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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原州 元氏 이야기
原州元氏 侍中公系 陰城公后參判公派 後裔 28世
原州元氏 侍中公系 中央宗親會 宗史硏究委員會
宗史硏究委員 元鍾石
℡.053-313-1691. 010-6517-1691.
wjs41328@hanmail.net
※<탁발원씨>와 운곡계 구보에 있는 동래에 대한 기록을 추가 했습니다.
※5월 8일, <양원설>에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大東韻府郡玉》에 있는 양원에 대한
기록도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삼계의 시조와의 관계도 기술해 놓았습니다.
※5월 10일, <양원설>에 보충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삼원설에 현재 삼계 시조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 올려놓았습니다.
※5월 18일 <간접인용>에 대하여 해명하였습니다.
일부의 어떤 독자는 이 글이 원주원씨의 시조에 대한 글인 줄로 알고 상당히 오해하고 있지만, 이 글은 시조에 대한 글이 아니고 글자 그대로 <원주원씨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리고, <간접인용>을 했다고 상당히 유식하게 꼬집는 분도 있지만 이는 상황을 잘 모르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글은 새로운 사실을 들고 나와 논쟁을 하고자 하는 학술 논문이 아닙니다.
그저 지금까지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못하던 그저 평범한, 이미 족보에 기록되어있는 내용을 알기 쉽게 정리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간접인용이 될 수 밖에 없지요.
우리 선조들이 고심하여 합의를 통하여 기록해 놓은 사실을 부정하고, 논쟁을 하기 위하여 새로운 사실을 원전을 들고 나와 부정하고 나서면, 詐文亂宗하고 辱及先祖하고, 또 다시 끝없는 논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하여 이미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최대로 활용하게 된 것입니다.
원주원씨의 이야기에는 <토원설>과 <동래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원주원씨에는 이야기가 참으로 많습니다. 시조가 셋분이시라는 삼시조(三始祖) 이야기, 원주 원씨가 두가지라는 양원설(兩元說), 삼계(三系)라 하여 원주원씨에는 양원(兩元)이 아니라 삼원(三元)이 있다는 이야기 등 참으로 복잡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체계를 갖추어 정리하고 설명하고자 합니다.
원주원씨(原州元氏)에는 양원(兩元)과 삼계(三系)가 있다고 합니다.
양원(兩元)이란 무엇입니까?
왜 양원(兩元)이 있게 되었습니까?
삼계(三系)란 무엇입니까?
왜 삼계(三系)가 있게 되었습니까?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서도 같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의문점을 해결하고자 여러 문헌을 탐독하였고, 직접 현지를 답사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여러 원로 종친들과도 이야기도 하면서 유추(類推)해낸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계속하여 현지 답사를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연구자가 처음으로 고안(考案)해 낸 아이디어이고, 이 이야기 내용에 대하여 권한(權限)과 책임(責任)은 연구자(硏究者)에게 있습니다.
<뒷이야기>
원씨(元氏)와 원주원씨(原州元氏)는 다릅니다.
우리 나라 원씨(元氏)에는 본관(本貫)이 원주(原州)로 하나뿐이기 때문에 흔히들 원씨(元氏)하면 원주원씨(原州元氏)를 말합니다.
그러나, 원씨(元氏)와 원주원씨(原州元氏)는 엄연히 다릅니다.
원씨(元氏)에는 원주원씨(原州元氏)가 포함(包含)되지만 원주원씨(原州元氏)에는 원씨(元氏)가 포함(包含)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김씨(金氏)와 김해김씨(金海金氏)와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김씨(金氏)하면 김해김씨(金海金氏), 경주김씨(慶州金氏) 등 모든 김씨(金氏)를 말하지만 김해김씨(金海金氏)하면 김해김씨(金海金氏)만 말하지 경주김씨(慶州金氏) 등 모든 김씨(金氏)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토원설(土元說)에 따르면, 원주원씨(原州元氏)란 토원(土元)과 당원(唐元)을 말합니다. 토원(土元)이란 원성백계(原城伯系)를 말하고 당원(唐元)이란 시중공계(侍中公系)와 운곡계(耘谷系)를 말합니다.
동래설(東來說)에 따르면, 원주원씨(原州元氏)란 진원(秦元)과 당원(唐元)을 말합니다. 진원(秦元)이란 원성백계를 말하고 당원(唐元)이란 시중공계(侍中公系)와 운곡계(耘谷系)를 말합니다.
더 넓게 나아가면 원씨(元氏)란 <원훤(元咺)>의 후손을 말하지만 세계의 모든 원씨(元氏)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원주원씨(原州元氏)라 하면 우리나라 원씨(元氏)를 말합니다.
