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하트마 간디 ―
(1) 原則이 없는 政治
20世紀의 가장 偉大한 人物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미국의 어떤 敎授가 英國의 유명한 歷史가요 文明批評家인 아놀드 토인비에게 물었을 때, 그는 즉석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印度의 뛰어난 指導者 마하트마 간디라고 생각합니다.
간디의 이름은 원래 모한다스 카람챤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다. 그런데 왜 마하트마 간디라고 하는가. 인도의 위대한 詩人 타고르가 간디의 생일날 간디를 禮讚하고 稱頌하는 祝詩를 간디에게 보내면서 ‘마하트마 간디’라고 썼다. 그 후 모두 마하트마 간디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하트마(mahatma)라는 말은 산스크리트말로 “위대한 靈魂”이란 뜻이다. 마하(maha)는 ‘위대한’이란 뜻이요, 아트만(atman)은 영혼이란 뜻이다. 간디는 全世界가 높이 우러러 보는 위대한 영혼이다. 그는 20세기의 最大의 인물이요, 最高의 良心이다. 타고르는 간디보다 8년 年上이다. 타고르와 간디는 인도가 낳은 二大人物이다. 간디와 타고르는 인도의 雙璧이요, 인도의 가장 큰 자랑이요, 가장 빛나는 보배다. 나는 1993년 겨울에 인도에 갔을 때 간디의 무덤과 生家와 修道院에 가보았고, 타고르의 집과 그가 세운 유명한 대학을 방문하였다. 타고르와 간디는 내가 20代의 대학생 시절부터 愛讀하고 가장 깊은 思想的 影響을 많이 받은 思想家다. 간디는 現代文明을 銳利하게 批判하고 일곱가지의 疾病을 지적했다. 나는 대학에서 實存主義 哲學을 강의할 때 20세기의 뛰어난 철학자인 야스퍼스와 하이데커와 슈바이처의 現代文明 批判의 글을 읽어보았지만, 간디의 비판이 가장 銳利하고 가장 核心을 찔렀다고 생각했다. 간디에 의하면 現代文明은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의 重大한 疾病에 걸렸다. 이 疾病을 治療해야만 健全한 文明이 될 수 있다. 이 疾病을 치료 못하면 현대문명은 不安과 危機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면 현대문명의 七大疾病이란 무엇이냐.
첫째는 原則이 없는 政治(politics without principle)요 둘째는 法이 없는 商業(commerce without morality)이요 셋째는 人格이 없는 敎育(education without personality)이요 넷째는 人間性이 없는 科學(science without humanity)이요 다섯째는 勤勞가 없는 財産(wealth without labor)이요 여섯째는 良心이 없는 快樂(pleasure without conscience)이요 일곱째는 犧牲이 없는 信仰(worship without sacrifice)이다.
참으로 簡潔明快하게 20世紀의 世界文明의 일곱 가지 疾病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간디의 깊은 洞察力과 예리한 慧眼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세계의 어느 思想家보다도 가장 넓고 가장 깊게 가장 정확하게 現代文明의 중대한 病理를 파헤쳤다. 그러면 이 七大疾病의 治療策이 무엇이냐. 대답은 簡明하다. without(없다)를 with(있다)로 바꾸면 된다. 原則없는 정치를 원칙이 있는 정치로, 道德이 없는 商業을 도덕이 있는 商業으로, 人格이 없는 교육을 인격이 있는 敎育으로, 人間性이 없는 科學을 人間性이 있는 科學으로, 勤勞가 없는 財産을 勤勞가 隨伴하는 재산으로, 양심이 없는 쾌락을 양심이 있는 쾌락으로, 희생이 없는 신앙을 희생이 따르는 신앙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 七大疾病에 걸리면 個人이건, 家庭이건 會社건, 國家건 早晩間에 몰락하고 衰亡한다. 이것은 明若觀火하다. 간디의 七大病患論을 하나씩 검토하기로 한다.
첫째 原則이 없는 政治를 原則을 지키는 政治로 바꾸어야 한다. 洋의 東西, 時의 古今을 막론하고, 국가의 권력은 세 가지의 큰 疾病과 害惡에 빠지기 쉽다. 첫째는 腐敗요, 둘째는 獨裁요, 셋째는 傲慢不遜이다. 이 세 가지 해악은 自古以來로 권력이 빠지기 쉬운 屬性이다.
권력은 부패한다. 絶對的 權力은 絶對的으로 부패한다.
19세기의 영국의 유명한 宗敎家요 켐부리지大學의 歷史學 교수였던 악톤(acton)의 이 말은 권력의 속성을 갈파한 名言이다. 腐敗는 腐와 敗가 합한 말이다. 腐는 썩는 것이요, 敗는 敗亡하는 것이다. 개인이건 회사건 국가건 썩으면 반드시 敗亡한다. 이것은 인생과 사회와 歷史의 不變의 鐵則이다. 개인이건 국가건 權力은 獨裁의 惡에 빠지기 쉽다. 스탈린과 히틀러와 秦始皇의 경우처럼 一人獨裁에 빠지거나 舊소련의 共産黨처럼 一黨獨裁와 一階級 독재의 惡에 빠지기 쉽다. 古代中國의 周나라의 指導者 周公이 喝破한 바와 같다.
天下非一人之天下,乃天下之天下也 천하는 君主 한사람의 전하가 아니고, 온 천하 사람의 천하다.
