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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가을~ ⓵
⓵영양숯불갈비(경주시 서부동)
⓶고분(古墳) & 반월성(半月城),계림(鷄林)
⓷연동어촌체험마을(경주시 감포읍 두원리)
⓸은정횟집 식당(경주시 감포읍 감포리)
⓹문무대왕릉(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⓺대왕암 커피(cafe~)
(10/03 개천절 ~ 04 금요일)
죽은 뒤에~ 동해의 호국룡(護國龍)이 되겠다고 한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한다.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다.
(2020.04.25 한국경제신문 지면 A22)
- 끝 -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경북 경주시 동쪽 ~(양북면 봉길리)
바다에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대왕암(大王岩)은
오래 전부터 신라 30대왕인
문무왕의 능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수중릉(水中陵)이라는 점에서
대왕암(大王岩)이
진짜 문무왕의 릉이 맞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이 제기됐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秋七月一日
王薨諡曰
君臣以遺言葬東海口
大石上
薨 죽음 훙 ① 죽음 ② 많다 ③ 제후(諸侯)의 죽음
諡 시호 시 ① 시호(諡號) ② 시호를 내리다 ③ 고요하다
이라고 하여 문무왕의 장례(葬禮)를
동해 어구(漁區) 큰 바위에서 치렀다는
정확한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陵在感恩寺東海中
이라 하여 감은사(感恩寺) 동해에
문무왕릉이 있다고
그 위치를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水中陵)을
무슨 연유로
1400여 년 전 동해에 만들었을까?
- 최초 실측 탐사,
문무왕의 유골(遺骨)은 있는가?
대왕암(大王岩)이
진짜 문무왕릉이냐는 의문과 함께
지속적으로 제기된 의문은
그 장례(葬禮) 방법이다.
먼저 문무왕의 유골(遺骨)을
대왕암(大王岩) 아래 묻었다는
가정하(假定下)에
대왕암의 외부를 살펴보았다.
만약 돌아래 문무왕의 유골을 묻었다면
인공적(人工的)인 흔적이 남아있을 텐데
50여 곳을 조사한 결과 돌이 갈라진
절리방향(節理方向)은
북동방향으로 모두 동일했다.
이것은 경상도 지역에 나타난
절리방향(節理方向)과 동일한 것으로
인공적(人工的)으로 돌을 깎아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대왕암 주변에 인공적(人工的)인
흔적(痕迹)이 없다면
물속에 잠긴 부분은 어떨까?
수로를 막고 대왕암(大王岩)의 물을 뺀 결과
중앙의 거대한 돌이 그 전체를 드러냈는데,
그 위치가 정확하게 북쪽을 향하고 있고
정중앙(正中央)에 있어
인공적(人工的)인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수로(水路) 부분에서 인위적(人爲的)으로
돌을 다듬은 흔적(痕迹)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돌 아래 문무왕을 묻었을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는데
보다 정확한 결과를 위해
부장품 검사와
돌아래 지반(地盤)구조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대왕암(大王岩)의 거대한 바위 밑에는
아무것도 묻혀있지 않았고
무엇을 묻을 수도 없는 구조였다.
- 문무왕의 유골(遺骨),
화장돼 대왕암에 뿌려졌다
문무왕 유골이 대왕암 아래 묻힌 게 아니라면
유골(遺骨)을 화장(火葬)하여 대왕암 위에 뿌렸을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後十日... 以火燒葬
이라고하여 죽으면 10일 뒤에
화장(火葬)하라는 유언(遺言)이 있다. 그리고
고문외정(庫門外庭)이라는
화장터도 유언(遺言)에 남겼는데
이곳은 지금의
능지탑지(陵只塔址)..하이퍼링크
로 추정되고 있다.
이유는 능지탑 조사 결과
화장터의 흔적이 나왔을 뿐 아니라
비석에 기록된 대로
사천왕사 자리에 위치했던 문무왕릉 비석이
서쪽 귀부에 꽂혀있었다고 가정하면
지금의 능지탑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무왕의 유언(遺言)대로
능지탑에서 유골(遺骨)을 화장(火葬)했다면
그 이후 문무왕의 유골은 어떻게 되었을까?
문무왕의 비석을 보면
粉骨鯨津
鯨 고래 경1. 고래2. 들다3. 쳐듦4. 수코래5. 암컷은 鯢
津 나루 진1. 나루2. 언덕3. 연줄4. 전하다5. 진액
경진(鯨津),즉 고래가 사는 깊은 바다에 뿌렸다는 의미
(鯢 도롱뇽 예1. 도롱뇽 2.암코래 3.작은 물고기)
이라는 기록이 있다.
