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번역서 > 향산집 > 향산집 제13권 > 묘갈명
향산집(響山集), 향산집 제13권
향산집 제13권 / 묘갈명(墓碣銘)
통훈대부 행 군자감정 송호 김공 묘갈명 병서
〔通訓大夫行軍資監正松湖金公墓碣銘 幷序〕
공의 휘는 연(演), 자는 형원(泂源)이다. 고령 김씨(高靈金氏)는 신라의 왕자 의성군(義成君) 석(錫)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0대를 전한 뒤 추충보조 공신(推忠輔祚功臣) 남득(南得)이 고양군(高陽君)으로 이봉(移封)되면서 고령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고양군의 손자 사행(士行)은 조선을 섬겨 군수를 지냈고 호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호조 판서가 아들 숙(肅)을 낳았으니 참의이고,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 휘 장생(莊生)은 현감을 지내고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조부 휘 구(鉤)는 부사(府使)이다. 부친 휘 두문(斗文)은 부장(部將)이다. 모친 남원 김씨(南原金氏)는 부사 우(雨)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嘉靖) 정미년(1547, 명종2) 고령의 양전리(量田里)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출중하였고 독실한 의지로 학문에 힘쓰니, 백씨 송계공(松溪公) 길(洁), 종조형(從祖兄) 송암(松菴) 선생 면(沔)과 함께 당시에 ‘김씨 삼군자(金氏三君子)’로 일컬어졌다.
임진왜란 때 송암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정진(鼎津)과 무계(茂溪)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공이 선생을 따르며 보좌하고 계책을 세워 그 공이 으뜸이었다. 그래서 송암 선생은 의병대장에 배수되었고, 공은 군자감 정이 되었다. 적병들이 조금 물러나자 송암 선생이 공에게 명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보호하게 하였다. 공은 험준한 산골에서 풍로(風露)만 겨우 피하면서도 진중(陣中)에 필요한 의복을 끊임없이 공급하니, 송암 선생은 항상 공을 현제(賢弟)라고 칭찬하였다. 이듬해 봄 갑자기 장성(將星)이 떨어지자, 공은 샛길을 따라 선생의 시신을 수레에 싣고 돌아오다가 신창(新倉)에 이르러 마침내 발상(發喪)하였다. 왜적들이 선생의 죽음을 눈치챌까 염려하여 유명(遺命)을 따랐던 것이었다.
난리가 평정되자 울산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오직 문을 닫은 채 자신을 수양하며 후생들을 훈도하는 것을 일로 삼았다. 향년 94세로 세상을 떠나니 곧 경진년(1640, 인조18) 11월 5일이었다. 청량면(靑良面) 진곡(眞谷) 계좌(癸坐)의 언덕에 장례 지냈다. 숙인(淑人) 박씨(朴氏)도 합장하였는데, 박씨의 부친 원우(元佑)는 만호(萬戶)이고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아들 둘을 두었다. 홍윤(弘潤)은 판결사(判決事)이고, 홍건(弘建)은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이며 양자로 나갔다. 손자는 넷이다. 첨지중추부사 경휘(景輝), 좌윤(左尹) 이휘(以輝), 별제(別提) 수휘(秀輝), 종휘(宗輝)이다. 증손은 여덟이다. 찰방 중형(重珩), 중정(重鼎), 중내(重鼐), 중구(重球), 통정대부 중남(重南), 중석(重碩), 동지중추부사 중태(重泰), 중만(重萬)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형은 나라 위해 충성을 다했고 / 兄爲國盡忠
아우는 형을 위해 직분을 다했음은 / 弟爲兄盡職
당시의 포전으로 분명히 드러났으니 / 顯矣當時之褒典
이에 한 자 비석 세워 후손을 권면하노라 / 庸勸後世於尺碣
[주-D001] 갑자기 장성(將星)이 떨어지자 :
송암 김면이 갑작스럽게 죽었다는 말이다. 장성은 대장을 상징하는 별이다.