中國의 古典인 六韜에 나오는 이 명언은 국가와 권력과 정치에 관한 金言이다. 국가는 君主나 政治家의 個人的 所有物이 아니다. 온 천하사람의 천하요 全體國民의 共同所有이요, 公的財産이다. 영어에서 국가를 country, state, nation이라고 하지만, 국가는 국민의 公有物임을 明示한 중요한 英語單語가 둘 있다. 하나는 Republic이란 말이요, 또 하나는 Commonwealth라는 말이다. Republic(國家)이란 말은 라틴말 publica에서 왔다. Res는 物件 thing이다. publica는 public, 公的이요, 公的事物이다. 執權者의 私的所有物이 아니다. 콤먼웰스 Commonwealth라는 말은 公共(Common)의 財産(wealth)이란 뜻이다. 政治와 權力이 獨裁와 腐敗와 傲慢의 惡에 빠지지 않으려면 法과 正義의 原則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權力은 正義 위에 君臨해서는 안 된다. 權力은 正義 미에 있어야 한다. 法과 正義의 遵守, 이것이 權力이 지켜야할 大原則이다. 세상에 遵法精神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政者正也 子帥以正 孰敢不正
論語 顔淵篇에 나오는 말이다. 魯나라의 대부인 季康子가 孔子에게 정치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공자가 대답한 말이다. “政은 正입니다.” 정치는 나라를 바로잡는 것이요 正義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大夫人 당신이 먼저 率先하여 정의를 實踐하십시오. 그러면 百姓은 반드시 당신을 본받고 따를 것입니다. 政은 正이다. 簡潔明快하게 정치의 根本을 갈파한 말이다. 政治는 正義의 盤石 위에 설 때 견고하고 權威가 있고 힘이 있다. 原則이 없는 정치는 타락하고 崩壞한다. 원칙이 무너지면 變則이 되고, 變則이 무너지면 反則이 된다. 世上萬事는 다 지켜야 할 法이 있고 原則이 있고, 順理가 있고, 正道가 있고, 道理가 있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스 神話의 正義(dike)의 여신은 우리에게 示唆하는 바가 많다. 정의의 여신은 세 가지의 특징을 지닌다. 첫째로 왼손에 저울대를 갖고 있다. 둘째로 두 눈을 헝겊으로 가리고 있다. 셋째로 오른손에 칼을 쥐고 있다. 저울대는 사물의 大小輕重과 善惡正邪와 是非曲直을 正確하게 分別하고 判斷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에 올바른 事理判斷을 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정의의 여신은 왜 두 눈을 가리고 있는가. 눈을 가린다는 것은 私心이 없는 것, 公私를 分明히 하는 것, 私利私慾에 사로잡히지 않고 모든 일을 公正하게 公平하게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정하려면 사심이 없어야 한다. 正義의 女神은 왜 오른손에 칼을 쥐고 있는가. 惡과 不正을 退治하고 懲罰해야 한다. 칼은 勸善懲惡을 의미한다. 힘이 없는 正義는 正義가 아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는 인간의 社會生活의 基本原理라고 갈파했다.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天下歸正, 온 천하가 모두 正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義人路也”라고 孟子는 외쳤다. 正과 義는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光明과 大義 정신을 가지고 인생의 正道와 大道를 正正堂堂하게 걸어가는 늠름한 韓國人, 그러한 국민이 되어야 한다.
現代文明의 七大疾病(2) |
― 道德이 없는 商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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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 秉 煜 |
(2) 道德이 없는 商業(commerce without morality) 現代文明의 七大疾病의 둘째는 道德이 없는 商業이다.
生財有大道(大學 傳十章)
財産을 모으는데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할 大道가 있고 커다란 原則이 있다. 儒敎의 古典인 『大學』에 나오는 名言이다. 道德이 없는 장사, 道德을 무시하고, 도덕을 忘却한 商業은 早晩間 반드시 衰殘하고 敗亡한다. 이것은 우리가 수 없이 目擊하는 엄연한 社會的 현실이다. 도덕을 무시한 個人이 성공하고, 도덕을 망각한 家庭이 幸福하고, 도덕을 유린한 企業이 繁盛하고, 도덕이 땅에 떨어진 國家가 발전하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그것은 밥 안 먹고 배불러 보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道德은 인생의 大本이요, 萬物의 根本原理요, 存在의 大原則이요, 攝理의 根幹이다. 道德이란 말은 道와 德이 결합한 말이다. 道는 무엇이고, 德은 무엇인가.
道는 길이다. 萬物有道.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저마다 자기가 가야 할 길이 있다. 吾行吾道. 나는 나의 길을 가고, 汝行汝道. 너는 너의 길을 가야한다. 인생은 going my way다. 달은 달이 가는 길이 있고, 地球는 地球가 가는 길이 있다. 王은 王이 가는 길이 있다. 그것이 王道다. 臣下는 산하가 가는 길이 있다. 그것이 臣道다. 선비는 선비가 가는 길이 있다. 그것이 士道다. 武士는 무사가 가는 길이 있다. 그것이 武士道다. 신사는 紳士道가 있고, 淑女는 淑女道가 있다. 自動車는 車道를 가야하고, 기차는 鐵道로 가야한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가야할 길이 있다. 그것이 人道다. 生卽道. 산다는 것은 저마다 자기가 가야할 길을 가는 것이다. 韓國은 韓國이 가야할 나라의 큰 길이 있다.
德이란 무엇이냐. 자기의 길을 갈 수 있는 힘이다. 德卽力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知卽力이다. Knowledge is power. 라틴말의 원문은 Scientia est potentia다. 17세기의 英國의 유명한 經驗論의 哲學者 프란시스 베이컨이 갈파한 말이다. 知의 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德의 힘이다. Virtue is power다. 德의 힘은 우리는 人格의 힘이라고 한다. 아들이 아들 노릇을 잘하고 자식이 자식 구실을 바로 하려면 德과 人格이 있어야 한다. 아는 것, 知도 중요하지만 행하는 것, 行과 德은 더 중요하다. 行은 象形文字다. 行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象形한 것이다. 말만 많이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을 nato라고 한다. no action talk only다. 그것은 意味가 없다. 知行一致, 言行一致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정말 아는 것이 아니다. 中國 明나라의 大儒 王陽明의 말처럼 知行合一할 때 참으로 아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은 知의 人은 많아도 行의 人은 드물다. 理論理性보다도 實踐理性이 더 중요하다. 말만 많이 하고 實踐力이 부족하고 行動이 貧弱한 것이 한국 知性人의 큰 缺點이다. 道는 우리가 가야할 길이요, 德은 우리가 갈 수 있는 힘이다. 길과 힘이 道德의 核心이다. 우리는 부단히 德을 갈고 닦고 强化해야 한다. 그것을 修養이라고 하고 또 修道라고 한다. 인간은 부지런히 修養을 쌓야만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 참된 힘이 생긴다.
