시사철 넓은 들과 뚝방을누비면서 오디도 따먹고 삘기를 뽑아 먹는가 하면 시광이라고 해서 크로버 잎처럼 생긴 풀을 뜯어서 먹었는데 그 맛은 얼마나 신지 먹으면서 돌 머리를 흔들면서도 따서 먹었다.
내가 자라면서 살던 집은 초가삼간이었으며 안마당 앞에는 마구간을 지었고 뒤란에는 장독간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장독간의 항아리들을 매일같이 행주로 반들반들하게 닦으셔서 장독들은 항상 빛이 나고 있었다.
그 당시의 대개의 집들에선 가을에 잠시 쌀밥을 먹을 수 있었지만 워낙 가난하던 시절이라 보리밥도 싫건 먹지를 못하였다.
더구나 밀기울로 만든 범벅이나 보리 겨로 만든 개떡일망정 없어서 먹지를 못하였을 정도였으니 그것이 우리 조선시대에서부터 내내 우리민족에게 물려졌던 가난의 굴레였던 것이다.
내 위로는 누님과 형님 그리고 내 동생 이렇게 여섯 식구가 살았는데 누님은 어렸을 때에 잔병치레를 많이 하였지만 일찌감치 양복 기술을 배워서 오래도록 바느질을 하였다.
여섯 살 터울인 우리 형님은 일정 때 샘밭에 있는 천전학교를 다녔는데 성적이 우수해서 급장을 6학년까지 계속하였고 상도 많이 타왔다고 하였는데 한번인가를 형님의 학교 운동회를 부모님을 따라서 구경을 간 적이 있었다. 운동장둘레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욱어지고 구경꾼들이 운동장을 하나 가득 메웠는데 점심때가 되자 운동장가운데에 밤을 쏟아놓고 조그만 아이들에게 주워가게 하여 나도 뛰어가서 밤을 몇 개 주워 왔다.
점심은 교실에 들어가서 밥을 먹었는데 책상이 위로 열게 되어 있는 것이 신기하였다.
몇 십 년 후에 내가 그 학교 교감으로 부임해서 시화전을 곁들인 운동회를 개최하였지만 어려서 한번 갔을 때의 나무 한그루가 교실보다도 높게 자란 것을 보고는 감개가 무량하였다.
형님 때에는 그 학교에서 농산물 품평회가 있었는데 어머니는 배추를 출품하셔서 상을 타 오셨다는 말씀을 두고두고 하셨다.
형님이 그렇게 공부를 잘 하였지만 한번은 학교를 갔다 집으로 오는 길에 미친개에게 종아리를 물려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돌아왔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미친개에게 물리면 사람이 미칠 수도 있다면서 그 개의 털을 잘라서 상처를 짖어야 한다고 해서 개의 털을 뽑아서 상처를 불로 짖고 한편으로는 묵은 초가지붕의 이엉 썩은 물이 약이라고 해서 양동이로 물을 퍼서 지붕에 물을 붓고 그물을 받아서 줄곧 먹이기도 하였다.
요행이 다른 이상은 없었지만 동네에서는 그 다음부터는 개에게 물리지 않도록 아이들에게 주의를 단단히 시키는 것이었으니 옛날부터 광견병이 무섭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었던가 보다.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할 때에는 입학을 하기 위해서 입학시험을 치렀다.
나는 그날 아침 흰 두루마기와 둥근 모자를 쓰신 아버지 손에 이끌려 집에서 십리가 넘는 거리를 신작로를 따라서 걸어갔는데 길바닥에는 자갈을 깔아서 짚신을 신었지만 얼마나 바닥이 웅툴붕툴한지 학교까지 걸어가는데 발에는 물집이 생기었다.
학교에 도착을 하자 유리가 번쩍거리는 교실로 들어가서 선생님 앞에 서니 무슨 말을 하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 옆에 있던 친구는 집이 어디냐고 묻자 뱅뱅 돌아서 농업학교 앞이라는 대답을 하여 매우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였다.
학교에 입학을 하고 나서 맨 먼저 어려움을 겪은 일은 집에서 하던 말을 하지 못하고 일본말을 하라는 것이었다. 일본은 한국을 한일합방을 한 이래 모든 관공서와 각 급 학교에 서 조선말을 쓰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하였다.
조선 사람들이 철저하게 일본말을 사용케 함으로서 종당에는 조선나라를 자기네 국토로 만들 속셈이었던 것이다.
1학년 때의 선생님은 후일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시던 시조시인 이태극 선생님이셨는데 선생님의 고향은 지금의 파로호 속으로 묻힌 간동면 수하리 시골이었지만 당시에 유학을 나오셔서 춘고를 거쳐 교원을 하시다가 서울대학교사범대학을 나오셨다.
선생님은 우리를 2년 동안 담임을 하신 다음에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는데 아이들이 무슨 잘못을 해도 소리 내어 꾸중을 하시거나 회초리를 들지 않으셨다.
3학년 때의 선생님은 김정( 金井 )선생님으로 우리말 이름은 김 성길 씨라고 하였는데 키가 크시고 얼굴도 길쯤하게 생기셨는가 하면 선생님은 사범학교를 다니실 때에 학생대장을 하셨으며 아이들이 와글거리며 떠들을 때에 조용히 하는 방법은 전체를 뒤로 돌게 하면 된다고 하셨다.
내가 후일 교사로 발령을 받았을 때에 이 방법을 여러 번 썼는데 나만이 아는 노하우가 되었다.
선생님은 문학에도 조예가 깊은 분이었으며 그 분의 호는 일망( 一忘 히도와스레)이라고 자랑까지 하셨는데 이 선생님도 6.25때에 비명에 가셨다는 소리를 듣고 한동안 마음이 괴로웠다.
학교에 입학을 하고 나서 우리 일곱 명은 매일같이 학교 길을 함께 다녔는데 보통 뛰어서 다닐 때가 많았다.
그날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밥을 먹고 나서 책보를 허리에 차고 신작로엘 나가니 마침 부자댁의 작은 머슴인 환복이가 소를 몰고 우리의 뒤를 따라나서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쯤을 같이 가던 환복 이는 우리들을 부르더니 공동묘지 구릉엘 가게 되면 소를 탈수가 있다면서 소가 타고 싶으면 따라오라고 하였다.
“ 소를 태워 준다고 .”
아이들은 소를 태워준다는 바람에 모두가 좋아하며 학교 가는 것은 잊어버리고 환복이 뒤를 따랐다,
아이들이 환복이의 말에 따른 것은 언젠가 풀밭에서 소에게 풀을 뜯기다가 저녁때가 되자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것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환복이는 우리의 앞장을 서더니 공동묘지가 있는 구릉으로 올라서는 소를 구릉아래 세워놓고 아이들을 하나씩 소등에다가 올라타게 하였다.
그리고는 방자가 이도령의 말고삐를 잡고 앞에 서듯이 공동묘지를 한 바퀴씩 도는데 소는 환복이가 끄는 대로 잘도 돌았다.
모처럼 소를 타고 보니 처음에는 두렵기도 하였지만 얼마쯤 가다 보니 소의 등허리가 축축하고 푹신한 것이 얼마든지 탈것만 같았다.
일곱 명에게 소를 다 태우고 나서 환복이는 소를 태워주었으니 이다음에 집에서 떡을 하면 흰떡 한가래 씩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소를 다 타고 나서야 아이들은 그 제사 학교에 가지 않은데 대해서 겁을 먹기 시작을 하자
환복이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집에 가서는 학교 갔다 왔다고만 하라는 것이었다.
한나절이 지나고 나서 우리들은 정말 학교엘 갔다 온양 집에 가서는 천연덕스럽게 평소처럼 가만히 있었는데 이날 저녁때 학교에서 소사 아저씨가 부자 댁으로 와서는 마을 아이들이 모두가 결석을 해서 원인을 알려고 왔다는 바람에 탄로가 난 것이다.
이리 되니 부모님들이 이 사실을 아시고는 환복이를 혼을 내주기도 하셨지만 집집마다 아이들은 매를 맞거나 밖으로 내쫓기기까지 하였다.
환복이는 어른 일꾼 아저씨한테 혼이 났지만 환복이가 아이들을 꾀려고 한 것이라기보다는 아이들이 워낙 평소에 소를 타보았으면 해서 태워주었을 뿐이라고 하니 그에게 잘못을 물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환복 이는 다시는 소를 타자 소리를 하지 않았지만 환복이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타보지 못했던 소를 다 타보았던 것이다.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르던 1학년짜리들이었기에 학교 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소를 탔던 어린 시절! 그때야말로 시간이라는 것이 가는지 오는지 조차 모르던 시절이었다.
학교 다닐 때의 일로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일 중에 2학년 때의 일이 생각이 난다.
그때 춘천사범학교에서는 졸업생에게 한 달 동안의 교생실습을 내보내는데 가네모리(金守) 라는 선생님이 우리를 임시로 담임을 하셨다.
얼굴이 둥글고 운동으로 다져진 몸에서는 광채가 날 정도로 힘이 넘치시던 그 선생님은 트럼벳을 잘 부셨는데 어느 날 눈이 많이 와서 길이 미끄러운 때인데 1시간을 마치고 나서는 신발을 단단히 하고 운동장에 모이라는 것이었다. 그때 아이들의 신발은 모두가 짚신을 신었기 때문에 눈길을 걷게 되면 신발에 눈이 들어가서 젖고 발이 시려울태지만 선생님은 다 모인 우리들에게 따라오라고 하더니 앞장을 서서 달리는 것이어서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떨어지지 않으려고 솜바지 저고리를 입은 둔한 몸으로 안간힘을 다해서 쫓아가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그날 아이들이 뛰던 코스는 평소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던 곳으로 학교를 나와서 옥산포라는 마을을 돌고 발산리 솔밭을 돌아오는 약 2km의 거리로 아이들에게는 벅찬 거리였다.
한 바퀴를 돌아오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는 모르지만 학교에 도착을 하고 보니 모두의 얼굴은 땀으로 젖어 있고 짚신은 물론 버선까지 젖어 있었다.
조그만 아이들을 데리고 그 먼 코스를 따라오게 한 선생님은 의지가 강한 아이들을 만들려는 의도였겠지만 아이들은 참으로 고생을 많이 한 날이었다.
그 해 4월에는 학교의 이도 교장선생님이 철원의 김화학교로 전근을 가신다고 하면서 조회시간에 작별 인사를 하시는데 교장선생님은 인사 말씀을 하다 말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시는 것이었다. 그러자 조례대 앞에 정렬했던 선생님들까지도 눈물을 흘리니 이번에는 고학년 학생들도 따라서 울게 되고 전교생의 울음바다가 되는 것이었다.