이러하므로 원씨(元氏)와 원주원씨(原州元氏)는 다르게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쉽게 재미있게 전개(展開)하고자 합니다.
1.원씨(元氏)의 창세(創世) 이야기
원씨(元氏)의 동래설(東來說)을 이해하려면 먼저 원씨(元氏)의 성조(姓祖)인 <원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족보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먼저 <원훤>성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성씨(姓氏)의 기원(起源)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복잡하게 설명하고 있으나 그 중에서 가장 정확한 정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글은 우리 시중공계의 《을축보,1985》1권 부록에 있는 글입니다.
성(姓)은 혈족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이미 인류 사회가 시작되는 원시시대부터 있었다고 봅니다.
각 씨족은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기 명칭이 있었을 것이니, 그 명칭은 문자를 사용한 뒤에 성(姓)으로 표현하였을 것입니다.
동양에 있어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었으며 처음에는 그 들이 거주하는 지명(地名) 또는 산명(山名) 강명(江名)으로 성을 삼았다고 합니다.
『신농씨(神農氏)의 모(母)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강씨(姜氏)라 하고, 황제(黃帝)의 모(母)가 희수(姬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희씨(姬氏)라 하고, 순(舜)의 모(母)가 요허(姚虛)에 살았으므로 성을 요(姚)라 했다고 합니다.』
우리 원씨(元氏)도 대를 이어 살아온 <원현(元縣)>이란 지명을 따서 원씨(元氏)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강숙(康叔)>이 위(衛)나라 임금으로 봉후(封侯)가 되어(BC1112) 몇 대를 내려오다가 구대(九代) 무후(武侯)의 공자(公子) 한 분이 원현(元縣)에 봉관(封官)되어 그 현(縣)을 대(代)를 이어 다스렸다. 그때에 천자(天子)가 모든 국민에게 성씨(姓氏)를 정하여 공포하였는데 그 현의 이름을 따서 <원훤(元咺)>이라는 성명을 내렸다(BC633년).
※春秋 國名譜 BC480년 孔子著.』
『원씨(元氏)는 위(衛)나라 종실 <원훤(元咺)>대부의 후손이다. 그 선조가 <원(元)>에서 살았기 때문에 성을
원(元)이라 한 것이다. ※(孔子 著, ≪春秋≫, 第五卷, 紀元前629年.』
시중공계 ≪을축보,1985≫의 서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나다.
『.....원현(元縣)을 다스렸으므로 그 지명을 따서 천자(天子)께서 원(元)이라는 성(姓)을 사(賜)하시니 이 땅에 비로소 원씨(元氏)가 발상(發祥)하였으며 시조는 위(衛)나라 대부인 <원훤(元咺)>이시다.........일천여년(一千餘年)의 문적(文蹟)이 없어서 가(可)히 고증(考證)을 할 길이 없다.』
<뒷이야기>
『중국에서는 元氏의 첫 출발을 , 청나라 때 유명한 고증학자였던 고염무의 고찰에 따라 商(즉 殷나라) 때의 재상이었던 '元銑'이란 인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춘추전국시대의 인물인 '원훤'은 어떤 기록에 의하면 元氏가 아니라 복성이었다는 견해도 있지요.』
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원씨의 성조에 대하여서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는게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주장이나 견해에 불과하고, 하나의 학설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중공계나 운곡계에서는 물론 삼계 합보 족보편찬위원회에서도 이미 <원훤>성조론(姓祖論)에 합의한 사항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시중공계 《을축보, 1985》1권 85쪽과 <원용석(元容奭)> 중앙종친회 회장이 근서(謹書)한 서문에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는 왕실의 성으로 100여 가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중 <원씨>도 왕실의 성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로는 <원씨>는 없어졌다고 합니다.
진시황(秦始皇)이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지방의 왕국을 폐쇄하여 왕족을 일반 백성으로 만들어버렸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왕족인 원씨가 일반 백성으로 되어버렸으니 없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에 들어가면 중국에 <원씨> 성이 뜬다고 하는데 아직 확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탁발(拓拔) 원씨(元氏)도 이야기가 있는데 우리 원주원씨(原州元氏)와는 관계가 없는 것 같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아서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탁발(拓拔) 원씨(元氏)> 이야기
시중공계 ≪을축보(乙丑譜), 1985≫ 1권 p.105에 보면 탁발(拓拔) 원씨(元氏)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원씨(元氏)가 성(姓)을 얻은지 약 1200년 후인 후위(後魏) 태화(太和) 20년(서기496년)에 효문제(孝文帝) 탁발홍(拓拔弘)이 다시 그 성(姓)을 원씨(元氏)로 하였으며《魏書高祖記》, 남종건덕(南宗乾德) 5년(서기967년)에 남성인(南城人) 오월(吳越)의 제상인 위덕소(危德召)가 다시 성(姓)을 원씨(元氏)로 하였으나《氏族博考》, 그 들은 모두 선비족(鮮卑族=몽고족과 퉁구스족의 혼혈로 유목민족)들이다.』
탁발(拓拔) 원씨(元氏)는 <원훤(元咺)>의 후손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뒷이야기>
시중공계 중앙종친회 홈페이제 연구자가 올린 <原州元氏 이야기>에 (2011년 06월 06일-wonsihin) 다음과 같은 댓글이 올라와 있습니다.
