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의 미망
누구나 종종 왜, 무엇 때문에 사냐고 스스로 묻는다. 그러다가 현재 자신이 처한 환경에 다른 처방을 내놓고 그것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세월은 가고 문득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다가 화들짝 놀라 제 정신을 차려 봐도 이미 때는 늦은 후이다. 결국 더 이상의 꿈조차 사라진 뒤에야 건강마저 상해 저 황혼의 길로 표표(飄飄)히 떠나는 것이 보통의 인생살이다.
희망을 잃지 않으면 살아 있다는 명확한 증거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추억에 매달리면 차라리 종말에 가까워졌다는 표시일지 모른다. 그만큼 희망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증표다. 인간이 동물들과 상이한 차이는 바로 희망이란 미래의 꿈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막연하나마 내일에 대한 기대는 곧 자신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과 신념을 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보통의 희망을 넘어서는 과도한 집착의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일찍이 법정스님은 ‘집착(執着)’을 버리라고 하면서 “우리가 살면서 어떤 사물에 대해 너무 좋아해도, 너무 미워해도 괴롭다. 모든 괴로움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 두 가지를 분별하는 자신의 마음에서 온다.”고 하였다. 종교학자인 「배 철한교수」는 ‘집착은 자신이 우연히 경험한 것에 안주하여 그것에 중독된 상태다’라고 규정하면서 ‘언제나 새롭게 빛을 비추는 자신의 양심의 빛을 겁도 없이 가리고, 자신이 우연히 경험한 세계를 유일하고 최고라고 착각하고, 그것에 안주하여, 자신의 오감을 지속적으로 자극하여 결국 그것에 중독이 되어버린 것들에 매달리는 불쌍함이다’라고 말했다.
비슷하지만 집념(執念)은 오히려 생산적이다. 인류 문명을 발전시키고 인간 이성의 한계를 확대시켰다. 위대한 예술가와 학자 그리고 일반 보통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창의성과 성취욕을 구현시킨 주요한 활력소였다. 보통의 사람들에게도 역시 집요(執拗)한 면이 있어야 어떤 사안에 대한 성과를 달성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다. 물론 이들 개념은 하나같이 그 바탕에는 집중(集中)을 우선적으로 필요로 한다.
사실 평소 우리 마음속에 좋고 싫은 것만 없다면 괴로울 것도 없고, 마음은 고요한 평화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고도의 수양을 쌓지 않는 한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감정이 없이 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랑하고 미워할지언정 과도한 집착을 버리고 살아야 한다. 언제나 지나친 집착은 인간을 파멸로 이끈다. 따라서 적당한 선을 넘지 않는 절제와 자제력(自制力)의 발휘가 필요하다.
무엇이던지 습관적으로 반복이 지속되면 집착이 된다. 우리는 쉽게 자신이 생각해 본적이 없는, 그 의미를 잘 모르는 어떤 것에 무의식적으로 쉽게 동의하여 집착을 하게 된다. 이렇게 어떤 일에 집착하여 노예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은 옳고 남이 틀린다고 말한다. 이런 편향된 집착은 색안경의 색과 같아서 내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왜곡시켜, 그 사물이 자신의 색이 아닌 전혀 다른 색을 지닌 것으로 보이게 한다.
우리는 수많은 문학 작품 속에서 ‘사랑의 집착’이 빚은 허무한 결말에 대한 애잔하고 연민의 마음으로 아파한다.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의 『보바리 부인』은 평범한 일상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공상에 사로잡힌 한 여인(엠마)이 허영과 불륜으로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가는 비극적인 종말을 리얼하게 그린 작품이다. 역시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도 모든 것을 다 갖춘 귀족 부인이 젊고 매력적인 장교인 「브론스키」를 만나 모든 것을 버리고 애정행각을 벌이다가 기차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인 내용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의 「나스타샤」는 과거의 수치심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과 자신에게 복수하려고 「로고진」에게 살해되어 떠나면서 「므이쉬킨」에게 남긴 책이 『보바리 부인』이었다.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금지된 사랑에 대한 ‘집착’을 그렸다. 10대 소녀를 사랑한 어느 중년 남자의 이야기로 첫사랑의 아픔을 간직한 중년 남자의 불안한 내면을 묘사하고, 질투와 사랑이라는 욕망의 광기를 섬뜩하리만큼 솔직하게 표현했다. 어린 소녀를 향한 성적 동경의 상징으로 오늘날 ‘롤리타 콤플렉스’나 ‘롤리타 신드롬’이라는 용어가 생겼다.