조회가 끝나고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와서도 우는 아이가 있자 모두가 책상에 엎드려서 우는데 나는 눈물이 나오지를 않아서 침을 발라서 우는 척을 하면서 옆의 아이들을 보니 모두가 나와 똑같이 가짜로 우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고학년이 울고 다른 아이들마저 울고 있는데 혼자서 울지 않으려니 시늉이라도 해야겠다는어린 마음에서 침을 눈에 발랐던 것이다.
그 때 아이들이 짚신을 신었다고 하였는데 학교에는 1년에 한 두 번의 운동화배급이 나온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운동화의 배급을 한반에 세 켤레씩 나오다 보니 제비를 뽑아서 세 명 안에 드는 아이들에게만 해당이 되었다.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은 남양군도를 뺏게 되면 고무생산지를 손안에 넣기 때문에 운동화를 전교생이 신을 수 있다고 하였지만 얼마 후에 일본은 남의 나라를 뺏기는 커녕 가는 곳마다 연합군에게 패하기만 하였다.
3학년에 올라가서의 일이다 . 그날은 일찍 수업이 끝나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요란한 비행기 소리가 나기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야부사’는 전투비행기가 양쪽 날개를 마치 춤을 추듯이 움직이더니 쏜살같이 학교에서 바라보이는 야산을 넘어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전교생이 떨어진 비행기를 보기 위해서 십리 길을 달려가는데 조그만 아이들은 가다가 숨이 차자 되돌아서 집으로 되돌아가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산을 넘어서 가는 아이들도 있긴 하였다. 나는 도저히 상급생들을 따라 갈 수가 없어서 도중에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다음날 학교에서 들리는 이야기로는 ‘하야부사’가 땅에 떨어져 박힌 것은 연료가 부족했기 때문이며 비행사는 다행히 살아서 나왔다고 하였다.
그 당시에는 젊은 청년들에게 징용영장이 나와서 일본으로 끌려 갈 때였고 학교에는 소년비행사와 소년 탱크 병을 모집하니 희망자는 지원하라 하였다. 여자 애들은 군수공장으로 돈을 벌러 갈 수도 있다고 하자 우리 학교에서도 여학생이 군수공장을 희망해 간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몇 명이 갔는지는 알 수가 없었는데 고학년 중에는 소년 탱크 병을 지원해서 간 학생도 있다고 하였다.
학교에서는 그때 아이들로 하여금 방공호를 파게 하였는데 그때의 우리 담임선생님은 요시하라 여선생님이었다.
키도 크시고 흰 테의 안경을 쓰신 선생님은 구덩이를 아이들과 함께 파셨는데 아이들이 잘못하면 양동이에 물을 들게 하는 벌을 주었다.
그 시대에는 목탄차가 다니는 것을 보았는데 워낙 차에 힘이 없다 보니 언덕에서는 앵앵 소리만 내고는 올라가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신작로에서는 하루 한번 다닐까 말까 할 정도로 차가 귀한 시대였고 하루 한번 정도 차를 만났지만 차는 길에 서 있는 때가 많았다.
신작로에는 주로 소가 끄는 마차들이 장작을 싣거나 숯을 실어 날랐는데 겨울에 눈이라도 내리고 바람이라도 불게 되면 하교 길의 아이들은 마차를 타고 싶었지만 아저씨들은 타고 가면서도 아이들은 조금도 태워주지를 않아서 어린 아이들은 바람막이로 마차 뒤를 바짝 쫓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집은 초가삼간과 마당 한쪽 외따로 사랑이 한 채 있었는데 거기에는 남준 네가 살고 있었다.
남준이는 나보다 두어 살 위이고 우리 형보다는 다섯 살이나 아래였다.
남준이 밑으로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나보다 세살 아래로 얼굴이 예쁘게 생긴 아이를 남준엄마는 갓난이라고 불렀다.
남준이는 말을 할 때마다 뜸을 들여서 하는 바람에 답답하긴 하였으나 첫마디가 나오면 바로 다음 말은 더듬거리지를 않았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이따금씩 남준이 흉내를 내느라 말을 더듬었는데 그 말이 보통 아이들에게는 신기하게 들렸던지 남준이와 말을 할 때에는 똑같이 말을 흉내를 내다가는 서로 웃기도 하였다.
남준이는 강에서 헤엄도 잘 헤었지만 공기받기라던가 사방치기도 잘 하고 술래잡기를 할 때에는 얼마나 잘 숨는지 아이들은 귀신이라고까지 별명을 지어 불렀다.
한번은 나와 같이 강에 가서 훌테질로 고기를 잡으려고 남준이가 긴 줄을 끌고 강으로 들어가더니 갑자기 “ 악” 소리를 지르면서 나가자빠지는데 강물이 금방 시뻘겋게 피물이 드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그에게로 달려가서 팔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와서 보니 발바닥이 쩍 갈라지고 피가 솟아나는데 걷잡을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도 누가 강에다가 유리를 깨서 던졌던지 어른들이 투망을 치다가 발을 베었었는데 이번에는 남준이가 벤 것이다.
나는 그에게 손으로 상처 난 부위를 막고 있으라 하고는 얼른 강가에 널려 있는 쑥을 뜯어서는 손바닥으로 으깨가지고 피가 솟는 부위에다가 턱 붙이고 꼭 누르자 피는 더 이상 나오지를 않았다.
아버지가 언젠가 꼴을 베시다가 손가락을 낫으로 베어서 피가 나올 때에는 쑥이나 풀을 물이 나올 때까지 비벼서 상처에 붙이면 낳는다는 말씀을 하신 것을 잊지 않고 그대로 해보았던 것이다,
한번은 남준이가 엄마한테를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갔는데 그때 남준 엄마는 농업학교 기숙사에서 학생들에게 밥을 해주신다고 하였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일본식 된장국에다가 하얀 쌀밥을 얻어먹었는데 집에서 먹는 밥보다 얼마나 맛이 있는지 두 그릇이고 세 그릇이고 간에 주기만 하면 다 먹을 것 같았지만 공기에 골싹하게만 주는 것이어서 아쉬웠지만 더는 달래지를 못하였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 한 번 거기 가서 흰 쌀밥을 얻어먹어 보았으면 하였지만 남준 이는 다시는 데리고 가지를 않았고 나도 마음은 있었지만 가자 소리를 하지 못하였다.
남준이와 내가 늘 붙어 다니다 싶이 하자 평소에 나만 졸졸 따라다니던 갓난이는 어느 날 나에게 누룽지를 갔다가 주었다.
“ 너 이것 어서 난거냐.“
갓난이는 엄마가 학교에서 갖다가 주셨다면서 엄마가 오빠는 주지 않고 저에게만 혼자 먹으라고 하였다고 말을 해 주었다.
갓난이는 그리고는 보여줄게 있다면서 나를 저네 방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방으로 들어가서 보니 방이 우리 집보다 환하고 방 한쪽에는 경대가 놓이고 무슨 그림도 붙여져 있었다.
횃대에는 울긋불긋한 천도 걸려 있어서 궁금해서 물었더니 엄마의 목도리라고 하였는데 나는 그 목도리를 하고 다니시는 남준 어머니를 한 번도 보지를 못하였다.
문득 어머니들이 우리 집에 오시기만 하면 하시던 말씀이 생각이 나는 때가 있었다.
그 말씀의 골자는 남 준 이와 갓난이가 서로 다른 씨인데 갓난이의 아버지는 지금 농업학교의 소사로 있다고 하면서 과부인 남준 어머니와 눈이 맞은 것은 꽤 오래 되었다고 하였다.
남준 어머니는 키가 크신 분이 시원하게 생기셨고 얼굴 눈 밑에 검은 점이 하나 있었는데 어머니들은 그것이 바람기를 안은 점이라고들 수군거렸다.
사교적이었던 남준 어머니는 어머니들과 이야기를 하실 때에는 아버지들처럼 큰 소리로 웃으면서 말씀을 하시고 어떤 때는 술까지 드신다는 소리가 들리긴 하였지만 아이들은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갓난이가 웃을 때에 하하 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엄마를 닮았는데 남준 어머니는 어디서 그렇게 계집애가 해바라지게 웃느냐면서 기생 년이 되려면 그렇게 웃으라고 나무라신 다음부터 갓난이는 웃을 때에는 입을 가리기도 하였지만 주위를 늘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갓난이는 그 후에도 누룽지뿐 아니라 생전 먹어보지 못했던 과자도 갖다가 주었는데 어느 날 남 준이가 내가 먹는 과자를 보고는 어디서 났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먹던 과자 한쪽을 주자 참맛이 있다면서 더 먹고 싶다는 것이었지만 나에게도 더 이상 과자가 없었으니 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남준이와 갓난이가 자고 일어나기만 하면 서로 싸우던 생각이 났는데 어느 날 남준 어머니는 부지깽이로 남준이를 때리면서 어서 나가 죽으라고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나중에서야 왜 그랬는지를 갓난이가 말을 해 주었는데 서랍에 넣어둔 돈을 남준이가 훔쳐서 과자를 사먹은 것이 들통이 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남준이가 손버릇이 나쁘다는 말이 있긴 하였지만 아이들은 그것이 진짜인지는 알지를 못했는데 집에서 엄마의 지갑을 열어서 돈을 가져간 것만은 사실이었다.
갓난이는 나를 저의 남준 오빠보다도 더 좋아하고 내가 가는 곳에는 늘 따라다녔는데 그럴 때마다 남준이는 갓난이에게 따라오지를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에 밤에 잠을 자는데 사랑집에서 여자들이 싸우는 소리가 나더니 악을 쓰는 소리가 우리 안방까지 들렸는데 남준 어머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듣지 않던 여자들의 목소리만 크게 들렸다.
“ 낫살이나 처먹었으면 나이 값을 해야지. 그래 아무 때고 가랑이를 벌려서 남의 집을 풍비박산을 만들어야 시원하냐. 이년아.”
“ ..............”
“사흘 내에 이 동네에서 떠나지 않으면 집안 살림을 몽땅 박살을 낼 테니 그리 알아 이 잡년아.”
한참동안이나 소란스럽더니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어머니가 들어오시면서 혼자 말씀을 하셨다.
“ 먼젓번에 내가 여펜네가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다시는 사내를 만나지 말라고 하였건만 언제 또 만났던 모양이니 원,”
“ 당신이 왜 남의 일에 참견을 하는 거요.”
주무시는 줄 알았더니 아버지가 하는 말씀이었다.
“ 남의 일이라니요. 바로 우리 집 사랑채에서 대낮에 벌어지는 일인데 어떻게 날 보고 잠자코 있으란 말이에요.”
“ 내가 생각하기에는 과부가 남자 좋아하는 것이 흠 될 것도 없고 그렇다고 홀아비가 과부 좋아하는 것도 큰 잘못은 아니라고 봐요.”