『중국 여행중 절강성과 천진에서 한족 원씨를 만났음. 서로 반가워 천진 원씨와 교류하며 함께 중국 인터넷에서 원씨를 찾아보았으며 우리 족보의 내용과 같이 기술되어있어 감동스러웠으며, 조상의 풍습 또한 같음을 알게되었읍니다. 천진 징하이 농촌지역에 원가들이 모여 살고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선조가 누인지, 시조가 누구인지를 확인하지 못한 것입니다.
후에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현재 인터넷에 뜨는 <元氏>는 <元咺>의 후손이 아니고, <拓拔 원씨>라고 하기도 하나 확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씨에 대한 중국의 통계표에는 왕족인 <원씨>는 기록에 있으나 후손은 없다고 합니다.
<시중공계(侍中公系)와 관계>
시중공계(侍中公系)에서는 <원훤(元咺)>을 성조(姓祖)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근거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기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중공계 《을축보,1985》이권(二卷)의 자손록(子孫錄)에는 일세(一世) 시조(始祖)에 <원익겸(元益謙)>이라 기록해 놓고 성조(姓祖)인 <원훤(元咺)>에 대한 기록은 한 줄도 없습니다.
마침 최근에 시중공계에서 ≪가승(家乘)≫을 발견하였는데, 이를 인정하면 이를 근거로 하여 <원훤(元咺)>성조(姓祖)와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원주원씨(原州元氏)의 연원(淵源) 이야기
원주원씨의 연원(淵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토원설(土元說)>과 <동래설(東來說)>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연구자가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유추(類推)한 이야기입니다.
토원설(土元說) 이야기
원주원씨(原州元氏)의 기원(起源)에 대하여 원씨(元氏)가 중국에서 동래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토박이 원씨(元氏)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를 두고 토원설(土元說)이라 한다고 합니다.
<원훤(元咺)>대부의 후손인 <원경(元鏡)>대부가 당(唐)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동래(東來)하여 원주(原州)에 입향(入鄕)하였을 때에는 이미 원주(原州) 지방에는 원씨(元氏)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후세에 내려오면서 이미 원주에 살고 있는 원씨를 <토박이 원씨> 즉 <토원(土元)>이라하고 <원경(元鏡)>대부의 후손을 당(唐)나라에서 동래(東來)했다고 하여 <당원(唐元)>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토원(土元)>이 원씨(元氏)의 성조(姓祖)이신 <원훤(元咺)>대부의 후손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되고 있으니, 이를 주장하기 위하여 <토원설(土元說)>이 등장한 것입니다.
중국의 역사에 대하여 이해가 부족하던 우리 선조들은 이 <토원설(土元說)>을 믿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어떤 지방에서는 <당원(唐元)>이라 하지 않고 중국에서 동래했다고 믿어 <당원(唐元)>을 <중원(中元)>이라고도 하고, 이미 우리나라에는 원씨들이 살고 있었으니 이를 <토원(土元)>이라 했다고 합니다.
원성백계(原城伯系)의 1차 족보 서문에
『이제 우리 북원원씨(北原元氏)는 <진한(辰韓)>으로부터 일어나......』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동래설(東來說)을 부정하고 토원설(土元說)을 주장하는 기록이 됩니다.
원씨(元氏)는 중국에서 동래(東來)한 것이 아니라, 진한(辰韓)에서 일어났으니 진한원씨(辰韓元氏)라 하기도 합니다. 후에 원성원씨(原城元氏)라 하다가 원주원씨(原州元氏)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원성백계의 족보 ≪갑오보(甲午譜), 1974≫ 표지에는 <原城元氏 族譜>라고 기록해 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주원씨가 진한(辰韓)에서 일어났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 아주 큰 약점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원씨(元氏)라 했는지 그 근거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토원설(土元說)을 뒤집을 수 있는 동래설(東來說)이 등장하게 됩니다.