商業이란 무엇이냐. 商品을 賣買하여 利益을 추구하는 營利行爲다. 돈을 모으는 것이 상업의 목적이다. 돈을 벌려면 장사를 해야한다. 월급쟁이가 되면 생활은 할 수 있어도 큰돈을 벌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富를 축적하기 위하여 商業에 投身한다. 商業을 하려면 商才가 있어야 하고 商魂이 투철해야 한다. 商行爲 商去來가 벌어지는 장소가 市場이다. 시장은 自由競爭과 公正한 去來가 이루어지는 熾烈한 活動舞臺요, 왕성한 競爭力이 불꽃을 튀는 東奔西走의 세계다. 市場만큼 活氣가 넘치고 意慾과 競爭이 强烈한 生의 現場이 없다. 세상에 商人처럼 부지런하고 민첩하고 生活力이 강하고 目的意識이 뚜렷한 사람이 없다. 나는 시장 구경을 무척 좋아한다. 나는 시장에서 삶의 가장 强烈한 맥박을 느낀다. 옛날에는 돈을 벌기 위하여 시장에서 서로 거짓말과 속임수와 否定과 싸움과 협잡과 腐敗와 賂物이 오락가락하였다. 그러나 時代는 크게 달라졌다. 狀況은 많이 바뀌었다. 좁은 國內市場이 廣大한 國際市場으로 바뀌었고, 커다란 多國籍 企業이 생겼고, 全世界가 하나의 巨大하고 自由로운 시장이 되었다. 참으로 큰 변화다. 지금 우리는 200餘個의 나라가 相互競爭하고 相互協同하는 太平洋 시대와 地球村 세계와 情報技術 産業社會 속에서 奔忙하게 살고 있다. 산다는 것은 環境에 適應하는 것이다. 激變激動하는 환경에 적응을 못하면 歷史의 落伍者가 되고 사회의 敗北者로 轉落한다. 우리는 살기 위하여 積極的인 適應力과 왕성한 競爭力과 견고한 協同力과 두터운 公信力과 발랄한 創意力을 갖추어야 한다. 오늘의 시대를 成功的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現代에서가장 强한 힘을 가진 것이 둘 있다. 하나는 國家의 權力이요, 또 하나는 돈이다. 돈의 놀라운 威力을 표현한 말을 몇 개만 소개하기로 한다.
神은 天上을 支配하고, 돈은 地上을 지배한다. 돈은 어디서나 歡迎을 받는다. 돈은 第二의 血液이다. 돈은 무슨 일이나 할 수 있다. 돈이 앞장을 서면 모든 門이 다 열린다. 돈은 놀라운 購買力을 갖는다. 黃金은 萬能이다. 돈은 帝王이다. 인간은 돈의 바다에 빠진다. 黃金은 黑士心이다. 돈은 선비의 마음을 시커멓게 만든다. 인간의 모든 苦痛은 두가지의 缺乏에서 온다. 하나는 돈의 결핍이요, 또 하나는 사랑의 결핍이다.
돈의 威力을 갈파한 명언들이다. 우리는 돈의 誘惑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돈의 奴隸가 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守錢奴가 되지 않아야 한다. 돈은 인간의 생활의 手段이지, 결코 生活의 目的은 아니다. 우리는 돈의 종이 되지 말고, 돈의 主人이 되어야 한다.
돈은 萬惡의 근본이다. money is the root of all evils라고 옛사람은 말했다. 道德과 良心은 秋毫도 없고 돈만 있고 돈 밖에 모르면 인간은 醜雜한 動物的 慾望과 本能의 포로가 되어 古代의 暴君처럼 酒色雜技의 노예가 되고 酒池肉林 속에 빠져버린다. 돈의 노예가 된 인간은 傲慢不遜 自尊妄大하여 無所不爲의 悖倫兒로 전락한다. 그는 人非人이다.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니다. 세상에 道德과 良心을 망각한 害惡처럼 惡하고 무서운 것이 없다. 大學에는 이런 文章이 있다.
德者本也 財者末也 外本內末 爭民施奪(大學 傳十章) 무엇이 人生의 根本이냐. 德이 人生의 根本이요, 財物은 人生의 末本이다. 인간이 本末을 顚倒하여 근본인 德을 等閒히 하고, 末端인 財物을 愛之重之하면 利를 위한 추잡한 싸움이 벌어지고 만다.