즉 뼈를 가루로 내어 바다에 뿌렸다는 것이다.
결국 문무왕의 장례(葬禮)는
뼈를 묻는 장골(葬骨)이 아니라
화장(火葬)하여 뼛가루를 뿌리는
산골(散骨)이었던 것이다.
- 시신(屍身) 없는 무덤,
문무왕은 호국룡(護國龍)이 되었다
문무왕의 유골(遺骨)을 화장(火葬)하여
대왕암 위에 뿌렸다는
결론(結論)을 내리면서
대왕암을 조사했을 때 발견된
인공적인 흔적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중앙의 돌을 보면 주변의 돌과
구성성분이 같은 것으로 보아
원래 대왕암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정중앙(正中央)에 위치한 것이나
정북(正北)방향을 향하는 것은
인위적(人爲的)인 흔적(痕迹)이 강하다.
더욱 확실한 ~
인공(人工)의 흔적은
동서(東西)방향의 수로(水路)가
배수(排水)를 고려하여
서(西)쪽의 높이가 동쪽보다
15cm
낮게 형성(形成)되었다는 것이다.
대왕암(大王岩)은
유골(遺骨)을 뿌린 장소일 뿐인데
왜 이 같은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일까?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문무왕이 죽은 뒤
호국룡(護國龍)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했다는 기록(記錄)이 있다.
그런데
대왕암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감은사(感恩寺)에는 *금당(金堂)의 섬돌 아래
구멍이 하나 뚫려있는데
이것은 용(龍)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구멍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이
대왕암(大王岩)을 향하고 있다.
*금당(金堂): 본존불을 안치하는 가람의 중심 건물
대개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는
대웅전을 말하는데,가람배치의 중심으로
모든 건물들이이 금당을 기준으로 배치된다
감은사의 용이 드나들게 만들었다는
구멍은 대왕암을 향하고 ~
대왕암의 배수(排水)는 감은사를 향한다.
이를 종합하면
대왕암(大王岩)은 호국룡(護國龍)이 된
문무왕의 처소(處所)가 된다.
- 대왕암(大王岩),
강력한 왕권의 상징
문무왕은
무슨 연유로 바다에 장사지내길 바랐을까?
왜(倭)의 침입을 막고자하는 염원에서
그랬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했지만,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왜(倭)의 세력이 미미(微微)해서
단독으로 침입할 수준이 되지 못했고
*백강구(百江口) 전투(戰鬪)에서도
왜(倭)는 신라에게 참패했다.
*백강구전투 [百江口戰鬪]: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부흥군이 주체가 되어, 일본의 지원병과 합세해
나당연합군과 벌였던 국제적인 싸움.
왜(倭)의 침임을 막고자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문무왕의 본뜻은 무엇이었을까?
삼국통일 후
문무왕은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려는
개혁을 단행한다.
그리고 이 같은 개혁에
문무왕이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그가 겪었던 시대적 상황과도 맞물린다.
통일(統一)을 이루기 위해 치뤘던
16년간의 기나긴 전쟁을 마치고 그 후
백제와 고구려 유민(遺民)을
융화시키기 위해
여념이 없었던 문무왕은 강력한 왕권으로
나라가 안정되기를 바랐다.
그러던 중~
병을 얻는 문무왕은
호국용(護國龍)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문무왕이 서거(逝去)하고
이듬해 ~
감은사가 완공된 뒤 용(龍)이 된
문무왕이 나타나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는
피리를 줬다는 설화가 있다.
이 피리는 마른 땅에 비를 오게 하고
외적을 무찌른다는 신비의 피리로
문무왕의 강력한 왕권을 상징한다.
이는 문무왕이 호국룡(護國龍)이 되었다는
믿음으로 이어지고 호국룡이 된
문무왕의 처소(處所)인
대왕암은
*만파식적(萬波息笛)과 더불어
문무왕의 강력한
왕권의 상징(象徵)인 것이다.
*만파식적(萬波息笛)
나라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해결된다는
신라 전설상의 피리.
감은사를 짓고 추모하는데,
죽어서 바다 용이 된 문무왕과
하늘의 신이 된 김유신이
합심하여 동해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적의 군사는 물러가고,
병은 낫고,
물결은 평온해졌다고 한다.