“ 뭐예요. 당신 정말 말 다 했어요. 혹시 당신도 사랑집을 좋아하는 것 아녜요. 옳지 그러고 보니 요즘 당신의 행동이 좀 이상하다고 했더니 나모르게 사랑방에 들어갔었지요.”
“ 무섭다. 무섭다. 사람백정이 제일 무섭다더니 당신 나를 그렇게 때려잡아도 되는 거요. 설마 내가 아무리 과부를 좋아하기로 그래 주막집을 내놓고 사랑집 남준 엄마에게 발을 대겠소.”
“ 누가 알아요. 내가 없을 때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으니 더 좋을 수도 있겠지요.”
아버지는 그 말씀에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를 않았고 어머니도 더 이상 말씀을 하시지 않더니 이불을 뒤집어쓰시고는 자는 나를 끌어안으셨다.
그날 상소리를 하고 돌아간 여자는 그 후에 다시는 나타나지를 않았고 남준 어머니 또한 이사할 생각은커녕 평상시대로 지나는 것이었다.
아버지들은 봄여름 가을 내내 힘들게 농사를 지으시다가도 가을걷이가 끝나면 한유한 농한기를 맞았는데 그렇다고 노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부자 댁의 사랑방에서 가마니틀을 차려놓고는 가마니를 짰던 것이다.
가마니를 짜려면 가느다랗게 새끼를 꼬아야 하는데 새끼를 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 같으면 장갑이라도 끼고 새끼를 꼬겠지만 그 시절이야말로 맨손으로 새끼뿐 아니라 나무를 할 때도 장작을 팰 때도 모두를 맨손으로 하다 보니 아버지들의 손은 마치 시멘트 바닥처럼 거칠었다.
아버지들은 그런 중에도 노름을 하는 분도 계셨는데 우리 아버지도 노름을 좋아하시다가 손해를 본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언젠가 어머니는 아버지를 향하여 노름을 하면 살지 않겠다고 하셨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아버지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하셨던지 아버지가 또 노름을 하고 계시다가 어떤 술집 색시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소리를 들으신 어머니는 그날로 보따리를 싸가지고 가평 외가댁으로 가신다고 집을 나서자 아버지는 보따리를 뺏으시면서 어머니의 길을 막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 후 다시는 노름판에 손을 대시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어머니가 일일이 아버지를 쫓아다니지 않는 한 아버지의 행동 모두를 제약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남준이와 나는 가끔 강가에 나가서 잠자리 호토를 잡아서는 긴 장대에다가 실로 매달아서 날아다니는 수놈을 잡기 위해서 장대를 휘둘렀다.
“ 잠자라 꼼자라. 이리 오면 살고 저리가면 죽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장대를 몇 번 휘두르면 눈이 커다란 호토란 놈이 암놈의 꼬리를 물고 늘어질 때에 동작도 빠르게 수놈의 날개를 잡으면 눈만 굴리면서 꼼짝도 하지를 못했다.
호토를 잡는 것이 그때는 왜 그리 신이 났던지. 아마 다른 아이들이 아무리 잠자리채를 휘둘러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우월감에서 그랬을 것이다.
호토를 잡은 후에는 또 다른 데로 눈을 돌렸던 것이니 낚시질이었다.
밥알을 민낚시에다 꿰고 물에 담그기만 하면 얼마나 많은 피라미들이 몰려드는지 얼마 안가서 종드래키에 골싹하게 피라미를 잡았는데 그것을 밸을 따개서 소금을 조금 뿌리고 화롯불 위에 석쇠를 놓고 구우면 노릇노릇하게 잘도 구워졌는데 그 맛이 너무 좋았다.
나는 이따금 부자 댁의 일꾼들이 쓰는 사랑마루에 있는 난간에 올라가서 놀기를 좋아 하였는데 우리 집에는 마루도 없었고 난간도 없어서 어디 올라가 놀 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기를 자주 가게 되었고 난간에 기어 올라가서 앉아 있으면 말을 탄 것처럼 편안하고 기분이 좋았다.
그 난간 밑에는 오줌독을 묻어놓아서 어떤 때는 오줌이 넘쳐나는 때도 있었다.
집집마다 오줌을 받아서 밭에 걸음을 하느라 오줌독을 땅에 묻지는 않더라도 오줌동이를 뒤란의 일정한 곳에다 놓고 집안 식구들의 오줌을 받았는데 그것은 나중에 밭에 걸음으로 사용하였다.
내가 말을 탄 사람을 처음 본 것은 언젠가 아버지를 따라서 읍내에 단양 대라는 곳엘 갔을 때였는데 말을 탄 사람은 제복도 멋이 있었지만 말이 뚜벅뚜벅 걸어갈 때마다 목을 아래위로 흔드는 것이 마치 부자 댁 괘종시계의 부랄이 왔다 갔다 하는 것과 같아서 웃업기도 하였다.
그날 말을 기르는 축사도 보았는데 말의 축사는 우리 집에서 기르는 소의 외양간보다 높이 지었고 그 안에는 여러 마리의 말이 서 있었는데 마음 같아서는 그 말 잔등에 한번 올라타 보고도 싶었지만 그 생각은 금방 말똥냄새가 쇠똥보다도 더 독한 바람에 사그라지고 말았다.
내가 처음 말을 타 본 것은 언젠가 제주도의 일출봉엘 오르다가 말을 타고 사진을 찍어 주는 곳이 있어서였다.
말은 평소에는 순하다가도 어떤 때 심술이 나면 엉뚱한 행동을 할 수도 있으니 주의를 하라고 해서 조심스럽게 올라타고 코스를 한 바퀴 돌고 보니 지상에서 발로 걸어 다니는 것보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몰랐다.
그 후 관광지에 갈 때 마다 말이 있으면 타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소처럼 집에서 자유롭게 기를 수 있다면 한번 길러보고 싶은 마음이 있으나 그것은 좀처럼 여건이 되지를 않았다.
환복이는 내가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할 때가 많았던 모양이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를 않았으니 공부에 대해서 의문스러운 것이 많았겠지만 아무리 학교에 대한 말을 해도 그는 좀처럼 알 수 없는 질문만 하였다.
환복이는 일꾼아저씨와 사랑방을 두 개를 함께 썼는데 이따금 밤저녁이면 일꾼들이 사랑
방에서 밤을 새워서 노름들을 하여 환복이는 윗방에서 혼자 자는 때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나는 환복이를 만나려고 일꾼 방엘 가서 방문을 열다가 깜짝 놀란 것이니 거기에는 사람들은 없고 어두컴컴한 방안에는 어떤 아주먼네가 일꾼 아저씨와 같이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일꾼아저씨는 내가 문을 열자 환복이가 며칠간 친척집엘 다니러 갔다면서 어서 문을 닫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문을 닫으면서 그 안에 있는 분이 누굴까 하다가 문득 남준 어머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지만 얼마 지나서는 아주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풀의 이름도 잘 알고 약재가 되는 나무나 풀도 잘 알아서 꼴을 벨 때면 어느 결에 내 입에다가 풀을 물리면서 먹어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가 먹여주는 풀은 대개가 쓴 것이어서 왜 그런 것을 먹이느냐고 하면 이게 다 약이 되니까 잠자코 먹기만 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꼴을 베다가도 종다리가 하늘높이 뜨게 되면 종다리의 집이 보리밭이나 밭둑 밑에 있다면서 알을 잘도 찾아냈다.
환복이는 노랫가락도 잘 불렀는데 소를 끌고 밭으로 가거나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갈 때에도 늘 활기차게 노래를 잘 하여 동네어른들이 모두 칭찬을 하였다.
한번은 강변으로 꼴을 베러 나갔다가 꼴 한 짐을 베고 났는데 환복이가 너무도 덮고 땀이 많이 나니 멱을 감겠다면서 먼저 강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다.
“ 멱을 감으려면 같이 해야지 혼자 들어 가냐.“
내 말에 환복이는 저만치 들어가서는 어서 들어오라 손짓을 하더니 소릴 질렀다.
“ 야. 강물로 들어오기 전에 돌팔매로 나를 한번 맞춰 볼래.”
환복이와 나는 가끔 강가에서 꼴을 베다 말고는 납죽한 돌을 골라서 물수제비를 띄우는 내기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강가에 있는 큰 바위를 목표물로 정해서 돌로 맞히기 내기를 한 적도 있었다.
“ 야. 네가 아무리 돌팔매질을 잘 한다고 해도 물속에 서 있는 나를 무슨 재주로 맞출 수가 있겠냐. 만일 나를 정통으로 맞춘다면 나 혼자만 알고 있는 보리밭에서 종달새 알을 꺼내서 즐게.”
“ 환복아 내가 정말 정통으로 맞추면 어떻거려고 그래.”
“ 야. 네가 아무리 팔매질을 잘 한다고 해도 물속에 있는 나를 맞추지는 못할 거야.”
“ 그 말 정말이지. 그럼 내가 던진다.”
“ 그래.”
나는 평상시대로 환복이의 이마를 조준하다 보니 거리가 너무 멀고 물결이 출렁거려서 도저히 맞출 것 같지를 않았지만 힘껏 돌팔매를 던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 환복이의 이마에서 딱 소리가 나더니 빨간 피가 튀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환복이는 이마를 턱 잡더니 아무 소리도 없이 물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 환복아. 정통으로 맞은 거냐.“
그렇지만 환복이는 입을 다문 채 밖으로 나오는데 얼굴과 팔뚝으로 피가 시뻘겋게 흐르고 있었다.
나는 겁이 덜컹 났지만 얼른 쑥을 뜯어서는 비벼서 피가 나는 이마에 붙여주었다.
“ 야, 너 돌팔매질을 잘 하는 줄은 알지만 내가 맞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럼 약속한대로 알을 꺼내러 가자.”
“ 너 미쳤냐. 지금 이마에서 피가 나는 판에 무슨 알 타령이냐.”
나는 지금도 그 후 환복이가 머슴살이를 고만두고 언제 집으로 돌아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금도 이따금 환복이의 이마를 향해 돌팔매질을 한 일은 두고두고 잊히지를 않았다.
그 후에도 나는 여름이면 매년 아이들과 같이 강에 나가서 멱을 감기도 하고 이웃집의 형님이 투망질을 하면 종두래키를 들고 쫓아다녔다.
그 시절의 여름철에는 어머니들이 저녁이면 강으로 멱을 감으려고 떼를 지어 나갔다.
우물도 두레우물을 쓰던 때이기도 하지만 목욕탕이 집집마다 없던 시대였으니 무더운 여름철이면 유일하게 강에 나가야 목욕을 할 수가 있었다.