<뒷이야기>
토원설(土元說)에 근거하면 우리나라 원씨(元氏)는 중국에서 동래한 것이 아니라 진한(辰韓)에서 일어나 진한원씨(辰韓元氏)로서 후에 원성원씨(原城元氏), 원주원씨(原州元氏)로 이어지는 진정한 우리나라 토원(土元)이니, 원성백계(原城伯系)는 토박이 원씨(元氏)로서 원주원씨(原州元氏)이니 시조는 <원극유(元克猷)>이고, <원경(元鏡)>대부는 당(唐)나라에서 동래(東來)하였으므로 당원(唐元)의 시조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토원설(土元說)을 인정하면 원성백계(原城伯系)는 원씨(元氏)의 성조(姓祖) <원훤(元咺)>의 후손임을 부정하게 됩니다.
<시중공계(侍中公系)와 관계>
시중공계(侍中公系)는 전설에 의하면 당원(唐元)이라고만 전해오고 있습니다.
당원(唐元)이라고 하지만 그 시조가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었는 것 같습니다.
창하(蒼霞) <원경하(元景夏)>공께서 처음 족보를 만들 때에도 시조가 누구인지 몰라 안타까워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최근에 발견한 시중공계의 ≪가승(家乘)≫의 기록에 보면 시조 <원익겸(元益謙)>을 <원경(元鏡)>대부의 후손으로 기록해 두었기 때문에 시중공계(侍中公系)는 토원(土元)이 아니고 당원(唐元)임을 증명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중공계는 토원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3.원씨(元氏)의 동래설(東來說) 이야기
원주원씨(原州元氏)의 기원(起源)은 <원훤(元咺)>의 후손이 동래(東來)하여 일어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원주원씨(原州元氏)의 기원(起源)에 대한 동래설(東來說)이라 합니다.
≪전고대방(典故大方)≫에 보면 원씨의 동래(東來)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원씨는 위(衛)나라 종실 <훤(咺)>의 후손이다. 선조가 원읍(元邑)이란 고을에 채읍(采邑)을 봉(封)받아 대를 이어 살아온 인록으로 그를 성(姓)으로 삼았다. ○후손이 중국에서 스스로 동쪽 우리나라로 옮겼다(其後孫自中國東來).』
최근에는 운곡계에서 시조 단비를 세우고 설단기(設壇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周)나라 문왕에서 계출하여 위(衛)국정경이신 원훤대부께서 원씨로 사성된 이래 공족으로서의 정통을 연면히 이어오고 있다. 당태종 정관17년 단기2976년 계묘에 이 땅에 동래(東來)하신 휘경(諱鏡)을 시조로 모시니.... 』
이와 같이 원씨(元氏)의 성조(姓祖) <원훤(元咺)>대부의 후손이 우리나라로 동래(東來)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하여 토원설(土元說)을 부정할 수 있고, 원주원씨(原州元氏)에는 양원(兩元)이 있다는 양원설(兩元說)을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양원(兩元)이란 토원(土元)과 당원(唐元)을 말한다고 하나 이는 옛날 이야기이고, 지금은 양원(兩元)이란 진원(秦元)과 당원(唐元)을 말합니다.
진원(秦元)이란 <원극유(元克猷)>의 후손을 말하고, 당원(唐元)이란 <원경(元鏡)>의 후손을 말합니다.
<원훤(元咺)>의 후손이 두 번에 걸쳐 우리나라로 동래(東來)했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가 진원(秦元)의 동래설(東來說)이고 두 번째가 당원(唐元)의 동래설(東來說)입니다.
진원(秦元)의 동래설(東來說) 이야기
진원(秦元)이란 <원극유(元克猷)>의 후손을 말합니다. 흔히들 토원이라 알려져 있지만 토원(土元)이라 하면 토박이 원씨로써 <원훤(元咺)>의 후손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 되므로 토원이라 하지 않고 진원(秦元)이라 합니다.
<평장사공계(平章事公系-耘谷系)> 족보(族譜) 이차(二次,1767) 간행 서문 서두에서
『≪삼한기(三韓記)≫에 가로되 중국 진(秦)나라 사람이 도망해서 한(韓)나라로 들어오니 한(韓)나라에서 동쪽 지경을 나누어 주었으니 여기가 진한(辰韓)이 되었고 십이국(十二國) 골을 통치하였으니 원주(原州)도 여기에 속된 골이다. 원씨(元氏)가 또한 이 시기에 난리를 피하여 도망하여 왔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 BC213) 사건 때에 우리나라 진한(辰韓)으로 피란 온 진(秦)나라 선비들 중에 원씨(元氏)가 한 사람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손이 <진한원씨(辰韓元氏)>로서 후에 원성백계(原城伯系)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성백계(原城伯系)는 진원(秦元)이 됩니다.
