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순례자나 나그네 같이 ····”(RB 6,2)
가난에 관한 성 프란치스코의 전반적인 가르침은 종말론적 색조를 띠고 있다. 작은 형제는 일정한 거주지 없이, 이 땅에 자기를 묶게 하고 속박하는 아무것도 없이 “생명의 땅”을 향하여 눈을 뜨면서 이 세상을 두루 다니는 소명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칸 생활양식이 가져오는 자연적 결과는 생계를 위한 안정이 없는 생활이라는 것이다. 생활의 안정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딸 오직 하늘의 아버지의 사랑에 맡겨져 있다. 프란치스코는 회개 때부터 전 생애를 통하여 자기와 형제회를 하느님의 손에 맡기는 도전을 하였다. 그래서 그는 정착하기를 두려워하였다. 성인의 개인 신심과 권고 그리고 그분이 사셨던 영신적 분위기를 살펴보면, 그분은 주님의 날을 신뢰심을 가지고 애타게 기다리면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인은 “그리스도의 복음적 신비를 전하기 위하여 이 마지막 시기에” 생긴 자기 형제회의 소명도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한다: 형제들은 가난하셨고 나그네 되셨던 주님처럼 “이 세상에서 순례자나 나그네같이” 사는 생활을 서약한다.
참된 고향을 향해 가는 신자생활의 길잡이는 희망이다. 형제들이 사용하는 장소, 물건, 음식 등 모든 것은 순례 여행을 상기시키고 “우리가 귀양살이하는 사람임”을 기억케 해야 한다. 형제들은 여행하는 사람으로서 집이나 교회를 머무를 장소로 소유하지 말고, 사람들의 환영을 받지 못하는 곳에서는 다른 지방으로 피해야 한다(Test 26 참조). 그 당시에 팔레스티나 성지나 콤포스텔라(Compostela) 성지에 가는 순례자들은 모든 신자들에게 현세생활이 천국을 향한 여정임을 계속 상기시키고 있었다. 프란치스코도 이 체험을 얻기 위해서 순례자들이 하는 신앙의 길을 스스로 맨발로 걷기를 원했다. 그 다음에 순례자들이 지키는 몇 가지 생활 지침을 형제들에게 제시하였다: 남의 집에 손님이 되고 평화의 인사를 하고 평화로이 다니며 본 고향을 갈망한다는 것 등이다.
사실 수도생활은 그 본질로써 여행하는 교회의 상징이고 그 방법과 증거는 각 시대마다 달리 표현되어 왔다. 옛 은둔자들과 동방의 수도자들은 도시생활을 피하여 조용한 장소를 택하고 현세적 여건을 도피함으로써 천상적 가치를 증거했다. 서유럽에서 중세기의 수도자는 새로운 도시나 국가들이 발생하는 시기의 사람들로서 안정된 정착의 생활양식을 택하였고 그 당시 떠돌이 야만 국민들의 생활을 정착시키기 위해 주도권을 잡았다. 이로써 이 당시에 정착의 생활은 천상 나라를 준비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따라서 여기에서 안정이 없는 공동체적인 가난은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13세기의 사회는 시민들이 스스로 경제적, 사회적 주도권을 잡고 물질적 세계가 발전하는 반면 종교적 관심을 잃어가는 속화되어 가는 사회였다. 이때 상인의 아들이었던 성 프란치스코가 세상에 다니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형제회를 출범시켰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서 둘씩 짝지어 돈도 식량도 두 벌의 옷도 가지지 않고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며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면서 생활하는 것이 작은 형제회의 생활 특징이 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손님이 되어 그들에게 짐이 도지 않도록 주는 것을 먹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RB 3,14 참조). 그리고 「성무일도」를 바치기 위해서 여러 양식 가운데 가장 간단한 양식인 로마 교회의 「성무일도」를 택했다.
작은 형제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방법은 사도적 가난이다. 사도적 가난을 실천함으로써 작은 형제는 고유한 방법으로 구원사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작은 형제는 “이 땅 위에는 우리가 차지할 영원한 도성이 없고 우리는 다만 앞으로 올 도성을 바라고 있을 뿐이다”(히브 13,14)라는 메시지를 생활 증거로써 전하는 것이다.
가난하고 사도적이며 탁발의 성격의 지닌 형제회의 생활은 주님의 산상설교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공동체는 물질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 정착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의 생각에 의하며, 프란치스칸 가난은 개인으로나 공동으로 절대적이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가난을 공동으로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하느님과 사람들의 봉사를 위하여 작은 형제들은 짐을 벗은 채 자유로운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프란치스코에게 온갖 형태의 정착에서 해방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였기에, 성인은 「유언」에서 고정적인 거주지를 받아들임에 대한 불가피한 사실에는 양보하였지만, 순회생활을 살리기 위해서 건물들을 임시로 써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형제들을 위해 지은 성당이나 초라한 집이나 다른 건물이 「회칙」에 따라 서약한 거룩한 가난에 맞지 않으면 형제들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 것을 명심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항상 나그네나 순례자같이 기거하십시오.”(1베드로 2,11).