지금도 맞벌이 부부들이 많지만 옛날에도 여자들은 남정네가 농사를 지으면 집안일을 해가면서 함께 농사를 거들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도 집안에서 헤어나지를 못할 정도로 일은 태산같이 밀리는 것이었다. 그뿐인가 시어른들이 계시니 신랑에게 애정표현 한번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불만이 있어도 속으로 삭혀야 했다. 밥하고 빨래하는 것은 기본이기도 하지만 빨래를 하려면 비누가 없었기 때문에 잿물을 욹워서 하자니 품도 들었지만 하기가 쉽지를 않았다.
식구들의 무명옷을 해 입히려면 집집마다 목화를 심고 씨아에 넣어 씨를 발리고 나서 물레로 실을 뽑아서는 풀을 먹이고 베틀에다 감고는 무명을 짜야 그것으로 옷을 지어 입을 수가 있었다. 옛날의 어머니들은 1인 5역을 해도 일을 다 하지 못하다 보니 언제 여자들끼리 한가하게 모여 앉아 농담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모처럼 밤저녁에 강으로 목욕을 갈 때가 잠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 빨리들 오지 뭣들 해요. 오늘 일하느라 땀들 많이 흘렸을 텐데. 흐르는 물에다가 계곡의 수풀까지 시원하게 푹 들 담가요.”
“ 너무 오래 담구면 거시기가 너무 풀어져서 방아뀅이가 안 들어간대요.”
“ 그렇지.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갈 수 있나. 한마디 꼭 한다니까.”
“ 내가 뭐 틀린 말 했어요. 호미도 쓰지 않으면 녹이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쟁기라는 건 잘 베려놓아야 한다구요,"
“얼시구 좋구먼. 그 말이 맞는 말일지도 몰라. 오늘 밤에 쟁기들 잘 닦아요. 그리고 엉뚱한 소리들 더는 하지 말고 단단히 보초들이나 서요. 장난치는 놈이 있을지도 모르니.”
여자들이 모이는 곳에는 장난꾸러기들이 몰래 그들의 뒤를 따라서는 옷을 감추거나 멱을 감는 아주먼네들의 몸을 자맥질을 해서 만지고 도망을 치기도 하는 것이었으니 그럴 때마다 여자들은 기겁을 하고는 “엄마야”소리를 질렀다.
여자들도 그렇지만 남자들이야말로 농사철이면 논밭에 나가서 하루 종일 일을 하다가 저녁을 먹고 나면 강으로 목욕이라도 가고 싶지만 여자들로 해서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일꾼들의 방일수록 땀내가 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의 방의 구조는 방안이 넓지 않고 바람벽은 종이가 귀한 때라 벽지를 바르지를 않아서 등을 기대지도 못할 정도였다. 게다가 빈대라는 것이 얼마나 많았던지 벽마다 빈틈이 없을 정도로 빈대를 잡은 핏자국이 나 있었다.
우리가 자랄 때의 놀이라고는 상점에서 물건을 사서 이용하는 장난감은 하나도 없었고 주로 막대기나 돌을 이용해서 놀았다.
지금처럼 쓰레기를 버리는 일정한 장소가 없었던 그때는 가정에서 쓰다가 깨진 사기그릇이나 자배기와 같은 옹기조각을 김장밭 머리에 버렸는데 꼬마들은 거기에서 사금파리나 오지그릇 깨진 것을 줏어다가는 돌로 살살 동그랗게 베려서는 소꿉장난을 하였다.
나무기구의 놀이 감으로는 팔 길이만큼의 막대기 하나와 손목길이만큼의 나무를 각각 한 개씩 가지고 편을 갈라서 자치기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땅위에 둥글게 원을 그려놓고는 양쪽에 둘이 마주 앉아서 가위 바위 보를 하고 이기는 편이 한 뼘씩 땅을 따 먹어 들어갔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땅을 뺏으면 기분이 좋았지만 땅을 모조리 빼앗기면 반대로 기분이 좋지를 않았다.
어쩌면 지금의 부동산업이라는 것이 그 때의 어린이 장난에서부터 출발하였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놀이 중에서도 제일 위험한 것은 정월 대보름 때에 달을 보고 귀를 붙잡고 절을 하면서 일 년간의 소원을 빌고 나서 횃불을 들고 마을별로 편이 되어 싸우기를 하였는데 횃불을 돌려 던지다가 짚가리도 태우고 어떤 때는 외양간을 태우는 때도 있어서 어른들한테 혼이 나기도 하였다.
여자애들의 놀이는 고무줄뛰기와 정사각형 코드를 만들어 놓고 발로 돌을 차는 사방치기였고 남자아이들은 에스 자를 그리고 깨끔발이로 상대방의 진지를 점령하는 놀이로 재미가 있었다.
그 외에도 둘이 마주앉아서 메 밭을 뛰었는데 그것도 여름 한철 그늘에서 심심할 때면 아무 때고 땅에다가 판을 그리고 하는 놀이였다.
한번은 강가로 아이들이 훌테질을 하러 나가는데 큰댁의 아저씨가 농업하교를 가게 되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가보라고 하여 우리는 이유도 모르고 달려갔다.
가서 보니 그날이 학교 생일이어서 학생과 주민에게 떡을 나누어 주었는데 아이들은 분홍색갈의 물이 든 둥근 떡을 하나씩 얻어들고는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내가 집에 돌아와서 보니 아무도 없는 집의 봉당에서 갓난이가 울고 있었다.
“ 갓난아 왜 울어 어디가 아프냐."
갓난이는 대답을 하지 않더니 방앗간을 지나서 부자 댁 큰 마당 옆에 짚가리를 쌓아놓는 의지간에서 여자애들이 소꿉장난을 하면서 놀고 있는데 바깥마을에서 놀러온 오빠들이 오더니 여자애들을 구석에다가 몰아넣고는 차례로 옷을 벗기고 애들 하나하나를 부르더니 앉혀놓고는 차례대로 아래에다가 장을 발랐는데 쓰라려서 운다는 것이었다.
나는 장을 씻어내면 쓰라리지 않을 것 같아서 갓난이를 강으로 데리고 나가서 얼른 미역을 감으라고 하였다.
한참 후에 강물에서 멱을 감던 갓난이는 이제는 쓰라리지 않다고 하더니 나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는 엄마가 어제 가져 오셨다면서 누룽지 한옹큼을 주었다.
갓난이는 그리고는 서랍에서 오색실로 엮은 구슬을 꺼내 주기도 하였다.
“ 이게 뭔데 나를 주는 거니.”
“ 나도 몰라. 그냥 예뻐서 주는 거야.”
나는 그것을 받고는 학교에서 받아온 떡을 주자 갓난이는 날더러 업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 그래 업히고 싶으면 한번 업혀 볼래.”
“ 정말. ”
갓난이를 업었지만 조금도 무겁지를 않았다.
“ 히히. 업히니까 좋은데.”
갓난이는 등에서 말을 타는 것처럼 몇 번 내 어깨를 잡고 겅정겅정 뛰더니 궤에다 대고 말을 하였다.
“ 오빠야. 만날 한번 씩 업어 줘, 알았지.”
남준이는 한동안 집에 없었는데 나중에 들으니 인천의 친척 댁엘 갔다 왔다고 하였다.
그 후에 남준 네가 언제 이사를 갔으며 갓난이와 어떻게 헤어졌는지 전혀 기억에 없지만 6.25사변이 나고 수복을 하였을 때에 남준이가 한번을 우리 집엘 와서는 하루를 자고 인천으로 간다 하고는 소식이 끊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갓난이의 소식이라도 물어보았어야 하는데 그때는 그런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지금도 갓난이가 하하대고 웃던 일이 뇌리에서 살아지지를 않고 있으며 더구나 남준이와 갓난이의 아버지가 다르다는 말씀을 해주시던 어머니의 이야기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지워지지를 않고 있다.
우리 집의 싸리문 옆에는 소를 기르는 마구간이 하나 있었고 마구간에는 일 년 내내 소들이 여물을 먹고 있었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시기 때문에 소는 밭갈이를 하는 데는 필수적으로 필요하였다.
소 먹이는 늦봄부터 가을까지 들에 나는 풀을 베어다가 먹였는데 소야말로 무슨 풀이든지 잘 먹었고 밭갈이를 할 때에는 군말 없이 밭을 잘 갈았다.
나는 시간이 나면 아무 때고 강여가리나 밭둑에서 소가 잘 먹는 꼴을 베었는데 주로 바랭이나 솔고지. 쇠뜨기. 쑥이나 돼지풀이며 토끼풀에 이르기까지 연한 것을 골라서 베어가지고는 소쿠리로 하나 가득 채워서 마구간 앞에다가 쏟아놓았다.
그러면 소는 밤새도록 잠도 자지를 않는지 그 많은 꼴을 새김질을 해서 다 먹고는 날이 새기만 기다렸다.
우리 집에서 소를 거두시는 일은 주로 아버지의 목이었는데 아버지는 장날마다 장에 가셔서는 소를 두어 마리씩 끌고 오셔서 일주일을 먹이시고는 도로 장으로 끌고 가셨다.
아버지가 매장 날마다 소를 끌고 장에 가시는 것은 소를 팔기 위해서였는데 대개 집에 한번 왔던 소는 다시는 집에 오지를 않고 팔려나갔다.
집에서 어떤 때는 암소보다는 황소를 기르셨는데 황소 값이 암소 값보다 비쌌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다가 어느 해 초겨울에 모처럼 기르던 암소가 새끼를 낳는다고 해서 어머니는 저녁에 횃불을 밝히고 아버지가 송아지를 받으셨는데 짐승이 어미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혼자의 힘으로 일어나다가는 쓰러지기를 몇 번을 거듭하더니 바로 젖을 무는 것이었다.
소는 새끼를 낳아서는 혀로 핥아서는 물끼를 말렸는데 날씨가 워낙 춥다 보니 아버지는 송아지가 얼어 죽는다고 헌 퍼 데기를 싸서 주셨는데 얼마 있다가 보니 새끼는 그 퍼 데기를 걷어 내차고는 어미의 젖을 찾아 무는 것이었으니 그것이 얼마나 신기한지 방으로 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덜덜 떨면서 지켜보았는데 송아지는 한참동안을 젖을 빨다가 갑자기 어미의 젖통을 들이받으니 어미는 움찔하고 놀라는 것이었다.
뱃속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놈이 어디서 그렇게 힘이 솟는지 알 수 없었으나 어미는 깜짝 놀랐으면서도 그런 체도 하지를 않고 송아지의 엉덩이를 핥아주고 있었다.
송아지를 낳고 난 후에 서너 달이 지나자 풀밭에는 새싹이 돋기 시작하고 양지 바른 울타리 가에는 풀이 한참 올라오고 있었다. 농사짓는 집들에서는 농사준비를 하기 시작하였을 때
아버지는 감자를 심기 위해서 이른 식전에 다른 집에서 황소 한 마리를 끌고 오시더니 소 두 마리의 목에 멍에를 짊어 지키고는 밭을 갈기 시작을 하였다.