우리에게 警鐘을 울리는 말이다. 世界는 하나의 크고 넓고 自由로운 市場社會가 되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오늘의 商業人들은 이 새로운 企業環境에 적응하기 위하여 올바른 商業倫理와 새로운 德目을 배우고 實踐해야 한다. 나는 다섯 가지의 德目을 강조한다. 첫째는 信用이다. 우리는 信用社會의 信用人이 되어야 한다. 국가의 興亡盛衰를 좌우하는 決定的 要素는 모랄에너지(moral energy)다. 伯林大學의 유명한 歷史學 교수인 랑케의 명언이다. 信用은 人間관계의 基本倫理다. 孔子가 갈파한 人生의 名言인 “無信不立”을 우리는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신용을 喪失하면 설 땅이 없다. 신용은 企業의 生命이다. 韓國의 企業이 高度의 信用을 획득할 때 우리의 商業은 크게 발전한다. 둘째는 公正이다. 우리는 公正社會의 公正人이 되어야 한다. 正은 인간이 서야 할 자리요, 義는 사람이 가야할 길이다. 白凡 선생은 “良心革命”과 “信義確守”를 力說했다. 韓國人의 말을 믿을 수 있고, 상품을 믿을 수 있고, 技術을 믿을 수 있고, 會社를 믿을 수 있다. 全世界가 韓國을 信用할 때 우리는 大成하는 나라가 될 수 있다. 셋째는 親切의 德目이다. “春風接人 和氣滿面” 사람을 대할 때 봄바람처럼 훈훈하고, 얼굴에서는 따뜻한 和氣가 넘쳐야 한다. 暗冷人이 되지 말고 明溫人이 되어라. 밝고 따뜻한 한국인, 우리는 그러한 印象을 全世界人에게 심어주어야 한다. 넷째는 奉仕다. 自動車王 헨리포드는 이렇게 말했다. “奉仕를 主로 삼는 企業은 번영하고 利得을 主로 하는 사업은 衰退한다.” 돈을 벌겠다는 營利의 정신보다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奉仕의 정신으로 기업을 하면 우리는 큰 繁榮을 누리게 된다. 끝으로 투철한 匠人精神을 가지고 자기의 직업에 心血을 기울이고 精魂을 傾注하면 반드시 大成할 수 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간절한 목표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자기의 직업에 대한 투철한 使命感과 뜨거운 獻身的 姿勢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이것이 大業 成就의 根本原理다. |
간디의 현대문명의 칠대질병 3 |
人格이 없는 敎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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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 秉 煜 |
세상에 敎育投資처럼 중요한 투자가 없다. 영어에 이런 名言이 있다.
교육은 최고의 투자다. Investment in education is the best investment
自己開發과 自我完成을 위하여 교육투자를 부지런히 하여라. 인간은 敎育의 産物이다. 敎育이 인간을 만든다. 프랑스의 유명한 啓蒙主義 思想家 장자크 루소는 이렇게 말했다.
교육의 목적은 機械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人間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다운 인간을 만드는 것, 健全한 인격을 形成하는 것, 이것이 교육이다. 獨逸의 大哲 칸트도 꼭 같은 의미의 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은 교육에 의해서만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람에서 교육의 成果를 除去하면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白紙와 같은 無의 存在로 태어난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서서히 말을 배우고, 習慣을 배우고, 禮節을 배우고, 道德을 배우고, 文化를 배우면서 人間다운 인간으로 成長한다. 그러나 올바른 교육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가르쳐야 인간다운 인간을 만들 수 있느냐.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敎育學의 大課題이다. 그러므로 칸트는 ‘敎育學’ 講義에서 이렇게 말했다.
敎育은 人間에게 賦與된 最大 最難의 課題다.
올바른 교육을 하는 것, 특히 올바른 人格敎育을 한다는 것은 難中之難事다. 올바른 子女敎育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세상에 子女敎育의 실패자가 不知其數다. 哲人的 교육자였던 九度壯元公 李栗谷 선생은 그의 名著 『擊蒙要訣』(蒙昧한 兒童을 가르치는데 중요한 비결이 되는 冊이란 뜻)에서 이렇게 말했다.
人生斯世 非學問 無以爲人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학문을 아니하면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다.
교육 없는 人格은 올바른 인격이 아니다. 인격 없는 교육은 참된 교육이 아니다. 교육과 인격은 서로 密接不可分의 관계를 갖는다. 敎育의 목적은 人格形成이요, 人格形成의 手段이 교육이다. 옛날 교육은 주로 人格敎育, 道德敎育, 精神敎育, 敎養敎育, 사람 만드는 교육이었다. 儒敎文化圈에 태어난 우리들은 孟子가 喝破한 “仁義禮智信”의 五常과 君臣之間의 義理, 父子之間의 親愛, 夫婦之間의 有別, 長幼之間의 有序, 朋友之間의 信義를 강조하는 道德敎育, 人倫敎育을 받으면서 朝鮮朝 五百餘年의 역사를 살아 왔다. 이것이 우리의 도덕과 敎育의 根幹이 되었다. 그러나 近代産業文明이 발달하면서 敎育의 목적과 도덕의 德目이 一大變革을 일으키게 되었다.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人格과 道德中心의 교육에서 物件을 만드는 技術, 商品生産 技術 교육으로 바뀌었다. 자동차를 어떻게 하면 잘 만드느냐, 電子製品을 어떻게 하면 다 싸고 편리하게 만들 수 있느냐. 生産, 技術, 能率, 速度, 便利, 利潤, 快適. 이러한 새로운 德目들이 현대 産業社會의 중요한 價値目錄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價値觀의 一大變革이었다. 그 결과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人格敎育과 道德敎育은 等閑視되고, 輕視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 그것은 절름발이의 교육이다. 近者의 西歐學者들간에는 이런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學校는 결코 사람을 만들지 못한다.(School never makes a ma)”, “학교는 죽어버렸다.(School is bad). 이것은 一理가 있는 말이다. 人類의 敎育界의 중대하고 불행한 現象의 하나다. 우리는 人格敎育과 道德敎育을 어떻게 再建할 것이냐 하는 중요한 問題意識이 생기기 시작했다. 倫理없는 敎育, 道德없는 技術은 무섭고 위험하다. 칼이 醫師의 손에 쉬어지면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善의 道具가 되지만, 도둑의 손에 쥐어지면 인간의 목숨을 빼앗는 惡의 도구로 전락한다. 原子力이 産業에 活用되면 文明의 놀라운 利器가 되지만, 戰爭의 武器에 惡用되면 人類를 破滅시키는 무서운 惡의 手段으로 전락한다. 위대한 文明批評家 마하트마 간디가 크게 憂慮하는 것은 現代文明의 이러한 危機的 狀況 속에서 “渾 없는 機械”가 되기 쉽고 “人格없는 道具”로 전락하고 삶의 意味를 喪失하기 쉽다. 나는 健全한 人間回復을 위하여 세 가지의 敎育을 强調하려고 한다. 첫째는 自己敎育(self education)이요, 둘째는 平生敎育이요, 셋째는 全人敎育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人間의 健全性과 自主性을 회복할 수 있다.
