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순교자가 간 길을 Date 2016. 6. 26
Text Jh 13,35-37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36)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7)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1.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벌써 66년이나 지났지만 그 전쟁의 상흔은 나라와 가정과 개인의 삶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전쟁은 화풀이 삼아 한 번 해봐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인명살상이나 재물손괴 같이 수치로 나타나는 피해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습니다. “(6)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9)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6-12)
난리의 소문? 기근과 지진? 그런 것은 단지 재난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가장 심각한 피해는 인간성 파괴이니,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며, 친구를 환난에 넘겨주고 심지어 가족까지도 고발하고 죽이는 인간성 파괴야말로 가장 끔찍한 전쟁의 피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때에 인간성 파괴를 강요하는 자들에게 대항하여 끝까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태도를 지키는 것이 ‘순교’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믿음의 법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버리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오늘 순교자기념주일과 6.25전쟁 66주년을 맞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2.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게 될 날이 가까운 절체절명의 시기에 제자들에게 해주신 말씀입니다. 오늘의 주제대로 다시 말한다면 이 절체절명의 시기란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신자의 도리를 버리라는 강압을 받는 때입니다. 구원의 도리를 가르쳐주시고 친히 그 도리의 희생제물이 되신 스승과 제자 사이의 도리를 저버리라는 강요를 당하는 때입니다. 또한 구원의 도리를 깨달아 알고 믿는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이웃들에 대하여 지켜야 할 도리를 다 버리도록 강제 당하는 때를 눈앞에 둔 시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힘든 시기를 맞을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는데 그것이 본문 말씀입니다. 주님의 당부에 담긴 내용의 키워드 중 첫째는 ‘사랑’입니다. 성도라면 그 어떤 상황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간직해야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35절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제자의 길은 사랑의 길입니다. 이 사랑의 길을 끝까지 지키되 목숨을 잃는 일이 있더라도 지키면서 가야 하는 길이 바로 순교자의 길입니다.
마귀는 갖가지의 방법으로 성도들의 믿음을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어쩌면 마귀가 사용하는 방법 중 최고로 악독한 방법이 전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극한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성도들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배신을 종용합니다. 그럴 때에 성도라면 당연히 마귀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을요. 네가 내게 무슨 해악을 저지르더라도 나는 사랑하리라고 선언하여야 합니다.
사도바울께서는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 갇힌 그를 힘들게 한 것은 감옥에 갇히게 됐다는 사실이나 감옥에서 당하는 고통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힌 사실이 바울 자신의 탓이라며 비난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바울이 옥에 갇힌 틈을 타서 바울의 자리를 차지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정말 그 비통한 심정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께서는 이렇게 말하며 주님 사랑과 형제 사랑의 길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15)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17)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20)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15-21)
여러분, 우리들도 저 거룩한 순교자들이 걸어간 그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그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어떤 경우에도, 어떤 사람이든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사랑을 포기하신 분들이 계십니까? 안 됩니다. 다시 사랑의 길을 시작하셔야 합니다.
3. 본문의 두 번째 키워드는 “너도 사랑할 수 있다”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랬더니 주님께서는, ‘지금은 네가 나의 길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따라올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는 분은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현 상태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38절, 네가 오늘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네 모습 가지고는 나를 따라올 수 없겠지만 너도 나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셨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뭐가 뭔지 모르고 있는 상태였지만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이란 ‘온전한 사랑의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부활하신 예수님 소식을 듣고도 주님을 뵐 면목이 없다며 다시 고기 잡는 어부 생활로 되돌아 간 베드로를 찾아 갈릴리 바닷가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질문하며 확인하십니다. 무엇을 묻고 무엇을 대답하였나요? 요21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였습니다. 이 사랑이 없다면 그렇게 대단해 보이는 방언이나 천사의 말은 그저 시끄럽기만 한 꽹과리 소리와 진배없으며, 모든 그럴듯한 헌신이나 봉사나 충성도 자신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셨지요?(고전13,1-3) 계시록 2장에 나오는 에베소교회는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주님이 알고 계실 정도였습니다. 또한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과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도 주님이 아실 정도로 그 충성과 헌신이 대단한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수고와 헌신과 충성도 다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할 위기를 맞고 있으니 하나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었다고 주님은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리고는 권고하십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계2,1-7)
여러분, 주님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약점도 아십니다. 우리의 무능함도 아십니다. 도저히 순교자의 길, 주님의 길을 따르고 못따르는 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요, 자격의 문제도 아니며, 형편 사정의 문제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단지 사랑의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요점을 바로 안다면 그 사랑은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 말씀대로 베드로는 오직 사랑을 회복했고 그 사랑 하나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는 순교의 자리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신앙회복은 사랑회복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사랑하나면 다 되는 나라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되게 하소서. 주님을 사랑하는 교회되게 하소서. 주님을 사랑하는 나라 되게 하소서. 집을 나가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이여 당신의 문제는 사랑을 잃어버린 것에 있으니 사랑을 회복하시오.
4. 마지막으로 우리가 보아야 할 말씀은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열심 하나만 가지고 이리저리 날뛰는 베드로와 그래도 그런 베드로를 사용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37)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주님의 깊은 뜻은 물로 눈앞에 벌어질 일의 전후까지도 전혀 모르는 채 큰소리 펑펑치는 이 한심한 수제자 베드로를 그래도 주님은 쓰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절대로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우리보다 특별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들도 우리와 똑같이 때리면 아픈 육체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의심이 들고 불안해 지는 것도 전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분들이셨습니다. 딱 한 가지 다른 점은 그분들의 주님을 향한 사랑이 남달랐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사랑에 푹 빠져있었다는 것이 다른 점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이 걸어간 그 길은 사랑의 길입니다. 또한 사랑으로만 걸어갈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모든 순교자들은 주님의 사랑에 꽂혀 있었습니다. 이 사랑을 발견한 이들은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분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오셔서 일어나 나와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면 언제든 일어나 따라 나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순교의 자리에서도 이 사랑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기를 기도합니다.
“나를 저주하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저주할 때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내게 침을 뱉어 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숨결을 뿜어낼 것입니다. 나를 때리십시오 그러면 나는 신음소리로 사랑의 흔적을 보일 것입니다. 나를 찌르십시오. 나는 사랑의 피를 흘릴 것입니다. 나를 짐승의 먹이로 던지십시오. 나는 사랑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나를 불태우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열기로 당신들의 증오의 심장을 녹일 것입니다.”(로마 원형경기장에서 순교를 당한 순교자들의 사랑의 고백)
“내 마음을 조사해 봐라.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밖에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어떤 귀족 단두대에서 순교당함)