성녀 글라라의 가정에서는 성지순례하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글라라의 어머니 올똘라나는 성지순례를 열심히 다녔을 뿐만 아니라 자기 친구들에게도 자주 그것을 권하였다고 한다. 글라라는 비록 봉쇄생활을 하면서도 “몸 안에 눌러 사는 동안에는 주님으로부터 떠나 살고 있다는 것을”(2고린 5,6) 느끼고 살았다. 그녀에게는 자발적인 봉쇄 자체가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건너감이나 출애굽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가 순회생활을 하는 형제들에게 제시한 개념들을 거의 글자 그대로 어려움 없이 자매들에게 적용시켰다. “순례자 나그네” 생활을 하기 위해서 가난한 자매들은 세상을 두루 다닐 필요가 없이 지상의 것을 가볍게 여기면서 지극히 높으신 가난이라는 몫과 유산 외에는 “하늘 아래 결코 다른 어느 것도 가지기를 원치 않으면” 충분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늘나라의 상속자와 왕이 되게‘하는 것이다(RegCO 8,1-3 참조). 글라라는 프라하의 아네스에게 다음과 같이 격려한다: ”그대의 발을 먼지를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 재빠르고 가볍게 하여 돌에 부딪치기 않는 발걸음으로 안전하고 기쁘고 흔쾌하게 확실한 행복의 길로 달리십시오.“
글라라는 공경하는 사부님이 손수 일하면서 준비해 준 성 다미아노의 사랑스러운 고요한 곳에 대해서도 애착심을 버리고 살았다. 비록 이곳에서 40년 동안이나 복음적인 모험을 살면서 하느님으로부터 수많은 체험과 은총을 받았지만 「유언」에서는, 아마 자기기 죽은 후에 이루어지리라 예상했던, 이 거룩한 장소의 이동을 반대하지 않는다. 단 한 가지 조건을 붙인 것은 자매들이 새로운 거주지에서도 “가난을 똑같이 지키라는”것이었다(TestCI 52 참조).
“돈: 가장 위험한 정착”
“나는 모든 형제들에게 단호히 명합니다: 형제들은 직접 혹은 간접으로 금전이나 돈을 절대로 받지 마십시오”(RB 4,1)라고 하는 「제2회칙」4장에 따른 돈에 대한 절대적이고 단호한 금지령을 이해하기 위해 그 비결은 작은 형제들이 개인과 집단적인 온갖 종류의 정착을 피하면서 “세상을 두루 다녀야 하는” 그 근본적 사명에서 찾아내야 한다.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 개인이 체험한 두 개의 사건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는 부자간에 상위점의 원인이 되었던 베드로 베르나르도네의 돈에 대한 욕심이 프란치스코에게 남긴 부정적인 추억이고, 또 하나는 회개하자마자 부자 상인의 아들다운 기준으로 성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려고 할 때 주님으로부터 배운 교훈이다. 그래서 복음적인 성숙함을 향해 긴 과정을 거친 프란치스코는 파견의 복음에서 앞으로 갈 길을 비쳐줄 더 객관적이고 교회적인 차원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금도 은전도, 동전도 없이” 복음을 전하러 파견되었다는 점이다.
성인의 동기는 「제1회칙」 8장에 분명히 표현되어 있다. 그는 형제들이 탐욕의 위험에 빠져들거나 이 세상의 근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시키고 있다. 이것은 모든 것 - 집, 땅, 재산 -을 버리고 들어온 형제들이 훨씬 비 복음적인 다른 종류의 안정 -경제적인 안정 - 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이다. 성인은 이 점에 대하여 염려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자기 집에서 상인들의 비 복음적인 생활을 목격했고 , 순례여행을 구실로 많은 순례자들과 수도자들이 엄청난 돈을 모으려고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실은 가족 자산 위주의 봉건 사회에서 발생한 대수도원이 받은 유혹은 갈수록 부동산을 늘리고 소작료를 올리는 데 있었다. 12세기 후반기까지는 돈이 유럽인들의 생활에 중요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수공업과 산업을 위주로 하는 새로운 사회의 구조에서 금전상의 경제가 차차 지배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으므로 이제는 돈이 권력을 좌우하게 되었다. 따라서 도시에 사는 부자는 정치 세력을 포함해서 농촌에서 많은 재산을 모든 귀족보다 더 세력이 있었다.
“세상에 다니면서” 세속 사람 가운데 사는 삶을 자기 생활양식으로 택한 새로운 작은 형제회가 돈의 뒷받침을 찾을 때야말로, 대수도원에 사는 전통적 수도회보다도 오히려 더 강한 경제력을 누릴 위험이 있었다. 더군다나 이 새로운 수도회의 회원들이 급속히 증가되고 그의 조직이 강해지며 그의 사도적 활동이 많은 성과를 낸다는 것을 본 성 프란치스코는 돈으로 인한 위험성을 명백히 예측하였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강조하여 주의시키기를 “모든 것을 버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하늘나라를 잃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 그리고 형제들은 동냥할 때 절대로 돈이나 금전을 받거나 받게 하지 말고 또한 청하거나 청하게 하지 말며, 집이나 건물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지 말 것입니다. ··· 그리고 돈을 지극히 조심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추잡스러운 이익을 얻고자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말아야 함을 명심할 것입니다.”
“나는 모든 형제들에게 단호히 명합니다. 형제들은 직접 혹은 간접으로 금전이나 돈을 절대로 받지 마십시오.”