두 마리 소는 그 전에 밭을 갈아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이러 하면 잘도 앞으로 가다가도 안으로 들어서 하면 가던 발길을 안으로 옮겨 가는데 그때마다 밭고랑이 일준하게 펴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밭을 가실 때마다 ‘어디여어’ ‘마아 마아’ ‘돌아서야지’ ‘고랑을 넘어서고’ ‘어치. 하며 구성자게 소리를 하셨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은지 밭갈이 타령은 동네에서 아버지가 제일 잘 하신다고 소문이 나셨다.
아버지는 밭갈이 뿐 아니라 겨울 농한기가 되면 동네사람들의 요청에 따라서 부자 댁의 사랑으로 모셔지는 것이었다.
나는 그럴 때는 가끔 아버지를 따라 가서 본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동네 어르신이나 젊은 부인들이 방안 가득 모여 있었다.
그날은 아버지가 동네 분들의 요청에 의해서 이야기책을 읽어드리는 날이었던 것이다.
좀 커서 아버지께 들은 말로는 그때 읽어주시던 책은 여러 가지라고 하셨다.
춘향전. 홍길동전. 장끼전. 토끼전. 숙영낭자전. 심청전. 옥단 춘전. 임꺽정전. 옥루몽. 사씨남정기. 외에도 많았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그때 목소리를 크게 내시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작은 목소리로 책을 읽으셨는데 한쪽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아주머니들도 계셨다고 하였다.
지금으로 이르면 아버지는 성우의 역할을 하셨던 것 같은데 밤늦도록 얘기책을 읽으시고 나면 그 다음에는 떡 상이 차려지고 막걸리도 서로 나누셨다.
나도 아버지의 목소리를 닮아서 그런지 자라면서 성대는 좋다고 하였지만 성우나 배우의 길 은 나에게 차지가 오지 않았다.
어미 소가 밭을 갈게 되면 송아지는 내내 어미 뒤를 따라다녔는데 아버지는 봄의 밭갈이를 거의 다 하시던 어느 날 송아지를 향하여 말씀을 하시는데 송아지는 들은 척도 하지를 않고 어미 뒤를 따르기만 하였다.
“ 송아지야. 너 어멈 오늘 실컷 보고 젖도 많이 먹거라. 알았니. 내일 모래 장엘 가게 되면 네 어멈은 팔려 나갈 거야.”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나는 소를 팔지 않으면 안 되나 하고 속으로 안 팔리기를 바랐다.
“소가 암소라서 일을 하려면 힘이 달려서 힘 센 놈으로 개우를 하려는 거란다. 왜 소를 판다니까 마음이 안되었냐. 그렇지만 할 수 없는 일이야. 소는 몇 년 만에 갈아야 새로운 힘이 솟는단다.”
장날 아침 아버지는 어미 소에게 일찌감치 여물을 떠서 주시더니 어머니를 부르시고는 송아지를 마구간 기둥에다가 매놓고 고삐를 단단히 붙잡고 계시라 하셨다.
아버지는 그리고는 송아지의 코를 하늘로 올려 잡으시고는 쇠꼬챙이로 송아지의 코를 뚫으시면서 바로 반원의 코뚜레를 코에다가 꿰셨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일이었다.
“ 며칠간 코가 아플 것이야. 어른이 되려면 이런 고초를 겪어야 하느니라.”
아버지는 바로 쑥을 태워서 송아지 코에다가 연기를 쐬자 송아지는 죽겠다고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는 코를 왼쪽으로 휘두르는 것이었다.
쑥의 독한 연기가 코로 들어가니 숨쉬기가 거북했던 모양이다.
“ 너의 아버지는 송아지 코 꿰는데 는 도사란다. 옛날에 사랑 말에 ‘월례. 어멈의 코를 꿰려다가 혼이 나긴 하였지만.”
어머니의 지나가는 말처럼 들린 말이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월례’ 엄마와 송아지와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아지 코를 꿰신 아버지는 송아지를 마구간에 매서 놓으시고는 어미 소를 끌어내자 어미 소는 나가지 않으려고 뒤꿈치를 뻗디디는 것이었다.
“ 오늘 장구경가는 날이니 어서 나가자.”
아버지는 소를 달래듯이 말씀을 하셨지만 어미 소는 궁둥이를 계속해서 빼고 있었다.
어미 소야 말로 몇 년 동안이나 우리 집의 한 식구로 지냈는데 어찌 어머니의 손길이며 아버지의 행동거지에 대해서 짐작을 하지 못하겠는가.
어미 소가 뻗딛다 못해서 밖으로 끌려 나가자 이번에는 송아지가 어미 소를 따라 나가려다 고삐가 걸리자 목이 끊어져라 고삐를 조이며 쫓아나가려 하다가 안 되니까 “엄메”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어미 소는 아버지 손에 끌려 나가다 말고 그 소릴 듣고는 바로 돌아서서는 끌려가지를 않으려고 다시 궁둥이를 빼면서 “ 엄메” 하고는 새끼를 찾았다.
그렇지만 어미 소는 아버지 손에 끌려 나가지 않을 수가 없었고 나가는 내내 새끼를 향하여 몸부림을 치는 것이었다.
어미 소가 나가자 송아지는 “엄메. 엄메 ”하면서 어미를 계속해서 불러댔다.
“ 네 어미는 이제 영영 만나 보지 못할 거야. 내 오늘 저녁에 콩물 해 줄 테니 이제는 네 어미 부르지 말아. 응.”
어머니는 송아지를 몇 번인가 쓰다듬으시더니 눈물을 글썽이시며 나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셨다.
“ 소를 기르다가 보면 정이 들게 되는데 소를 팔러 나갈 때는 늘 서운하단다.”
“엄메” 하는 송아지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어머니는 한동안 일손을 놓으시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셨다.
“ 어미 소가 팔리지 않았으면 좋겠네.”
“ 이젠 어미 소 생각하지 말아. 어미 소가 늙어서 힘을 못 쓰다 보니 푸줏간으로 가는 것이야.”
“ 푸줏간.”
“ 쇠고기가 되는 거란다.”
“ 엄마 월례 엄마가 누구야.”
“ 지금은 아주 먼 곳으로 이사를 갔어야. 아버지가 장에 다니다가 만난 여잔데 무척 예뻤단다.”
송아지는 나와 엄마가 방안에 들어와 앉았는데도 쉬지 않고 “엄메” 하고 불렀다.
“ 집에서 기르던 소를 팔게 되면 왜 그렇게 마음이 서운한지 모르겠다.”
밤새도록 울던 송아지가 이튿날 아침에 잠이 깨자 울지를 않았다.
얼른 일어나서 마구간으로 가서보니 그 때 어머니는 송아지에게 사이다병을 입에다가 넣으려고 하였지만 송아지는 막무가내로 입을 벌리지 않으면서 “엄메” 하고 어미만 불렀다.
송아지의 코는 시뻘겋게 부어 있고 피가 흐른 자욱이 바짝 말라 있었다.
“ 내가 콩물 해다 준다. 그러지 않았어. 어서 마셔야 살아. 어미는 이제 영영 못 만난다니까 그래.”
어머니는 송아지에게 콩물을 아무리 먹이려 해도 먹지를 않자 내 손을 잡고는 그냥 방으로 들어가셨다.
“ 저녁때쯤이면 배가 고파서 먹을 거야 . 사람이나 짐승이나 어미를 잃으면 다 마찬가지로 슬픈 일이지.”
어머니 말씀대로 저녁때에 어머니가 콩물이 든 병을 송아지 입에다 들여대니 송아지는 몇 번은 외면을 하더니 병을 입에다가 억지로 집어넣으니 그 다음 부터는 빨아들이기 시작을 하다가 다시 입을 빼고는 “엄메”하고는 귀를 쫑긋 세우는 것이었다.
콩물을 마시다 보니 젖을 빨던 어미 생각이 다시 나서 그랬을까?
아버지는 저녁때가 되자 그날 팔린 어미 소보다는 덩치가 작은 황소 한 마리를 끌고 오셨다.
황소가 마구간으로 들어오자 송아지는 얼른 황소의 뒷다리 밑으로 목을 늘이다가는 뒷걸음질을 하였다.
“ 너 어미가 아니야 임마. 내가 네 어미 노릇을 하게 생겼어. 꼴 많이 베어 올 테니 그거나 많이 먹어 알았지.”
송아지는 일주일가량을 어미를 찾는가 싶더니 그 다음부터는 아기가 젖을 빨듯이 콩물을 잘 도 빨아 마셨다.
집으로 새로 온 황소가 석 달이 지나자 어미 소 이상으로 몸집이 불고 밭도 잘 갈아치우는 것이었다.
그 때에는 농사를 짓는 집이면 집집마다 대부분이 소를 기르고 있었으며 겨울에는 덕석이라고 해서 가마니틀로 아기 요만큼의 넓이로 짜서 쇠등허리에다가 묶어서 입혔다.
소를 기르는 집은 겨울에는 가마솥에다 쌀뜨물을 붓고는 볏짚과 옥수수대궁 콩깍지를 잘게 썰어 끓여서는 쇠귕에다가 퍼다 주었는데 쇳물이 뜨거우면 소들은 쇳물을 먹으려고 혓바닥을 내밀었다가 너무 뜨겁자 혀를 홰홰 내두르다가 한 참후에나 다시 접근을 하였다.
아버지는 겨울에 먹이를 잘 먹여야 농사를 지을 때 힘이 덜 든다면서 어떤 때는 쇠여물 삶는데다가 콩을 반 되 박씩 넣어주셨는데 소는 아이들이 맛있는 반찬만 해서 밥을 잘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쇳물 속에서 콩만 골라 먹느라 숨도 쉬지 않다가 미처 숨이 꽉 막히면 후하고는 숨을 내쉬는 바람에 옆에 서 있다가는 쇳물 세례를 받을 때도 있었다.
우리 마을에는 내 또래의 아이들이 모두 일곱 명이었다.
그 중에 두 명은 내 조카뻘이 되었는데 우리들은 학교를 갔다가 오게 되거나 노는 날이면 자치기며 술래잡기 연날리기 제기차기 비석치기 깨금발이 놀이 공기받기 메밭뛰기 삘기뽑아먹기 종달새 창에 놓아서 잡기 어항으로 고기 잡고 훌테질로 고기 잡기를 하는 등 철철이 온 동네를 누비고 다녔다.
그중에도 제일 재미있던 놀이는 가을에 김장밭에서 축구하기였는데 처음에는 새끼줄을 동그랗게 묶어서 공으로 만들어서 차다가 언젠가부터 어른들이 돼지 오줌통에다가 바람을 넣어주시는 바람에 차고 보니 얼마나 잘 나가는지 몰랐다.
