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보기 드문 강연회 광경이다. 발표장의 자리가 모자랐다. 그래서 회장과 간사가 옆 강의실 의자를 20여 개 날랐다고 한다. 정원 60 명이니 20명 플러스 80여 명이 참석하였으나 방명록에는 61명이 사인을 했다.방송에 자주 나오시는 연세대 사회학과 류석춘 교수님도 오셨다. 당교회맹록이 무엇이길래 이런 관심을 가지는지 나도 궁금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10 개월 뒤인 1593년 2월 21일부터 27일까지 경상도 상주땅과 문경땅의 접경지역인 함창읍 윤직리를 중심으로 당교(唐橋)전투가 벌어졌다.그 곳은 내가 함창고등학교를 다닌 곳이라서 지형지물에 익숙한 편이다. 1980년 고3때인가 여름 가뭄이 심하여 가뭄 극복 차원에서 당교 근처에서 봉사를 한 기억이 난다. 청계천 고서점가를 자주 가는 나는 헌책방에서 고령박씨 박진남 의병장의 실기인 <회암박공실기(悔巖朴公實紀)>를 발견하여 입수하였다.그 속에 '당교회맹록(唐橋會盟錄)'이 나온다. 남들은 그냥 스쳐지나갈 일이지만 당교라는 명칭이 나에겐 무척 익숙한 지명이었다.내가 경상북도 상주시 은척면 두곡리 태생이라서 누구보다 더 눈에 띄었을 것이다.우리는 21세기를 살면서 조상님들이 이루어놓은 업적을 기릴 줄 알아야 한다. 임란이라는 시기는 모든 조선사람들이 고통을 받던 시기였다.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충, 애국이 연상된다. 내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를 생각해 본다. 일본 침략세력에 저항하는 사람도 있지만 도망갈 수 있다. 참전하여 싸우는 사람을 관군과 의병이다. 의병들의 명단이 나왔으니 그 후손들은 관심을 가질수 있다. 147명이다.내가 아는 초등학교 동창생 남양희네 13대조 할아버지도 나온다. 그 분이 고산 남영 선생이다. 내가 무릉초등학교 다닐 때 산모롱이를 지나면 멀리서 볼 수 있는 곳에 무덤이 계신다. 나는 그동안 그 분이 누구인지도 몰랐으나 이번 기회에 추석에 내려가서 후손과 함께 성묘를 하였다. 비석과 묘소와 재실 사진도 찍었다.묘비를 찬한 분이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의 시조를 남긴 남구만 선생이다. 남구만 선생은 영의정을 지낸 문장가이다. 남구만은 약천집을 남겨서 민추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우리나라 조상님들의 애국애족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어야 하고 우리도 마음다짐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