후에 <원극유(元克猷)>가 고려 개국 일등공신이 되니, 원주원씨(原州元氏)는 고려화벌(高麗華閥) 명문가(名文家)로 부상(浮上)합니다.
<뒷이야기>
고려(高麗)를 개국한 <왕건(王建)>이 고려개국 일등 공신들에게 여러 성(姓)을 사성(賜姓)했다고 하지만 원주원씨(原州元氏)를 사성(賜姓)했다는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왕건(王建)>이 원씨(元氏) 성(姓)을 사성(賜姓)하지 아니한 것은 이미 옛날부터 원씨(元氏) 성(姓)을 사용해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라 유추(類推)할 수 있습니다.
<시중공계와 관계>
시중공계(侍中公系)와 원성백계(原城伯系)는 어떤 관계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시중공계(侍中公系)와 원성백계(原城伯系)와의 관계를 기록한 책이 있습니다. 이를 ≪화벌보(華閥譜)≫라 합니다.
<원극유(元克猷)>와 <원익겸(元益謙)>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기록해둔 책은 ≪화벌보(華閥譜)≫가 유일합니다. 이 책에는 <원익겸(元益謙)>을 <원극유(元克猷)>의 후손으로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원성백계에서는 이 ≪화벌보(華閥譜)≫를 인정하지 아니합니다. 원성백계 족보와 비교해 보면 <원극유(元克猷)> 이외에는 일치하는 휘(諱)가 하나도 없습니다.
최근에는 이 ≪화벌보(華閥譜)≫에 대하여 선산(善山) 김씨 대종회에서 학술 강연까지 하면서 깊이 연구한 사실이 있으나 이를 인정하는 데는 다음과 같이 신중을 기하고 있습니다.
『이 책(화벌보)에 있는 우리 선조(선산 김씨의 실전한 선조의 휘)의 사실을 보다 확실한 고증 없이 그대로 수록하면 사문난종(詐文亂宗)하고 욕급선조(辱及先祖)함은 물론 그 종책(宗責)이 자손마대까지 미침을 알아야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화벌보(華閥譜)≫로 원성백계와 시중공계와의 관계를 설명하기에는 무리일 것 같습니다.
당원(唐元)의 동래설(東來說) 이야기
당원(唐元)이란 당(唐)나라에서 동래(東來)한 <원경(元鏡)>대부의 후손을 말합니다. 지방에서는 중국에서 동래했다고 하여 중원(中元)이라고도 합니다.
운곡계의 《丙子譜?, 1936?》에는 다음과 같은 <원경(元鏡)>의 동래(東來)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高麗光宗十一年以太學士奉使東來時池辛洪郭張李河八鏡同來』
고려 광종11년에 태학사가 東來할 때에 <(元), 池, 辛, 洪, 郭, 張, 李, 河> 8鏡이 함께 東來했다.
시중공계(侍中公系)의 ≪乙丑譜, 1985≫에는 다음과 같은 <원경(元鏡)>의 동래(東來)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기원전633년에 주(周)나라 천자가 처음으로 <원훤(元咺)>이라는 성명을 내렸으니 이것이 원씨(元氏) 창세(創世)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중략>
그 후로 약1300여년 동안 중국에서 그의 자손이 번성하였는데 당(唐)나라 태종(643) 때에 평장사공 <원경(元鏡)>이 고구려로 파견되어 우리나라 원씨의 시조가 되었다. ※(原州元氏族譜編纂委員會)』
《乙丑譜, 1985》, 1권, p.85.
원주원씨(原州元氏) 양원(兩元) 삼계(三系)가 합의를 하여 합보하기로 결정하고 쓴 원주원씨원사(原州元氏源史)의 첫머리라고 생각됩니다.
<원경(元鏡)>의 동래설(東來說)을 인정하고, 원주원씨(原州元氏)의 시조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뒷이야기>
운곡계(耘谷系)는 <원경(元鏡)>이 시조라는 ≪구보(舊譜)≫를 발견하자 바로 <원극부(元克富)>시조를 취소하고 <원경(元鏡)>을 시조로 바꾸고, 족보도 ≪原州元氏 唐元 平章事公系 世譜≫로 고쳤습니다. <耘谷>의 비문에 보면 시조는 <원극부(元克富)>라고 각자(刻字)해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운곡계(耘谷系)를 평장사공계(平章事公系)로 고쳐 불러야 합니다.