그 다음부터는 오줌통을 얻어다가 축구를 하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우리 동네 아이들은 축구 선수 아닌 아이들이 없을 정도로 공을 잘 찼다.
축구 장소로는 김장밭이 좋긴 하였으나 우리들이 제일 좋아하는 곳은 신작로가의 묏자리였다.
그 묘는 보통 묘보다도 크고 그 주위에는 잔디가 잘 자라서 아이들 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겨울에 눈이라도 내리면 눈썰매를 이 묘에서 탔는데 얼마나 잘 나가는지 아이들은 여기서 살다 싶이 하였다. 아이들은 시간만 있으면 묘의 분상에 올라가서 놀다가 썰매를 타고 내려오기도 하고 양쪽에 세운 상석으로 올라가보려고도 하였으나 얼마나 높은지 손이 닿지를 않아서 올라갈 수가 없었지만 겅중겅중 뛰면서 올라가 보려고 하였다.
그런데 한번은 아이들 여럿이 묘에 올라갔다가 썰매를 타고 내려오기를 여러 번 하고 있는데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가 오시더니 “이놈들 남의 조상 묘에서 썰매를 타다니 안 된다” 하시면서 지팡이를 휘두르시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무서워서 그 다음부터는 그 묘에 얼씬도 하지를 않았는데 어린 것들이 그때만 해도 묘가 뭔지도 몰랐던 때였다.
마을로 들어오자면 신작로 가에 점방이 하나 있었는데 사기유리병에는 빨강파랑의 눈깔사탕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우리 아이들 중에 사먹는 아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 집은 한길에서 한참 안으로 들어오다가 맨 끝의 집으로 부자 댁의 바로 뒤에 살았는데 강이 가깝다 보니 여름이면 아이들이 하루 종일 강에서 모래성을 쌓으며 놀기도 하고 헤엄을 쳐서 강을 건너 다녔다.
강가에 사는 아이들은 누가 헤엄치기를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하였는데 한번은 내가 제일 앞장을 서서 강을 건너다가 갑자기 몸이 뒤틀리고 헤엄을 칠 수가 없어서 사람 살리라고 소리를 질렀다,
마침 나의 형님이 그때 고기를 잡다가 헤엄을 쳐서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가는 바람에 억지로 살 수가 있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겁이 나서 남들 앞장을 서지 않았다.
하루 종일을 강에서 놀았다고 하였지만 여름이라고 해서 해가 반짝 난 날도 있지만 어떤 때는 구름이 해를 가려서 오래도록 해가 나오지 않을 때는 아이들의 입술이 새파래지면서 덜덜 떨 때도 있었다.
그리 되면 아이들은 밖에 나와서 오들오들 떨면서 “ 해야 해야 나오너라. 어서 어서 나오너라. ” 하며 일제히 빨가숭이들이 궁둥이를 두들겼다.
마침내 해가 나오게 되면 “ 와 ” 하고는 개구리처럼 다시 물로 뛰어 들었다.
그때 강가에는 하늘높이 자란 미루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어머니들은 그 아래에서 삼을 삶아가지고는 무릎에다가 비벼서 실을 가늘게 늘여서 틀에다가 감고는 베틀에다 올려놓고 삼베를 짰는데 어머니는 밤을 새우셨다.
그때의 생활환경을 말해 본다면 대부분이 초가집에서 살았고 아궁이에다가는 산에서 해온 나무로 불을 때서 밥이고 국을 끓여서는 안방의 두리반에 모여 앉아서 밥을 먹었다.
난방이 전혀 되지 않은 초가집의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으니 저녁에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한 뒤에는 다음 날 새벽에야 다시 일어나서 불을 땠으니 온돌방은 식어서 방바닥에서는 찬 기운이 올라왔고 방문을 열 때마다 문고리는 손에 쩍쩍 달라붙었다.
그때의 아이들의 입음새는 모두가 바지저고리를 입었고 내의라는 것은 모르고 살았다.
지금처럼 전기불이 들어오지도 않고 집집마다 등잔불을 켜던 시대였으니 얼마나 밤저녁에 살아가는 것이 불편했으랴.
아이들이 밖에서 해가 지도록 놀고 있으면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놀만한 곳을 향하여 아이들의 이름들을 일일이 부르셨다.
“ 노마야. 고만 놀고 들어 와서 밥 먹어라.”
아이들이 집으로 각각 돌아갈 때면 집집마다 등잔불을 켰는데 문을 훅닥 열게 되면 불이 꺼질 때가 많아서 살며시 문을 열고 닫아야 하지만 아이들이 그러지 않다 보니 호롱불은 연실 잘도 꺼졌다.
그렇게 등불이 귀했어도 그 시대의 학생들은 등잔불 밑에서 밤을 새워서 공부를 하여 성공을 한 사람도 많았다.
그 때야말로 성냥도 귀한 때여서 집집마다 화롯불을 신주 모시듯이 잘 간수를 하였는데 아이들이 있는 집은 화롯불에다가 콩도 볶아 먹고 밤도 구워서 먹느라 불을 꺼트리기가 일쑤여서 어른들한테 만날 혼이 날 때가 많았으니 그때에는 옆집에 가서 불씨를 얻어와야 했다.
우리 집이나 농사를 짓는 다른 집에서도 가을이 되면 햇곡식으로 고사떡을 만들어서 고사를 지냈다.
어머니는 떡을 하시기 전에 부정을 타면 안 된다고 왼 새끼를 꼬아서 솔가지를 매달아서 대문 기둥에다가 내 걸으시고는 목욕 후에 쌀을 물에 불귄 뒤에 발 방아를 찧어서 가루를 내고는 떡시루에다가 해 안치고 아궁이에 불을 때셨다.
시루떡이 뜸이 든 다음에는 시루판 채 번쩍 들어서는 성주님 앞의 상에다가 차려놓고는 1년 열두 달 365일 집안 식구들이 다 무사히 지나게 해달라고 어머니는 빌고 또 비셨다.
사실 그때만 해도 우리네 살아가는 형편은 집집마다 넉넉한 편이 아니어서 비록 농사를 짓는 집이라 할지라도 자기네 땅이 없다 보니 도지를 물고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사람들에게 다시 빼앗기다 보니 집에서 겨울양식도 모자라서 죽으로 연명을 하는 집이 많았다.
농사꾼이 먹을 양식이 부족하다는 것은 어쩌면 농사를 지어도 헛 짓는다는 말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해마다 봄철이 되면 양식이 완전히 떨어지게 되어 그때에는 부자 댁에서 장리쌀을 얻어다가먹을 수밖에 없었다.
장리쌀이란 봄에 얻어다가 먹고는 가을에 농사를 지어서 갚는 것을 말하는데 그때에는 이자를 쳐서 배로 갚아야 했으니 장리쌀을 먹는 사람들은 이듬해에도 같은 방법으로 장리쌀을 먹을 정도로 형편은 펴지를 못하였다.
우리 집도 남들 모양 춘궁기가 되면 장리쌀을 얻어다가 먹는 형편이었다.
지금은 집집마다 농사를 지어도 대학을 나온 엘리트들이 수판을 튕겨가면서 특용작물을 재배하거나 축산업으로 돈을 많이 벌지만 옛날에는 재래농법이 최선의 농지 경작법이며 논에는 갈을 꺾어 넣어서 비료를 대신하거나 인분을 써서 비료를 하였다.
재래식 영농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그전에는 화장실이 모두가 울타리 밖에 있었고 잿간이라고 해서 구조는 인 분통을 묻은 것이 아니고 한쪽에는 재를 쌓아놓는 간이고 또 한쪽에는 큰 돌을 양쪽으로 놓고는 거기에서 용변을 보고는 재로 덮어서 한쪽으로 쌓아 놓기를 계속하다 보면 인분이 쌓여서 썩게 되고 이듬해 봄에는 아버지가 쌓인 재와 변을 손으로 버무려서 삼태기에 담아서는 밭고랑에다가 뿌리고 감자나 옥수수를 심었다.
그 후 아마 6.25전후에는 인 분통(도람통)을 땅에다 묻고는 용변을 보았는데 인 분통이 쌓이면 이것을 수거해서 가는 사람들이 원하는 사람들의 밭에다 뿌려서 걸음을 하였는가 하면 중국사람 중에 채포를 하는 사람들이 퍼가지고 가서는 정사각형으로 1m 깊이로 땅을 파고는 인분을 퍼서 쟁겼다가 그것이 겨우내 썩으면 배추며 무 또는 채소 고랑에다가 인분을 쳐서 걸음을 하였다.
화학 비료가 나오기 전까지 화교들이 이런 방법을 통해 야채를 가꾸어서 시장에다가 팔았고 이 방법이 보급이 되어 오랫동안 이어지다 보니 매년 학교에서 회충검사를 해도 좀처럼 회충의 빈도가 떨어지지를 않은 이유가 다 거기에 원인이 있었다.
아버지는 광복이 되기 전까지 남의 도지를 얻어서 농사를 지으셨는데 밭에는 수수와 조를 많이 심으셨다.
무더운 여름날 아버지는 조밭에 가셔서 조밭에 김을 매셨는데 잡초가 얼마나 많이 나는지 닷새 도리로 밭을 매셨는데 풀을 뽑은 다음에 비라도 내리면 잡초는 다시 살아나서 김을 다시 매셨다.
여름날 조는 한길로 자라다 보니 확확 찌는 더위로 인해 아버지의 벼 잠방이는 금방 땀에 젖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때마다 냉수를 떠오라고 하셔서 나는 두레우물에 가서는 두레박으로 찬물을 떠다가 드렸지만 물길이 먼 관계로 물은 금방 미지근해지는 것이었다.
지금같이 설탕이라도 흔한 때라면 설탕물이라도 타다가 드릴 수가 있었지만 그때는 식민지 세상이어서 설탕은 구경도 하지를 못하였다.
지금은 농사를 지어도 비닐하우스에 특용작물을 재배하여 수익을 많이 올릴 수가 있지만 옛날에는 재래식 농법 그대로 밭에는 조나 콩 옥수수며 녹두 팥 등을 심어서 먹었다.
참외 수박 혹은 드물게 과수원을 하는 사람들은 돈을 수시로 만질 수가 있었지만 그 외의 농사꾼들은 농산물을 팔아야 돈이 되는데 팔아야 할 양이 되지를 못하다 보니 어렵게 지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봄이 되면 때를 굶는 사람이 풀풀하였다.
때는 1944년 3월 그 당시에 일본은 남양군도에서 패전을 거듭한다는 소식이 들렸는데 우리 형님에게는 징용영장이 나왔다. 부모님도 그렇지만 동네 분들은 만날 때마다 일본으로 가게 되면 언제 올지도 모른다며 위로의 말을 하였지만 당사자나 부모님은 실망의 빛이 역력하였으니 4월 초에 춘천역에 집결하게 되어 있었다.