敎育權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權利의 하나다. 우리는 現代文明의 汚染된 濁流속에 漂流하지 않지 위하여 먼저 自己敎育의 主體가 되어야 한다. 네가 너 자신을 가르치는 自主的 敎育者가 되어라. 독일의 위대한 哲學者 칸트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名言을 남겼다.
스스로 思索하고, 스스로 探究하고 제 발로 서라.
우리는 堂堂한 自主人이 되어 내 발로 서서 내 힘으로 나의 進路를 개척하고 스스로 나의 運命을 건설하는 主體的 人間이 되어야 한다. 人格의 가장 중요한 特色은 自律性(Autonomy)에 있다. 남이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해야 할 일을 自主的으로 能動的으로 하는 自發的 인간이 되어야 한다. 自己敎育을 하려면 自己激勵(Self encouragement)와 自己鞭撻을 해야한다. 자기가 자기를 격려하고 스스로 채찍질을 加해야 한다. 우리는 自主人이 되고 自治人이 되고 自律人이 되어야 한다.
둘째는 平生敎育(life long education)이다. 인간의 一生은 교육의 일생이다. 우리는 한 평생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 激變ㆍ激動하는 치열한 競爭社會에서 배우고 공부하지 않으면 인생의 落第生이 되고 사회의 劣等生으로 전락한다.
나는 공부하고 준비하리라. 그러면 機會는 반드시 온다. 만나는 사람마다 敎育의 기회로 삼아라.
젊은 링컨은 이런 座右銘을 만들고 平生敎育을 하였기 때문에 온 人類가 우러러보는 세계의 偉人이 되었다. 링컨은 집이 가난하여 初等學校 밖에 못 다녔다. 平生敎育이 그를 偉大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生活에서 배우고 自然에서 배우고, 歷史에서 배우고, 인간관계에서 배우고, 經驗에서 배운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면 萬人이다. 나의 스승이요 만물이 다 인생의 교과서다.
日日學 日日進 日日新
우리는 날마다 배우고 날마다 前進하고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끝으로 全人敎育(the total education)이다. 교육이란 무엇이냐. 人間性의 調和的 發達(harmonius development)이다. 스위스의 뛰어난 교육자 페스탈로찌의 말이다.
인간의 여러 가지 能力이 均衡的으로 調和的으로 골고루 발달할 때 全人이 形成된다. 머리와 손과 가슴의 세 要素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머리는 知識이요 學問이다. 손은 勞動이요 技術이다. 가슴은 良心이요 도덕이요 宗敎다. 일찍이 學聖 孔子는 知와 仁과 勇의 三德을 강조했다. 知仁勇의 세 가지 德이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全人이 形成되고,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 나는 知仁勇을 野性과 知性과 德性이라는 말로 表現하고 싶다. 知性은 인간의 놀라운 學習能力이요, 위대한 創造力이다. 知性은 偉大하다. 그러나 결코 萬能은 아니다. 사람이 良心과 德性이 없고 知性만 발달하면 교활한 高等 知能犯이 되고, 惡의 지혜와 꾀가 많을 惡魔로 전락한다. 그러므로 학교에서 지식과 기술만 가르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知識敎育위에 德性敎育과 道義敎育이 있어야 한다. 敎育은 단순한 지식과 기술의 傳達이 아니다. 가르치는 者와 배우는 者의 魂과 魂, 精誠과 精誠, 生命과 生命, 人格과 人格이 서로 만나고 서로 대화하고 서로 共鳴共感하고 서로 感激과 기쁨을 같이 나눌 때 참된 人格敎育과 도덕교육이 이루어진다. 學生은 많아도 弟子는 드물다. 先生은 많이도 스승은 적다. 스승과 제자가 上敬下愛 속에 따뜻한 魂의 交流가 이루어지고 서로 믿고 서로 아끼고 서로 신뢰하고 서로 사랑할 때 참된 人格敎育의 아름다운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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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現代文明의 七大疾病(6) |
良心없는 快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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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秉煜 |