<평장사공계(平章事公系)와 시중공계(侍中公系)>
평장사공계(平章事公系)의 ≪구보(舊譜)≫와 시중공계(侍中公系)의 ≪가승(家乘)≫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세(二世)에 와서는 시중공계(侍中公系)와 운곡계(耘谷系)는 다 같이 장남(長男) <정립(貞立)>의 후손이나, 삼세(三世)에 내려오면 시중공계(侍中公系)는 장손(長孫) <희적(稀跡)>의 후손이고, 운곡계(耘谷系)는 차손(次孫) <희영(稀英)>의 후손입니다.
그러므로 시중공계는 <원경(元鏡)>시조의 큰집(맏집)이 되고 시중공계(侍中公系)가 <원경(元鏡)>시조의 사손(祀孫)이 된다는 것입니다.
<뒷이야기>
시중공계(侍中公系)는 <원경(元鏡)>의 장손(長孫)인 <희적(稀跡)>의 후손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운곡계(耘谷系)의 일부에서는 크게 반발하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기록을 근거하여 따져야지 감정이나 기분으로 따질 문제가 아니 것 같습니다.
1985년경 삼계(三系) 합보(合譜)를 만들 당시의 유고(遺稿)에 보면 <원경(元鏡)>을 일세(一世) 시조로 기록하고 육세(六世) <영조(永祖)>의 후손으로 시중공계를 끼워 넣기 방식으로 기록해 두었습니다.
시중공계(侍中公系)의 일부에서는 이와 같이 적당히 아무데나 끼워 넣기식으로 계대(繼代)를 기록한 것에 대하여 크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확실한 근거도 없이 적당히 끼워 넣기식으로 족보를 만든다면 사문난종(詐文亂宗)하고 욕급선조(辱及先祖)할 우려가 있다고 합니다.
4.원주원씨(原州元氏)의 양원설(兩元說)
양원(兩元)이란 진원(秦元)과 당원(唐元)을 말합니다.
동래설(東來說)에 따르면 <원훤(元咺)>의 후손이 먼저 진한(辰韓) 때에 <진(秦)>나라에서 동래(東來)한 후손을 <진원(秦元)>이라 하고, 그 후에 <당(唐)>나라에서 동래(東來)한 <원경(元鏡)>의 후손을 <당원(唐元)>이라 한다고 합니다.
토원설(土元說) 따르면 양원(兩元)이란 토원(土元)과 당원(唐元)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전설에 따르면 양원(兩元)이란 토원(土元)과 당원(唐元) 또는 중원(中元)을 말합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양원(兩元) 또는 이원(二元)이라고 하여 운곡계(耘谷系)와 시중공계(侍中公系)라는 기록도 있고, 원성백계(原城伯系)와 시중공계(侍中公系)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시중공계의 ≪을축보,1985≫ 1권의 ≪원주원씨 세보 발문, 1743, 元命揆 지음≫에는
『본관은 같지만은 종족(宗族)은 같지 않아서 족보상에 시조를 각기 달리 쓰면서 수십여 세대를 내려오고 있다.
其貫雖同而其宗不同各其譜牒書式至今數十餘世....』
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를 미루어 짐작해보면 이미 옛날부터 양원(兩元)에 대한 전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운곡계와 시중공계
양원(兩元)이란 용어는 <운곡(耘谷)> 비문에
『孺人元氏 宗簿令廣明之女 非一元族氏 以爲原有兩元是也.
(孺人은元氏이니 宗簿令 <廣明>의 따님이라, 한가지 원씨가 아니고 원주의 원씨가 둘이 있다고 한 것이 이를 이름이다.)』
라고 최초로 나타납니다.
이 비문에는 시조는 <원극부(元克富)>라고 각자(刻字)되어 있고, 양원(兩元)이란 운곡계(耘谷系)와 시중공계(侍中公系)를 말하는 것인데, 서로 타성(他姓)이라는 각자(刻字)입니다.
<원극유>파와 <원유염>파
<권문해(權文海)> 저(著) 조선시대 최대의 백과사전인 ⟪大東韻府群玉(1589)⟫의 卷之四 三四內面에 보면 원주원씨(原州元氏)에는 양원(兩元)이 있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성씨(姓氏) 항(項)에 ⌜姓氏-原州有二派新羅末元克猷始事麗太祖爲兵部令又有判吏部尙書元惟琰之後一元與否不可考⌟란 기록이 있으니 간단히 요약하면 원주원씨에는 二파가 있고 <元克猷>파와 <元惟琰>파이나 이 양파가 ⌜一元與否不可考⌟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元惟琰>파란 시중공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원주원씨에는 원성백계와 시중공계의 양원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토원과 당원
최근에는 <원세동(元世東)>선생이 ≪原州元氏侍中公派始祖考證≫에서 양원(兩元)에 대한 전설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토원(土元)과 당원(唐元)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운곡계는 당원
1984년도 평장사공계의 족보 표지에 ≪原州元氏 唐元 平章事公系 世譜≫라고 기록하여 처음으로 양원(兩元)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시중공계는 당원
<원성백계(原城伯系)>는 진원(秦元)이라 하고, <평장사공계(平章事公系)>를 당원(唐元)이라 자처하는데, <시중공계(侍中公系)>는 당원(唐元)으로 전하여 오고 있습니다.
