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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태풍 속에서 들은 말씀
Text Acts 27,20-26
(20)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21)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2)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3)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1. 전국에 비가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장마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는데, 기상청에 따르면 7월 26일이 되면 장마전선이 한반도를 완전히 지나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장마가 끝나면 태풍 소식이 연달아 들려올 것인데, 기상청은 20일 필리핀 마닐라 서쪽 약 450km 해상에서 2024년 제3호 태풍 '개미'가 발생하였다고 전망하면서, 예상 경로는 중국의 동해안을 따라 북상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서해가 태풍 영향권에 들게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장마에 이어 태풍이 가끔씩 찾아올 터인데 모두들 안전하게 이 여름을 지내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도 태풍 얘기가 나옵니다. 죄수 아닌 죄수인 신분으로 로마로 가고 있는 바울 일행을 루기아의 무라 시에서 알렉산드리아라는 배에 태웁니다.(6절) 8절에 보면 그들을 태운 배가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바울 사도께서 이번 항해가 매우 위험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지만 좀 더 큰 항구인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뢰하여 항해를 계속합니다. 그러다가 ‘유라굴로’라는 태풍을 만나(14절) 짐과 배의 기구들까지 바다에 모두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보면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지 못하고 계속되는 큰 풍랑에 구원의 여망마저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 여행을 로마로 가는 4차 전도 여행이라 하는데 그 여행길에 만난 태풍 ‘유라굴로’로 인해 고통을 겪는 중에 있었던 이야기가 오늘 본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인생길에서 만나는 태풍과 하나님의 섭리 이야기를 설교하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이 은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2. 먼저, 20절을 보면, 태풍으로 인하여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였는지를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여망이 없어졌더라” 태풍은 계속되었고 중지될 기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사용했던 방법들,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화물을 버리고 배의 기구들까지 버리는 것들은 효과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자포자기합니다. 그들 앞에 맞닥뜨린 절망적인 상황은 여러 날 동안 먹고 마시는 것조차 하지 않게 하였을 정도입니다.(21절) 38절에 의하면, 배에 충분한 식량을 가지고 있었지만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짓눌려 음식을 먹을 수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의 아이러니를 발견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목적 하나로 죄수가 되는 길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죄수가 되기를 자처하기까지 한 사도의 로마행 항해를 왜 하나님은 태풍 ‘유라굴로’로 힘들게 하였을까요? 왜 하필 그때 유라굴로가 일어나도록 하셨는지, 아니면, 왜 그때 유라굴로가 일어나게 내버려두셨는지, 왜 그렇게 많은 희생을 치르게 하셨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혹 하나님은 태풍을 막을 능력이 없으셨을까요? 혹 하나님은 그런 일에는 관여하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혹 하나님께서 실수하신 건 아닐까요? 왜 다른 것도 아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로마로 가고자 하는 바울의 행로에 무서운 태풍이 있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자연법칙을 깨뜨리시면서 역사를 하신 일이 성경에는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를 중천에 머무르게 한다든지(수10,12-13), 해시계의 해 그림자를 뒤로 물러가게 하신다든지(왕하20,9-11),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일(눅8,24) 등입니다. 밤새도록 동풍이 불게하여 홍해 바다의 물을 벽처럼 양쪽으로 갈라세우기도 하셨고 범람하는 요단강물을 흘러내리지 않도록 물길을 막아 물이 쌓이게 하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은 그렇게 자연법칙을 깨뜨리면서까지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교회는 성전을 건축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비를 한 방울도 내리지 않게 하셔서 공사를 아주 수월하게 하였다고 자랑을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성전 건축 공사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무리 적게 잡아도 몇 달 동안은 해야 하는데 그 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면 큰 가뭄이 든 것인데 그렇게 성전 건축 공사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가뭄 피해를 겪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성도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대부분의 경우에 자연법칙을 통해 비를 내리기도 하시고 바람이 불게도 하시며 풍랑이 일게도 하시면서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을 구별하지 않으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구별하지 않으시고 비를 내리시고 햇빛을 비추어 주시는 분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마5,45)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적어도 자연법칙을 운용하시면서 악인과 선인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의인과 불의한 자를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옳은 믿음일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법칙을 내 편의를 위해 깨뜨려달라고 구하는 것은 좋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도우실 수 있고 높은 언덕 길에서도 도우실 수 있으며 평탄한 들판에서도 도우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어야만 잘될 것 같고 좋겠다는 내 판단은 하나님의 판단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안 좋은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길이 최고의 길일 수도 있기 때문에 내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평탄하지 않은 길로 인도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반석을 만나든 큰 물을 만나든 하나님은 그 반석에서 샘물을 내시고 그 바다에서 기적을 보게 하셨습니다.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라는 찬송가 가사도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유라굴로 태풍 속에도 계시고 장마철 폭우 속에도 계십니다. 태풍과 폭우라는 현상에 두려워 그 속에 계신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 잘못입니다. 구원은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3. 