형님이 떠나던 날 춘천역광장에는 징용에 끌려가는 아들들을 전송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환송식이 끝나고 나서 차례대로 징용자들이 차에 오르고 기차가 떠나가자 광장은 금방 울음바다가 되고 우리 아들을 왜 끌어가느냐면서 몸태질을 하는 엄마들도 많았다.
막바지에 이른 당시의 전쟁에서 일본은 하야부사라는 비행기 조종사들을 특공대로 조직을 하여 연합군의 군함을 향하여 비행기에 폭탄을 실은 채로 오늘날의 이슬람 무장단체들의 자살특공대와 같이 연합군의 군함을 향하여 돌진을 하도록 하였던 것이니 일본이야말로 그들국민의 잔인성을 온 세계에 알리는 게기가 된 것이다.
그러고도 그 엄연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일본 정부가 앞장서서 부인하고 인접 국가를 향하여는 그런 사실조차 없다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이런 나라와 이웃을 하고 있는 우리나라야말로 정신을 똑바로 하지 않는다면 언제 또다시 그들에게 침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후세들은 똑똑히 기억하고 이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
형님이 떠나던 날 어머니는 집으로 오시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시면서 아무래도 아들의 얼굴을 다시 못 볼 것 같다면서 소양강다리를 제대로 건너지를 못하시었다.
나라 없는 설음이 얼마나 슬프고 나라 없는 백성이 얼마나 고생이 많다는 것은 겪어보지 않은 나라 사람들은 결코 그 고통을 알지 못할 것이다.
형님이 탄 가차가 이틀 만에 부산에 도착을 하였을 때 일본의 전선은 연합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연일 전선마다 패하던 때였다.
일본은 전쟁 막바지에 조선 사람들의 가정에서 쓰던 쇠붙이며 놋그릇 종류를 모조리 걷어 갔다. 우리 집안에서도 제사를 지낼 때에 쓰던 귀한 놋그릇이며 촛대는 물론 낡은 무쇠 솥과 놋쇠로 만든 수저까지도 거의 다 빼앗기고 말았다.
그때 소양강 난간에는 쇠로 만든 둥근 쇠로 난 간대를 설치하였는데 그것도 빼갔으며 심지어 우리의 문화재 중에서 쇠로 만든 것은 모조리 탈취 당했으며 절간의 대웅전에 고리 열쇠까지 빼갔다고 하니 일본이 그 전쟁에서 승리할 공산은 눈곱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 세례가 일본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도 어찌 보면 일본이야말로 감히 미국이라는 호랑이한테 일본의 쥐새끼 한마리가 덤비다가 당한 엄청난 죄과였던 것이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범죄자들이 그 후 모조리 사형을 받긴 하였으나 일본이야말로 다시는 범죄 집단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서도 그들은 세계 역사 인식을 올바로 해야 하고 그들의 미래세대야말로 세계평화를 위해서 정진할 수 있도록 일본의 정치인들부터 각성을 해야 한다.
일본의 패전이 가까워질 무렵 일본은 각 가정마다 방공구덩이를 파라고 해서 어느 집이나 울타리 옆에다가 굴을 팠으며 사이렌이 울리면 식구 전부가 가서 숨어야 했다.
일본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남양군도를 점령하였기 때문에 고무생산을 많이 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학생들이 모두가 운동화를 신고 다닐 수가 있을 것이라고 선전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등교할 때에 낫을 지참하라고 하였다.
학교엘 가니 학년별로 아이들을 산으로 데리고 가더니 소나무에서 솔옹지를 따라고 하였다. 솔옹지는 소나무의 가지 중에서 옹이가 백인 곳으로 그것은 불쏘시개를 할 때에 쓰이기도 하지만 가을 타작을 할 때에도 이른 새벽에 광솔 불로 어둠을 밝히는데도 잘 쓰이다 보니 집집마다 소나무 장작을 팰 때에 광솔이 나오면 따로 모아두었다가 썼다.
아이들은 이 솔옹지를 따기 위해서 소나무에 올라가서 가지를 따서는 짊어지고 학교로 와서모아 놓으니 그 양이 굉장히 많았다. 이번에는 그 솔옹지를 밑에 구멍이 뚫린 오지독을 아궁이위에 오려놓고는 진흙으로 싸 바른 다음에 아궁이에다 불을 때게 되면 솔옹지가 녹으면서 껄따란 검은 색깔의 기름이 구멍을 통해서 나왔는데 그것에 대한 용도는 비행기 오일로 쓰인다고 하였지만 자세히는 알 수가 없었다.
불을 때다가 아궁이에 불이 꺼지면 입으로 불어서 불씨를 살렸는데 그때 갑자기 솔옹지에 불이 확 붙다 보면 머리카락을 태우기도 하고 화상을 입기도 하였는데 그 냄새가 확하고 폐로 들어가면 가슴을 쓸어안고 기침을 하면서 대그르르 구를 정도로 가슴이 아파서 설설 길 정도였다.
기름을 짜고 나면 선생님들이 기름을 제일 많이 짠 조에는 상품으로 연필 한 자루씩을 주었는데 우리 조는 겨우 한번을 타고 칭찬을 받았다.
부산에 도착한 형님을 비롯한 징용자들은 배가 오지를 않아서 보름간이나 수용소에 머물렀다고 하였는데 그때의 전시상황은 일본의 패전이 역역하여 스마트라며 자바 같은 섬은 이미 연합군에게 점령을 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들리고 있었다.
그러자 징용으로 끌려갔던 형님을 비롯하여 일부청년들은 일본이 망할 것이라는 소문이 뜬소문이 아니라는 것을 예감하고는 어떻게 하던지 집으로 내뺄 궁리를 하다가 마침 비가 오는 밤을 이용하여 일부대원들은 부대를 탈출하여 각각 흩어지니 그 때 형님은 부산을 출발하여 순전히 도보로 오다가 어떤 집으로 밥을 얻어먹으러 들어가면 집집마다 먹을 것이 부족함에도 밥을 한술씩 주면서 멀지 않아서 일본이 망할 것이니 어서 집을 잘 찾아가라고 격려를 해주었다는 것이다
형님이 강원도 춘천 집까지 오는 동안 고생도 많이 하였지만 중간에 한 번도 검문을 당하지 않았다 하니 일본이야말로 이제 망하는 판에 어느 누가 충성을 다해서 일본을 지키려 하였겠는가. 그들이야말로 뉴스를 통해서 국내외정세 파악을 너무도 잘 하였을 것이니 전쟁에 패하게 되면 일본인들이 어떤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공포감에 외국에 주둔해서 살던 일본인들은 누구나 하루하루를 벌벌 떨면서 살았을 것이다. 형님이 갖은 고생 끝에 집에 도착한 것은 6월 어느 날 밤이었다고 하였는데 만일을 모르니 몰래 사립문을 열고는 집으로 들어와서 어머니를 불렀다니 징용을 간 다음에는 아무 소식도 들을 수가 없던 어머니는 날 마다자고 일어나면 아들생각에 눈물을 흘리셨던 중이라 어머니는 형님의 목소리를 듣고는 너무도 놀라셨다는 것이다.
아들이 무사히 집으로 살아 돌아온 것만 다행으로 생각하신 어머니는 아들이 집에 왔다는 사실을 동네 사람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으니 만일에 일본순사에게 고발이라도 들어가면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낮에는 방공구덩이에서 숨게 하고는 밥을 먹게 하였고 밤에도 윗방 구석 볏가마니를쌓아놓은 속에 들어가서 자게 하였다.
어머니는 날마다 일본 순사가 혹시 집으로 형님을 잡으러 올까 봐서 겁을 많이 내셨으니 일본 순사들은 집집의 생활환경을 훤하게 꿰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께는 부자로 사는 김 영길 씨네 집으로 일본 순사들이 수시로 와서는 음식을 대접을 받으면서도 어떤 때는 또 다른 금전을 요구하기 위해서 노름패로 몰아서는 유치장에다가 가두기도 하였다.
이토록 비열한 수단을 써가면서 우리 백성들을 끝까지 괴롭힌 일제지만 우리는 정당하게 항의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굴욕적으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 식민지 지배를 당한 우리 한국인들이야말로 일본의 뿌리 깊은 한국인에 대한 멸시와 모멸감에 대해서 결코 후세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마침내 1945년이 되자 일본의 사이판이 연합군에게 점령을 당했으며 많은 주민이 일본만세를 부르며 함께 자살을 택했다고 아침조회에 교장선생님이 훈시를 하셨다.
그 당시의 조선의 아이들은 거의가 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알지도 못했고 일본이 우리나라라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그런 줄만 알았다.
세뇌교육이란 낱말에 대해서 지금은 알 수가 있지만 어렸을 때에는 학교에 가기만 하면 일본 말을 쓰고 글도 썼기 때문에 한글이 존재하는지 조차도 몰랐다 .
일본사람들은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한국을 식민지화하여 한국인들을 모두 일본인으로 만들겠다는 각오로 식민지 교육에 철저를 기했지만 그러나 한국인들의 조상들이 어떤 분들이며 그들이 섬긴 민족이 어떤 배경에서 나라를 지켜 왔던가를 생각하면 결코 우리나라 이 민족을 결코 그렇게 얕잡아 볼 일이 절대로 아니었음에도 일본은 우리국민을 노예화하려 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외교권을 강탈당했을 때에 우리나라의 수많은 백성들은 나라 잃은 슬픔을 결코 잊지 않았으며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지만 이를 초개같이 내놓고 독립운동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총칼 앞에 당하지 못한 우리의 선량한 동포들은 일본의 말발굽아래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기 일쑤였으니 얼마나 많은 우리의 독립투사들이 그들의 총칼아래 목숨을 잃어버렸던 것인가.
1945년 8월15일 해방이 되자 마을에서는 신작로에다가 솔문을 해 세우고 태극기를 하늘높이 달고는 만세를 불렀는데 그때에 매일같이 소련군인을 태운 트럭들이 화천 쪽을 향해서 이동하였다.
그 당시에 이미 38선이라는 경계선이 그어져 이남에는 미군이 그리고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를 하였으니 이것이 남북을 가르는 경계선이 되었다.
해방이 되고 난 후에 남북의 왕래는 당분간 이어졌는데 당시 북한에서는 지주들을 모조리 반동분자로 몰고 토지를 국유화하여 뺏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38선을 넘어서 남한으로 넘어 왔다.
8.15 광복 후 당분간은 이렇게 넘어 올수가 있었지만 이북에서 월남하는 것을 막게 되자 그 다음에는 밤중에 길 안내자를 통해서 넘어오기도 하였지만 나중에는 이마저 통제가 되어 38선은 완전히 폐쇄가 되고 경비를 강화하니 그 때부터는 이북사람들이 월남을 하고 싶어도 올 수가 없게 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한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지게 되자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생기게 되고 그 고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얼마나 많은 실향민이 고향을 가고 싶어 하셨지만 이제 원로들은 거의가 돌아가시고 말았으니 이 원한을 어디 가서 풀 수가 있다는 말인가.