<뒷이야기>
진한(辰韓) 시대에는 아직 성씨가 없던 시대라 토원(土元)이나 진원(秦元)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양원에 대한 용어는 <운곡(耘谷)>선생 이후에 생긴 용어라 보면 그러한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게 됩니다.
〈시중공계와의 관계〉
시중공계(侍中公系)는 <원경(元鏡)> 시조의 후손으로서 당원(唐元)이 된다고 합니다.
시중공계 ≪을축보,1985≫ 1권 85쪽에 보면 원주원씨의 시조는 <원경(元鏡)>이라 기록해 놓고, 2권의 자손록(子孫錄)에는 일세(一世) 시조에 <원익겸(元益謙)>이라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래서 <원경(元鏡)>과 <원익겸(元益謙)>과는 어떤 관계인지 알 수가 없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최근에 발견한 시중공계의 ≪가승(家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가승(家乘)≫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원경(元鏡)>과 <원익겸(元益謙)>과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원주원씨(原州元氏)의 삼계(三系)와 삼원(三元) 이야기
원주원씨(原州元氏)에는 삼계(三系)가 있습니다.
이 삼계(三系)는 시조(始祖)도 다르고 족보(族譜)도 모두 서로 다릅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시조(始祖)가 다르니 삼계(三系)가 아니라 삼원(三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삼계란 원성백계(原城伯系)와 시중공계(侍中公系), 운곡계(耘谷系)를 말합니다.
진(秦)나라에서 동래(東來)한 원씨(元氏)를 진원(秦元)이라 하고 원성백계(原城伯系)가 됩니다.
당(唐)나라에서 동래(東來)한 원씨(元氏)를 당원(唐元)이라 하고 시중공계(侍中公系)와 운곡계(耘谷系)가 됩니다.
이 삼계(三系)는 시조(始祖)도 다르고 중앙종친회도 다르고, 시조제(始祖祭)도 시조(始祖) 설단(設壇)을 따로 만들고 모두 따로 지내고 있습니다.
<뒷이야기>
최근에는 이 삼계(三系) 합보(合譜)를 추진하고 있으나, 원주원씨(原州元氏)의 원사(源史)에 대하여 먼저 합의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토원설(土元說)로 합의를 하면 이 토원설(土元說)에 근거하여 삼계(三系) 원사(源史)를 쓰면 될 것이고, 동래설(東來說)에 합의를 하면 이 동래설(東來說)에 따라 원사(源史)를 쓰고 토원설(土元說)이나 동래설(東來說)에 맞추어 자손록(子孫錄)을 쓰면 될 것이라 사료(思料)됩니다.
<시중공계(侍中公系)와 관계>
최근의 시중공계 ≪을축보(乙丑譜), 1985≫는 원주원씨(原州元氏)의 원사(源史)와 자손록(子孫錄)은 서로 일치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원주원씨(原州元氏) 원사(源史)를 토원설(土元說)이나 동래설(東來說)에 맞추어 써야 하고, 여기에 근거하여 자손록(子孫錄)을 쓰면 될 것이라 사료(思料) 됩니다.
<현황(現況)-삼계(三系)와의 관계>
운곡계(耘谷系)
운곡계(耘谷系)의 최근의 족보 표지에는 <原州元氏 唐元 平章事公系 世譜>라고 인쇄해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원경(元鏡)>은 당원(唐元)의 시조가 됩니다.
원성백계(原城伯系)
원성백계(原城伯系) 시조 단비(壇碑)에는 <원극유(元克猷)>를 원주원씨(原州元氏) 시조(始祖)라고 각자(刻字)해 두었습니다.
시중공계(侍中公系)
시중공계(侍中公系) 시조 단비(壇碑)에는 <원익겸(元益謙)>을 시중공계(侍中公系)의 시조라고 각자(刻字)해 두었습니다.
