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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으로 발화한 층위 속 문장들
_ 피귀자 작품론
세상이 예전 같지 않아 다들 살기가 팍팍하다고들 한다. 팍팍한 세상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또 한편으로 문학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무병처럼 안고 살아가는 시인의 삶이 존재한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도 경외스럽거니와 한 순간도 마음을 놓지 않는 문학적인 열정에 감탄하면서 고투의 시간을 통해 내보이고 있는 시편을 접하면서 그래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직은 살만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한 것이어서 시인이라고 하여 특별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어김없이 다가와서 현재라는 모습을 통해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도록 하는 현상 속에 존재하는 인식의 층위를 다만, 시적으로 사유하며 천착한 것이다. 지금껏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낯선 상상을 통해 드러내는 형상들은 사유라는 접점에서 시인의 문학적 메타성을 유발한다. 알고 보면 현재의 시간도 어딘가를 경유하여 건너왔기에 이미 과거라는 시간의 층위를 내포하고 있다. 비록 우리 앞에서 새로움으로 다가와 하나의 사물성을 현재라는 모습으로 발현하고 있지만, 지금의 시간도 따지고 본다면 이미 오래전 과거에서 도래한 층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담론을 들추는 데는 다름 아닌 사유의 새로움이 지금껏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움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피귀자 시인의 시적 유의미라는 문장 속에 존재하는 내면에서 그런 사유의 시간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 내면 속에 존재한 생각과 사유, 그리고 감정들을 현재라는 시간으로 현현하여 문장화한 것이기에 그렇다. 신선하게 다가오는 형상적인 언어들도 따지고 보면 이미 화자의 경험을 통해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으로 감당을 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여성만의 일상들을 섬세하고 예리한 상상력으로 발화한 시편들을 통해 그러한 예증을 확인해 준다.
순종적인 나는
뼈가 없어 이제 칼도 두렵지 않죠
상처를 잊는 법을 알고 있어
어떤 비명도 지르지 않죠
자존심의 각에 따라 모서리가 생겨나도
심장만큼은 물컹하죠
바깥에서 바라본 중심은 아득하지만
굳이 나를 고집하려 하지 않아서
들러리와 어울려 맛을 내죠
바스러진 꽃 스미고 뭉쳐
몽글몽글해진 하얀 살갗
비로소 당신 살과 피가 되고 싶죠
뜨겁게 쥐어 짜인 기억마저
노래하는 칼날에 잘려지죠
토막처지는 내 삶의 어설픈 구간은
맷돌의 어처구니를 돌린 당신의 방식이죠
-<두부를 말하다> 전문
‘순종’이라는 것의 의미는 의지의 포기가 아닌 자의식을 표표히 드러내는 ‘주체’라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순종’으로 대상화된 ‘두부’도 본래는 현재의 형상이 아니었음을 익히 알고 있다. 콩이라는 형상에서 변화를 거듭해 본래의 물성과는 전혀 다른 물상으로 변화된 형상이 ‘두부’인 것이다. 그렇기에 더는 본래의 모습을 의지로 나타낼 필요가 없다. 어차피 부두로 변화된 이상 다시 원형의 모습인 ‘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제는 ‘콩’이라는 물성을 벗어나 ‘두부’가 된 현상을 긍정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도 그러해야 한다는 사회 가치와도 상통한다. 