성인이 돈에 대해 취한 그 강력한 태도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제2생애」35-38장에 나오는 이야기 - 성 프란치스코와 돈 - 들만 가지고 사부님의 생각을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이 이야기들은 성인이 돈을 만지는 것조차 악의적이고 악성적인 것처럼 생각했다고 기록하는데, 성인의 저서에서는 이러한 광신적인 태도를 찾아볼 수 없다. 첼라노가 「제2생애」에서 사부님의 죽음 후에 돈의 사용 때문에 발생한 분쟁을 반영하고 있고 영성파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부님은 「제1회칙」과「제2회칙」에서 “돈을 사용하지 말라” 혹은 “돈을 만지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고 ‘돈을 받지 말라“고만 명령한다.
여기서 「제2회칙」4장의 해석에 대한 역사적 상황을 논의할 필요는 없다. 실은 이러한 해석은 창립자의 사망 후에 시작되었고 돈의 금지에 대한 정신보다도 글자의 법적인 의미에 중점을 두고 있다. 마치 실지로는 돈을 받지 않고 돈을 마련하여 사용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해결책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성녀 글라라는 이 점에서도 성 프란치스코의 「회칙」을 글자 그대로 지킬 수 없음을 알고「회칙」의 정신에 충실하면서 자기 회칙에 작은 형제들의 「회칙」제4장을 인용하지 않을뿐더러 돈이 수녀원에 애긍으로 들어오는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가난하고 겸손하게 주님을 섬기는 작은 형제”;Minoritas
가난을 소유욕의 대상으로 삼을 때 교만으로 변하기 쉽다. 예를 들어, 성 프란치스코 당시의 복음적 운동의 개혁자들과 같이 가난을 자랑거리, 위선적인 행동 혹은 형 경제체제의 대립으로 세울 때 그러한 가난은 복음적인 것이 아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한때 자기가 세운 수도회를 “가난한 자들의 회”라고 칭할 생각이 있었지만 사랑이 없는 거만하고 광신적인 가난을 피하는 동시에 가난을 프라떼르니따스(fraternitas)와 미노리따스(minoritas)의 기초 위에 세우기 위해서 자기 수도회를 “작은 형제회”라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성 보나벤투라가 처음으로 사용한 “미노리따스)(작음)라는 명사는 오늘날 프란치스칸들 가운데서 흔히 쓰이는 용어다. 성 프란치스코 시대에 미노르(minor)는 마요르(maior)와 반대되는 말로 평민이라는 낮은 사회적 위치를 의미하였는데 성인이 여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겠지만, 역사가 증명하듯이 ”작은“이란 명칭을 택하게 된 주요 동기는 무엇보다도 복음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뜻은 분명하다: ”형제들은 작은 자가 되고 ··· 모든 이들에게 복종하는 사람이 되어야“(RnB 7,2)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은 「제1회칙」 4장부터 7장까지 인용되는 성서적 구절, 즉 형제적 봉사와 겸손과 섬김을 말해주는 성서적 배경 속에 알아들어야 한다. 미노리따스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의 자세로서, 다른 사람들을 자기 자신보다 더 높은 사람으로 여기고 존경할 만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자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 사람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섬기러 오셨던“ 주님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빠우뻬르따스-미노리따스(paupertas-minoritas)는 무엇보다도 높으신 주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갖추어야 할 마땅한 자세이다. 프란치스코는 성덕의 수련에 있어 인간의 노력과 자신감에 기초를 두는 길을 따르지 않는다. 성격상 열광과 좌절감 사이의 파도가 심한 성인은 자신의 한계, 약점과 작음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부의 영성은 겸손한 동시에 낙관적이다. 즉, 자기 자신의 한계를 의식하여 겸손을 기초로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풍요함을 믿는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영성이다.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에서 자기 자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나는 나의 큰 탓으로 많은 점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 이는 내가 게을러서도 그랬고 병약해서도 그랬고 무지하고 배우지 못해서도 그랬습니다.”
겸손하고 가난한 정신을 기초로 하는 영성이 사부님의 모든 기록에 나타난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이 정신을 형제들에게 전하려고 애썼다. 형제들은 단순하고 겸손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완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성인은 편지와 다른 저서에서 자기 자신을 “아랫사람” “보잘것없고 약한 사람”, “천한 사람”. “모든 사람의 종”. “다른 형제들의 발 아래 있는 사람”. “주 하느님의 부당한 종” 등으로 부른다. 그리고 죽기 전에 마지막 「유언」에서 ‘우리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으며 모든 이에게 복종하였습니다“라고 형제들 앞에서 고백한다.
작은 형제는 가난을 서약한 사람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봉사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천하고 멸시받는 사람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 병자와 나병환자들, 길가에서 구걸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낼 때 기뻐해야 한다”. 작은 형제는 각 가난한 사람 안에 형제를, 동반자를, 더 나아가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발견할 줄 안다. 프란치스코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을수록 주님의 빛으로 충만하여 궁핍해 있는 각 사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만났고,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보게 되면 그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만났고,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보게 되면 그가 모습을 닮은 데에 앞선다는 이유로 질투할 정도였다. 또한 누가 가난한 사람을 욕하거나 단죄하는 것을 보면 그를 꾸짖어 말하곤 하였다. “가난한 사람에게 저주를 하는 자는 그리스도께 상처를 입히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부요하셨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높은 상징을 그들이 달고 다닙니다.”