현 상황이 이러하므로 <원경(元鏡)>은 당원(唐元)의 시조이고, <원극유(元克猷)>는 원주원씨(原州元氏)의 시조요, <원익겸(元益謙)>은 시중공계(侍中公系)의 시조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
이상과 같이 원주원씨(原州元氏)의 양원(兩元)과 삼계(三系)에 대하여 이해하려면 토원설(土元說)보다 동래설(東來說)을 인용하여 설명하면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侍中公系 陰城公后參判公派 28世
宗史硏究委員 元鍾石
첫댓글 "성씨의 기원"에서 기원은 "起源"입니다.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저의 9대조님 (諱 '景'字 "夏"字)의 호는 "倉荷"가 아니라 "蒼霞"(蒼 푸를 창, 霞 놀 하) 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元氏의 첫 출발을 , 청나라 때 유명한 고증학자였던 고염무의 고찰에 따라 商(즉 殷나라) 때의 재상이었던 '元銑'이란 인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춘추전국시대의 인물인 '원훤'은 어떤 기록에 의하면 元氏가 아니라 복성이었다는 견해도 있지요. 아무튼 단순하게 생각하고 판단할 문제는 아니란 점을 일단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 중국에서의 元氏 즉, 元姓의 출발이 언제 어떤 인물에 의해서 이뤄졌든 그 인물이 바로 한반도에서의 원씨(元氏)의 출발은 아니라는 점을 또한 명확히 해야 할 것입니다.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이며(이어서)
하루 아침에 모든 종원이 만족할만한 결론이 날 수는 없는 문제라 생각합니다.
결론이 날 문제가 아니고, 시중공계에서는 이미 확정하여 이를 자세하게 족보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만 중요한 원칙이 되어야 하는 점은,
ㄱ) 타당하고 합리적인 시각에서 판단해야 한다.
ㄴ) 선조님들의 견해 역시 가벼이 할 수 없다.
ㄷ) 18~19세기에 자기네 성씨에 대한 과장된 치장을 하던 당시의 분위기를 십분 파악하고 이런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러한 몇 가지 원칙을 먼저 확인해 둬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 원칙 자체를 우리 종사연구위원들이 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는 누누구나 다알고 있는 원론적인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연구의 원칙을 먼저 정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 원칙을 씨줄로, 문헌이나 기타 다양한 고증 또는 학문적 접근 자세 등을 날줄로 삼아 시조에 대한 문제에 접근해 가야 하리라 봅니다.
너무 성급하거나 해서는 문중 내부의 분란만 야기할 뿐이란 말이지요. 올바른 접근 자세를 먼저 세우고 서로가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야 "소모적일 뿐 아무런 득도 없는 분란"을 초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는 어느누구나 다하고 있는 원칙입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연구하여 발표할 권리가 있고, 누구는 누구는 안된다는 그런 것은 없을 것이고, 판단은 독자가 할것이고, 이것은 독자의 권리일 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연구자가 처음으로 고안(考案)해 낸 아이디어이고, 이 이야기 내용에 대하여 권한(權限)과 책임(責任)은 연구자(硏究者)에게 있습니다. 그저 이야기 정도로 가볍게 쓴 것이므로 너무 예민하게 받아드리지 마시고 그 저 그런 이야기 정도로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생각하는 밥법은 사람마다 다르므로 어느 것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모르는것이 너무 많아 자주 와서 조상 공부를 하야야 겠습니다
원칙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은 자꾸자꾸 그 원칙이 무시당하고, 이리저리 휘둘리기 때문이지요. 어떤 연구든 그 방향성을 잡지 않을 수 없으나, 방향이 섰다고 해서 근거나 논리가 흔들리거나 무시되어선 안되지요.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옛 선인들의 기록 원문을 직접 인용하는 작업, 다시 찾아 확인하는 작업을 통해 재삼재사 간접인용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좋은 말씀인데요. 무언가를 많이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학술 논문이 아닙니다. 이 카페는 그저 이야기를 하자고 모인 카페입니다. 학술 논문을 발표하는 그러한 카페가 아닙니다. 박사님이 보시기에는 모자라는 것이 많겠지요. 그러나 언중유골이라고 그 속에는 뼈가 있습니다. 간접인용을 했다고 꼬집는데 그럼 박사님께서 그 원칙에 맞추어 논문을 올려보세요.
이 글은 말씀 그대로 "~이야기"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와 같은 "이야기'에 대한 언급이 아님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다만 본격적인 논의를 위한 글에서는 그리 해야 하지 않을까를 말씀드린 것이고요. 한 가지 덧붙일 것은 글을 쓸 때마다 원문인용은 사실 힘드니 원문을 모아서 그대로 영인(복사 포함)하여 번역문과 곁들여서 함께 묶어서 자료집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시급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그래야 편하게 "자료집 몇 쪽 어떤 내용" 이렇게 밝히면 원문과 우리말이 있으니 모두가 보기 쉽고 오해의 소지도 적어지리라 봅니다. 그러면 후대에도 잘 활용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알게되어 너무 감사합니다
이해는 잘 안되지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