작품을 떠나 실 생활에서도 많은 사례가 있다. 전설의 무용수인 「이사도라 덩컨」은 결혼무용론 자였으나 파리의 억만장자인 「패리스 싱어」의 구애를 받고 두 아이를 낳았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언덕 아래로 굴러간 승용차가 센 강에 침몰하여 두 아이는 익사하였다. 상심한 그녀가 러시아의 초빙으로 갔을 때 마중 나온 사람이 시인인 「세르게이 예세닌」이었다. 죽은 아들과 너무나도 흡사한 그를 보고 모성애가 발동한 「덩컨」은 「예세닌」과 18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했다. 그러나 「예세닌」은 대부분 시간을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렸으며, 결국 자기 기분을 조절하지 못하고 손목을 그어 자살하였다. 「덩컨」 역시 50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드라이브를 나섰다가 목을 감은 붉은 스카프 자락이 자동차 바퀴에 휘감기면서 세상을 하직했다. 역시 사랑의 집착이 빚은 비극이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사실 인간이 살아가게 하는 힘은 희망과 꿈으로 상징되는 욕망이다. 처음에는 누구나 하나만 얻으면 더 이상 욕망이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그것을 이루는 순간 새로운 욕망이 다시 솟는다. 사랑에 대한 지나친 광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사랑에 대한 욕망이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차원을 지나 도를 넘는 집착에 매달리게 되면 그 사랑의 광기는 결국에 자신의 파멸을 초래한다. 우리는 문학작품이나 실생활을 통해 지나친 집착이 빚은 사랑의 광기가 얼마나 많은 참극을 빚었는지를 잘 알고 있다. 한마디로 일정한 도덕적인 기준을 넘어서는 순간 종착역은 자신의 파멸뿐이라는 생생한 교훈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상국가로 ‘스파르타’를 묘사한 『국가론』에서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제시했다. 즉, 통치자는 지혜를, 수호자는 용기를, 그리고 일반 시민은 절제를 구비해야 하며 이 세 집단이 각기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면 정의로운 사회, 이상적인 국가가 된다고 하였다. 로마시대의 「키케로」는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지혜, 정의, 용기, 그리고 절제를 강조하였다.
그런데 「플라톤」이나 「키케로」가 추구한 인간의 덕목 가운데 절제라는 공통의 항목이 있다. 이것은 행동하고 말할 때 절도를 지키고 적절함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라는 의미이다. 우리 인간 모두는 탐욕과 욕망을 절제함으로써 보다 나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내려놓아야만 다른 존재와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詩)라고 칭송을 받는 「황무지」(The Waste Land)는 「T.S. 엘리엇」이 1922년에 발표했다. 이 작품은 한마디로 현대인의 죽음 속의 삶(living in death), 혹은 삶 속의 죽음(death in living)의 여러 형상들을 보여주고, 그에 대한 해답을 암시적으로 제시한 걸작이다. 그런데 이 시는 시인이 황무지를 구원할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끝난다. 천둥소리를 통해 「산스크리스트어」로 들려주는 3가지 지혜가 있는데 Datta(다타:나누어라/주어라), Dayadhvam(다야드밤:공감하라), Damyta(담야타:절제/자제하라) 등이다. 이들 3가지 지혜의 실천을 통해 미래 인류 번영의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심신수양에 필요한 자양분의 역할을 하는 문학 작품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인생을 배운다. 대개 집착은 비극을 초래하므로 미리 조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거의 유한하다는 깨달음, 욕망의 성취엔 한계가 있다는 진리, 따라서 절제와 자제를 통해 신의 섭리와 자연의 법칙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겸허함을 배우고 익힐 때 미래는 더욱 밝아질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언제나 겉으로 보이는 피상적인 현상만을 보고 그 선악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더구나 자주 마주치는 관계일수록 도에 넘는 집착의 미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심지어 부모와 자식 간에도 일방적인 사랑의 집착은 오히려 안정보다 긴장을 조성한다. 한 마디로 내 자신과 타인을 깊이 이해하고 배려하며 포용하는 언행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2023.11.14.작성/2024.3.6.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