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교회
우리는 앞 장에서 자유주의 신학뿐 아니라 기독교도 사회 제도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살펴봤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제도를 아직 다루지 않았다. 그것은 교회라는 제도다. 잃어버렸던 영혼이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으면, 그들은 기독교 교회에 연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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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서 미묘한 개인적 질문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저런 개인이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를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질문은 오직 하나님만이 결정적으로 답할 수 있다. 어떤 ‘자유주의자들’ 각자의 그리스도를 향한 태도가 구원을 얻는 믿음인가 아닌가를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자유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분명하다. 사태가 그러하므로, 자유주의 신학과 기독교가 동일한 기관의 테두리 내에서 계속 증식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지 못하다. 교회 내에 존재하는 이 두 파의 분리는 현실적으로 절박한 요구다.
많은 사람이 분리를 피할 방법을 찾고 있다. 그들은 왜 형제들이 연합해 동거할 수 없느냐고 묻는다. 또한 그들은 교회 내에는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모두를 위한 공간이 있다고 말한다. 보수주의자들이 사소한 일들은 뒤로 미루고 “율법의 더 중한 바”에 주로 집중한다면 교회 내에 남을 수 있다고도 한다. 그런데 ‘사소한’ 것들이라고 지칭된 그 속에, 죄를 진정으로 대속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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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 상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유주의 신학은 그것이 참되든 거짓되든 단순한 ‘이단’이 아니다. 즉, 기독교적 가르침의 몇 가지 요소에서 빗나간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주의 신학은 전혀 다른 뿌리에서 나왔으며, 본질적으로 자체의 통일된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자유주의 신학자가 자유주의 신학의 모든 요소를 다 받아들인다는 말은 아니다. 또한 자유주의 신학의 어떤 한 가지 요소에 동의한 그리스도인이 자유주의 신학의 모든 요소에 동의했다는 말도 아니다. 모든 것이 논리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사람이 믿음의 한 부분을 포기했다고 해서 그의 믿음 전체가 파괴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적 움직임을 검토할 수 있는 참된 방법은 논리적 관계 속에 있다. 논리는 큰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어떤 생각의 논리적 함의는 조만간 일어나게 돼 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현재 존재하고 있는 자연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은 상당히 통일된 독립적 체계를 가진 현상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독교 신앙의 논리적 잔재를 자체의 체계 속에서 점점 제거해 나가게 될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 인간, 권위의 자리, 구원에 관해 기독교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것은 신학에서만이 아니라, 삶 전체에서도 기독교와 다르다. 때로 생각의 교제가 사라진 곳에도 감정의 교제는 있을 수 있다고, 즉 머리의 교제와 구별되는 심장의 교제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 논쟁 상황에는 그런 구분이 적용되지 않는다. 도리어 그렇게도 죄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고, 죄 있는 인간성에 관한 아무런 동정심이 없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소중한 것들을 그렇게도 함부로 다루고 비웃는 최근 자유주의 설교자들 책을 읽거나 설교를 들어보면,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 교제 속으로 들어오려면 지성의 변화만큼 완전한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변화를 하나님께서 일으키시기를! 그러나 현재 상황이 무시돼서는 안 되며, 직접 대면해 처리돼야 한다. 기독교는 뼛속까지 반기독교적인 운동에 의해 내부로부터 공격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무엇일까? 특히 교회 안에서 책임을 맡은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무엇일까?
첫째, 그들은 지적, 영적 전투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격려해야 한다. 기독교를 변호하는 일보다는 기독교를 전파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ㅡ어떤 평신도들은 이런 의미로 말하는 듯하다ㅡ말해서는 안 된다. 당연히 기독교를 전파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신자라면 당연히 공격을 막는 일로만 만족해서는 안 되고, 질서 있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복음의 충분한 부요를 드러내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변호는 덜 하고 전파를 더 많이 할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그 훨씬 이상의 것을 의미할 때가 많다. 그들이 정말로 의도하는 것은 복음을 지적으로 변호하는 활동 전체를 그만두게 하려는 것이다. 또한 그들 말은 큰 전투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 얼굴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사실은 복음의 변호에 더 많은 시간이 사용돼야 한다. 진리는 오류에 대비되지 않고서는 선명하게 제시되지 못한다. 실제로 신약성경 많은 부분이 논쟁으로 돼 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난 오류들 때문에 복음적 진리가 선포됐다. 일은 항상 이렇게 진행될 것이다. 이는 인간 마음의 근본 법칙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현재 위기를 계산에 넣어야 한다. 기독교를 변호하지 않고도 전파할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날은 지나갔다. 복음의 반대자들이 교회를 거의 장악한 지금, 복음의 변호를 조금이라도 피하는 것은 순전히 주님을 향한 불충성일 뿐이다. 거의 오늘날 위기에 비교될 만한 큰 위기가 과거 교회사에 있었다. 그중 하나가 2세기에 있었는데, 영지주의자들에 의해 교회 생명 자체가 위협을 받았다. 또 다른 위기는 하나님 은혜의 복음이 거의 잊힌 중세에 있었다. 그런 위기 때 하나님께서는 항상 교회를 건지셨다. 그러나 신학적 평화주의자를 사용해서 건지신 것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 싸우는 끈질긴 논쟁자들을 사용해 건지셨다.