다음, 22-25절을 보면, 믿음의 사람 사도 바울은 여러 날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배를 조종할 수 없어 물결에 떠밀려 다니며 폭풍우가 도무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으며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22)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3)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태풍 속에 휘말려 있지 않고서는 알 수도 없고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사도께서는 알고서 더욱 담대하게 그러나 겸손히 복음을 전하십니다. 물론 거기 죽음의 터널을 통과한 사람들에게 그 비밀스러운 은혜를 다 얘기할 수는 없어서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라는 말을 덧붙이고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당신들을 구원의 복음에 복종시키기 위해 그렇게 태풍 속에 휘말리게 하셨다고 하면 그들의 마음에 반항심을 가지게 할 수도 있었기에 그 와중에서도 최대한 겸손하게 하지만 아주 강력하게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목회하던 교회에 시무하시던 조재하 장로 얘기입니다. 경남 남해가 고향이었던 장로님은 부산으로 이사나오기 전까지 그것에서 어업에 종사하고 계셨었는데, 배를 타고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죽음 직전에 이르렀던 경험을 들려주셨습니다. 망망대해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될 위기에 처하자 믿음이 있던 장로님은 ‘이렇게 죽는구나. 천국에 들어갈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내 영혼을 주님께 맡깁니다.’라는 마음과 함께 기도와 찬양을 하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거의 미치광이로 변하여서 어찌할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대로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고 자기 머리를 쥐어뜯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머리를 배에 찧으며 ‘살려달라’고 울부짖더랍니다. 그날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태풍은 자연법칙에 의해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 태풍은 막대한 피햬를 입히기도 하지만 공기를 정화하고 오염된 바다를 뒤엎으면서 깨끗하게 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어업 현장에서는 조심스럽지만 태풍이 오기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인간에게도 재해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태풍 속에서만 들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아주 잘 다스리고 계십니다. 실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도 자연현상의 하나인 그런 태풍은 아니지만 인생의 태풍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면서 일부러 태풍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만일 그런 태풍을 만난다면 성도는 원망하거나 불평하고 두려움에 떨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그중에서만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없는 기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라굴로 태풍 속에서 꼭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하나님의 뜻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태풍 속에서도 얼마든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권능, 시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능력이시요 환난 중에 만날 신실한 자시로다”라는 말씀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 어떤 때보다 부드럽지만 강하게 구원의 복음을 함께 있던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단 한 명의 인명피해도 없이 그들을 살릴 수 있기도 하였습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말씀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다 뜻이 있고 작은 실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만사를 주님께 맡기고 믿고 가기만 하면 됩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주님의 구원 전선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다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엡2,10 말씀 “우리는 그 안에서 지으심을 받아 거듭난 자라 기록됨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선한 일들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처럼 하나님의 선한 일을 다하고 있는지 자문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26절 말씀을 봅니다.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본 절에서 하나님은 태풍에서 살려내시는 구원의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때로는 요나처럼 큰 물고기가 삼키게 하고 그로하여금 뭍에다 토해내게도 하시지만 대부분은 아주 자연스럽게 한 섬에 걸리게 하여 살려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특별한 방법으로 살려주시기도 하겠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는 ‘유라굴로’에서 바울 일행을 살려내신 방법처럼 하실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어떤 사람들은 ‘우연히’ ‘신기하게도’ ‘어쩌다가’ 등의 언어로 표현하겠지만 하나님의 사람들 눈과 귀에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방법이 보이고 들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고 계시며, 지혜롭게 계획하시고 이행하십니다. 인간의 한계와는 달리 하나님의 판단과 행동은 절대적이고 완벽하다고 믿습니다.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의 계획 중 일부인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어진 삶을 살아가며 그의 지도와 인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품 안에서 성도는 믿음과 희망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자신의 계획을 완성하시려고 하시는 일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일하시든지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뜻에 따라 우리가 할 일을 성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치고,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역할을 이행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과 섬김을 바탕으로 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이 부족하여 두려움을 느낀다면 시56,3-4절 “(3)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4)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말씀을 되뇌어야 합니다. 주님은 마6,31-33을 통하여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두려움을 넘어서는 확신과 용기를 가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에게 말씀하셨듯이 옆에서 누가 뭐라 하든 믿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순순히 받아들이시는 겁니다. 그리고 평안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감사하는 때가 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