작은 형제는 가난한 옷을 입었다고 해서 “부드럽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나 맛좋은 음식을 먹고 마시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을 업신여기거나 판단하지 말고 오히려 각자가 자기 자신을 판단하고 업신여길 줄 알아야 한다. 즉, 금욕자들의 교만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리고 작은 형제는 “속화된 불쌍한 어떤 사제들을 만난다 해도 ··· 그들을 마치 자기 주인인 듯이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존경하기를 원하고” 또한 “직접 혹은 간접으로 설교하기 위해서나 자기 몸에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나 성당이나 다른 건물을 위해서 어떠한 증서도 로마 교황청에 감히 신청하지 말아야 한다.” 즉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서 끝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우골리노 추기경이 작은 형제들을 주교로 임명하길 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성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주교님, 나의 형제들은 작은 자들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감히 큰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성소는 그들을 낮은 자리에 머무르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 그러니 그들을 성직에 오르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들이 가난한 마음보다는 자랑스런 마음을 가지게 되고 거드름을 떨까 염려됩니다.”
그러므로 미노리따스(minoritas)는 두 자매 덕행인 가난과 겸손 위에 세워져 있는 복음적 마음가짐이다:
“귀부인이신 거룩한 가난이여, 주께서 당신의 자매인 거룩한 겸손과 함께 당신을 축복하시기를! ··· 거룩한 가난은 탐욕과 인색과 이 세상의 근심을 부끄럽게 합니다. 거룩한 겸손은 교만과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도 부끄럽게 합니다.”
참된 겸손이란 억지로 자기 자신을 억제하고 낮추려고 하는 행동에 있지 않고, 단순하게 진리 앞에 서서 하느님이 우리를 보시는 대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천박하고 무식하며 멸시받을 자로 사람들로부터 간주될 때와 마찬가지로, 칭찬과 높임을 받을 때도 자기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사실 인간을 하느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 높은 자리에 올랐다가 자진하여 내려오기를 원치 않는 수도자는 불행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에 의해 높은 자리에 올라 있으면서도, 다른 이들의 발 아래 있기를 늘 열망하는 그런 종은 복됩니다.”
겸손한 사람은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윗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나 아랫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나 똑같이 겸손한 자로 드러난다. 또한 겸손한 사람은 남이 자기를 있는 그대로 보고 평가해 주기를 바란다. 성 프란치스코는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라고” 자주 말하였다. 성인은 자기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으로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이렇게 기막힌 은총을 한 강도에게 주셨다면, 프란치스코야, 그는 너보다 더 고마워했을 것이다. 한 죄인도 할 수 있는 일들을 가지고 헛된 자만심으로 스스로 자랑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성인으로 여길 때 성인은 흥분해서 말하기를 “저를 안전한 사람으로 찬사를 보내지 마십시오. ··· 은총을 나에게 빌려주신 분이 다시 그 은총을 물려가려고 하면 나에게 남는 것이라고는 육신과 영혼뿐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는 자들도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높이려고 할 때 프란치스코는 진실한 마음으로 형제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를 모욕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어느 날 농부 한 사람이 “많은 이들이 당신께 신뢰를 두고 있으니 모든 이가 이야기하고 있듯이 그렇게 좋은 사람이 되도록 하십시오. 절대로 기대를 저버리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충고 드립니다”라고 말하자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 무엇보다도 진리 안에서 사는 겸손한 사람은 남한테서 오는 충고를 감사하게 받을 줄 알고 그들 앞에서 자기 약점을 인정할 줄 안다.
“다른 사람이 해주는 충고와 책망과 꾸지람을 마치 본인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그러한 인내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종은 복됩니다. 책망을 들을 때 자기 잘못을 쾌히 인정하고 조용히 받아들이며, 겸손하게 고백하고 또한 기꺼이 보속하는 종은 복됩니다. 변명하는 데 빠르지 않고 본인이 범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도 수치와 책망을 겸손되이 참아 견디는 종은 복됩니다.”
겸손은 자기 자신을 낮추기보다도 남을 존경하고 높이 평가하는 데 있다.
“우리는 절대로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종들이 되어야 하며, 하느님 때문에 피조물인 모든 사람에게 복종해야 합니다”라고 성인은 가르쳤다. 따라서 주님의 영에 순종하는 사람은 그 영의 열매로 겸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에지디오 형제는 겸손을 잘 표현하였다. “겸손이란 하느님께 자리를 비워드리는 것이다.”