그것은 결국 사회라는 거대 구조 속에서 살아가며 행할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킨 타자에 대한 이해와 긍정이 최선임을 알아버린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선 안 될 문장 속 ‘순종’으로 긍정하기까지는 많은 고통을 극복해 가는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눈여겨봐야만 한다. 한 알의 콩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더 많은 콩과 결합하여 유익한 물질로 변화하는 과정처럼 한 여성으로 감당해 온 삶의 모습도 그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부만이 갖는 물성에 멈추지 않고 또 다른 물질과 융합하여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 간다는 데 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시적 환기는 아무래도 여성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두부’라는 형상을 통해 무한 변화해 가는 여성성의 모습으로 환기하여 재현하고 있다는 데 있다. ‘뼈’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이미 내면에는 자아라는 ‘뼈(주체의식)’를 대체하고 있다. 또한 아픈 상처를 잊기 위한 방법으로 고통에 대한 비명을 지르지 않는 모습을 통해 일상의 고통에도 묵묵히 인내하는 여성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자존심을 버렸다고 하지만, 확연하게 자신을 나타내는 ‘모서리’를 갖고 있어 자신만의 개성 있는 삶을 살아가는 주체의식을 드러낸다. 자신의 실재를 부인하지만, 또 다른 존재가 내면에 완벽하게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람 횡포에 몸 살점 떼어먹힐까
쉽게는 부러지지 않겠다고 곁의 가지와는
간격을 둔다
눈 감고 기도하는 꽃봉오리들
목줄 풀린 내가 주무르면
방해 말라고 튕기는 굳은살
그래봤자 으르렁거리다가 가벼워질 이빨
해마다 나는 순해지고 있다
누가 부르지 않아도 끓는 이마
뿌리로부터 철철 넘치는 집중
점점 커지는 너의 은밀한 둥지는
더 이상 참지 못해 물컹해지고
쓰다듬는 내 눈독은 집요하다
하루에 하나씩 아껴 피던
수줍음마저도 어느새
지르밟는 발아래 너털웃음이다
-<목련제祭> 전문
‘목련제祭’라고 말하지만, 목련祝祭를 다녀왔을 것으로 추측을 한다면 무리일까? 하기사 언어로 사물을 직접 표현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대상화된 사물을 특정한 언어로 인식하면서 탐색과 재 발견을 통해 인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목련이라는 사물성에 대한 상상의 사유를 다양하게 펼쳐가는 것이다. 피귀자 시인도 그런 상황에서 한껏 자태를 드러낸 목련의 모습을 통해 전해오는 감상적인 충동에 전율하며 형상화한 존재성을 시라는 문장을 통해 완성했을 것이다. 그 충동적인 시작은 목련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되었지만, 지나온 삶의 한 부분처럼 목련이 꽃으로 개화하기까지 있었을 과거의 시간을 거슬러 가며 유추하고 있다. 먼저 목련이 꽃으로 개화되기까지 겪어야 했던 시간을 되짚어보며 꽃을 피우는 과정을 상상하고 있다. 마치 산모가 뱃속의 태아를 생각하며 매사에 조심하며 행동하는 것처럼 목련이 꽃을 온전히 피워내기 위한 조바심에 주의를 집중하듯이 “누가 부르지 않아도 끓는 이마/ 뿌리로부터 철철 넘치는 집중”하여 가지에 맺힌 목련꽃을 피워낸다. 화자는 꽃을 보며 말 없는 목련도 자신과 같은 마음일 거라며 동일시하고 있다. 눈 감고 기도하는 긴 시간을 지나서야 하나의 꽃으로 형상이 맺혀 본색을 드러낼 즈음 더더욱 단단해진 생물적인 본성으로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곧 세월이다. 그 순간마다 좋은 생각으로 태아 같은 꽃봉오리를 키워 어루만지고 있는 형상을 “점점 커지는 너의 은밀한 둥지는/ 더 이상 참지 못해 물컹해지고/ 쓰다듬는 내 눈독은 집요하다”며 과거적 몸에 익숙한 시절을 추억하고 있다.
남산성당 수돗가 낡은 물그릇 테두리에
포로롱 날아와 발 딛는 참새
동그랗게 눈 뜬 내게 쉿!