해방이 되면서 애국가를 처음으로 불렀는데 곡조는 올드랭쌔인의 곡에다가 불렀으며 저녁마다 집집에서는 애국가를 배우느라 호롱불이 꺼지지를 않았다.
학생들은 한글을 전혀 몰라서 누구나 까막눈이었는데 어느 날 마을에서는 한글로 “신탁통치 반대”라는 표어를 써서 벽에다가 붙이라고 하여 나도 처음으로 아버지가 써서 주신 것을 보고 써 붙이긴 하였지만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에 새롭게 유행어가 생겼는데 누가 그런 말을 지어 냈는지는 모르지만 “ 미국은 믿지 말고 소련에게 속지 말고 일본이 일어난다.” 는 말을 아이들은 뜻도 모르면서 외우고 다녔다.
해방을 맞은 우리나라는 일제의 36년 동안의 식민지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계기였다. 그 긴 동안을 우리나라의 애국독립을 위해서 희생하신 분들은 얼마나 많으며 해외로 망명을 했다가 돌아오시지 못하신 분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 분들은 오로지 적수공권(赤手空拳 )으로 일제와 싸우다가 어느 날 나라의 독립도 보시지 못하고 홀연히 눈을 감으신 것이니 우리나라는 결코 애국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치신 이분들을 기리고 그분들의 후손들을 찾아서 끝까지 보살펴 드려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국민들이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있으니 그것은 광복과 더불어 우리나라사람들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원조를 적극적으로 해준 미국이라고 할 것이다.
미군으로부터 숱한 원조를 받았지만 미국이야말로 얼마나 부강한 국가였으면 우리나라 백성들이 먹고 남을 만큼의 밀가루며 우유를 보급해 주었겠는가.
해방이 되었지만 헐벗고 굶주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미국은 수도 없이 입을 옷이며 생활필수품을 공급해 주었으니 당시에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이의 혜택을 입지 않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해방이 되기까지 집집마다 잘 못살았던 것은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어느 날 동회에서설탕을 배급을 준다고 하여 어머니가 타오셨는데 노랑설탕을 한 깡통이나 타 오시니 처음으로 설탕을 먹는 날이어서 아이들은 그것을 수저로 밥을 퍼먹듯이 입에다가 퍼 넣었다. 해방이 되고 학교에 등교를 하니 그때까지 “시바다”일본인 교장선생님은 학교에서 일본으로 가실 준비를 하고 계셨고 우리들을 만나자 웃으면서 잘들 있으라고 손을 흔드셨다.
교장선생님은 관사에 사셨는데 사모님은 한 번도 보지를 못했으며 딸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와 같은 반이었지만 학교에 얼마 다니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전쟁이 끝나기 전에 미리 일본으로 보낸 것 같았다.
교장선생님은 어린 학생들에게 특별히 일본교육의 우수성을 강조한 분도 아니고 항상 교장실에서 독서를 하시고 가끔 점심시간에는 우리 교실에 오셔서는 우리와 함께 도시락을 잡수셨는데 음식을 먹을 때에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먹어야 된다고 하셨는데 교장선생님은 식사를 하실 때에 입을 벌리지 않고 오랜 시간 음식을 씹으시는 것이었다.
“시바다” 교장선생님도 언제 일본으로 가셨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같으면 가시기 전에 위로의 말씀이라도 해 들였어야 하지만 어린 우리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고 말았다.
해방이 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 무엇 때문에 기차역엘 갔는지 모르지만 그날 춘천에 살던 일본사람들이 일본으로 가기 위해서 가차 역으로 모인다고 하였다.
그런데 모인 사람들 틈에 우리 담임인 요시하라 선생님이 가방을 메고 막 기차를 타려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들은 반가워서 선생님에게 가서 인사를 하려 하였으나 그 안으로 들어가지를 못하게 막는 바람에 마지막 선생님의 전송을 하지도 못한 채 돌아서고 말았는데 지금도 그때 선생님께 작별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인간의 작별이란 순간에는 실감이 나지 않지만 지나놓고 보니 그것이 선생님과의 마지막 순간이란 것을 그때는 생각지를 못하였다.
얼마 후에 다시 등교를 하고 보니 그때는 선생님들이 모두가 한국 분으로 우리말로 인사를 하고 우리말을 통해 한글을 베우게 되는 것이 그저 새롭기만 하였다.
해방이 되던 해에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그때의 담임선생님은 유남렬 선생님으로 일본군에 입대를 하여 남양군도에까지 전쟁에 투입되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오셨던 분이었다.
매사에 군대에 갔다 오신 분이 다르다는 인상을 주듯이 절도가 있었고 공부를 할 때에도 정신을 집중하라는 말씀을 늘 강조하셨다.
선생님은 담임을 6학년까지 우리를 끌고 올라가셨는데 그해 결혼을 하셨으며 신부는 같은 학교의 윤강원 선생님으로 이따금 선생님 댁엘 놀러 가면 신부선생님은 우리들에게 과자며 감주를 주시면서 자주 놀러 오라고 하셨지만 그 훈엔 다시 간 기억이 없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셨던 선생님은 중학교 진학을 하는데 따른 과외수업을 밤늦도록 해주셨는데 지금 같으면 학부형들이 수고하시는 선생님께 밤참이라도 사서 드릴 수가 있지만 그때에는 담임선생님을 찾아뵙는 학부형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선생님은 어떤 대가를 바라시지도 않으섰다.
졸업이 가까워지자 중학교에 진학을 하는 아이들에 대한 입학원서를 쓰게 되었을 때에 우리동네 아이들은 모두가 집 가까이 있는 사농동에 위치한 춘천농업중학교에 입학원서를 낸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만은 나를 중학교에 보내느니 차라리 농사나 지으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어른의 말씀이라면 한마디 대꾸는커녕 그대로 아버지 말씀을 따를 수밖에 없던 나는 어쩔 수 없이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친구들은 중학교엘 진학을 하는데 나 혼자 집에서 농사나 지어야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뿐 아무 대책이 없이 그냥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에 제련소에 다니던 형님이 일주일 만에 집엘 와서 나의 사정을 듣더니 아버지께 동생을 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자 아버지는 무슨 돈으로 학교를 보내느냐면서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다.
형님은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을 하시자 그렇다면 돈이 적게 드는 사범학교를 보내자고 한 것이다.
그때 사범학교에서는 입학금도 농업중학교에 비해서 저렴하였고 학교 6년을 졸업하게 되면 교원으로 입용도 가능할 수가 있다고 하자 아버지는 거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반대를 하시지 않아서 용케 입학원서만은 써서 내게 되었다.
입학원서를 낸 후에 학교에서는 졸업식 날을 받고 우리들은 졸업식 노래며 사은회를 하기 위하여 준비를 하였는데 사은회는 각자 집에서 쌀을 한 되씩 거두어서 떡을 하기로 하였다. 막상 졸업식 날이 결정되고 이에 대한 준비를 한다고 하자 공연히 마음이 설레기도 하고 지나간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입학을 하고 난 우리들은 학교에서 일본말을 익히며 일본 말을 쓰게 되자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으나 어느 순간부터 일본 선생님들의 말을 알아듣게 되고 일본의 가다가나로 글을 쓰게도 되었다.
조선말을 일체 쓰지 않게 되니 이름도 일본말로 부르고 칠판에 글씨도 모두가 일본 말뿐이니 우리 조선말은 집에서나 혹은 학교를 벗어나게 되면 자유롭게 쓰는 용어가 되었다.
학교에 1학년 입학을 하면서부터 일본 말을 익혔다고 하였는데 어려서 외국어를 배우게 되면 아무 무리 없이 배울 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이들의 조기 외국어교육은 빠를수록 좋은 것임을 입증한 셈이다.
졸업식 날 우리들은 아침부터 교실 벽을 튼 강당에 모여서 졸업식에 임하였는데 교장선생님은 졸업생에게 당부의 말씀을 오래도록 하셨지만 아이들은 얼른 졸업식이 끝나기를 바랬으니 사은회에 대한 관심만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졸업식 노래가 울려 퍼지고 1절과 2절이 끝난 다음에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할 때에 노래가 툭 끊어지고 말았으니 그때에 졸업생들의 울음보가 터졌기 때문이다.
순진하고 티 없이 맑게 자란 아이들이 이제 학교를 마지막으로 떠난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눈물이 나왔으며 남자 아이들보다도 여자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창문 밖으로 퍼져나가자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던 것이다.
졸업식의 노래를 부를 때에 그 눈물은 오래도록 지속이 되었으니 그 시절이야말로 못살고 배고프고 서로 친구끼리 아껴주던 시대였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때야말로 어려운 아이들이 있게 되면 서로 도와서 도시락을 나누어 먹었고 따돌림이라는말 자체가 없을 정도로 아이들의 마음은 시냇물처럼 맑고 무지개 빛깔처럼 휘황찬란하고 아름다울 뿐이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마침내 사은회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에 아이들은 교실 책상을 한군데로 모아서 마주 앉게 좌석을 만들었고 교장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을 중앙에 모시고 다른 선생님들도 함께 앞에 앉으시었다.
좌석마다에는 대접에 백설기를 썰어놓았으며 아이들 좌석에도 똑같이 떡을 차려놓았는데 성급한 아이들은 벌써 떡이 먹고 싶어서 그런지 손을 날름거렸다.
맨 먼저 교장 선생님께서 졸업생에게 축하를 하신다는 말씀을 하시고 나자 담임선생님이 일어나셔서 한마디 말씀을 하시다가 목이 메시었다.
해방되기 직전까지 일본의 군대에서 복무하시던 선생님은 일본이 패망할 무렵에는 며칠간씩이나 때를 굶어야 했고 이제는 고국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죽는다는 생각만 하셨다고 하였는데 그 죽음의 계곡을 넘어서 졸업생들의 앞에서 음식을 대하시니 그때의 생각이 나셔서 목이 메셨을 것이다.
선생님은 오늘의 제자들과의 사은회를 오래도록 잊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선생님은 3년 후에 6.25 남침 때 피난을 나가시다가 홍천에서 인민군의 총탄에 돌아가셨다는 것이었으니 일본군대에 가셔서도 살아오신 분이 어떻게 이리도 허무하게 돌아가신다는 말인가.
오래도록 제자들과 자주 만나자고 약속을 하시던 선생님. 지금도 우리 동기생들이 모일 때면 선생님을 떠올리면서 옛날의 금잔디 동산의 아름다웠던 정경을 마음속에 그려본다.
金 斗 洙 204. 14.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