복음적 덕행 중 실천하기에 가장 큰 용기와 성숙이 요구되는 것은, 이른바 “수동적 덕행”(virtutes passivae)들이다. 더군다나 한 수도회가 그 덕행들의 실천을 생활 프로그램으로 삼을 때 더욱 그렇다.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있어서 창설자가 남겨주신 유산 중에 바로 “미노리따스”(minoritas: 작음)라는 덕성이 인간적으로 받아들여지기 가장 어렵다. 복잡하지도 않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 “미노리따스”를 형제들은 사부님의 유산 중에서 제일 먼저 잊고 말았다. 역사적으로 증명되는 사실로서 프란치스코가 죽은 후, 가난 문제로 인해 형제회에서 발생한 분열의 원인과 교황 요한 22세 재임시 형제들이 교황청에 대해 취한 비 복음적인 태도의 원인은 바로 여기 있다: 성 프란치스코의 아들들은 “낮은 자가 되어야 함을 잊었고, 가난한 자만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 “미노리따스”를 지키는 것은 의미가 있는가? 오늘날 사회의 모든 구조가 선전 기술에 매여 있고, 모든 단체들은 정보와 언론과 광고의 수단을 자기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면서 효과를 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많은 교회의 사람들은 교회가 드러나게 보이지 않는 현존으로 돌아가기를 요구하고 있으며, 교회가 권력과 지상적 권위와 완벽한 체제의 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세속과 타협하는 일 없이 누룩의 작용으로 더 효과적으로 인류의 모든 가족을 변화시키기를 바란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면서 인간의 양심 속에 하느님과 정의에 대한 갈망을 심어주는 새로운 크리스처니즘에 희망을 두고 있다.
그래서 이때 많은 사람들은 단순하고 작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에게 눈을 돌린다. 프란치스코에게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힘, 즉 사랑, 온유함, 부드러움, 비폭력, 봉사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게 다니는 작은 형제들의 매력이다. 프란치스코는 자기 형제들을 위하여 바라는 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그럴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작은 형제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으면 좋으련만! 세상이 놀랄 만큼 형제들의 숫자가 적었으면!”
가난과 일
최근에 생긴 “인간과 현세적 실재”의 신학에서 노동의 신학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3장에서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 있어 인간 활동의 크리스천적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인간은 일을 통하여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참여하며, 노동 여건을 성화시키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재창조에 이바지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 활동은 구원적이고 속죄의 가치를 지닌다.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일은 생계의 주요 방법인 동시에 인간을 향상시키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일은 인간들을 서로 뭉치고 한 공동체로서 인류의 발전에 봉사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성 프란치스코가 회칙을 쓸 당시 일의 가치관은 오늘과 다르게 평가 되었다. 그 당시에 인간의 활동은 다음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되었다: 정신노동(학문과 예술, 즉 liberales - 자유인들의 일)과 육체노동(serviles - 노예들의 일)으로 구분되었다. 인간 지성에 속하는 첫째 종류(facultates superiores)인 학문적이고 예술적인 활동은 높이 평가되어 인간의 영신적 완성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반면에, 둘째 종류의 일 - 수공, 노동, 기술적 혹은 생산과 소비에 관계되는 일 -은 천한 직업이므로 하인들이 하는 일이며, 영신생활에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육체노동의 필요성을 다음 네 가지 이유로 설명한다: 생계를 마련하기 위한 수단, 한가함을 피하기 위한 수단, 정욕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 애긍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들이다. 대수도원 생활 전통에서 일의 가치는 주로 수덕적이고 금욕적인 것이었다. 즉, 한가함을 피하고 유혹을 피하기 위한 가치다. 그러므로 개인적 혹은 사회적 목적 없이도 일은 그 자체로 위에 말한 이유 때문에 가치가 있었다.
성 프란치스코도 이러한 개념의 영향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당대인들과 비교하면 더 복음적이고 현대적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일에 관한 성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은 「제1회칙」 7장, “봉사와 일하는 자세”에 나온다. 요약해서 말하면, 형제들의 일은 “형제적 공동체”(Fraternitas)와 “작은자”(Minoritas)의 정신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형제들의 일반적이고 주된 방법은 일이다. 그리고 회칙이 말하는 일은 육체적 일이기에 형제들은 노예들이 일을 하듯이 부자들의 집에서 일할 때 책임을 맡거나 관리인이 되지 말고 “작은 자”답게 모든 사람에게 복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중세기에서 일은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므로 주인에게 예속함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제7장에서 형제들이 기술적 일을 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 “기술을 아는 형제들은 구령에 해가 되지 않고 올바르게 쓸 수 있다면 그 기술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8장에서는 돈에 대한 욕심을 일으킬 수 있는 일을 제외한 후에 “형제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우리 생활에 반대되지 않는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라고 덧붙인다. 또한 성 바울로의 말을 적용하면서 형제들에게 권고한다: "각각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기술과 직을 그대로 유지하십시오. ···· 그리고 각자의 기술에 필요한 공구와 연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통적 대수도원과 당대의 후밀리아티(Humiliati)및 비슷한 단체들과는 달리 작은 형제들의 공동체는 자기 생계비를 위해서 수도원 내에서나 밖에서 생산 조직체를 설치하지 않는다. 각 형제는 공동체가 소도직을 행하는 지역에서 혹은 은둔소가 자리잡고 있는 지역에서 스스로 일을 찾아야 했다. 「제1회칙」에 의하면, 일에 형제들 생계의 일반적 방법이다. 그리고 돈을 제외하고는 “형제들이 일의 보수로 필요한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일의 보수로 받은 것만으로 생활하기에 항상 충분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병환자들을 위해서도 양식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충방법으로 애긍을 해야 했다. 애긍에 대하여 다음에 언급하겠지만, 처음에 애긍하러 다닌 형제들은 다른 기술이 없고 다른 일은 하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성인은 애긍을 하러 다니는 것도 가치가 높은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동냥을 얻는 데 수고하는 형제들은 큰 보상을 받을 것이다.”