人間은 어떤 存在냐, 多元的 慾望의 主體다. 사람은 하나의 복잡한 욕망의 덩어리다. 인간은 欲塊다. 산다는 것은 자기의 慾望을 充足시키기 위하여 東奔西走하면서 奮鬪努力하는 것이다. 자기의 욕망이 充足되면 흐뭇한 기쁨과 滿足感을 느끼고, 자기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심한 欲求不滿이 일어나 挫折感과 不快感을 느낀다. 인간의 感情의 快不快는 주로 욕망이 충족되느냐 안 되는냐에 의해서 左右된다. 인간은 대체로 다음 일곱 가지의 욕망을 갖는다. 첫째는 權力慾이요, 둘째는 所有慾(財物慾, 金錢慾)이요, 셋째는 名譽慾이요. 넷째는 快樂慾(享樂慾)이요, 다섯째는 知識慾(眞理追求慾)이요, 여섯째는 奉仕慾(眞正한 信仰人의 경우)이요, 끝으로 創造慾(成就慾, 發明家나 作家나 藝術家의 경우)이다. 特殊한 例外的 人間도 있겠지만 대체로 이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 어느 욕망이 强하냐, 弱하냐의 差異가 있을 뿐이다. 慾望은 인간의 向上의 原動力이요, 社會的 進步의 推進力이요 文明發展의 起爆劑가 된다. 인간은 욕망이 없으면 向上도 없고 發展도 없고 進步도 없다. 健全한 慾望은 善과 幸福의 源泉이다. 잘살아 보고 싶다. 성공하고 싶고 勝利하고 싶다. 보람 있게 살고 싶다. 有名한 藝術家가 되고 싶다. 국가에 貢獻하고 싶다. 偉大한 국가를 建設하고 싶다. 이러한 욕망이 있기 때문에 生活의 向上이 있고 社會의 繁榮이 있고 文明의 進步가 있다. 꿈과 理想이 없는 사람은 죽은 인생이나 다름이 없다. 욕망은 인간의 强力한 發動機다. 나는 무엇을 할 것이냐. 나는 어떤 慾望을 追求할 것이냐에 따라서 나의 人生觀과 價値觀과 삶의 態度와 方向이 決定된다. 人生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慾望의 選擇과 管理”다. 우리는 자기의 適性과 天分과 才能에 맞는 욕망을 選擇해야 하는 동시에 그 욕망을 智慧롭게 잘 管理해야 한다. 慾望을 잘못 선택하고 잘못 관리하면, 虛慾이 되고, 過慾이 되고, 貪慾이 된다. 文學的 소질과 天分이 많은 사람이 政治나 企業에 투신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왜냐하면 자기의 適性과 天分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慾望의 체계 중에서 享樂慾, 快樂慾은 대단히 强烈하다. 도든 사람이 저마다 강한 享樂衝動을 갖는다. 이것은 人間性의 一般的 傾向이다. 快樂은 感性의 滿足이요, 感覺的 快樂의 充足이다. 맛이 있는 것을 먹고 싶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싶다. 부드러운 것을 만지고 싶다. 安樂하게 살고 싶다. 좋은 옷을 입고 奢侈하고 싶다. 신나게 춤추면서 놀고 싶다. 酒色에 흠뻑 빠져보고 싶다. 末梢神經에 짜릿한 刺戟과 興奮을 가하고 싶다. 이것이 現代人의 感覺文明이다. 많은 사람들이 ‘快樂은 幸福이다’ 이렇게 믿고 快樂追求에 골몰하고 몰두한다. 이런 人生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現代人은 多分히 感覺的 人間이요, 快樂主義者다. 옛날 사람들은 快樂主義를 酒色雜技라고 표현했다. 人心은 古今同다. 인간은 자칫 잘못하면 感覺的 快樂의 포로가 되기 싶다. 現代의 商業主義의 華奢한 感覺文明은 多彩多樣한 享樂文化를 만들어 現代人을 자극하고 유혹한다. 感性이 旺盛한 젊은 世代들은 이 强烈한 유혹에 빠지기 쉽다. 향락에 깊이 빠지면 心神이 피로하고 생활이 荒廢해진다. 富와 自由와 閑暇의 시간을 많이 가지는 사람은 快樂문화의 늪에 빠지기 쉽다. 中國의 古典의 하나인 大學에 이런 말이 있다.
小人閒居爲不善 無所不至(大學 傳六章)
小人은 閑居하면 不善한 행동을 서슴지 않고 恣行한다. 小人은 君子의 反對 槪念이다. 小人은 智慧와 德이 不足한 未熟한 인간이다. 소인은 한가하면 좋은 일은 안하고 나쁜 짓만 한다. 獨逸의 詩人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享樂은 人間을 賤하게 만든다.
사람은 享樂에 빠지면 賤해진다. 인간은 어느 정도 快樂이 必要하다. 그러나 快樂에 사로잡혀 쾌락의 포로가 되면 인간은 賤과 醜의 世界로 전락한다. 인간은 지저분한 享樂의 종이 죄면 너절한 俗物이 되고 보기 흉한 醜物이 되고 쓸모가 없는 凶物로 전락하여 아무 가치도 없는 廢物이 되고 만다. 前途有望한 젊은이가 飮酒에 빠져 無用之物이되고 유능한 企業家가 痲藥에 중독되어 廢人처럼되고, 善良한 中年女人이 도박에 미쳐 敗家亡身하고, 훌륭한 社會指導者가 女色에 빠지어 日新을 亡치는 것을 볼 때 享樂慾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實感하게 된다. 그러므로 위대한 智慧의 스승인 孔子는 이렇게 갈파했다.
樂而不淫(論語 八佾篇) 향락 속에 빠지지 말라
무슨 일이 나 즐기면 빠지기 쉽다. 우리는 쾌락의 함정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서양의 어떤 哲學者는 이렇게 말했다.
苦難을 이기기는 쉽지만 快樂을 이기기는 어렵다.
우리는 快樂의 誘惑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快樂主義者의 末路는 破滅이요, 悲劇이요, 敗亡이다.
