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완주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인민군 점령기에 완주에서는 미군의 폭격과 후퇴하는 인민군 측에 의해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미군폭격 피해>
1950년 9월 13일 오후 2시 미 전투기가 우전면 태평리(현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에 있는 주막집에 기총사격을 가해 주민 6명이 사망했다. 평상시 비행기가 마을 위를 지나다녔지만 주민을 공격한 날은 이 때 뿐이었다고 한다. 9월 25일에도 미공군의 폭격으로 조촌면 고랑리 주민 9명이 사망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인민군 후퇴시기 완주 동상면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동상면 신월리 주민 20여 명(주로 기독교인이었다고 함)이 9월 27일 면사무소 창고와 분주소로 연행되었다가 괴비소 골짜기, 동상지서 부근 밭, 동상국민학교 뒷산 등 다섯 곳에서 희생되었다. 시신은 다음날인 9월 28일 수습되었다.
가해자를 직접 목격한 주민은 없었으나 주민들은 빨치산 활동 중 사살당한 동상국민학교 교장 조모를 직접 가해자로 지목했다. 조모는 동상면 당부위원장으로 이 사건 후 금산방향으로 도주했으나 퇴로가 차단되어 마을로 되돌아 왔으며, 1952년 가을 처형당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사건들이 이서면과 비봉면에서도 있었다고 한다.
동상면은 산세가 험해 후퇴하는 인민군들이나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이 입산하였으며, 국군 11사단과 8사단의 토벌작전으로 주민들 피해도 많았다.
<11사단 사건>
완주에서는 수복 초기에 11사단 13연대가 고산면에 주둔하면서 동상면 일대에서 토벌 작전을 전개했다.
1950년 11월경 11사단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집을 태우는 등 소개작전을 벌이자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거나 산 속으로 피난을 다녔고 일부는 동상초등학교에서 피난해야 했다. 당시 동상면의 면소재지였던 신월리에서는 국군에게 잡히면 죽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으므로 젊은 사람들은 산속으로 피난을 다녔다.
당시 마을주변으로 피난을 다니던 주민들은 모두 빨치산으로 간주되었으므로 토벌 군인들에게 잡히면 현장에서 사살되거나 광주수용소로 끌려갔다. 반면, 실제 마을에서 희생된 사람들 대부분은 연로하여 피난하지 못한 여성이나 노인들이었다.
<8사단 사건>
1951년 4월 11사단의 임무가 8사단으로 교체됨에 따라 완주지역의 토벌작전도 국군 8사단이 계속하였다.
1951년 4월 24일 고산면에 주둔하던 8사단 군인들이 완주 동상면 신월리 원신마을에 들어와 70여 명의 마을 주민들을 고산면으로 끌고 갔다. 다음 날인 4월 25일 동상면 주민 42명 또는 48명이 경천리에 끌려와 양조장에서 며칠 감금되어 있다가 온천리 주민 일가족 4명이 그사이 풀려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한 곳에서 일시에 총살되었다.
당시 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이 이들 일렬로 세우고 총살하였고 그 자리에 매장했다. 같은 날, 완주 동상면 수만리 단지마을에서 피난을 가지 못하고 마을에 남아 있던 노인 3명이 군인들에게 희생되었다. 희생된 이들은 70~80대의 나이로 피난을 가기에 불편한 노인들이었다. 당시 치안대원으로 활동했던 김씨(김승옥)은 당시 소개명령을 받고도 마을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던 주민들은 토벌과정에서 살해당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이 사건에 대해 1951년 4월 24일자 8사단 21연대 1대대의 정기정보보고에 따르면, 1대대 2중대 3소대가 24일 오후 2시 신월리 원신마을과 약 1.5km 떨어진 CQ4681 인근에서 ’무(장공)비 30 비무(장공비) 39명을 발견하여 8명을 사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 후 동상국민학교에 남아 있던 노인과 어린이 등 30여 명의 주민들이 1951년 4월 29일 8사단 군인들에게 희생되었다. 당시 동상국민학교에 있던 마을 주민들이 모두 학교 앞에 있던 논에서 총살되었다. 당시 성판용이 유일하게 살아남았으나, 희생자들의 사망 여부를 확실히 하기 위해 군인들이 총살한 시신의 귀를 검으로 베어내었고, 성판용도 그 때 귀가 베여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국군 8사단은 1951년 4월 29일 7중대가 4월 29일 신월에서 31명으로 추산되는 빨치산을 사살한 것으로 KMAG에 보고했다.
이 사건에 대해 국군 8사단 21연대 1대대 소대장 유씨(유병권, 중위)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래서 현장을 가보니까 거기에 있던 우리의 배낭이나 식사해 놓은 것을 다 가지고 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지역으로 가서 도주해 가는 것을 기습을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잡았는데 실제 전투 병력은 잡지 못하고 노인하고 애들만 한 20명 잡았습니다. 부락민이 아니고 공비를 따라다니는 소속부대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상 완주지역에서 확인된 피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