일에 관한「제2회칙」5장에서도 일할 특은을 받은 사람하고 일할 줄 모르는 사람. 이 두 종류의 구분이 나온다. 그러나 「제1회칙」과 달리 「제2회칙」은 일의 동기 중에서 사회적인 것보다 수덕적, 금욕적인 동기를 강조한다. “영혼의 원수인 한가함을 피하는” 것이 그 동기이다(이 구절은 성 베네딕도 회칙에서 인용된 것임). 또한 일이 긍정적인 가치를 지니기보다 “거룩한 기도와 신심의 정신”에 해가 되는 것처럼 간주된다. 이것은 수도회에 입회한 배운 형제들의 강요로 삽입된 것으로 간주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하튼 「제2회칙」에서도 일이 형제들의 생계를 위한 주요 수단이고, 이 일은 수도원 밖에서 하게 되는 것이다.
성녀 글라라도 노동은 절대적인 가난의 당연한 결과요, “가난한 자매들의” 공동체에서 일치와 평등의 요소로 본다. 글라라회의 공동체에서는 하찮은 일을 하도록 입회한 “노동 자매들”이 따로 없고 모든 자매들은 각자가 받은 일할 특은에 따라 같은 차원에서 공동 작업에 참여해야 한다.
글라라는 「회칙」에서 매일 삼시경 후에 시작되는 유익한 일을 언급한다. 비록 일에 관한 성 프란치스코의 「제2회칙」의 택스트를 인용하지만 자매들의 노동을 “영혼의 원수인 한가함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생계를 위한 필수적인 수단으로 생각한다. 수녀원이 재산도 가지고 있지 않고 소작료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더욱 그렇다.
자매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살았다. 전통적인 여자 수녀원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이러한 수도생활 양식을 가까이 관찰한 비트리의 야고보(Iacobo de Vitry)는 1216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작은 자매들은 도시에서 멀지 않은 가난한 집에 살면서 공동생활을 한다. 이들은 아무것도 받지 않고 손으로 일하여 생계를 마련한다.” 글라라 자신이 일에 열중하는 데서 모범적이었다. “성녀는 한가함을 몰랐다. 병중에 있을 때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천을 짜는 일을 하였다.”
당대에는 여성들이 하는 일 분야가 한정되어 있었다. 여성들은 특히 봉쇄 안에서 실 잣는 일, 천 짜는 일 그리고 수를 놓은 일 외에는 다른 활동이 없었다. 글라라는 이외에도 먹는 채소를 장만하기 위해 자매들이 수녀원 옆 밭에서 일하기를 원한다.
그동안에 “일할 특은을 받지 못한”(노동 일) 형제들 - 학자, 사제, 귀족 출신 - 의 수가 증가했고 또한 노동 일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형제들이 많아졌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런 형제들을 형제회에 받아들임으로써 거기에 따른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형제회에서 학문적인 활동이 허용되었고 이러한 활동도 노동일이나 기술, 나병환자들을 돌보는 일, 애긍을 하러 다니는 일고 같은 수준으로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일“이라고 하면 모든 활동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인은 육체적인 일을 함으로써 형제들이 기도의 정신을 잃을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학문적인 활동만이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 도움이 된다는 그 당시의 사상과 달리, 성인은 어떤 종류의 일이라도 - 학문이든, 노동이든, 기술이든 - 같은 수준으로 여겼다.
그렇지만 실제로 노동 일을 멸시하려는 형제들이 있었다는 점과 이 때문에 형제들간에 불평등이 생기는 것을 볼 때 성인은 매우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유언」에서 단호히 말한다:
“나는 손수 일하였고 또 일하기를 원하며 다른 모든 형제들도 올바른 일에 종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일할 줄 모르는 형제들은 일을 배워야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한가함”은 어떤 공동체가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때문에 어떤 형제들은 일할 책임을 느끼지 않고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벌써 이 악습이 성인의 시대에 발생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자주 이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였고 그런 형제들을 심하게 다루었다. 예를 들어, 초창기 생활에서 어떤 형제가 일하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으며 애긍하러 나가지도 않는 것을 보고서 다음과 같이 나무랐다. “파리 형제여 당신의 길을 가시오, 형제들이 일해 온 수고로 살고 있으니, 형제는 마치 벌지도 않고 일하지도 않으면서 일벌들의 수고에서 먹기만 하는 수벌과 같구나.”
예부터 수도자들이 받아온 비판 중의 하나는 “사회의 기생충”이라는 점이다. 아마 오늘날에 그런 비판은 별 근거가 없는 것 같다. 어떤 때 사회인들은 수도자들이 하는 일의 유익함과 목적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어쨌든 오늘날에 수도생활의 쇄신에 있어서 수도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오늘날의 신학은 디아코니아(diakonia), 즉 인류 공동체를 위한 봉사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데, 프란치스칸 가족들은 이 점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프란치스칸들에게는 어떤 종류의 일이든지 다 적합한 것이고 프란치스칸 활동에서는 어떤 종류의 일이라도 제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의 선택이나 분배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소질과 받은 카리스마 그리고 각자가 전공한 분야와 우리가 서약한 축성생활의 요구, 그 중에도 특히 우리들이 사회 안에서 가난한 자와 작은 자의 신분을 택했다는 점이다. 또한 각 형제들의 활동이 형제적 공동체의 정신에 입각해서 형제들의 일치를 촉진해야 한다. 형제들이 서로 다른 일을 했다고 해서 형제들 간에 불평등이 생기지 말아야 하며 또 서로 다른 활동을 했다고 해서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거나 차이가 생기지 말아야 한다. 형제들이 사목적 활동, 자선사업, 사회봉사. 기술적인 활동, 수공적인 활동 등 어떤 활동을 하든지 또한 이런 활동을 수도원 내에서나 밖에서 하든지 간에 형제들은 서로 존중해야 한다.