갈라진 입술로 십자가 긋는다
이마로 찍어 입술에 바르는 물 흘려
견뎌온 갈증을 꿀꺽 삼키는지
톡톡 익숙하게 구부린 자세로
말러의 교향곡 4번을 듣는다
그렇게 기도를 마친 참새는
끄덕끄덕 민들레는 또 피어나라고
사방을 살피며 들어 올리는 고개 짓
긍정의 몸짓이다
홀가분한 몸 항문까지 젖은 참새는
구불구불 밖으로 빠져나간 물로
한 줄의 비망록을 성모상 손바닥에 남긴다
단번에 삼킬 수 없는 벌레를
이리저리 앞발로 굴리던 나는 아직도 목이 마른데
사랑 공부에 눈 맑아진 참새는
훌쩍 성당지붕 십자가 위로 솟구치고 있다
-<손바닥 경전> 전문
기도하는 성당에 한 모금의 물을 얻기 위해 날아든 참새의 일상이 안온한 화자의 심정적인 감정선과 맞닿아 있다.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난 일들이 다들 새롭고 경이롭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그날의 풍경 속 참새의 작은 미동들도 어찌 보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날도 특별한 경우라서가 아니라 대상으로 다가온 풍경을 통해 전이된 상상 지점에 존재한 시의성이 감각적 환상과 합일한 것이다. “남산성당 수돗가 낡은 물그릇 테두리에/ 포로롱 날아와 발 딛는 참새/ 동그랗게 눈 뜬 내게 쉿!/ 갈라진 입술로 십자가 긋는다”며 화자는 성당 수돗가에 내려앉은 참새를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다. 장소가 성당이니만큼 참새도 화자가 갖는 경건한 마음처럼 종교적인 행위로 교감되면서 공감이 확장된 것이다. 이어 참새가 잠깐의 여유를 즐기는데도 무심히 보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천진난만한 아이가 물장난을 치는 모습처럼 연상되며 말러의 교향곡 4번의 감동으로 번져간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참새를 통해 많은 생각들을 삶의 지나온 순간들로 변주해 간다. 참새는 단순히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대한 감사로 의식을 집행하듯 입술로 성호를 긋고 기도를 간구한다. “그렇게 기도를 마친 참새는/ 끄덕끄덕 민들레는 또 피어나라고/ 사방을 살피며 들어 올리는 고개 짓/ 긍정의 몸짓”까지 엄숙하게 마친 뒤 이마에 마치 성수를 뿌리는 것처럼 행위를 거듭한다. 이어서 성모상의 손바닥으로 다가간 뒤 간곡한 무언가를 또박또박 눌러 적어 소원하며 온통 세상에 대한 긍정과 예찬의 몸짓을 보여준다. 참새의 작은 몸짓을 통해 지상의 시간 속에서 행한 행동은 지금껏 화자가 행해온 종교적인 삶의 일상이란 것을 말해준다. 평소에 갖고 있는 화자의 생각들을 참새를 통해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을 통해 재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자라는 머리카락 시간을 보려
솔숲에 가만히 귀를 세워요
저녁을 벗어난 달의 정수리에
반짝이는 이슬의 노래를 들려주죠
외출이 자유로워진다고
노래는 후렴에 후렴을 잇고
검은 옷을 부팅해야 하는데
파가니니 바이올린 소리 들려요
한 달에 한번 가꾼 솔숲엔
지천에 꽃들이 한창
넘실넘실 넘쳐 살에 살이 닿는 축제죠
비로소 째깍째깍 초침소리 잉태한 숲에는
이끼 이불 덮고 잠든 아이가
발 시린 소나무를 흔들어 깨우고 있죠
-<염색나라> 전문
언제나 그럴 거라고 믿었고 자신만은 항상 검은 머리카락을 평생 유지하며 살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귀밑머리가 하얗게 변하기 시작한 것을 깨닫게 된다. 흰머리를 뽑거나 숨겨도 자꾸만 돋아나는 하얀 머리카락이다. 어쩔 수 없이 염색약을 발라가며 비집고 나온 새치라는 흰머리를 관리해야만 하는 때가 오고 만다. 화자도 거울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피해 갈 수 없는 세월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흰머리를 감추기 위해 반복적으로 어느 시점이 되면 머리에 염색약을 발라가며 사는 것이 나이 들어 의례적으로 치르는 일이 되어버렸다. 말이 그렇지 그런 일을 주기적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일상을 화자는 귀찮아하지 않고 되레 그런 시간을 통해 변화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즐거워하고 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복된 행위를 하면서 불편하거나 귀찮아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런 반복된 일정을 즐거운 마음으로 전환해 가는 화자는 세월의 흐름을 거부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려는 긍정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될 것이다. 마치 호기심 많은 아이 같은 마음으로 “자라는 머리카락 시간을 보려/ 솔숲에 가만히 귀를 세워요” 라며 머리카락이 자라는 시간을 알기 위해 귀를 쫑긋하며 듣고 있다는 감성적인 모습을 내비친다. 나이 지긋해서도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기미를 감지하려는 마음이 명랑하다. 거기에 더해 소녀처럼 밤을 아껴 달빛과 교감하는 낭만마저 넘쳐 이슬에 젖은 채 “파가니니 바이올린 소리”에 흠뻑 빠져들면서 예쁜 모습으로 변신해 외출을 꿈꾸는 상상마저 천진해 감상에 부풀어있는 소녀 같다. “한 달에 한번 가꾼 솔숲엔/ 지천에 꽃들이 한창/ 넘실넘실 넘쳐 살에 살이 닿는 축제죠”라며 그런 충동적인 상상은 매사를 긍정하며 살아가는 모습의 일부일 것이다. 화자가 지향하는 생기발랄한 삶의 에너지가 역동성을 통해 긍정적인 활력으로 자연스럽게 일상으로 번져간다. ‘염색나라’는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낭만의 시간을 돌려받는 사유 안에서만 가능한 영토임을 말해준다.