둘째, 교회 안에서 책임을 맡은 그리스도인들은 사역 신청자들의 자질을 판단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하는가, 그리스도께 대적하는가?” 하는 질문이 안수 신청자들 심사 과정에서 끊임없이 일어나야 한다. 이 문제를 애매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때로 있어 왔다. “신청자들이 진리의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그를 보내서 선포할 뿐 아니라 배우게도 하자.”고 말하곤 했다. 이렇게 해서 복음의 또 다른 반대자가 교회 회의에 들어오고, 또 다른 거짓 선지자가 죄인들에게 자기 의라는 비참한 누더기로 자신을 감싸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나아가라고 용기를 주고 있다. 그런 행동은 실제로는 신청자 자신에게도 ‘친절한’ 것이 아니다. 부정직한 생활로 들어가도록 격려하는 것은 절대로 친절한 일이 아니다. 복음적 교회가 순전히 자발적 단체라는 사실을 자주 망각하는 것 같다. 어떤 사람에게도 그 단체에 들어와 봉사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런 교회의 신념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는 다른 교회 단체에서 자기를 위한 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장로교회 신념은 신앙고백에 명시돼 있는데, 그 교회의 목사들이 온 마음으로 그 신념에 동의할 때까지 교회는 따뜻한 교제도 힘찬 활동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을 위해 철저히 거짓된 친절을 베풀고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향한 자기들 충성을 기꺼이 포기하는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셋째, 교회 안에서 책임을 맡은 그리스도인들은 회중의 일원이라는 위치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보여야 한다. 이 문제는 목사를 선택하는 일과 관련해 자주 일어난다. 이런저런 사람이 놀라운 설교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의 설교 내용이 무엇인가? 그의 설교가 그리스도 복음으로 충만한가? 대답은 종종 애매하다. 그 문제의 설교자가 교회 내에서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으며, 교리 혹은 은혜를 부인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 까닭으로 그가 목사직으로 초청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 소극적 확신으로 만족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 십자가를 단지 ‘부정하지 않는’ 정도의 설교자로 만족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그런 만족감을 허물어 버리시기를! 그리스도 십자가를 ‘부정하지 않는’ 사람들 목회 속에서 사람들이 멸망 당하고 있다.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분명히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 부인하는 데 그치는 설교자가 아니라, 십자가로 불이 붙은 설교자들, 그들 전 삶이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 주신 복되신 구주를 향한 불타는 감사의 제물이 되는 설교자를 보내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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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G. 메이천 {기독교와 자유주의: 정통 기독교 본질을 말하다} 황영철 역 (서울: 복 있는 사람, 2013)’ 221쪽~248쪽.
첫댓글 자유주의 신학이 단순한 이단이나 해석의 차이가 아니라 기독교의 본질을 위협하는 전적으로 다른 체계임을 선명하게 밝힌 메이천의 경고에 깊이 공감합니다.
화평이라는 이름으로 진리를 타협하거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복음을 지적으로 변호하며 끝까지 진리를 사수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단순히 십자가를 부정하지 않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로 가슴이 불타올라 오직 복음만을 온전히 선포하는 신실한 주의 종들과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공감합니다.
아멘!
"자유주의 신학은 그것이 참되든 거짓되든 ///단순한 ‘이단’이 아니다./// 즉, 기독교적 가르침의 몇 가지 요소에서 빗나간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주의 신학은 전혀 다른 뿌리에서 나왔으며, 본질적으로 자체의 통일된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
우리가 통념적으로 아는 이단과는 또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의 본질을 다른 근거로부터 위협하는 전혀 다른 체계임을 선명히 경고한 메이천의 글에 깊이 공감합니다.
자유주의라는 명목으로 진리를 타협하거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양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복음을 변호하며 진리를 사수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공감합니다 😁
자유주의 신학이 단순히 몇 가지 가르침의 차이가 아니라 뿌리부터 다른 별개의 체계라는 메이천의 날카로운 통찰에 깊이 공감합니다.
기독교의 탈을 쓰고 정통 교리와 십자가 복음의 본질을 흔드는 영적 위기 속에서 타협 없는 분별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포용과 화평이라는 명목 아래 진리를 양보하지 않고, 오직 성경적 진리 위에 서서 복음을 담대히 지켜내는 신실한 신앙이 되길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