오늘과 같은 전문적 시대에서 형제들이 하는 일이 유익한 봉사의 방법이 되려면, 적합한 준비는 물론 계속적인 재교육 -학문적이든 기술적이든 - 이 필요하고 할 수 있는 한 자격증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은 형제가 잊어서는 안될 점은 그가 수도원 내에서나 밖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가난하고 작은 자답게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백성에 봉사하는 사람으로서 매일 노동으로 생계를 마련하는 사람들과 더 가까이서 사는 더 직접적인 증거의 삶, 남의 기관에서나 남의 지배하에 일하며 사는 것이 수도회의 일을 봉사하는 것보다 작은 형제에게 더욱 이상적인 삶일 것이다. 그렇지만 각 형제는 자기 노동을 통해서 지역 공동체나 관구 공동체 형제들의 생계비에 이바지해야 함을 자각해야 한다. 노동자들과 같이 정식 노동계약을 해서 일의 정당한 보수를 받는다는 것은 프란치스칸 생활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적당한 보수를 받되 어떤 명목으로 받든지 그것을 공동체를 위해 바칠 것이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를 할 때 보수를 받지 않고도 기쁘게 일할 줄 알아야 한다. 「
“주님의 식탁”
모든 창조물의 주권자이신 하느님은 또한 “큰 자비심을 가지고 합당한 자나 부당한 자에게 골고루 애긍을 나누어 주시는 아버지로서 애긍 희사하시는 큰 은인이시다.” 프란치스코는 복음에서 이 진리를 배웠고 이것을 순수한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모든 재화의 소유권은 하느님께만 있고, 사람들이 지상 재화를 빌려서 쓰는 셈이다. 따라서 만약에 다른 사람이 극빈 중에 있으면 인간은 가지 재물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이 없으며, 극빈자를 도와주지 않을 때 하느님의 재물을 훔치는 죄를 범한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만날 때 그에게 애긍 희사하였다. 성인은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만나서 그에게 망토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형제여, 우리는 이 망토를 그 주인인 저 가난한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이 망토는 우리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만날 때까지만 우리가 빌린 것입니다. ··· 나는 도둑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필요한 사람에게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둑이나 진배없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법적인 기준을 넘어서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지상 재물의 목적을 매우 깊은 종교적 차원에서 본 결과이다. 그러므로 애긍이란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는 “결과”로서, 가난한 자의 권리이다.
“동냥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얻어주신,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유산이며 권리입니다.” “물건들이란 모두 범죄 후에 우리가 하느님께 희사 받은 것이다. 그리고 베푸시기만 하시는 위대하신 분께서는 자비로우신 사랑 때문에 받을 만한 사람이건 그렇지 못한 사람이건 간에 누구에게나 당신의 선물들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생활을 보장해 주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 재산, 돈, 권리, 특전 등 - 미친 사람이 짓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의 무한하신 섭리와 사랑을 믿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탁발”(거지) 생활양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의 신비 안에서 그 완전한 뜻을 가지게 된다. “동냥”에 관한 「제1회칙」 9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모든 형제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가난을 따르도록 힘 쓸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동냥하러 다닐 것입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전능하시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또한 주님뿐만 아니라 복되신 동정녀도 제자들도 가난하셨고 나그네 되셨으며 동냥으로 사셨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일을 해서 거기서 받은 보수로 생활하기에 충분하지 않을 때 프란치스코는 애긍의 방법을 찾았는데, 애긍하는 생활을 택한 주요 동기는 극빈에 처해 있는 사람들과 같이 모욕을 맛보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일의 보수를 받지 못할 때는 집집마다 동냥하면서 주님의 식탁으로 달려갑시다.” 프란치스코는 은인들이 스스로 바치는 애긍을 받는 것보다 집집마다 다니면서 애긍을 청하는 방법을 더 좋아했다. 부끄러움을 당함으로써 그리스도와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까이 느꼈기 때문이다.