물속에 심지 박고 서 있던 섬이
해 지면 바지락 꽃게 거느리고
상사화로 핀다
짙푸른 그리움과도
손 잡아주면 한 계절 건너 뛸 수도 있겠다
신발 끈 묶고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다가오는
속 붉은 암술의 술래는
솟아오르는 울렁증이 되고
파도의 등 떠미는 바람에도
아랫도리는 늘 축축했다고
젖은 모래에 뒤엉키는 몽돌들
밀고 당기는 어제보다
썰물에 가까워진 아침의 내 몸은
은근 슬쩍 철썩이는 자석이 되고
*밀물 때는 섬이 되고 썰물 때는 육지가 되는 서해의 섬
-<나의 면삽지*> 전문
시를 통해 가슴 안에 들어와 자리 잡은 섬이 ‘면삽지’다. 그 ‘면삽지’는 정확히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리’다. 충남 보령에 있는 섬을 찾아가 시간을 보내면서 즐거웠던 순간순간들이 몸의 어딘가에 층위라는 겹으로 달라붙어 섬이라는 장소성이 화자의 내면 속에서 아련한 충동을 거듭했을 것이다. 그 섬에서 젖어든 감상이 오래된 과거적 경험처럼 가슴을 밀치고 나와 “물속에 심지 박고 서 있던 섬이/ 해 지면 바지락 꽃게 거느리고/ 상사화로 핀다”라며 애틋함으로 마음 시리게 한 것이다. 하지만 화자는 그런 풍경에 만족하지 않고 그 안에 감춰진 또 다른 이별의 시간 동안을 “짙푸른 그리움과도/ 손 잡아주면 한 계절 건너뛸 수도 있겠다”라며 아련하게 밀려오는 그리움으로 애써 말하고 있다. 그 섬에서 보았던 것처럼 어김없이 밀물과 썰물을 통해 지형의 풍경이 바뀌는 자연 속 경이로움이 화자의 시선을 압도한 것이다. 밀물 때면 섬이 되는 섬, 물속에 가라앉은 섬의 아랫도리는 언제나 촉촉이 젖어 한 족속이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썰물 때면 아무렇지 않은 듯이 드러나 섬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면삽지’ 섬이 화자의 마음속에서 물때에 맞춰 일렁이고 있다. 아직도 가슴 어딘가에 남아있는 사춘기의 한 때처럼 “신발 끈 묶고/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다가오는/ 속 붉은 암술의 술래는/ 솟아오르는 울렁증이 되고”라며 그동안 잊고 지냈던 소중한 추억의 한 소절을 찾아내 썰물이 만들어낸 갯가의 흔적처럼 적어나가고 있다.
피귀자 시인의 시 다섯 편을 살펴보았다. 시 전편을 통해 다양한 시의성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중에서 눈여겨보았던 것은 시적 대상에 대한 사유의 근경이 단순하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순간들을 사유 깊은 형상으로 환기시키고 있다. 또한 일상에서 만난 사소함에도 상당한 삶의 의미를 부여하여 그 안에서 전이된 상상력을 통해 시적으로 확장하여 어떤 순간들도 우리의 삶에서 소중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특히 그 안에서 그리움으로 잔잔하게 파동 되는 삶의 부분들이 슬몃슬몃 외양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도 유의미하게 바라보았다. 시를 일상에서 상상(초월) 하지 않으면서 현실 속으로 끌어와 새로운 접점을 만들어내는 것도 피귀자 시인만의 변별성으로 바라봤다. 시 다섯 편이 결국은 우리의 삶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일상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시적인 사유를 통해 자연스럽게 말해주고 있다.
-《인간과 문학》2023년 여름 4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