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론, 사과 그리고 비너스
윤여사
“가슴이 크니 아기 젖은 넉넉히 나오겠어.”
사우나 안 열기로 달아오른 얼굴이 더 빨개졌다. 내 나이 스물여섯 처녀 때 일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할머니가 수유중인 엄마로 볼 만큼 내 가슴은 유독 부풀어 있었다. 엄마, 언니, 동생도 가슴이 크니 필시 유전이렷다. 나는 거기에 더해 살까지 찌니 상체비만이었다. 방송인 사유리가 자기 가슴이 멜론만하다고 했다는 포털기사를 볼 때 피식 웃으며 넘겼지만 속으로는 놀라웠다. 연예인이라 방송에 한 컷이라도 나오고 주목 받는 게 중요하겠지만 자기신체를 희화화 하는 일이 내외부 시선에 자유롭다는 반증인 듯 당당해 보였다. 내 가슴도 멜론크기지만 남 앞에서 말할 정도로 대범하지 못하다.
아. 사과 반쪽만한 가슴. 대학시절 동기 한명이 ‘내 가슴은 사과 반쪽 만해’ 웃으며 말하는 모습이 이십년이 지난 지금 부러움 속에 재생된다. 사과 반쪽만한 삶은 얼마나 가벼울까. 브래지어 끈 자국이 어깨에 거무스름하게 남지도 않을 테고 호흡도 한결 편하겠지. 팔을 움직일 때 걸리지 않고 누군가 무심코 부딪치는 민망한 일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브래지어를 사는 수고로움이 덜한 것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A컵, B컵 사이즈 중 맘에 드는 것을 고르면 될 테니까. C컵 이상 사이즈 브래지어는 일반 속옷매장에서는 구하기 힘들다. 백화점에 가야 볼 수 있고 종류도 별로 없다. 단조로운 디자인에 재질도 다양하지 않다. 예쁜 디자인을 바라는 것은 과한 욕심이 되버린다. 가격도 보통 2~3배 이상 되니 부담된다. 정확한 치수를 재기 위해 탈의실에 들어가 웃옷을 벗고 팔을 올려야 하는 상황이 어색하다. 몸에 나있는 점, 잡티와 겨드랑이 털이 신경 쓰인다. 살냄새를 맡으며 치수를 재는 친절한 직원에게 미안함과 연민이 생기니 이 감정은 온당한가 싶어 편치 않다. 이래저래 브래지어 하나 사는 것도 스트레스다.
핑크빛 유두의 봉긋한 가슴을 꿈꾼 것은 책과 매체를 통해 인식된 미적기준을 받아들인 결과다. 그런 가슴을 가지면 훗날 남자친구에게 부끄럽지 않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건 될 수 없는 허상이었다. 한번 처진 가슴은 ‘업’되기 힘들다고 한다. 그나마 가슴을 위로 지탱해 주는 근육 키우기 바스트업 책을 보면 운동할 자신이 없어 눈으로만 훑어본다. 여성잡지 속 가슴축소수술 전후사진을 보며 나도 수술하면 가슴이 저렇게 예뻐질까 상상하지만 생각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수술할 용기도 돈도 없고 몸에 칼을 댈 만큼 내적동기가 강하지 않다. 핑크빛 유두는 또 어떤가. 저마다 피부 색소와 농도가 다를 텐데 핑크빛 유두와 유륜를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봉긋하게 솟은 가슴도 있고 가슴골이 벌이진 사람도 있고 처진 가슴도 있을 텐데 이미 가지지 못한 가슴을 욕망하느라 가슴 속 불만은 가슴 크기에 비례에 커갔다.
‘가슴 큰 여자는 무식하다’는 통설은 가슴 큰 여자를 억압한다. 존재를 무시하는 통념은 가슴이 커질수록 살이 찔수록 주변 시선을 의식하게 만든다. 타인의 시선이 예의 이상 가슴에 머물면 자아는 위축되며 신경은 예민해진다. 순간 나는 가슴이 큰, 무식한 여자가 된다. 시선을 의식하기 전에 아무렇지도 않던 자신이 흉하게 느껴진다. 내면화된 통념은 자신을 괴롭힌다.
성장기 때부터 가슴은 전방이 아닌 아래를 향하며 커갔다. 브래지어를 늦게 착용해서 그런가, 살이 쪄서 그런가 이런저런 탓을 하며 양 손으로 가슴을 들어본다. 한결 심장에 부담이 없어 가벼워진 느낌이다. 크고 무거운 것은 자연스레 아래로 향하게 마련이다, 내 가슴도 크기와 무게에 맞게 중력을 따랐을 뿐이다. 허나 이 자명한 사실도 위로가 되진 못한다. 체중을 줄여 가슴사이즈를 줄이는 길밖에 없어 보인다. 살이 빠지면 탄력감이 떨어질 텐데 걱정이 또 하나 생긴다. 젖이 축 늘어진 이나중탁구부에 나오는 할머니 모습이 미래의 내 모습일거 같아 불안하다. 한 살 이라도 나이 먹기 전에 체중을 줄여야 할 텐데 이 또한 귀찮다.
구석기 시대 비너스상(빌렌도르프비너스, 2만6000년전)의 몸매를 빼닮은 내 가슴은 ‘풍요와 다산’을 누리지 못한 채 85D컵 비너스 맞춤브라에 감싸여 어깨에 부담을 주며 힘겹게 매달려있다.
첫댓글 전 빈약하고 누구 표현에 의하면 허술한 제가슴 얘기 쓰다 말았는데 윤여사님은 쓰셨네요. 자기 가슴에 만족하는 여자가 있을까요? 오늘 수업 가서 손 들어 보라고 하고 싶네요.ㅋ 제목 죽이고 글도 좋아요.
쓰고 보니 별거 아니데요. 왜 망설였을까 그기억이 삭제된듯이요. 글 좋다니 넘 좋아요 헤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전 가슴 작은분들이 부러웠어요 특히 키이라 나이틀리가 자기의 작은가슴이 좋다고 할때 더더욱. 충격적이란 말에 왠지 힘이 납니다.~
아... 저희 어머니도 가슴이 몹시 크셔서 매번 가슴 큰 여자는 무식해보이기만 한다며 불평했던 것이 기억나요.... 어머니가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아요...
네넵~ 아마 어머님 어깨도 쪼이구 아프실 수 있어요. 어깨에 부담이 가서 좀 굳기도해요~
글을 읽으며 편안하고 따뜻한 윤여사님이 그려지다가 이 것 또한 편견이구나 싶기도 하다 몇 번 못 뵀지만 이 느낌은 윤여사님과의 만남에 대한 것이라 반박해보다 말다 합니다.
이나중탁구부의 할머니 이야기에 반전 웃음 크게 터뜨렸습니다. 이야기는 상처와 불안, 스트레스를 안고 진행되지만 진솔하면서도 담담해 잘 읽히고 좋네요.
가슴 큰 여자는 무식하다란 통설 이야기가 위의 이야기들과는 다르게 설명만 있고 나의 이야기가 구체적이지 않아 와닿지 못하는 느낌이 드네요.
잘 읽었습니다.
예전에 아는 분이 천사타로카드를 리딩해주신적이있는데 제가 뽑은 카드에서 상반된 이미지를 직관적으로 풀이하신적이있어요. 슝슝님이 느끼신 저도 글로 읽혀시는 저도 저입니다.ㅎㅎ 통설부분은 제 느낌을 개념(?)적으로 써보고 싶었어요. 나름 사유적으로 써봤는데 구체적이지 않단 말에 고개를 끄덕여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