“良心없는 快樂은 인간을 亡친다.”라고 간디는 우리에게 중대한 警告를 하였다. 良心은 인간의 最高의 스승이요, 最大의 빛이다. 독일의 위대한 哲學者 임마뉴엘 칸트는 良心을 일컬어 “人間法定”이라고 하였다. 良心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峻嚴한 裁判所다. 우리가 否定한 犯罪를 저질렀을 때, 양심은 준엄한 裁判官이 되어 우리를 內的 法廷에 불러내어, 우리의 잘못된 행동을 준엄하게 告發하고 苛責하고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말라고 엄중한 경고를 한다. 우리는 숙연한 마음으로 양심의 소리를 조용히 듣고 깊이 반성하고 아프게 苛責을 느끼고 다시는 그런 행동을 안 하겠다고 굳은 盟誓를 해야 한다. 良心은 하늘의 소리요, 하나님의 音聲이라고 옛사람들은 믿었다. 양심이란 무엇이냐. 사람으로서 마땅히 가져야할 바르고 착한 마음이다. 무엇이 善이고 무엇이 惡이며,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는지를 우리에게 일러주고 善과 正을 命令하고 惡과 不正을 물리치게 하는 준엄한 道德意識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 良心이라는 最高의 判斷者와 최고의 命令者 있기 때문에 우리는 惡과 不正을 물리치고 善과 正義의 實踐者가 되고, 惡한 행동을 하였을 때 심한 苛責感과 羞恥感을 느끼고 惡을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孟子는 良心의 核心을 羞惡之心이라고 하였다. ‘惡’字는 ‘악할 오’ 자인 동시에 ‘미워할 오’다. 良心은 不義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不善을 미워하는 마음이다. 인간은 羞惡之心이 있기 때문에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人格다운 인격이 될 수 있다. 動物에는 羞惡之心이 없다. 그러므로 동물은 道德以前, 道德以下의 存在가 된다. 양심은 인간의 核心的 要素다.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이 무엇이냐. 道德的 行動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良心과 正義感이 인간의 根本이요, 사람의 뿌리다. 인간에게 良心과 正義感을 除去하면 醜惡한 동물로 전락한다. 良心의 行方不明처럼 세상에 무섭고 부끄러운 것이 없다. 양심은 人間 最高의 빛이요, 最大의 權威다. 우리는 良心韓國을 建設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至上의 課題다. 우리는 양심의 기초 위에 나라를 세워야 한다. 그래야만 偉大한 나라가 될 수 있다.
나의 良心은 果然 健在한가?
우리는 엄숙한 마음으로 自己自身에게 이러한 물음을 던져야 한다. |
간디의 現代文明의 七大疾病(7) |
犧牲이 없는 信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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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秉煜 |
위대한 것은 어떤 것이냐. 偉大性의 基準과 尺度는 무엇이냐. 훌륭한 일을 위해서 獻身的으로 일에 沒入하는 것이다. 愛國을 위해서, 眞理를 위해서, 同胞를 위해서, 正義를 위해서, 놀라운 發明과 探險을 위해서, 자기의 몸과 마음과 情熱을 모두 바치는 것이다. 이런 용감한 행동은 반드시 우리의 心琴을 울린다. 우리는 이러한 人格과 행동 앞에 저절로 고개를 숙이고 感謝와 尊敬과 驚歎의 念을 禁할 수 없다. 信仰이란 무엇이냐. 우리가 마음속으로 굳게 믿고 높이 우러러보는 훌륭한 生活信條요, 확고한 믿음이다. 犧牲이란 무엇이냐. 옛날 國家社稷에서 큰 제사를 드릴 때 羊과 같은 산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희생은 어떤 일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고 온갖 精誠과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민족의 義人이라고 일컫는다. 한 國家와 史話에 이런 사람이 많아야 한다. 이것이 훌륭한 사회요, 뛰어난 나라다. 그러한 사회의 代表的 人物을 두 사람 생각해 보기로 한다. 먼저 슈바이처에 관해서. 슈바이처는 유복한 가정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哲學을 공부하여 思想家 神學者가 되었고, 大學敎授와 著述家가 되었고, 파이프 오르간의 유명한 演奏者가 되었다. 그는 21세 때에 놀라운 決心을 했다. 30세가 될 때까지는 나 자신의 學問과 藝術을 위해서 살자. 이후부터는 直接的 방법으로 人類에 크게 奉仕를 하자. 그는 자기의 인생을 두 토막으로 나눴다. 어느 날 파리의 傳道회관에서 보낸 신문을 보고 그는 커다란 衝擊的 感動을 느꼈다.
지금 아프리카 콩고 지방에는 醫師가 없어서 병을 고쳐 주려고 해도 병을 고칠 수가 없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메시지를 傳하려고 해도 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신을 간절히 부르고 있습니다. 이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실 분은 안 계십니까.
이 記事를 본 순간 슈바이처는 “제가 가겠습니다.”하고 중대한 決心을 하였다. 참으로 위대한 決斷이었다. 그는 醫師가 되기 위하여 6년 동안 의학공부를 하여 1911년 마침내 의사가 되었다. 그는 看護學을 전공한 夫人을 동반하고 아프리카 콩고지방의 람바레네로 떠났다. 그는 람바레네에 병원을 짓고 흑인 醫療事業을 시작했다. 슈바이처를 돕기 위하여 世界 各地에서 많은 의사들이 모여들었다. 아프리카의 奧地인 이 조그마한 마을은 世界奉仕運動의 메카가 되었고, 人類愛의 産室이 되었다. 그는 50년 동안 흑인 의료사업에 獻身的으로 노력했다. 슈바이처는 1952년에 노벨 平和賞을 탔다. 20세기의 위대한 聖者 슈바이처는 1965년 90년의 偉大한 생애를 마감했다. 暗黑의 땅 아프리카의 흑인들에게 사랑과 責任과 信仰의 빛을 던진 슈바이처는 20世紀의 가장 위대한 義人이다. 나는 20代의 젊은 大學生 시절 그의 自敍傳 『나의 生活과 思想』(Aus Meiem Leben und Denken 1933)을 愛讀하고 깊은 感動을 받았다. 지금도 나의 書齋에 이 책이 꽂혀 있다. 20세기 最大의 人物을 들라면 우리는 슈바이처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슈바이처는 아들이 없다. 슈바이처의 外孫女가 한국에 왔을 때 나는 그 女를 만나 코리아하우스에서 같이 저녁식사를 한 일이 있다. 참으로 즐겁고 행복한 만남이었다. 그 때 그 女는 스위스 醫科大學校 卒業班 학생이었다. 지금부터 30여년전의 옛일이다.
다음은 간디에 관해서. 20세기의 위대한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暴力(힌사 himsa)은 動物의 法則이요, 非暴力(아힌사 ahimsa)은 인간의 法則이다.”