애긍을 청하는 일은 창피한 일이다. 프란치스코는 회개의 시작에 이러한 모욕을 맛보기를 원했다. 회개한 후에도 출신 도시에서 잘 아는 시민들의 집을 다니면서 애긍의 부끄러움을 견딤으로써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충실성을 지켰다. 프란치스코는 첫 번 동료들에게도 같은 시련을 겪게 했다. 아씨시의 시민들은 ‘자기 재산을 포기한 사람들이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한다’고 그들을 나무랐고, 가족과 친척들은 그들의 꼴을 보면 창피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뻬루지아 전기」에 의하면, 성인의 첫 동료들이 애긍을 청함으로써 창피를 당하는 시련을 겪고 영신적으로 강하게 된 후에, 프란치스코는 그들을 위로했고 그 시련에서 면해 주었다고 증언한다. 그렇지만 성인은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거지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신자들이 좋은 마음으로 애긍해 주는 것을 받는 것과 수고스럽게 남들이 벌어온 재물을 그들에게 부담을 부면서 받는 다는 것은 다르다. 그래서 처음에는 형제들에게 애긍을 청하는 것이 시련의 방법이 되었지만, 그들이 잘 알려지고 존경을 받게 될 때 오히려 애긍의 방법은 편하게 살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이 위험을 예지한 프란치스코 성인은 애긍으로만 사는 “탁발” 형제회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일의 보수로 충분하지 않을 때만 비상시의 방법으로 애긍을 청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필요 이상으로 애긍을 청하는 것은 다른 가난한 사람들의 유산을 빼앗아가는 것이 된다. 또한 애긍으로 받은 것은 모든 가난한 사람들의 유산이기 때문에 그들과 기꺼이 나눌 줄 알아야 한다고 성인은 가르쳤다.
“하늘나라의 상속자와 왕이 되게 하는 가난의 탁월성”
“주님의 식탁”은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백 배를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의 이루어짐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약속의 둘째 부분, 즉 “후세에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성인은 가난이 천상적 유산을 보장해 주는 “약속이며 보증”이라고 한다. 프란치스코는 또한 이러한 말씀으로 천국에서 누릴 영광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약속대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이 이미 이 지상에서 하느님의 나라에 속하게 하는 권리를 획득하고 있으며 왕적 지위를 지니고 있음을 믿었다. 그래서 성인이 말하기를 - “이것이 ···나의 형제 여러분을 하늘나라의 상속자와 왕이 되게 하는 지극히 높은 가난의 탁월성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 안에서 더욱 충만하게 모든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도무지 아무것도 소유하려 하지 않았다.” 성인은 주님께서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재물을 “임시로 맡기셨지만”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유산”을 마련하셨다고 말하곤 하였다.
이 세상에서 “주님의 식탁”을 누리고 저승에서 “영원한 유산”을 누릴 수 있는 확신은 프란치스코에게 이 세상 걱정에서 해방과 마음의 자유와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자기 형제들을 세상에 파견할 때마다 그들을 축복하고 시편의 말씀으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네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 드려라. 당신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첼라노는 리보또르또의 첫 공동체의 생활을 기술하면서 “지극히 거룩한 가난의 추종자들은 가진 것도 애착할 것도 없었기에 결과적으로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할 것도 없었다. ··· 그러므로 그들은 어디에서나 안전하였다”하고 증언한다.
가난을 없애려고 온갖 힘을 다하는 오늘의 세계에서 우리는 가난의 메시지를 어떻게 전해야 할 것인가? 1971년, 세계 곳곳에서 로마로 모인 재속 3회 형제들에게 교황 바오로 6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난, 가난이란 이미 복음에서 두 면을 보여주는 역설적인 말이다. 복음에서 ‘가난한 자들이 복되다’라고 불려지고 있는 한편, 같은 복음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가난 때문에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가난에서 해방시키라고 촉구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수수께끼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가난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가난에 대한 해석과 가난의 준수 때문에 - 프란치스칸 가족을 포함하여 -주장과 사람들을 분열시킨 역사적 논쟁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오늘의 세계도 가난과 부유 때문에 둘로 갈라져 있다. 오늘날의 가장 강한 이데올로기들과 사회적인 운동은 가난한 자, 노동자, 극빈자들의 편을 드는 한편 재산을 가진 자, 부유한 자, 자본주의자들을 공격하고 있다. 그런데 현대의 모든 발전과 현 사회의 모든 조직은 바로 부유함의 무한한 증가와 새로운 경제적 자원의 개척과 분배를 목적으로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은 세계에서 복음적인 가난이 설 자리가 있는가?
잘 알다시피, 복음적인 가난의 의미는 우리의 인생관을 이 땅과 지상의 재물, 지상의 안락, 지상이 줄 수 있는 것에 두는 것이 아니다. 복음적인 가난의 의미는 우리의 인생관을 지상의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두면서 하느님을 찾고 소유하며 재물이라는 유혹에서 우리의 정신을 해방시키는 데 있다. 복음적 가난의 의미는 하느님이 정하신 그 목적에 따라서 재물을 사용하는 데 있다. 이 목적은 재물이 사람들의 일용할 양식이 되고 사람들에게 일할 자리를 마련해 주며, 사람들이 일함으로써 일의 경제적인 이익을 삶과 공동선과 봉사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한다.
다행히도 복음적 가난은 교회에서 다시 꽃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이며 자녀인 여러분은 가난을 명예롭게만 여길 것이 아니라, 가난을 실천함으로써 교회의 모범이 되고 기둥이 되어야 한다. 또한 여러분은 가난을 실천함으로써, 재물에 대한 지나친 근심 걱정과 재물을 차지하려는 사회적 투쟁과, 재물이 줄 수 있는 쾌락에 사로잡혀 있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가난의 참된 뜻을 보여주어야 한다. 복음적 가난이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으뜸임을 재확인하는 것이요, 자유와 겸손의 표현이요 단순생활의 양식이요 기쁨의 원천인데, 프란치스칸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의 증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