[주-D002] 유명(遺命)을 따랐던 것이었다 :
김도화(金道和)가 지은 〈통훈대부 군자감 정 송호 김공 행장(通訓大夫軍資監正松湖金公行狀)〉에 의하면, 김면이 군중에서 병으로 죽으면서 여러 장수들에게 “나의 죽음을 적이 알게 하지 말라.〔吾死 勿使賊知之〕”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拓菴集 卷34》
만구집(晩求集) 晩求先生文集卷之十三
墓誌銘通訓大夫軍資監正松湖金公墓誌銘 幷序
이종기(李種杞) 1936 a331_305a
한국문집총간 > 만구집 > 晩求先生文集卷之十三 > 墓誌銘 > 최종정보
晩求先生文集卷之十三 / 墓誌銘
通訓大夫軍資監正松湖金公墓誌銘 幷序 a331_305a 편목색인
公姓金氏諱演字浻源號松湖。松庵先生沔其從父兄也。祖於新羅敬順王子錫。封義城君。其後有諱龍庇。官太子詹事。子諱宜尙書左僕射。子諱南得封高陽府院君。子孫遂爲高陽人。子諱畒當麗季。南誾,鄭道傳等謀危社稷。公與圃隱欲除去之。不得行。及圃隱遇害。公亦坐流。府院君亦竄。事載麗史。子諱士行。a331_305b仕我朝贈戶判。子諱子肅參議。是爲公高祖。曾祖諱莊生參判。祖諱鉤府使贈判書。考諱斗文宣傳官。妣南原金氏。府使雨女。嘉靖丁未月日。生公于高靈量田里第。幼穎悟有器量。無疾言遽色。在親側必擎跪惟謹。見者已知非常人。稍長從松庵學。日夕不離案。及舞勺駸駸有步趣。松庵授以性理近思等書。且曰於此着脚。方爲爲己之學。公退而與伯氏松溪公征邁益力。人稱金氏三君子。丙子宣傳公視疾。公竭誠扶護。及丁憂。致哀盡禮。戊寅內艱亦如之。値壬辰亂。列郡瓦解。松庵倡義旅。公貽書郭存齋言臣a331_305c子復讎之義。遂與郭公䞭,趙公宗道,文公緯同起兵。不旬月有衆數千。賊屯知禮金山,開寧界。號十萬。松庵與公引軍壁牛旨。賊盛其衆乘我。松庵與晉州牧使金時敏逆戰破之。又躙賊於鼎津大破之。又趕及於茂溪津。賊艘蔽江而來。松庵謂公曰但决一死耳。戰旣酣。松庵鼓不竭。公與諸將佐益用命。隕其大酋。獲賊器如山。公請于松庵。輸之方伯。俾上行在。上壯其績。拜松庵陜川郡守。拜公通訓大夫軍資監正。下書褒諭。松庵尋拜義兵大將。統一道軍。公居幕府累月。松庵謂公曰賊勢稍淨而家屬失所。我當誓a331_305d心討賊。君則歸護家屬。公泣曰演亦濫受恩爵。豈以家屬爲事乎。松庵曰保全家室。使余專意討賊。是亦不爲無助也。公遂聽命而行。松庵在陣時。公令家人供衣服不絶。松庵嘗曰吾有賢弟。亂中調濟。多此人之力也。癸巳松庵以節度使卒于軍中。公痛哭曰長城壞矣。奈此賊何。於是公與從子楓庵公弘遠。舁柩還新倉。遂挈家深入。更不赴亂。葢勢然也。亂定後移居蔚山昔南里。惟以承先業敎後生爲事。庚辰十一月五日。考終于家。享年九十四。葬于府南眞木負癸之原。配淑人興麗朴氏。萬戶元祐女。有婦德。亦卒于a331_306a是年。葬同壙。男長弘潤掌隷院判决事。次弘建訓鍊奉事出系。弘潤四男。景輝僉樞。以輝漢城左尹。宗輝,秀輝司圃別提。出系弘建後。曾玄以下不盡錄。後孫相珪,相英與其族人喜珠。請誌文於不佞。余惟公忠孝有大節。又得松庵爲之依歸。時平則講學受矩。時亂則蹈鋒贊籌。始終成就。卓卓然固其所也。藐後生辭不能摸擬德媺。諸君強不已。是爲銘。銘曰。
以是人生是家宜是嘉。可以引可以翼可以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