이 설화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나라의 안정을 꾀하려 했던
호국 사상과 모든 정치적 불안이 진정되고
평화가 오기를 소망하는
신라인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KBS 역사스페셜 112회
최초 발굴, 신라 대왕암 (2001.4.28.방송)
(끝)
- 또 다른 이야기 -
신라(新羅)의 문무왕(文武王)은
그의 유언에 따라
대왕암에 그의 유골을 수장했다고
우리는 그리 배웠으나
사실은 "문무왕(文武王)이
그때 죽은 게 아니고~
당(唐)나라의 압박을 피해
왜(倭)로 건너가
왜왕(倭王)이 되었다"는 주장을
일본의 만엽집이나
*일본서기,
고사기 등을 바탕으로하여
퍼즐을 맞춰내고 있다.
이영희 여사의 주장
(그리 되는 사연)을 요약하면
"신라가 당(唐)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하자마자
당(唐)은 신라를 포함,
한반도 전체를 당(唐)에 복속(服屬)시키려는
야욕(野慾)을 들어내기 시작하였고,
이를 간파한 신라가
670년,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唐軍)을 일제히 공격하면서
676년까지
7년동안 치열한 전쟁(戰爭)을 벌인 끝에
당군(唐軍)을 한반도 밖으로 몰아냈지만,
전열을 재정비한 당군(唐軍)이
신라를 계속 압박해오면서
또 다시 지옥같은 전쟁(戰爭)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맞게 되는데
이때 문무왕(文武王)은
힘을 앞세운 당(唐)의 부당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강경한 요구
(문무왕-법민태자:法敏太子 이
당 황제 앞에 와서 직접 사죄 등)를
무산시키면서, 외교를 통한
화해의 길을 찾아가는 방안으로
왕위(王位)를
그의 아들 신문왕에게 넘기면서
국상(國喪,문무왕의 죽음)을 선포하게 한 뒤
감은사(感恩寺)에서 배를 타고
왜(倭)로 건너가서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망명하여
길비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함께 건너간 무신들과 함께
일본열도에서 세력을 키워가는 과정에서
그때 왜(倭)의 왕이었던
지통여왕의 연인(戀人)이 되었고,
그의 이름은
김법민(法敏)의 *시호(諡號)인
문무왕文武王의 "무(武)"다.
*시호(諡號): 왕·왕비를 비롯해 벼슬한 사람이나 학덕이 높은 선비들이
죽은 뒤에 그의 행적에 따라 국왕으로부터 받은 이름
그 "무(武)"가
왜(倭)의 지통여왕과 열애 끝에
일본의 문무왕(文武王)이 되었다."고
재야 사학자 이영희
(1931년 일본 도쿄 출생 /
제11대 국회의원-
유정회/전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전 한국일보 일본특파원,
문화부장, 논설위원) 여사는
"노래하는 역사"라는 책에서
일본 사학계의
'매서운 칼잡이'로 주목받던
고바야시 야스꼬 여사가
자신의 저서에서 제기한
폭탄 선언에 나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영희 여사의 이 저서는
일본 문예춘추에
"또 하나의 만엽집" 등
7권의 저서로 발간되어
일본 역사학계,
문학계에 큰 화두를 던졌고
또 우리나라에서 이 내용이
책으로 발간되기 전에
조선일보(문화면)에
2년여 동안
연재되기도 했었다.
- 또 다른 이야기 -
- 양북면 봉길리, 문무대왕 수중릉 -
손창동 카카오톡 2019/12/25 수요일(성탄절) 17:39
*일본 서기(日本書紀) :
니혼쇼키(Nihon shoki)라고 발음하는 《일본 서기》는
《고사기(古事記)》와 함께 일본(日本)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歷史書)이다.
신화 시대부터 697년까지를 기록하고 있으며,
일본에 끼친 중국 문명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중국식으로 새롭게 정비된 황실이 주도가 되어
중국의 연대기에 버금가는 역사서를 지향하여
편찬한 것으로, 720년에 완성되었다.
《일본 서기》는 6국사(六國史)의 첫 번째 책으로,
6국사는 황실의 명령을 받고 887년까지 편찬된
6권의 역사서를 말한다.
《일본 서기》는 모두 30권으로 이루어졌다.
첫 권은 고대 일본의 신화와 전설을 기록하고 있으며,
신도(神道) 사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약 5세기경부터 다루고 있는 후반부는
역사적 기술이 정확하며, 황실뿐만 아니라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여러 씨족들에
관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불교 도입과 7세기의 다이카 개신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본 서기 [日本書紀]
(Basic 고교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2002. 9. 25., 강상원)
첫댓글 49년 전통의 추억어린~(since1970년)` "영양숯불갈비 "
경주시 양남면~
부채꼴 모형의..
주상절리(柱狀節理, columnar joi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