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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차원의 세계. 1
“그래 그 소저는 여전히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는 게냐?”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무림초출임에 분명한 듯 합니다. 지금 읽는 책들이 현 무림의 세력이라던가, 타 문파의 특징 등에 대한 내용, 그리고 그 역사를 기록한 책들을 주로 읽고 있습니다.”
“그 소저와 이야기는 많이 나누어 봤고?”
남궁성현의 말에 남궁상욱은 말문이 막혔다.
“...... 그게……. 가끔 차(茶)를 함께 하는 정도입니다.”
‘이런 숙맥하고는......’
그 정도의 미모를 지닌 소저에게 그저 가끔 차나 함께 하는 정도라니. 남궁성현은 아들의 말에 답답해졌다. 남궁세가가 마비될 정도의 사건-남궁상욱이 유이리를 안고 들어온 길목의 모든 남자 무사들이 한동안 굳어 있었다.- 이 있은 후, 남궁성현 부부는 유이리라는 소저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유이리는 당일 하루는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진 듯 정신을 못 차렸었으나, 다음날 바로 회복하는 강한 정신력을 보였다. 외모만으로도 충분히 합격점을 부여할 수 있었으나, 정신력 역시 범인과는 다른 면을 보였다.
또한 중원의 예절과는 달랐으나, 예의바르고 기품 있는 행동은 그녀가 귀한집안의 출신임을 증명해 주었다.
남궁성현은 유소저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만일 아들이 그 소저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두말할 것 없이 허락할 생각이다. 물론 처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허부인 역시 그 소저가 맘에 들었는지 시간만 나면 유이리의 방에 찾아가는 것을 하루의 일과로 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별다른 행동을 하고 있지 않다니. 남궁성현은 나오는 한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 소저가 마음에 있기는 하는 거냐?”
“......”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지를 않았으나, 남궁성현은 안도감이 들었다. 남궁상욱의 얼굴이 잠깐이지만 붉어짐을 보았다. 호감이 있음에 분명했다.
그러나 외부적인 도움이 없다면 상당한 장기전을 요구할 듯 보였다.
남궁성현은 조용히 차를 마시는 아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온지도 벌써 한 달.
이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유이리로써는 그저 남궁상욱의 가족들과 친하게 지내며 여러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가문답게 여러 서적을 구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점과 이 집안의 식구들이 한 가족같이 친절하게 대해준다는 점이었다.
특히 남궁상욱의 부모는 거의 매일 찾아와 불편한 점이 없나 살펴주었다.
참상에서 일어나 아침기도를 마친 유이리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지난 보름간 읽은 여러 가지 서적은 이 세계의 정보와 문화를 습득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으나 분명한 사실은 이곳은 휴렌대륙이 아니라는 것이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대마도사 케이님이 언젠가 연구를 한다고 법석을 떨던 다른 차원의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사람들은 자신들의 대륙을 중원이라 불렀다. 무(武)가 득세하는 사회로 대표적인 세력이 구파일방오대세가였다. 마치 신관전사를 연상케 하는 소림이나, 신을 목표로 하는 무당, 곤륜, 아미파와 전사길드같은 화산, 점창, 청성, 종남, 형산파의 구파. 거지들의 집단인 개방. 사설무예 가문인 남궁, 당문, 제갈, 황보, 백리 오대세가가 있다. 이들은 정의와 협의를 지양하는 사설 단체이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빛으로 나오지 못한 단체인 사파와 마교. 힘이 곧 법으로.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원한들을 갚기 위해 뛰어든 이들도 있으나,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일반 민초들에게 해를 끼침으로써 존경보다는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세력들이 있다.
문파 특성상 개인적 성향이 강해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기 어려우나, 통솔력있는 지도자가 등장시에는 하나로 집결하기도 쉬웠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00년전에 발생한 혈풍(血風)이었다. 남궁상욱 공자의 조이신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 검황(劍皇) 남궁영이 혈마(血魔) 여신우를 제압함으로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다.
이 혈란 이후, 남궁세가는 큰 발전을 이루웠고,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라는 칭호로 불렸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정도의 무력단체가 국가에 소속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국가정부와 무림단체는 상호 불가침으로 정부에 큰 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무림인의 일에 정부가 끼어드는 일은 없었다. 물론 국가의 녹을 받으며 벼슬을 받아 일을 하는 무림인들도 존재하고, 국가에 큰 환란이 닥쳐올 경우 이에 힘을 보태주기도 하나, 이러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상당히 특이한 곳이란 말이야.”