그는 眞理와 非暴力과 非協力의 方法을 가지고 인도의 獨立을 爭取하기 위하여 일생동안 英國과 싸웠다. 간디를 흔히 聖雄이라고 일컫는다. 그는 聖人이면서 영웅이었다. 聖人은 善의 最高峰이요, 英雄은 힘의 最高峰이다. 그는 큰 善과 큰 힘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간디의 운동을 싸티아그라하(Satyagraha 眞理把持運動)이라고 한다. 眞理(사티안)의 힘을 가지고 惡과 싸우자는 것이다.
“眞理의 神에대한 忠誠은 딴 모든 충성에 앞선다.”
간디의 思想은 “神은 眞理다.”에서 출발하여 “眞理는 神이다.”의 사상으로 발전했다. “모든 印度人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 이 간결한 말속에 그의 民族魂과 愛國心이 가장 잘 나타나 있다. 正直, 忠誠, 眞實. 이것이 간디의 性格의 核心的 要素다. 그는 20세 때 英國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면서 어머니와 세가지의 約束을 했고, 또 그것을 지켰다.
1. 술을 먹지 않을 것. 2. 女子 관계를 안 할 것. 3. 肉食을 禁止하고 菜食生活을 할 것.
이것은 힌두敎徒가 지켜야할 生活의 規則이었다. 간디는 일생동안에 몇 개의 아슈람(Ashuram)修道場을 만들었다. 아슈람은 간디가 싸티아그라하의 共同生活을 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내가 인도에 갔을 때 찾아간 간디의 아슈람에는 다음 열가지의 원칙이 적혀 있었다. 이 十大原則은 간디의 思想과 운동을 理解하는데 核心이 되는 중요한 要素다.
1. 眞理의 盟誓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진리의 法則을 꼭 지킨다. 2. 不殺生(아힌사)의 盟誓 殺生하지 말라. 非暴力의 원리를 지킬 것. 3. 禁慾의 盟誓(부라마챠리아 Brahmacharia). 國民에게 奉仕하고 참으로 宗敎的 榮光 속에 살려면 旣婚者건 未婚者건 禁慾生活을 해야 한다. 4. 味覺制御의 盟誓 動物的 욕망을 컨트럴하려는 사람은 味覺을 制御해야 한다. 食欲의 통제가 가장 어려운 맹서의 하나다. 5. 도둑질하지 않는다는 盟誓 도둑질하지 말 것. 必要以上의 것을 가지려고 하지 말 것. 6. 스와데시(Swadesi) 스와데시(自治)와 스와데시(Swadesi 國産品愛用)를 强調한다. 7. 두려움을 없애라. 우리의 마음에서 恐怖心을 제거해야 한다. 8. 不可觸賤民에 관한 盟誓 社會的 虐待를 받는 不可觸賤民(pariah, untouchable)이 있다는 것은 힌두敎의 씻을 수 없는 汚點이다. 印度의 모든 不幸은 이 不當한 差別에서 발생한다. 9. 土着語 敎育에 힘쓸 것. 10. 手織物 着用을 할 것. 인도의 木棉으로 짠 모직물을 입을 것. 勞動의 權威를 表示하기 위해서는 모직물을 입어라.
아슈람은 인도의 精神的 指導者들이 자기의 精神을 具現하기 위하여 弟子, 協力者들과 같이 共同生活을 같이 하는 것이다. 아슈람은 간디主義의 學校요, 아슈람의 盟誓는 그 行動綱領이다. 간디는 한 週間의 하루를 「沈?의 날」로 定하고 그 날은 筆談으로 對話를 했다. 간디는 一生동안에 여러 번 斷食을 했다. 斷食은 그의 독특한 行動武器였다. 간디는 어떤 때에 斷食을 했는가. 자기 자신의 중대한 精神的 危機에 직면했을 때, 同志들이 非暴力을 버리고 暴力的 행동을 했을 때, 回敎徒와 힌두敎徒間에 對立과 분쟁이 생겼을 때, 集團間에 暴動이 일어났을 때, 自己純化와 懺悔를 할 때, 不可觸賤民의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을 때, 英國과 印度 사이에 중대한 政治的 紛爭과 難題가 생겼을 때 간디는 斷食을 斷行했다. 그는 斷食을 통해서 解決의 분명한 對答과 光明을 찾았다. 간디는 일생동안에 (1913년에서 1948년까지) 18回의 斷食을 했다. 그 중에는 21日동안 斷食하는 決死的 斷食이 세 번 있었다. 不可觸賤民 문제와 英印間의 紛爭과 國內의 集團的 紛爭이 발생했을 때였다. 간디는 一生에 11回 投獄되었다. 1947년 1월 13일. 세상을 떠나기 1년전이다. 回敎徒와 힌두敎 사이에 對立과 紛爭이 격화되었다. 간디는 回印間의 融化를 위하여 수일간 단식을 했다. 이것이 간디의 마지막 단식이었다. 고난의 무거운 十字架를 지고 홀로 가시밭길을 용감하게 걸어간 聖雄 간디의 그 위대한 人格과 生涯 앞에서 나는 고개를 숙일 뿐이다. 1949년 1월 30일 저녁 네시반. 弟子들과 最後의 만찬을 끝내고 기도를 하기 위하여 壇上에 오르려고 할 때, 갑자기 會衆 속에서 한 젊은이가 뛰쳐나와 간디를 향하여 빵! 빵! 빵! 하고 세 번 銃을 쏘았다. 하얀 옷에 붉은 피가 번지면서 간디는 조용히 쓰러졌다. 힌두敎의 過激한 靑年의 無謀한 蠻行이었다. 1949년 간디는 79년의 生涯의 막을 내렸다. 地上最大의 非暴力의 聖者 간디는 暴力主義者의 손에 殺害되었다. 마하트마 간디, 그는 地上 最大 最高의 偉大한 靈魂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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