신전이 조직적이지 못한 부분 역시 특이해 보였다. 부처님 이라는 신을 모시는 신전인 사찰이 가장 많았고 조직적이긴 했으나 그 외의 신전들은 거의 개인 신전에 가까웠다. 또한 잡다한 신들 역시 많았다. 주신에 대한 계념도 없었으며, 자신의 수행여부에 따라 신이 될 수 있다는 부분역시 흥미 있는 내용이었다.
또한 사찰을 제외한 타 신들은 대부분 마교로 몰렸다. 대표적인 것이 성화교나 일월교였다. 힘에 모든 것을 의존하는 점이 악신 다우렌을 연상시켰기에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러나 전쟁의 여신 마제린의 이름 역시 꺼내기가 꺼림칙한 것은 사실이었다.
누가 뭐래도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내공이란 부분이었다. 여러 소설책들에 보면 전투시에 내공이라는 것을 운용해서 전투를 치러냈다.
소설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것으로도 생각 되었지만, 자신을 희롱하려 했던 사내 역시 내공에 대한 말을 했었다.
여러 서적에서 읽은 내용을 종합해 보면 전투시 사용하는 개인 특성이 있는 체내 마나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고 보니 이곳도 무가(武家)잖아. 그것도 무림중원 내에서 최고의.”
허부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기거하고 있는 이 저택이 내원 안에 있는 여러 건물 중 하나라고 하였다. 또한 간간히 산책을 나가보면 정원을 비롯해
상당한 크기의 저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웬만한 공작가의 저택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거의 한 공국의 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정도 규모의 저택이라면 호위무사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을 위한 훈련장 역시 마련이 되어 있겠지?”
흥미를 끄는 요소가 있고, 그 흥미를 풀어줄 장소가 가까운 곳에 있다. 더 이상 생각만 하고 있을 유이리가 아니었다.
유이리는 읽던 책을 덥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의 찌뿌둥함을 기지개로 날리고 문을 나섰다. 문을 나서자 똑같은 얼굴을 가진 큰 눈망울이 귀여운 10대 후반의 소녀 둘이 따라 붙었다.
소설과 소빙. 허부인이 붙여준 시비이다. 자신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것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붙임성이 있는 좋은 아이들이었다.
“이곳에 연무장이 있니?”
“예. 아가씨.”
“그럼 그곳으로 가자.”
내원의 입구에는 호위무사가 지키고 있었으나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이미 유이리를 남궁상욱이 데리고 왔다는 사실이 온 세가에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러나 소문이라는 메체는 전달과정을 거침에 따라 추가적인 왜곡을 거쳐 종장에는 전혀 다른 사실로 변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번 소문 역시 그러한 전례를 피할 수는 없었다.
단지 위기에 빠진 유이리를 남궁상욱이 구해 손님으로 초대했다는 사실은 여러 입을 거치면서 수많은 외곡된 사실을 양산해 냈다.
‘남궁상욱 공자가 수백의 괴한을 뚫고 유소저를 구출해 왔다.’
‘부모 몰래 약혼한 사이었다.’
이 정도의 외곡은 아주 귀여운 수준의 것이다.
‘이미 결혼한 사이로 벌써 세가의 후계자를 생산했다.’
심지어는
‘선녀가 잠시 세상에 내려온 것을 남궁상욱 공자가 그 미모에 혹해서 납치해 온 것이다.’
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러나 그중 가장 유력한 것은 유이리가 남궁상욱이 데려온 약혼녀라는 것이었고, 이는 모두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한 시나리오였다.
게다가 매일같이 유이리를 찾는 남궁성현가주나 허부인의 행동은 이러한 소문의 근거가 되어 주었다. 따라서 세가 내의 모든 사람들은 유이리를 조심스럽게 대했다.
차세대 세가의 안주인에게 함부로 대할 배짱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원을 나가 정원을 가로질러 한참을 걸어가니 넓은 장소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무예수련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일사불란한 움직임과 힘찬 기합소리, 절도 있는 동작. 고향에 온 느낌이었다.
“허허허. 유이리가 아니냐.”
제자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남궁성현이 유이리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안녕하셨습니까. 가주님.”
유이리의 인사에 남궁성현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유이리는 그 표정에 어제의 일이 생각났다.
남궁성현 부부는 어제 유이리의 처소를 찾아왔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유이리가 몸을 의탁할 곳 역시 없다 것을 밝혔다.
두 부부는 유이리가 이곳에 머물기를 원했으며, 딸처럼 여기기고 싶어 했다. 유이리 역시 따로 갈 곳도 없을뿐더러, 이 가족 역시 마음에 들었다.
두 부부는 유이리를 의녀(義女)로 맞아들이기를 원했고, 유이리도 이에 승낙을 했다. 사실상 가족이 된 것이다.
남궁성욱 부부의 의도는 다른 쪽에 있었으나 그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유이리는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님.”
유이리의 한마디에 시무룩하던 남궁성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래그래. 이곳까지는 왠 일인고?”
“예. 천하제일가의 무예와 훈련하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을까 하고 왔습니다.”
“허허허. 그 정도야 어려울 게 있나. 이곳에 와서 천천히 구경하려무나.”
남궁성현은 유이리를 처마 밑 그늘진 곳으로 안내했다. 그러는 사이 훈련장에는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모든 행동들이 멈췄다.
유이리를 처음 본 무사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졌고, 이미 한번 봐본 적이 있는 행운아들도 이를 피할 수 없었다.
“저....... 저 선녀가 누구지? 가주님을 아버님이라 부르다니. 가주님의 숨겨둔 따님이신가?”
“예끼. 이사람 하고는. 자네는 아직 소문도 못들어 봤나?”
“소문이라니?”
“상욱 도련님이 모시고온 약혼녀에 대한 소문도 못들어 봤단 말인가?”
“에? 저 아가씨가 바로 그 아가씨란 말인가?”
“그렇지.”
“허허. 내 소문만 듣고는 믿지를 않았는데, 이거 무림삼화나 천하사미가 오더라도 울고 가게 생겼네 그려. 상욱도련님이 부럽구먼.”
“내 말이 그 말 아닌가?”
무사들은 유이리의 자태에 굳어 있으면서도 서로의 정보를 주고받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런면을 보면 수다가 여자들의 전유물이라는 말도 믿을 것이 못되었다.
이런 젊은 무사들을 정신 차리게 한 것은 그래도 조금이나마 수행을 더 쌓은 고참 무사들이었다. 각 대(隊) 대장들의 호통에 젊은 무사들은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수행에 들어갔다. 유이리는 그런 무사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베어 올리고, 찌르고, 뛰어오르고 잘라내고. 100여명의 움직임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나이가 젊은 층들은 약간씩 움직임이 늦고 빠름 등의 경향이 있으나,
우측 정면부분에 모여 있는 무사들일수록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연무를 선보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연무가 끝났다. 다부진 인상의 검은 옷의 중년인이 포권을 하며 남궁셩현의 앞에 섰다.
남궁성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검은 옷의 사내는 뒤를 돌아 큰 소리로 외쳤다.
“자유대련.”
중년인의 외침에 각 대의 대주(隊主)들은 복명복창하고 뒤돌아 지신의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젊은 무사들은 복명복창과 동시에 사방으로 흩어져
자유대련에 들어갔다.
“총관. 그리고 각 대의 대주들은 이곳으로들 오게.”
남궁성현의 말에 5명의 사내가 다가왔다. 다부진 인상의 검은 옷을 입은 40대 중년인을 앞에 두고, 4명의 각기 다른 색의 경장을 입은 사내가 뒤에 일렬로 늘어섰다.
“인사들 하게나.”
남궁성현의 말이 끝나자 검은옷의 사내가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처음뵙겠습니다. 소저. 총관을 맏고 있는 마영길이라고 합니다.”
‘총관? 이곳의 실무를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뜻이군.’
마영길을 시작으로 뒤에 서있는 네 명의 사내들이 차례로 예를 갖췄다.
“홍염대의 원민이라고 합니다.”
붉은 경장을 입은 시원스러운 인상의 사내였다.
“수호대의 진유신 라고 합니다.”
원민과는 다른 파란경장을 입은 듬직한 체구의 사내였다.
“암영대의 조충이라고 합니다.”
마총관과 같은 검은경장을 입은 호리호리한 사내였으나 왠지 모를 냉랭함이 느껴졌다.
“신무대의 장역린 이라고 합니다.”
갈색경장의 경박하게 생긴 사내였으나, 그다지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모두 좋은 인상을 받았다.
다만, 유이리가 모르는 점이 하나 있다면, 이들이 평상시와는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차이란 것이 매우 미비할 정도였으나, 남궁성현은 이를 알아차리고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유이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이리라 합니다.”
유이리의 예에 당황한 다섯 사내는 허둥거리며 다시 허리를 숙였다. 유이리는 그런 사내들을 보며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총관과 각대의 대주들은 유이리의 미소에 혼이 빠져나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총관들뿐 아니라 대련을 가장한 채 유이리의 모습을 지켜보던 대부분의 무사들 역시 유체이탈을 경험해야했다.
유이리는 유체이탈 놀이를 하는 총관과 대주들을 뒤로하고 남궁성현에게 다가갔다..
“아버님. 부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아?...... 아! 그........ 그래. 무엇이냐?”
총관들과 마찬가지로 유체이탈을 경험하던 남궁성욱은 유이리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대련을 해봤으면 하는데요. 허락해 주세요.”
“뭐? 대련?”
“예. 대련이요.”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